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커버스토리
박종철 30주기, 최환과 황적준
박종철 30주기, 최환과 황적준
박종철이 경찰의 고문으로 사망한 지 30주기를 맞아 당시 서울지검 공안부장이었던 최환 변호사(오른쪽)와 당시 부검의였던 황적준 박사(왼쪽)가 서울 용산구 갈월동 박종철기념관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30년 전인 1987년 1월14일, 21살 꽃다운 나이의 대학생이 경찰에서 수사받다가 숨졌다. 숱한 의문이 제기됐지만, 권력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경찰은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고 발표했다. 쇼크사로 위장해서 덮으려던 경찰의 의도는 권력과 상부의 압박에 굽히지 않은 한 검사와 부검의에 의해 꺾였다. 물고문으로 숨졌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불의한 정권에 대한 시민의 저항이 불붙기 시작해, 6월29일 마침내 권력을 무릎 꿇리고 민주화를 이뤄냈다. 세계사에 유례가 드문 시민 승리였다. 그때 검사가 한밤중의 시신 화장을 허락했다면, 부검의가 경찰 요구대로 심장 쇼크사로 사인을 바꿔줬더라면 역사가 어떻게 진행됐을까. 민주주의는 더디게 왔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더 많은 피를 흘려야 했을지도 모른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30주기를 맞아, 공직자가 자기 위치에서 원칙을 지키고 양심을 따를 때 사회 발전이 이뤄진다는 교훈을 새겨본다. 30년 전 당시 서울지검 공안부장이었던 최환 변호사(오른쪽)와 당시 부검의였던 황적준 고려대 의대 명예교수(왼쪽)가 서울 용산구 갈월동 박종철기념관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박종철 30주기를 맞아 당시 서울지검 공안부장이었던 최환 변호사(오른쪽)와 당시 부검의였던 황적준 박사(왼쪽)가 서울 용산구 갈월동 박종철기념관에서 당시 박종철 열사가 고문 치사당한 취조실 욕조 앞 박 열사의 영정 사진 앞에 묵념을 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박종철 30주기를 맞아 당시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부검의 황적준 박사와 당시 서울지검 공안부장 최환 변호사가 서울 용산구 갈월동 박종철기념관에서 대담을 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국과수 부검의 황적준
박종철 진상규명의 밑거름
87년 6월항쟁의 뿌리 역할 연행해온 서울대생 박종철
경찰 물고문 도중 숨지자
심장 쇼크사로 은폐 시도
검사·의사 직업양심에 막혀최 “2시간 동안 매달리더군요. 부모도 동의를 했는데 화장을 왜 허락하지 않느냐고 떼를 씁디다. 내가 그랬죠. 당신들도 아이들이 있을 텐데 입장 바꿔놓고 생각해봐라, 서울로 유학 보낸 아들이 하루아침에 숨졌는데 어느 부모가 자식 얼굴도 안 본 채 화장해도 좋다고 하겠느냐고 말했죠. 그랬더니 고개를 떨구더군요. 이들을 보내놓고 혹시 싶어서 시신 보존 명령을 내렸죠.”경찰은 14일 오전 10시40분쯤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 9호실에서 박종철에게 학교 선배인 박종운(54·전 한나라당 부천·오정 당협위원장)의 소재지를 밝힐 것을 요구하면서 물고문을 시작했다. 박종철의 옷을 모두 벗기고는 손과 발을 수건으로 묶었다. 이어 그의 왼쪽 팔과 어깨는 황정웅, 오른쪽은 반금곤, 다리는 이정호가 각각 잡았다. 박종철이 꼼짝 못하게 된 상황에서 강진규가 그의 머리를 욕조에 수차례 담갔다. 이 상황을 조한경이 현장에서 지휘했다. 물고문 도중 11시쯤 박종철은 욕조 턱에 목이 눌려 숨졌다. 그러나 경찰은 그가 수사받다가 갑자기 졸도해서 사망한 것으로 사건을 꾸미기로 했다. 축소 조작에는 치안감인 5처장 박처원 등 경찰 고위층도 가담했다. 조작이 성공하려면 시신부터 없애야 했다. 대공 수사관 2명이 밤늦게 검찰에 나타난 것은 이를 위해서였다.
1987년 5월18일 오후 6시30분 서울 명동성당에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주최로 열린 ‘광주민중항쟁 7주기 미사’에서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군 고문치사 경관 3명이 더 있다’는 성명서를 낭독하고 있다. 6월항쟁에 기름을 부은 순간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박종철 30주기, 서울 용산구 갈월동 ‘남영동 대공분실' 5층 9호 취조실. 1987년 1월14일 오전 이곳에서 조사를 받던 서울대 학생 박종철군이 물고문에 사망했다. 현재는 박종철기념관으로 바뀌어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박종철이 1987년 숨진 서울 용산구 갈월동의 옛 ‘남영동 대공분실'. 현재는 박종철기념관으로 바뀌어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건물로 가늘고 긴 세로 창(밖이 보이지 않도록)이 있는 5층에 10여개의 취조실이 있으며, 건물 내부에는 달팽이관처럼 생긴 철제 계단이 있어 이 계단을 따라 1층부터 5층까지 올라가도록 만들어져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1987년 2월7일 각계 인사 6만명이 준비위원으로 참여한 ‘박종철군 추모대회’가 전국에서 동시에 열렸다. 사진은 서울 추모대회 뒤 시위대가 명동성당으로 진입하려고 경찰과 맞서고 있는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한밤중 시신 화장 추진
부검 거부하는 경찰 총수에
최환, “현행범 체포” 압박도 부검 이후엔 황적준을 회유
“고문사망 땐 정권 무너진다”며
쇼크사로 소견서 작성 요구
황, “정의편에 서겠다” 고수
사진으로 남아 있는 박종철의 생전 마지막 모습. 숨지기 일주일 전쯤 하숙집 친구들과 경기도 일산 백마의 한 민속주점에 놀러갔을 때 찍은 것으로, 하숙집 선배였던 하종문 한신대 교수가 보관해왔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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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를 마친 두 사람은 박종철기념관을 나와 서울 남영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자녀들이 자신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슬쩍 물어봤다. “무척 자랑스러워하는 것 같아요. 아버지 같은 분은 없더라고 가끔 얘기하더라고요”(최환), “내색은 않는데 좀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아요”(황적준)라는 답이 돌아왔다. 아버지처럼 살아야 한다는 부담이리라. 이 땅에서 자유와 평화를 누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들에 대한 부채의식과 부담감을 지니고 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역사 안으로 걸어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최환 변호사와 지난 6일 서울 서초구 반포동 변호사 사무실에서 한 별도 인터뷰 내용도 기사에 담겼다.)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