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 기본원칙 무시가 정치관행
총리의 각료임명 제청이 대표적
대통령 독주에 대한 견제 기능 할
국무회의 본연의 성격도 훼손돼
차기 후보들은 총리권한 준수와
국무회의 심의 활성화 공약해야
이른바 권위주의 시대에서뿐 아니라 1987년 민주화 이후에도 한국 정치는 헌법의 기본원칙을 무시하거나 우회하여 사실상의 대통령무책임제를 관행으로 정착시킴으로써 오늘의 파탄에 이르는 토양을 제공했다 할 수 있다. 이러한 한국 정치의 관행은 정치·사회 전반에 걸쳐 일상화됨으로써 헌법 무시에 대한 감각이 흐려져 왔던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헌정 질서의 왜곡과 민주정치 기형화의 초점은 헌법 86~89조, 국무총리와 국무회의에 연관된 조항에서 가장 선명하게 지적될 수 있다.
대한민국 헌법은 제헌 때부터 87년 개헌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대통령제와 내각제의 변형된 혼합형으로 구성돼 왔다. 학계에서는 의원내각제적 요소가 강하다는 지적도 있었지만 실제 운용 차원에서는 강력한 권한을 가진 대통령제였다. 그동안 국무총리는 대통령이 지명하여 국회의 인준을 받는다는(86조) 절차만 지켜왔을 뿐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의원들의 지지기반을 갖고 국회와 행정부 간의 소통에 충실할 수 있는 인물을 지명한다는 내각제적인 운용은 존중되지 않았다. 이에 더해 철저하게 무시돼 온 조항은 국무총리의 국무위원 임명제청권과 해임건의권한(87조)이다. 이 조항은 대통령과 총리의 분권형 정부 운영을 시사하고 있으나 역대 대통령은 물론 언론조차도 신임 총리가 과연 누구를 국무위원으로 제청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철저한 무관심으로 일관하다 보니 축적된 헌법 무시 관행은 오히려 대통령의 고유권한인 양 정착되고 말았다.
정상적 국가 운영의 우선적 요건은 헌법을 비롯한 국가의 틀을 잘 짜는 것이지만 이를 충실히 지켜가겠다는 지도자들, 그리고 이를 감시할 국민의 힘이 제도화되지 않으면 민주국가, 정의사회, 효율성 있는 공동체를 실현하기 어렵다는 결론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를 위해서는 권력독점적 성격이 강한 대통령무책임제의 폐해를 바로잡고 민주 사회의 핵심인 국민의 기본권 및 지방자치의 활성화를 보장하는 헌법 개정이 이번 기회에 반드시 이뤄지기를 국민은 기대하고 있다. 다만 초읽기에 몰린 한국 정치의 위기 국면에서 광장의 시민민주주의와 의사당의 대의민주주의를 유효하게 연결시키는 개헌과 이의 효과를 담보할 선거법 개정 작업은 참으로 어려운 역사적 과업임에 유의하지 않을 수 없다. 가히 국가백년대계라고 할 수 있는 이 작업을 졸속으로 처리하는 잘못만은 피해가야 할 것이다.
신중한 논의와 검토를 거쳐야 할 개헌 작업과는 별도로, 아니 개헌에 앞서 다음 대통령 선거에 임하는 정당과 후보자들은 최소한 헌법 무시의 관행, 특히 국무총리의 권한과 국무회의의 중심적 위치 및 역할 부분에 대해 확실한 청산 입장을 공약하고, 만약 이를 어길 때는 국민적 탄핵도 감수하겠다는 약속으로 우선 한국 민주주의 정상화의 계기를 마련해야 하겠다. 원활한 소통과 활발한 토론이 결여된 국정 운영의 치명적 폐단을 우리 모두가 실감하고 있지 않은가. 헌법 지키기를 약속한 다음 정부부터는 유아독존으로 혼자 뛰기보다는 여럿의 지혜를 모으는 집현전의 전통을 되살려 시민 참여의 동력과 접속시키는 한국 민주주의의 새 시대를 열어가야 할 것이다. 머지않아 나라의 미래를 함께 논의하는 국무위원들과 국무회의의 활기찬 모습을 볼 수 있기 바란다.
이홍구 전 국무총리·본사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