오승재 장로(박사)소설 콩트 에세이

[스크랩] 김제 금산교회

성령충만땅에천국 2016. 11. 29. 03:53

  

금산교회

전북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290-1,  063-548-4055

1892년 한국 제물포에 도착한 한국 남장로교 선교사, 초기 7인 선발대원 중의 한 사람이었던 최의덕(L.B.Tate)은

전주 선교부를 기점으로 전주와 정읍을 오가며 전도활동을 했는데 전주와 정읍의 중간지점이며 마방이 있았던

 금산면에서 머물며 외국인이 서툰 한국말로 예수를 전하고 있었다. 이에 흥미를 가진 이 고장의 유지이며 부호였던

조덕삼 씨가 자기집 사랑채를 말씀을 전하도록 내 주었다가 일년 후 1905년 자기 과수원 땅에 다삿칸 짜리 예배당을

짓게 했는데 이것이 금산교회의 시작이 되었다. 이듬 해 세 분의 집사를 세우고그 증 조덕삼과 그집 마부였던

이자익은 영수가 되어 설교를 맡기도 했다. 다음해 1907년에는 장로를 세웠는데 마부인 이자익은 장로가 되었고 주인인

조덕삼은 장로가 되지 못했다. 일년 뒤 조덕삼 씨는 장로가 되었지만 마부 이자익을 자기보다 신앙이 좋다고 칭찬하며

평양의 신학교에서 공부를 하게 하고 그가 목사가 된 뒤는 금산교회의 목사로 초빙했다는 아름다운 미담이 있는 교회이다.

이자익 목사는 위기 때 장로교총회 총회장을 세번이나 역임하고, 오정교회 당회장, 대전 신학교 교장, 대전노회 초대

노회장  등을 역임한 바 있다.

 

 

'ㄱ'자 교회,

다섯 칸짜리 예배당을 지을 때, 당시 남녀 칠세 부동석이란 유교 문화의 영향을 벗어 날 수 없어 남자석과 여자석을

구분하여 예배당을 기억(ㄱ)자형으로 지었다. 한 편에는 남자가, 다른 한편에는 여자가 앉게 하며 그 사이는 천으로

칸막이를 해서 양 편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목사 뿐이었다. 목사도 여자 쪽을 두번 이상 보지 않았다고 한다. 남자

인원 수가 많아 남자 쪽은 좀 크게 지었고 여자 쪽은 작고 좁다. 이 교회는  한수(漢水) 이남에서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1997년 10월 전북 문화제 제 136호로 지정되었다.   

한남대 은퇴 교수 방문 2015년 10월 30일

 

여자측이 앉은 교회의 한 쪽 날개

남자 측이 앉은 교회의 다른 쪽 날개, 더 크게 지어졌다.

2014년 11월 11일 '이자익 목사상 수상 감사예배'를 드렸다. 특히 100년 전 예배와 성찬식을 재현하는 예배였다. 

성찬식의 떡은 분병위원이 나누어준 재래식 떡을 나와 받았다.

분즙위원이 나누어준 포도즙은 큰 대접에 담은 것을 나누어 마셨다.

이번 수상자는 필리핀에서 24년간 사역하고 있는 김귀환 선교사이다.

조덕삼 장로 

이자익 목사

1921년 당회록

김 아무개와 김 아무개 모친은 가정불화에 관하여 권면하고,

김  아무개 댁 김 아무개는 부모에게 불효하고 주일을 범함으로 회개 할 동안 성찬에 불참케 한다.

김 아무개는 주일을 범하므로 권면하고

이 아무게는 도박한 일로 출교하고,

 박 아무개는 귀신을 공경하므로 출교하고 

김 아무개는 도박 일로 학습제명하고,

조 아무개는 신앙생활을 심사하기 위해 호출하기로 가결하다.”

 

 

출처 : 달팽이
글쓴이 : 오승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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