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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제리 독립, 직선제 개헌 재미 본 드골도 국민투표로 사임 / 중앙일보

성령충만땅에천국 2017. 1. 8. 18:27

알제리 독립, 직선제 개헌 재미 본 드골도 국민투표로 사임

                                        
지금으로부터 꼭 99년 전인 1918년 1월 8일 미국 의회에서 토마스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은 평화 14개조를 제안했다. ‘세상을 바꾼 선언’ 가운데 하나로 오늘날 종종 인용되는 연설이다.

2011년 8월 서울 곳곳에서는 무상급식 주민투표에 참여와 불참을 각각 권유하는 홍보전이 전개됐다. [중앙포토]

윌슨 선언의 핵심적 내용인 민족자결 원칙은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여러 식민지의 독립을 가능하게 한 동시에, 이러한 신생국 독립에 불만을 가진 독일 등이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게 만든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민족자결 원칙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 대의명분뿐 아니라 피지배 민족의 지원을 끌어들이기도 했던 것이다. 전쟁 종식 후 패전국 식민지의 독립은 바로 이루어졌으나, 승전국 식민지의 독립은 그 진척이 느렸다.
1917년 4월 2일 미국 의회에서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독일에 선전포고 승인을 요구하고 있다. 1인자들은 정치적 속성을 지닌 국민·주민 투표를 종종 전략으로 이용했다. [중앙포토·위키피디아]

1917년 4월 2일 미국 의회에서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독일에 선전포고 승인을 요구하고 있다. 1인자들은 정치적 속성을 지닌 국민·주민 투표를 종종 전략으로 이용했다. [사진 위키피디아]

공식적으론 식민지 지위가 아닌 프랑스의 일부였던 알제리가 독립한 때는 세계대전이 끝난 지 17년이 지난 1962년이었다. 알제리 독립 문제는 당시 프랑스 국내정치의 심각한 갈등 요소였다. 프랑스 군부와 알제리 거주 프랑스인의 지지를 받고 대통령에 당선된 샤를 앙드레 조제프 마드 드골이 알제리 독립을 추진하자 그의 지지자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이에 대한 드골의 전략은 국민투표였다. 실제 여러 나라에서 민족자결 원칙은 이미 주민투표로 실행되던 차였다.
국민투표로 정책추진 동력 잃은 드골
지금으로부터 꼭 56년 전인 61년 1월 8일 ‘알제리 주민의 자치 및 알제리 통치기구에 관한 프랑스 대통령의 제안을 승인하느냐’를 묻는 프랑스 국민투표에서 75%가 찬성했다. 다음해 에비앙협정(알제리 전쟁 휴전)에 관한 4월 국민투표와 알제리 독립에 관한 7월 국민투표(알제리 거주 프랑스인 참여)에서 드골의 제안이 모두 통과함에 따라 알제리는 프랑스에서 마침내 독립했다.

드골은 58년 제5공화국 헌법 도입에 관한 국민투표를 시작으로 여러 차례 자신의 정책 추진 동력을 국민투표로 끌어올렸다. 62년 9월 드골은 대통령 직선제를 내용으로 하는 헌법 개정을 추진했는데, 10월 초 의회가 불신임 표결을 하자 드골은 의회를 해산했다. 10월 말 국민투표에서 대통령 직선제 헌법은 63%의 찬성으로 통과됐다. 65년 12월 선거에서 드골은 7년 임기로 다시 대통령에 당선됐다.

국민투표가 권력자에게 만능은 아니다. 드골의 정계 은퇴 역시 국민투표에 의해서였다. 69년 드골은 상원과 지방정부에 대한 자신의 개혁안이 국민투표를 통과하지 못하면 대통령직에서 사임하겠다고 밝혔다. 고령의 드골을 사임시킬 필요성에 공감하던 프랑스 유권자들은 국민투표에서 반대표를 던졌고 드골의 제안이 48% 대 52%로 받아들여지지 않자 드골은 결국 사임했다.

