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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병찬의 향원익청] 참보수주의자 이항로의 통곡 / 한겨레

성령충만땅에천국 2017. 2. 15. 17:06

[곽병찬의 향원익청] 참보수주의자 이항로의 통곡

한겨레 등록 :2017-02-14 18:03수정 :2017-02-14 18:59

 

화서가 학문의 목표로 삼은 ‘성인’은 별처럼 저 홀로 빛나는 존재가 아니었다. “맹자는 그 마음속에 백성 두 글자를 항상 새겨두고 잊지 않았다.” “성인은 천하 만민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그 덕화를 입지 못하거나 한 물건이라도 제자리를 얻지 못하면 사지의 뼈 마디마디가 땅기고 찌르는 아픔을 느낀다.” 그 역시 부단히 민생 개혁을 추진했다.

친박 세력은 ‘원조 보수세력’을 자처하고, 그들의 추잡에 질려 이른바 ‘개혁 보수주의자’들이 새로운 당을 창당했다. 탄핵 반대를 외치며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드는 이들이 앞세우는 것도 ‘보수주의’다. 그 행태로 보아 박근혜로 상징되는 무능과 독선, 무사안일과 무책임을 덕목으로 삼고 정권의 부정부패, 정경유착, 반민주성을 가치로 삼는 것 같다. 그런 자들을 과연 보수주의라 할 수 있을까.

1868년 36살의 나이에 사헌부 장령(정4품)의 중책을 맡은 면암 최익현의 마음은 무거웠다. 13년 전 과거에 급제했을 때 스승(화서 이항로, 1792~1868년)이 준 두 가지 당부 때문이었다. “부단히 학문을 연마하되 가볍게 논박하는 일이 없을 것이며, 마땅히 상소할 일이 있음에도 입을 꼭 다물고 국록이나 타먹는 일을 하지 말라.” 마침 그해 스승은 세상을 떠났다. 어떻게 그 유지를 지킬 것인가.

당시는 대원군의 섭정 5년째로, 그 서슬에 대소신료 어느 누구도 찍소리도 내지 못할 때였다. 대원군은 집권 초 세도정치의 혁파와 인사개혁으로 민심을 얻었지만, 피폐한 민생을 외면한 채 왕조의 권위 세우려 경복궁 중수를 밀어붙이면서 백성들로부터 멀어졌다. 당백전 따위를 마구 찍어내 인플레를 유발하고, 도성 통과세까지 신설해 서민을 쥐어짰고, 농번기에 전국의 청장년을 노역에 동원해 원성이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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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암은 상소(무진소, 戊辰疏)를 올렸다. 당장 토목공사를 중지하고, 당백전을 철폐하며, 사문세를 폐지하고 각종 수탈정책을 폐기하라는 것이었다. 면암은 이후에도 1873년 10월 동부승지에 제수되면서 사직소를 올린다. “… 쉴 새 없이 매기는 세금에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고, 윤리는 파괴되고 선비의 기풍은 죽어버렸다.” 고종이 그런 그를 호조참판에 임명하자 이번에도 호조참판 사직 상소를 올린다. “대의멸친(大義滅親)!” 대원군과 부자의 연을 끊으라는 것이었다. 1876년 병자수호조약 체결 문제로 나라가 소란스럽자 면암은 이른바 ‘도끼상소’를 올린다.

스승 화서는 13번이나 벼슬을 제수받았지만 출사하지 않았다. 고종 즉위 초 내우외환에 시달리던 조정은 국론 통일을 위한 사상적 지주가 필요했다. 고종은 신하들의 주청에 따라 화서에게 1864년에 전라도도사, 사헌부지평, 사헌부장령 등을 잇따라 제수했다. 1866년 병인양요가 발발하자 동부승지에 임명했다. 더 이상 침묵으로 거부하는 건 도리가 아닌지라, 화서는 한양 궐문 앞에서 동부승지 사직상소와 함께 정책건의서를 올렸다. “서양 도적과는 싸우는 것이 옳고 화친하는 것은 옳지 않다” “고통스런 현실을 알려 백성들을 일깨우고, 언로를 열며, 현명한 이를 임용하고 간사한 이는 멀리하며, 토목공사를 정지하고 사치를 버려야 국가를 보전할 수 있다.” 매천 황현이 ‘백 년 이래 가장 바른 목소리’라고 평가한 화서의 동부승지 사직상소였다. 고종이 그를 공조참판에 제수하자, 그는 다시 사직상소를 올려 “경복궁 중수를 중단하고 백성의 재물을 끌어모으는 일을 금해야 한다.” 면암 상소의 효시였던 무진소 내용은 화서의 상소를 이어받은 것이었다. 화서는 곧 벽계로 돌아왔다.

벽계, 경춘고속도로가 뚫리기 전까지만 해도 그곳은 경기도의 오지 가운데 오지였다. 양수리까지는 그런대로 강과 들을 벗 삼을 만하지만 문호리를 지나면서 가파른 산이 북한강과 예각을 이뤄 산허리를 굽이굽이 돌아가야 했다. 그렇게 20여리를 가야 수입천이 나오고, 수입천을 20여리 더 거슬러 올라야 벽계마을이 나온다. 구한말 정통 보수주의 이념이었던 위정척사의 발원지였고, 불퇴전의 중부지방 항일의병의 태실이었던, 바로 그 마을이다.

화서의 윗대는 6대조까지는 경기도 고양에 살았다. 병자호란을 겪은 뒤 ‘앞으로 50년간 벼슬을 하지 말라’는 유언에 따라 5대조는 양평군 서종면 정배리로 이주했다. 증조부는 더 깊은 양평 명달리 소유곡으로 옮겼으며, 둘째 큰할아버지가 지금의 노문리 벽계에 정착했다. 그가 후손 없이 세상을 뜨자 부친(우록헌)이 옮겨와 세거를 이루었다.

