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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후일에 영광이 되는 고난(마5:10-12, 고전4:9-13) / 호현낙선

성령충만땅에천국 2017. 3. 6. 05:45

후일에 영광이 되는 고난 마5:10-12, 고전4:9-13

클로비스 채플 목사님의 ‘두 척의 외륜선’ 이야기가 있습니다. 두 배가 멤피스를 출발하여 미시시피 강을 따라 뉴올리언스로 향했습니다. 빨리 가는 배가 느린 배를 보며 비웃었습니다. 그러자 느린 배가 약이 올라 속도를 내기 시작하였습니다. 결국 두 배는 시합을 하게 되었습니다. 점차 한 배가 뒤로 처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배는 연료가 충분하지 않습니다. 목적지까지 가기에는 충분했지만 경주를 하기에는 부족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배는 화물을 꺼내 물에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그 배는 경주에는 승리했지만 수송해야 할 화물을 다 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도 세상에서 1등을 하기 위하여 더 소중한 화물을 버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화물선의 우선순위는 경주에서 1등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안전하게 화물을 운반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필요도 없는 것을 얻으려고 경쟁하다가 가장 소중한 하나님의 나라를 잃게 된다면 그 우승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성도는 비록 세상의 삶에서 뒤로 처지는 삶이 될지라도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세상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나라를 얻는 도구로 유용하게 사용하는 자가 되고, 그 나라를 위해 희생과 고난이 따르더라도 기꺼이 필요한 대가를 지불하는 자가 됩니다. 오늘 사순절 첫 주일을 맞아 두 본문을 중심으로 “후일에 영광이 되는 고난”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세상에는 부끄러운 고난을 당하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세상에 살면서 당하는 고난 가운데는 부끄러운 고난이 많습니다. 그런 고난을 당하게 되는 이유 중에는 먼저 자신의 죄와 허물로 당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이런 고난은 칭찬도 상급도 없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벧전 2:20에서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라고 했으며, 계속해서 벧전 4:15에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라고 했습니다. 이런 경우처럼 남의 일을 간섭한다든지 죄를 범한다든지 하여 당하는 어려움은 죄에 대한 형벌로 받는 부끄러운 고난입니다. 다음에 자신의 무지함이나 광신적인 잘못된 처신 때문에 오는 고난이 있습니다. 바른 신앙생활을 하려면 덮어놓고 믿는 자가 되지 말고 성경을 펴서 바로 깨닫고 알아서 말씀에 따른 바른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덕이 되지 못하고 혐오감을 주면서 복음을 전하다가 욕을 먹는 것도 지혜롭지 못한 처신입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전도하러 내보낼 때에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 10:16)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혜롭지 못하기 때문에 잘못된 전도방법을 사용함으로 겪게 되는 어려움을 반드시 핍박이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신앙의 동기가 바르지 못하면 주님의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는 신앙이 아닌 이기적인 사욕이나 자신의 명예를 목적으로 하는 외식하는 신앙에서 오는 고난은 주님의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주님은 마25:41-46에서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13:3에서 “내가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교회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더러는 종교적인 명예욕을 위해 쇼맨십으로 순교를 한 자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하지 않고, 순수한 신앙의 동기나 복음에 의한 것이 아니면 그것은 핍박이 아니며, 그 순교는 의미가 없음을 가르칩니다. 우리 가운데는 이런 부끄러운 고난을 받는 자들이 없기를 소망합니다.

2.주와 복음을 위한 고난을 당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서신서 본문 고전4:9-13에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이후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받는 축복이 얼마나 귀하고 복된지를 깨닫고 주와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위해 살기로 작정했습니다. 그 사명을 감당하면서 온갖 고난과 박해를 다 당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게 된 것을 감사했고, 기쁨이 넘쳤습니다. 주님이 복음서 5:10에서 말씀 하신대로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하신 말씀을 믿고 천국에 소망을 두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없는 사람은 주와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을 수 없습니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인도의 영웅 마하트마 간디도 이 팔복을 읽었다고 합니다. 그는 3-10절까지 읽어보면서 ‘옳다 옳아’라고 하면서 무릎을 치며 기뻐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말씀이 자신이 주장하는 ‘비폭력 무저항 운동’의 정신과 일치하는 점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11절의 “나를 인하여 핍박과 고난당하는 자가 복되다”는 말씀을 읽고서는 성경책을 집어던졌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외치기를 “도대체 예수가 누구관대 그를 위해 고난 받고 핍박받을 정도로 그를 따르라는 것이냐!”라고 했다고 합니다. 결국 그는 인도의 영웅은 되었지만, 예수님을 바로 알지 못하여 천국 시민이 될 자격은 얻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로 알고 믿는 자들은 주님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사랑과 보호를 받고 하늘 기업의 상속자가 된다는 것을 알기에 주님을 믿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기꺼이 주와 복음을 위해 고난당하는 길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일본이 세계적으로 자랑하는 기독교인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우찌무라 간조입니다. 그는 위대한 성경학자였습니다. 또 한 사람은 가가와 도요히꼬였습니다. 그는 빈민 운동 등을 통해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에 옮기는데 앞장섰던 목사님이었습니다. 가가와 도요히꼬는 일본의 성자라고도 불리어 지고 또 일본의 사도 바울이라고도 불리어 졌던 분입니다.

가가와 도요히꼬의 어머니는 술집의 기생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고오베 시장이었습니다. 고오베 시장이 기생을 첩으로 들여서 나온 아들이 바로 가가와 도요히꼬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릴 때 아버지도 여의고, 어머니도 여의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는 아버지의 본처 집에 가서 얹혀살았습니다. 그러니 어릴 때부터 얼마나 많은 구박을 받았겠습니까?

