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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구 칼럼] 헌법 무시의 관행 청산이 가장 시급하다 / 중앙일보

성령충만땅에천국 2017. 1. 19. 18:18

[이홍구 칼럼] 헌법 무시의 관행 청산이 가장 시급하다

      

헌법 기본원칙 무시가 정치관행
총리의 각료임명 제청이 대표적
대통령 독주에 대한 견제 기능 할
국무회의 본연의 성격도 훼손돼
차기 후보들은 총리권한 준수와
국무회의 심의 활성화 공약해야

이홍구 전 국무총리·중앙일보 고문

이홍구
전 국무총리·중앙일보 고문

새해 첫날부터 내우외환의 억센 파도에 부딪히면서 국가운영 체계의 대개혁을 시도하자는 국민적 움직임이 숨 가쁘게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개혁 필요의 긴박성이나 정치 다이내믹스의 역동성에 휘둘려 대한민국 헌법에 명시된 원칙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차제에 정치적 편의나 상황의 논리를 내세웠던 헌법 무시 관행을 청산하는 것이 개혁이나 개헌의 전제가 되어야만 한다.

이른바 권위주의 시대에서뿐 아니라 1987년 민주화 이후에도 한국 정치는 헌법의 기본원칙을 무시하거나 우회하여 사실상의 대통령무책임제를 관행으로 정착시킴으로써 오늘의 파탄에 이르는 토양을 제공했다 할 수 있다. 이러한 한국 정치의 관행은 정치·사회 전반에 걸쳐 일상화됨으로써 헌법 무시에 대한 감각이 흐려져 왔던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헌정 질서의 왜곡과 민주정치 기형화의 초점은 헌법 86~89조, 국무총리와 국무회의에 연관된 조항에서 가장 선명하게 지적될 수 있다.

대한민국 헌법은 제헌 때부터 87년 개헌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대통령제와 내각제의 변형된 혼합형으로 구성돼 왔다. 학계에서는 의원내각제적 요소가 강하다는 지적도 있었지만 실제 운용 차원에서는 강력한 권한을 가진 대통령제였다. 그동안 국무총리는 대통령이 지명하여 국회의 인준을 받는다는(86조) 절차만 지켜왔을 뿐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의원들의 지지기반을 갖고 국회와 행정부 간의 소통에 충실할 수 있는 인물을 지명한다는 내각제적인 운용은 존중되지 않았다. 이에 더해 철저하게 무시돼 온 조항은 국무총리의 국무위원 임명제청권과 해임건의권한(87조)이다. 이 조항은 대통령과 총리의 분권형 정부 운영을 시사하고 있으나 역대 대통령은 물론 언론조차도 신임 총리가 과연 누구를 국무위원으로 제청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철저한 무관심으로 일관하다 보니 축적된 헌법 무시 관행은 오히려 대통령의 고유권한인 양 정착되고 말았다.
이렇듯 헌법이 규정한 국무총리의 권한을 무시한 위헌적 관행은 국가 운영, 특히 정부 운영의 중심인 국무회의 본연의 성격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대통령과 총리를 포함한 30인 이내의 국무위원으로 구성된 국무회의는 ‘국정의 기본계획과 정부의 일반정책, 선전·강화 기타 중요한 대외정책, 헌법 개정안, 국민투표안, 조약안, 법률안, 예산안, 결산안, 대통령의 긴급명령, 계엄과 그 해제, 군사에 관한 주요 사항, 행정 각부의 중요한 정책의 수립 및 조정, 검찰총장의 임명’ 등 주요 사항을 최종 심의하는 국가 운영의 핵심이다(88, 89조). 헌법에 따르면 국무회의의 심의 과정은 국무위원들의 의견과 지혜를 수합하는 토론의 장이며, 대통령의 독주에 대한 견제와 균형을 잡는 제도인 셈이다.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의 TV 화면에 익숙해진 국민이지만 이제는 국정의 중심인 국무회의의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해야 할 필요가 있다.

정상적 국가 운영의 우선적 요건은 헌법을 비롯한 국가의 틀을 잘 짜는 것이지만 이를 충실히 지켜가겠다는 지도자들, 그리고 이를 감시할 국민의 힘이 제도화되지 않으면 민주국가, 정의사회, 효율성 있는 공동체를 실현하기 어렵다는 결론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를 위해서는 권력독점적 성격이 강한 대통령무책임제의 폐해를 바로잡고 민주 사회의 핵심인 국민의 기본권 및 지방자치의 활성화를 보장하는 헌법 개정이 이번 기회에 반드시 이뤄지기를 국민은 기대하고 있다. 다만 초읽기에 몰린 한국 정치의 위기 국면에서 광장의 시민민주주의와 의사당의 대의민주주의를 유효하게 연결시키는 개헌과 이의 효과를 담보할 선거법 개정 작업은 참으로 어려운 역사적 과업임에 유의하지 않을 수 없다. 가히 국가백년대계라고 할 수 있는 이 작업을 졸속으로 처리하는 잘못만은 피해가야 할 것이다.

신중한 논의와 검토를 거쳐야 할 개헌 작업과는 별도로, 아니 개헌에 앞서 다음 대통령 선거에 임하는 정당과 후보자들은 최소한 헌법 무시의 관행, 특히 국무총리의 권한과 국무회의의 중심적 위치 및 역할 부분에 대해 확실한 청산 입장을 공약하고, 만약 이를 어길 때는 국민적 탄핵도 감수하겠다는 약속으로 우선 한국 민주주의 정상화의 계기를 마련해야 하겠다. 원활한 소통과 활발한 토론이 결여된 국정 운영의 치명적 폐단을 우리 모두가 실감하고 있지 않은가. 헌법 지키기를 약속한 다음 정부부터는 유아독존으로 혼자 뛰기보다는 여럿의 지혜를 모으는 집현전의 전통을 되살려 시민 참여의 동력과 접속시키는 한국 민주주의의 새 시대를 열어가야 할 것이다. 머지않아 나라의 미래를 함께 논의하는 국무위원들과 국무회의의 활기찬 모습을 볼 수 있기 바란다.

이홍구 전 국무총리·본사 고문


[출처: 중앙일보] [이홍구 칼럼] 헌법 무시의 관행 청산이 가장 시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