화서의 주리론은, 이(理)가 선이요 기(氣)는 악이며, 정직이 이이며 거짓은 기라는 것을 요체로 한다. 주리론은 거짓을 배척하고 올바름을 지켜야 한다는 척사위정(斥邪衛正)의 정치사상으로 발전했고, 나라를 지키는 구국 이념이 되었다. 당시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중국에서는 성리학의 맥이 끊겼고, 오로지 조선에서만 그 정통이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했다(小中華). 조선이 지켜온 이런 질서(理)를 서양 제국주의의 침략(氣)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생명을 바치는 것이야말로 선비의 도리였다. “목숨을 바쳐 정의를 이루라”(死身取義)는 의리론과 사생관이 그것이다.

독학으로 주자학을 깨친 화서는 나이 서른에 이르러 그의 명성이 경향 각지에 퍼졌고, 눈 밝고 뜻 굳센 이들이 벽계로 모여들었다. 포천의 중암 김평묵, 포천에서 양평으로 이주한 면암 최익현, 춘천의 성재 류중교와 의암 류인석, 평안북도 태천의 운암 박문일, 그리고 양평의 하거 양헌수 등이 그들이다. 제자만 450여명, 제자의 제자까지 합치면 수천명에 이르렀다. 비타협적으로 일제와 맞선 화서학파다. 역사학자 박은식은 이렇게 단언했다. “의병 정신은 반만년 역사에서 저절로 우러나온 민족정신이요, 선생은 그것을 깨달아 전달한 선각자였다.”

면암은 을사늑약 후 의병을 일으켰다가 붙잡혀 대마도에서 모든 음식을 거부하다가 옥사했다. 의암은 을미의병을 일으켜 한때 중부지역을 석권했으며 1910년 병탄과 함께 연해주로 건너가 의병 통합체인 13도의군 도총재로 추대됐다가 그곳에서 순사했다. 만주 지역의 유인석 안명근 안정근 안중근 안홍근 조병준 이세영 등, 상하이임시정부의 박은식 김구 김승학 엄항섭 황종관 등, 광복군의 조병준 김승학 신우현 신연감 백의범 조병선 변창근 박이열 홍식 신동열 등이 그의 제자였다. 화서학파에서 독립유공 서훈 받은 이는 233명이고, 103명은 순국 순절했다.

화서는 벽계에서 제자들을 가르칠 때 생가 동쪽 느티나무 밑에 축대를 쌓고 강학의 터로 삼았다. 제월대(비 갠 하늘의 티 한 점 없는 달빛)다. 표지석에는 이런 시가 새겨져 있다. “작은 구름이라도 보내어/ 맑은 빛에 얼룩지우지 말라/ 지극히 맑고 지극히 밝으니/ 태양과 짝하리라.” 위정척사의 의기가 오롯하다.

화서가 학문의 목표로 삼은 ‘성인’은 별처럼 저 홀로 빛나는 존재가 아니었다. “맹자는 그 마음속에 백성 두 글자를 항상 새겨두고 잊지 않았다.” “성인은 천하 만민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그 덕화를 입지 못하거나 한 물건이라도 제자리를 얻지 못하면 사지의 뼈 마디마디가 땅기고 찌르는 아픔을 느낀다.” 그 역시 부단히 민생 개혁을 추진했다.

정전제는 그 일환이었다. 나라에서 외면하자 그는 나이 예순에 홍천으로 옮겨 정전제를 직접 실천했다. 벽계의 토지를 팔아 삼포와 철정에 땅을 사들이고, 자신은 맏아들과 함께 삼포에서, 막내아들은 철정에서 농민들과 함께 정전제를 실시했다. 당시 조선은 토지겸병의 확대로, 세금을 내지 않는 양반 대지주의 증가로 국가의 조세 수입은 날로 줄어들어 재정난은 심화되고, 민생은 피폐해졌다. 양민 수탈이 가혹해져, 소규모 자영농들은 농지를 포기하고 스스로 소작이 되었다.

화서는 69살이 되어서야 농장을 둘째 사위에게 맡기고 벽계로 돌아온다. 벽계에는 화서가 소소한 자연풍광에서 지극한 도리와 선과 의를 새기던 벽계 8경이 있다. 제월대에서 바라보는 맑고 밝은 달빛, 명옥정에서 듣는 청아한 물소리, 생가 동편 묘고봉 위를 유유히 도는 솔개, 생가 서남쪽 개울 속 깊은 웅덩이의 물고기 솟구치는 모습과 느티나무숲, 명옥정 동편 세찬 물길이 수석에 부딪쳐 눈보라처럼 튕기는 물방울, 묘고봉 동북쪽 기슭에 우뚝 솟은 석문, 청화산 기슭의 16m 높이의 일주암 등이 그것이다.

대권을 꿈꾸던 반기문을 실망시킨 것은 ‘보수의 소모품’이 될 것을 요구한 자칭 보수주의자들의 성화였다. 친박 세력은 ‘원조 보수세력’을 자처하고, 그들의 추잡에 질려 이른바 ‘개혁 보수주의자’들이 새로운 당을 창당했다. 탄핵 반대를 외치며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드는 이들이 앞세우는 것도 ‘보수주의’다. 그런데 이들은 말하지 않는다. 자신이 어떤 가치와 어떤 덕목을 지키려 하는지를. 그 행태로 보아 박근혜로 상징되는 무능과 독선, 무사안일과 무책임을 덕목으로 삼고 정권의 부정부패, 정경유착, 반민주성을 가치로 삼는 것 같다. 그런 자들을 과연 보수주의 혹은 애국의병이라 할 수 있을까. 지하의 화서가 통탄할 일이다.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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