그가 12살 때였습니다. 마땅히 갈 때가 없었던 그는 담장 밑에 쪼그리고 앉아서 홀로 따스한 햇볕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앞을 북을 치며 나팔을 불고서 지나가는 행렬이 있었습니다. 예수 전도단 이었습니다. 그 행렬에서 외치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인생의 참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가가와 도요히꼬는 그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리고는 소리치는 사람에게 다가가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정말입니까? 나 같은 기생의 자식도, 첩의 아들도 예수님만 믿으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가 있습니까?"

그 전도대원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물론입니다! 요1:12에 말씀하기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당신도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면 얼마든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는 그 길로 자기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누가 물으면 그는 언제나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나는 기생의 자식도 아니고, 첩의 아들도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그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자기처럼 불쌍한 자들을 위해서 일생토록 많은 봉사를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예롭고 영광스러운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우리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때문입니다. 이 사랑을 깨닫고 믿는 성도들은 그 사랑과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기꺼이 주와 복음을 위해 고난당하는 자들이 됩니다. 우리 모두 그 고난에 동참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3.주와 복음을 위해 고난당하는 자들에게 상과 영광이 따릅니다.

복음서 본문 마5:11-12에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하셨습니다. 여기 ‘기뻐하다’의 헬라어 ‘카이로’는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좋은 감정, 벅찬 기쁨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즐거워하다’의 헬라어 ‘아갈리아오’는 외부로 넘치는 기쁨, 억제할 수 없는 역동적인 환희의 뜻으로서 ‘카이로’ 보다는 좀 더 차원이 높은 기쁨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오순절 성령 충만을 받은 예수님의 제자들은 박해 중에 있더라도 기뻐하고 즐거워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늘의 상이 크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늘의 큰 상에 비하면 땅의 박해는 작게 느껴졌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에도 기뻐하고 충성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닌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사실 고난은 기쁨이며 은총의 표시입니다. 고난은 새로운 것도, 우연한 것도, 불합리한 것도 아닌 필수 과정입니다. 성도는 고난을 통하여 기도하고 겸손하게 되며, 십자가를 바라보고 부르짖어 믿음의 담력을 얻게 됩니다. 고난을 통하여 세상적인 불순물이 제거 되어 정금처럼 빛나게 됩니다. 고난 받은 만큼 믿음은 성장하고 영광도 비례합니다. 일반적으로 박해를 받으면 포기하고 원망하는데 제자들은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하였습니다. 이것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능력인 것입니다. 박해는 보복이나 원망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것으로 이기는 것입니다. 박해 너머에 큰 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와 복음을 위해 많은 고난을 당했던 사도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주님 때문에 핍박과 환난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입문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앞서간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모두 핍박을 이겨내고 승리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신앙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어느 시골교회 여 집사가 어려운 생활환경에서 몹시도 힘겨운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을 꾸준히 하면서 믿음으로 역경을 이겨내며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었지만 너무도 힘들었습니다. 그러던 중 하루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하루하루 살아가기가 너무 힘듭니다! 주님 너무 힘이 들어 정말 견딜 수 없습니다.”

그런 다음 어느 날 그 여 집사는 꿈속에서 커다란 십자가를 질질 끌고 가고 있는데 그때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주저함도 없이 예수님께 부탁드렸습니다. “주님! 너무 힘이 듭니다. 주님은 목수이지 않습니까? 이 십자가를 좀 잘라주세요” 주님은 빙그레 웃으시더니 기다란 그 십자가를 절반 잘라 주셨습니다. 한결 가볍고 편안하여 걸어 갈만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눈앞에 요단강이 나타났습니다. 강물은 깊지만 강폭이 좁아 웬만큼 긴 나무만 하나 강 위에 걸치면 충분히 건널 만 했습니다.

여 집사의 뒤에 오던 다른 사람들은 기다란 십자가를 다리삼아 가나안 복지를 향해 건너갔습니다. 그런데 그 여 집사의 십자가는 절반을 자르고 나서도 두 번이나 더 잘라버렸기 때문에 너무 작아서 그 십자가를 강위에 얹어 놓고 건너갈 수가 없었습니다. 여 집사는 강가에 털썩 주저앉아 깊이 후회를 하며 엉엉 울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불러보았지만 이미 주님은 거기서 떠나고 계시지 않았습니다.

여 집사는 자기 잘못을 크게 뉘우치며 회개하던 중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주님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지니라.” 그녀는 이 말씀을 들으면서 “아멘, 아멘”으로 화답했습니다.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믿음의 길에서 오는 고난과 역경은 축복의 기회가 됩니다. 성도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면 상급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고난이 크면 클수록 상급은 더욱 커집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성도가 힘들다고 해서 일시적인 고난을 참지 못하고 십자가를 잘라 달라고 하는 것은 주님을 믿는 신자의 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주님이 나의 멍에를 같이 메줍니다. 넉넉히 감당할 힘을 주십니다. 우리 모두 바울처럼 “현제의 고난은 장차 받을 영광과 족히 비교 할 수 없다.”고 고백하면서 기쁨으로 고난을 이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정리합니다. 오늘 사순절 첫 주일을 맞아 두 본문을 중심으로 “후일에 영광이 되는 고난”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세상에는 부끄러운 고난을 당하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주와 복음을 위한 고난을 당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주와 복음을 위해 고난당하는 자들에게 상과 영광이 따릅니다.

아멘.

<2017. 3. 5. 성산 교회. http://cafe.daum.net/sungsansarang>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호현낙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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