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재 장로(박사)소설 콩트 에세이

병원에서 맞는 구정(舊正)

성령충만땅에천국 2017. 2. 3. 02:55

병원에서 맞는 구정(舊正)|성경 말씀 묵상

은혜 | 조회 10 |추천 0 |2017.02.02. 21:31 http://cafe.daum.net/seungjaeoh/J75F/196 

2월의 말씀 산책

    우리나라는 신정보다는 구정을 더 설답게 지낸다. 무엇보다도 오랜만에 헤어져 지내던 가족들이 만나 부모님께 세배도 드리고 조상을 섬기는 차례도 지내고, 한복을 곱게 입고 나들이를 나가고, 즐거운 행사에 참여하기도 한다. 이 때 빠지지 않은 것은 떡국이다.

나와 아내는 최근 35년간 둘이서 살면서 자녀들을 기다리고 즐기는 시간을 갖지 못했다. 아들 셋이 외국에서 공부를 하고, 직장을 갖고, 자녀들을 낳고 사는 동안 설날 우리를 찾아 올 수가 없다, 또 딸은 서울에 살지만 그것은 최근의 일이고 전엔 유학생 남편을 따라 외국에 살면서 거기서 애를 셋이나 낳았다. 따라서 내가 직장에 있는 동안에는 아내가 혼자 미국에 가서 출장 조산원 노릇을 해야 했다. 그래도 새해에는 어김없이 한 주먹 정도의 떡국을 끓여 몇 가지, 전을 부치고 둘이서 감사기도를 드리며 지냈다. 그런 세월이 35년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럴 수가 없게 되었다. 아내가 늘 다니던 시장에 갔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골절을 했기 때문에 병원에서 구정을 맞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늘 조심하고 또 조심하고 다녔는데 한 순간의 실수로 넘어져 오른 쪽 어깨와 고관절 뼈가 부러진 것이다. 119를 불러 응급실로 가는데 나는 차를 운전하고 갔기 때문에 따로 함께 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구급대원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가까운 병원이 아니고 충남대학병원으로 환자가 가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 아내는 언제나 그렇게 판단력이 민첩하고 분명했다.

일반 병실에 입원한지 5일 째에 수술하기로 했다. 아직 아파서 정신상태가 혼미한 때였는데 전신마취를 하겠다고 동의서를 받으러 왔다. 나이가 많기 때문에 돌발 사태가 생길 수 있다고 무서운 말을 많이 하고 내 서명을 받아 갔다. 환자 대기실에 앉아 있는데 80이 넘은 환자는 두 사람 뿐이었는데 그 중 아내의 나이가 제일 많았다. 아내는 이곳 병원에서도 전신마취만 세 번째였다. 심장 때문에, 뇌 때문에, 이번에는 골절 때문이었다. 하나님 밖에는 의지할 곳이 없다고 생각하며 기도하고 있는데 중환자실로 오라는 연락이 왔다. 아내는 코에 호스를 끼고 산소 공급을 받으며 실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상태 같기도 했다. 의사는 나더러 손을 컵처럼 하고 잠들지 않도록 계속 아내의 가슴을 두들겨 주라고 했다. 수술하는 동안 폐가 기능을 중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산소량을 늘리고 계속 가슴을 두들겨서 폐에 물이나 공기가 차지 않도록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계속 그렇게 하고 싶었지만 간호사들이 나를 밀어내고 다음날 10시부터 30분간 면회시간에 오라고 나를 내보냈다. 며칠간 간호하겠다고 서울에서 내려온 딸에게 아내가 떠난 빈 병실을 맡기고 나는 우선 4일간의 간병생활을 끝내고 집으로 귀가했다. 아내는 다행히 하루 만에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겼다.

사흘 뒤 중요한 이사회 준비모임도 있고 해서 여러 사람들의 강권에 따라 간병원을 두기로 했다. 그런데 그 간병원이 구정에는 쉬어야 한다고 해서 연휴 동안 4일을 나는 다시 24시간 아내의 간병자로 들어갔다. 그래서 구정에는 평생 처음으로 떡국을 못 끓여 먹게 된 것이다. 그런데 구정 하루 전에 교회 후배 장로로부터 구정에는 자기 내외가 문병을 갈 테니 아내는 자기 부인에게 맡기고 나는 자기와 함께 시내에서 식사를 하자는 것이었다. 그들은 내가 병자는 아니지만 고생이 많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사실 나는 오래토록 아내와 둘이서만 함께 살아 왔기 때문에 떨어져 있는 것이 오히려 큰 고통이지 함께 있는 것은 고통이 아니었다. 나는 후배 장로 내외와는 허물없는 사이여서 그날 문을 연 식당도 많지 않을 텐데 수고스럽지만 집에서 떡국을 끓여 와서 병원에서 같이 먹으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이렇게 해서 결국 병원에서 구정맞이 떡국을 먹게 되었다. 그날 떡국을 놓고 식 기도를 하는데 나는 주책없게 울컥 울먹이는 목소리가 나왔다. 그들에 대한 고마움과 평생 경험할 수 없는 단 한 번뿐일 병원에서의 구정 떡국이 그렇게 나를 감격하게 했다. 이렇게 사랑을 주고받는 것이 기독교인의 공동체 삶이 아닐까?

점심을 다 마쳐 가는데 원로 목사의 아들 부부가 또 찾아와 변비에 좋다고 많은 불가리스 음료수를 사 왔다. 원로 목사에게 세배를 갔더니 빨리 병문안을 가라고 성화여서 오래 있지도 못하고 왔다는 것이다. 그들과 함께 온 막내딸 수아는 할아버지가 성난 것 같아 무서웠어.”라고 하는 것이었다. 목사님께 감사하다고 전화를 드렸더니 거의 집안에서만 겨우 거동하는 그 분은 당신이 문병을 가야 하는데 못가서 미안하다고 진정 미안해하는 말을 전해 왔다. 전화 문병도 인색한 시체 교회의 목사들을 생각하면 너무나 고마운 일이었다. 멀리서도 사랑이 느껴지고 위로가 되는 것이 참 문병이며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자녀들의 삶이 아닐까?

얼마 지나자 시집에 가서 문안 인사를 드리고 서울로 돌아가는 딸 내외가 막내아들과 함께 들려 걱정스런 눈빛을 보였다. 섬망(譫妄)현상이 조금씩 비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딸은 자기는 남아 하룻밤 간병하고 가겠다고 우긴다. 나는 그녀의 언행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아들들의 부모에 대한 사랑도 함께 느낀다. 우리는 둘이 살아도 아들들의 사랑을 너무 많이 받고 산다.

이 모든 넘치는 사랑은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지닌 그리스도의 얼굴을 우리를 향해 비춰주신 것이다. 고난당하는 자가 있으면 서로 기도하는 것, 즐거워하는 일이 있으면 찬송하는 것. 이것이 주님과 함께 사는 기독교인의 삶이 아닐까?

나는 이번 병원에서의 구정맞이에서 많은 것을 배운다. 이스라엘 역사를 배우는 것이 아니고, 강해설교를 듣는 것은 아니었지만 사방에서 비쳐오는 예수님의 온화함과 따뜻함과 온 몸을 비추는 빛을 느낀다. 이제 아내가 회복되면 주님이 허락하신 날까지 남은 여생을 계수하며 목자장의 인도를 따라 주의 증인으로 찬양하며 살겠다고 결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