69년 국민투표는 드골이 정치적 난국을 극복할 목적으로 실시했다가 오히려 역풍을 맞은 것으로 보기도 한다. 국민투표로 흥한 자가 국민투표로 망했다고 평가하는 것이다. 사실 드골은 자신의 진퇴 여부를 국민 의사에 따라 결정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독선적이라는 비판과 동시에 공사를 구분하고 강직하다는 평가를 받은 드골은 권력을 장악하거나 연장할 때뿐 아니라 물러날 때에도 국민 의사를 확인하여 결정한 것이다. 권력의 근원을 국민에게서 찾는 일관성을 보여주었다.
2003년 10월 13일 국회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자신에 대한 재신임 국민투표를 제안하고 있다.

2003년 10월 13일 국회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자신에 대한 재신임 국민투표를 제안하고 있다.

국민투표는 헌법에 규정되어 있는 여부에 따라 다른 명칭을 부여받기도 하지만, 그런 명칭이 나라마다 시대마다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만큼 국민투표는 매우 정치적인 속성을 지녀 1인자가 사용할 수 있는 전략 가운데 하나이다. 1인자가 엘리트 집단과 권력을 공유할 수 없을 때 의존할 수 있는 대상은 국민이기 때문이다.

국민 의사를 확인하고 이에 따라 국가 정책을 결정하는 국민투표는 궁극적으로 어떤 의견이 다수이고 어떤 의견이 소수인지를 판정하는 절차이다. 종종 자신의 의견만이 국민 의사라고 서로 주장하는데, 말 없는 다수 대신에 목소리 큰 소수의 의견이 국민 의사로 잘못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이에 정확한 국민 의사를 확인하기 위해 국민투표를 실시하는 것이다.

어느 정도 다수의 의견을 국민 의사로 볼 수 있을까? 1793년 프랑스 국민투표는 모든 성인 남성이 참가하는 보통선거로 실시되어 99%의 찬성으로 헌법을 채택했는데 사실 투표율은 26%에 불과했다. 더구나 그 헌법은 혁명의 와중이라 효력을 발휘하지도 못했다.
1972년 유신헌법 채택 여부의 국민투표.

1972년 유신헌법 채택 여부의 국민투표.

일종의 국민투표인 주민투표에서 찬성이 반대보다 많다고 해서 그 찬성 의견을 주민 의사로 무조건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소수만이 참여한 주민투표의 결과는 주민 의사로 채택되지 않는 관행이 있다. 주민투표의 결과를 주민 의사로 받아들이려면 일정 수준 이상의 투표 참여가 있어야 한다. 현행 대한민국 주민투표법은 투표권자 3분의 1 이상의 투표와 유효 투표수 과반의 득표로 주민투표에 부쳐진 사항을 확정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3분의 1 투표 참여 조항이 과도하여 주민 의사를 판별하는 데에 지장을 준다는 주장이 있는데, 반대로 소수 의견이 전체 주민의 의사로 받아들여지는 상황을 막지 못한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예컨대 찬성하는 16.8%와 반대하는 16.7%는 모두 투표에 참여했고, 나머지 66.5%는 무차별하거나 무관심하여 기권했다고 하자. 3분의 1 이상의 투표 참여만 있으면 주민 의사로 인정되는 조건에서는 전체 유권자의 16.8%만 찬성하는 의견이 전체의 뜻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 것이다.

 
반대 1%라도 기권 유도해 무산시킬 수 있어
이런 주민투표에서 각 진영의 전략은 어떨까? 찬성하는 진영은 무조건 투표에 참여하여 찬성표를 던지는 것이 제일 나은 선택이다. 만약 전체 유권자의 51%가 찬성하고 있다면 찬성 유권자들은 모두 투표에 참여함으로써 가결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찬성 유권자가 이보다 훨씬 적더라도 투표에 참여했다고 해서 불참했을 때보다 가결 가능성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1975년 2월 8일 서울 외교구락부에서 김대중(왼쪽), 김영삼(가운데) 등 야권 지도자들이 국민투표 거부 행동강령을 선언하고 있다. [중앙포토]

1975년 2월 8일 서울 외교구락부에서 김대중(왼쪽), 김영삼(가운데) 등 야권 지도자들이 국민투표 거부 행동강령을 선언하고 있다. [중앙포토]

