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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현장] 산티아고 시에라와 불편한 잠 / 박보나

성령충만땅에천국 2017. 2. 10. 18:15

[문화 현장] 산티아고 시에라와 불편한 잠 / 박보나

한겨레 등록 :2017-02-09 18:20수정 :2017-02-09 20:53

 

박보나
미술가

산티아고 시에라는 스페인의 미술가로, 퍼포머들에게 고단하고 껄끄러운 일들을 시키면서 최저임금에 따른 시급을 지급하는 퍼포먼스 작업들로 유명하다. 속옷만 입고 몇 시간이고 갤러리 벽을 보고 서 있게 하거나, 말도 안 되게 무거운 입체물들을 끌고 다니게 하거나, 미술관의 벽을 쓰러지지 않게 내내 받치고 서 있게 시킨 후에, 너무 소소해서 현실적인 시급을 지급한다. 시에라는 현실의 피도 눈물도 없는 가혹한 착취 구조와 미술의 형식을 겹쳐 놓음으로써, 현실의 모순적인 경제, 권력 구조를 드러내는 동시에, 예술이 현실과 동떨어진 안전하고 아름다운 것이라는 순진한 생각을 비웃는다.

시에라가 흥미로운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참고 보기 힘든 작업들이 있다. 퍼포먼스 참여자들이 사회적 약자 계층이고, 이들에게 요구한 퍼포먼스가 껄끄럽다 못해 굴욕적인데, 퍼포먼스 사례비는 비참하게 현실적인 2000년대 초반 작업들이 그렇다. 미술관 앞에 구덩이를 파 놓고 7달러의 시급을 지급하며 홈리스를 앉혀 놓는 퍼포먼스는 불편하며, 이라크 노동자들의 몸 위에 독한 화학 폴리우레탄을 잔뜩 뿌려 덮어버리는 퍼포먼스는 모욕적이고, 헤로인에 중독된 매춘부 네 명의 등 위에 160㎝의 선을 문신하고, 헤로인 일회 분량의 가격인 67달러 정도를 지급하는 퍼포먼스는 경악스럽기까지 하다.

산티아고 시에라의 <네 명의 등에 문신된 160㎝의 선>(2000). ‘산티아고 시에라 300톤과 이전의 작업들’(쿤스트하우스 브레겐츠 출판, 2004)에서 발췌한 이미지.
산티아고 시에라의 <네 명의 등에 문신된 160㎝의 선>(2000). ‘산티아고 시에라 300톤과 이전의 작업들’(쿤스트하우스 브레겐츠 출판, 2004)에서 발췌한 이미지.
일부 평론가들은 시에라의 작업이 민주주의의 속성인 갈등과 대립의 측면을 드러내는데, 이것은 더 나은 사회로 가기 위한 정치적 가능성을 지니는 것이라며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하지만 이들은 민주주의는 갈등에 기반한 체제인 동시에, 타협과 소통의 과정이라는 것을 간과한 듯 보인다. 의사소통은 상대방의 경험 안에서 공감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상대방을 먼 타자로 규정하여 나와 분리시켜 버리면 대화를 시작할 수 없다. 위에서 언급한 시에라의 2000년대 초반 작업들의 경우, 유명한 백인 남자 작가와 매춘부, 안락하게 구경하는 관객과 불편함과 위험함을 감수하는 홈리스와 외국인 노동자라는 - 작가와 퍼포머, 관객과 퍼포머 사이의 거리는 너무나 멀고 이질적이다. 나를 포함시키지 않은 채, 멀리 있는, 심지어 나보다 약한 위치에 있는 타자의 곤경을 불편한 마음으로 구경하는 것이, 비릿한 구조적 모순을 깨닫는 것 이상으로, 어떤 소통을 통해, 어떤 변화와 정치적 가능성을 얼마나 가질 수 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최근 논란이 된 박근혜와 최순실로 패러디한 작업, ‘더러운 잠’은 시에라의 작업을 읽은 관점으로 보면, 최소한 두 가지 문제점을 가진다. 작가는 박근혜 정부의 무능과 부패를 비판하고 더 좋은 세상을 희망하는 의도에서 작업을 제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작업은 모든 관심과 논쟁이 작업을 둘러싼 표현에만 집중됨으로써, 정작 비판을 의도했던 대상과 문제는 건들지 못했다. 갈등과 대립의 대상이 사회적 모순이나 문제로 전혀 확장되지 못했기 때문에, 더 나은 무엇을 위한 시도조차 되지 못했다는 점이, 시에라의 작업과의 차이점이며, 이 작업의 첫 번째 문제점이다. 또한 이 작업은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의 관음적 대상으로서의 여성의 누드를 패러디한 것이든, 19세기 매춘부의 흔한 예명을 제목으로 가져다 쓴 마네의 ‘올랭피아’를 패러디한 것이든, 박근혜를 사회적 약자인 여성이라는 타자로서 조롱한다. 여기에 시에라의 실수와 같은 두 번째 문제점이 있다. 이 작업은 함께 목소리를 내야 할 여성을 타자로 소외시키고 멀리 밀어냄으로써, 공감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소통을 차단해버린 이 작업을 통해 새로운 변화를 상상하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상대에 대한 모욕적이고 공격적인 표현은 예술 작업에서도, 현실 정치에서도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공감과 설득의 표현으로 논쟁의 상대에 접근해야 - 그것이 비록 시간이 좀 더 걸릴지라도 - 진짜 대화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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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82034.html?_fr=mt0#csidx01f28c1029107aebcab9da08b027ab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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