반면에 반대 진영은 투표에 참여해서 반대표를 던지는 것이 나은 상황도 있고 아니면 아예 기권하는 것이 나은 상황도 있다. 만약 찬성표가 이미 투표 정족수를 채울 정도이면 참가해서 반대하는 것이 낫고, 만약 찬성표가 반대표보다 많으나 투표 정족수에는 이르지 않는다면 투표에 불참하는 것이 낫다. 예컨대 찬성 유권자 비율이 33%라고 하자. 만약 반대 유권자 그리고 무관심하거나 무차별한 유권자 모두 기권하게 만들 수 있다면 반대 진영은 반대 비율이 1%이든 32%이든 아예 불참하여 부결하는 것이 더 나은 전략이다. 극단적으로 반대 유권자가 1%에 불과하더라도 기권을 유도하여 가결을 저지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극단적인 예가 아닌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찬성 투표자, 반대 투표자, 투표 불참자, 획일적 집단행동자 등의 비율과 불확실성을 감안하여 찬반 진영의 전략을 각각 계산할 수 있다. 기권 전략으로 가게 되면 사실상의 공개투표라는 속성을 숙지하고 계산해야 할 것이다.

2011년 8월 24일에 실시된 무상급식 지원범위에 관한 서울특별시 주민투표는 특정 안에 대한 가부가 아니라, 소득 하위 50% 학생을 대상으로 단계적으로 실시한다는 제1안과 모든 학생을 대상으로 전면적으로 실시한다는 제2안 가운데 택일하는 방식이었다. 몇몇 여론조사를 종합해보면 당시 서울시민의 선호는 제1안 20%, 제2안 15%, 무차별·무관심 65%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이 선호 그대로 투표했더라면 제1안으로 정리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 결과는 최종투표율 25.7%로 개표 없이 무효로 결정됐다.

이에 한나라당은 2010년 서울시장 선거에서 오세훈 후보가 얻은 유권자 대비 25.4%(한명숙 후보 25.1%, 기권·무효 46.4%)보다 더 득표했기 때문에 사실상의 승리라고 자평했다. 반면 야당은 주민투표가 부결됐으니 제2안으로 결론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주민투표는 양립 불가능한 대립적 의견을 하나로 결론 내리지 못했다. 대신에 소수 진영이더라도 그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전략적 선택이 존재함을 보여줬을 뿐이다.
황교안 권한대행도 국민투표 발의 가능
다수의 의사로 확인된다고 해서 모든 사안이 다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 독일 나치스의 예처럼 일시적인 다수에게 무한한 권한을 부여하게 되면 국민투표 역시 독재권력을 정당화하는 도구에 불과하다. 그래서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강력한 전체주의적 독일 정권의 재등장을 원치 않은 연합국은 비례대표제 중심의 정치제도를 독일에 도입했다.

1972년 유신헌법은 국민투표에 의해 채택되었다. 75년 박정희 대통령은 유신헌법의 존속을 국민투표에 부치고 그 결과를 자신에 대한 신임투표로 받아들이겠다고 밝혔다. 2월 12일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80%의 투표율과 73%의 찬성률이라는 선관위 공식 집계로 유신헌법은 존속으로 가결됐다. 유신헌법의 도입과 존속 모두에서 다수의 찬성이 있었지만, 다수가 소수의 기본권까지 박탈할 수 있는 권한까지 부여받은 것은 아니었다.

현행 헌법에서 대통령의 재신임 국민투표는 허용되지 않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2003년 10월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에 대한 재신임 국민투표를 12월에 실시하자고 제안했는데, 2004년 헌법재판소는 현행 헌법이 재신임 국민투표를 허용하지 않는다고 결정했다. 헌법 제72조는 대통령이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외교·국방·통일 기타 국가안위에 관한 중요정책을 국민투표에 부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대통령이 직무 정지를 당한 지금, 대통령 권한대행은 필요하다고 인정하면 국민투표를 실시할 수 있다. 차기 대통령 후보들도 당장 국민투표를 실시할 수는 없더라도 국민투표를 제안하거나 약속함으로써 세력 편재와 선거 결과에 영향을 줄 수 있다. 개헌도 국민투표에서 통과돼야 가능함은 물론이다. 국민투표에 무관심한 국민을 어떻게 이끄느냐에 따라 국민의 뜻은 다르게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김재한 한림대 정치학과 교수


[출처: 중앙일보] 알제리 독립, 직선제 개헌 재미 본 드골도 국민투표로 사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