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재 장로(박사)소설 콩트 에세이

300 기도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7. 3. 7. 06:17

300 기도용사|성경 말씀 묵상

은혜 | 조회 27 |추천 0 |2017.03.02. 18:12 http://cafe.daum.net/seungjaeoh/J75F/198 

3월의 말씀 산책

우리 교회는 금년부터 ‘300 기도용사를 모집하기로 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맡기신 300 용사처럼 우리교회의 성장을 위해서 헌신할 정예부대가 필요하다고 생각되어서 일 것이다. 조건은 새벽기도, 중보기도, 금요기도에 정기적으로 참석하거나 집에서 하루에 30분 이상 기도하겠다는 결심을 한 사람이었다. 나도 이 모임에 참여하겠다고 이름을 써 냈다. 교회를 60년 가까이 다니면서 장로로 은퇴한 사람이 하루에 30분 이상 기도도 하지 않고 기독교인이라고 말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기 때문이었다. 무슨 교회성장의 선봉 정예부대가 된다는 거창한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알람으로 아침 6시면 일어나서 기도하며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이 30분도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평소에는 6시에 일어나면 컴퓨터를 키고 이멜 검색을 하고 그곳에 올라와 있는 생명의 삶’, ‘Our Daily Bread(1938년에 시작된 Detroit Bilble Class의 방송선교에서 시작된 묵상)’으로 말씀묵상을 하고 나서 기도를 하던 종전의 방법을 중단하고 먼저 기도부터 시작하였다. 그런데 기도를 끝내고 보니 15분밖에 되지 않은 것이었다. 결국 나는 지금까지 하루에 15분밖에 기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초 신자가 기도는 5분 이상 할 말이 없다고 한 말을 듣고 히죽거리던 생각이 났다.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기도해 왔는가를 새삼스럽게 돌아보게 되었다. 나와 내 가족, 내 친척의 안녕, 교회와 이에 얽힌 교우들의 평안 그리고 나라를 지켜달라는 피상적인 기도가 전부였다. 나는 자기 자신 이외의 이웃에 대한 기도를 한 것일까를 생각했다. 어떤 신학자가 내 교회, 내 친구, 나와 이해관계가 깊은 단체를 위한 기도는 결국 자기 사랑의 연장이요 이웃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는 말을 했기 때문이다. 내 욕심을 죽이고 원수를 사랑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절대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자, 굶주린 자, 죽어가는 자를 찾아 사랑하고 기도하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30분 이상 기도할 일이 생겼다. 아내가 낙상해서 전신마취를 하고 수술실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나는 보호자 대기실에서 거의 한 시간도 넘게 기도하였다. 기도가 끝난 뒤 도대체 나는 무엇을 위해 기도했기에 이렇게 긴 기도를 한 것일까를 생각하였다. 가족도, 친구도, 교우도, 나라도,내 머리에는 아무 것도 들어 있지 않았다. 지금 세상을 떠날지도 모를 아내를 위해 기도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뿐이었다. 나는 주시옵소서. 주시옵소서.’하고 기도하고 주시면 하나님을 떠나 내 마음대로 주신 것을 즐기고 살다가 다시 힘들면 하나님께 와서 또 칭얼대는 그런 기도를 하고 지냈던 것을 알았다. 내 마음 한 구석에는 한 군단이나 되는 귀신들이 들어 앉아 나를 세상 바람에 날뛰게 하고 내가 정신적으로 병들어 있는 것도 모를 때 하나님은 내게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과 병을 치유하는 능력을 주셨는데도 나는 스스로의 병을 치유하는 은사와 날뛰는 귀신처럼 탕자가 되려는 나를 제어하는 권능을 주신 것은 모르고 주시옵소서. 주시옵소서.” 하고 구한 것은 하나님의 것을 내 것처럼 쓰고 나를 과시하려는 오만이었던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새롭게 발견한 하나님 때문에 아무 기도도 하지 않고 아무 간구도 하지 않았는데 어느새 한 시간이 지나가버린 것이다.

하나님이 사사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해 내라고 했을 때 그는 정말 하나님이 자기를 도울 것인지 검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양털 한 뭉치를 타작마당에 두고 다음날 아침 이슬이 양털에게만 내리고 다른 곳은 마르게 해 달라고 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자 다음날에는 이번에는 양털에는 이슬이 내리지 않고 타작마당에만 이슬이 내리게 해 달라고 했다. 이번에도 그렇게 해 주었다. 기드온은 이 때 말로만 듣던 하나님이 정말 계신 것을 알았던 것이다. 이것이 와서 보라하고 우물가의 여인이 자기가 행한 것을 모두 말해준 사람이 있다고 말했을 때 그를 찾아가 예수를 만난 믿음의 첫 단계다.

기드온이 말로 듣던 여호와를 믿고 확신했기 때문에 미디안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32,000명의 군사를 모았다. 이 때 하나님은 12,000명을 돌려보내게 했다. 다시 한 번 나머지 사람도 돌려보내고 300명만 남겼다. 이것이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한 기드온의 300 용사다. 기드온은 이제 미친 듯이 하나님만을 믿기로 했다. 이 때가 예수께서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하고 물었을 때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던 베드로의 신앙고백의 깊이에 이른 둘째 번 믿음의 단계라고 생각한다. 이성을 넘어서 확실히 믿음의 단계로 들어선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렇게 중한 신앙고백을 하고도 주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세 번이나 주를 부인했다. 인간은 하나님이 온전한 것처럼 온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드온은 힘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믿고 있었다. 왼 손에 횃불을 감춘 빈 항아리를 들고 오른 손에 나팔을 들고 300 용사는 기드온의 명령, 아니 여호와의 명령을 따랐다. 그들이 일제히 나팔을 불고 항아리를 부수니 메뚜기 같이 많고 해변의 모래 같이 많던 적 미디안과 아말렉은 도망쳤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여 승천한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예루살렘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던 무리들이 성령을 받고 방언을 하며 베드로의 설교에 3000명이나 회개한 믿음의 능력이 들어난 것은 기드온의 300 용사의 승리와 같은 믿음의 세 번째 단계에 비유될 수 있다.

기드온이 의심의 단계에서 믿음의 단계로, 믿음의 단계에서 순종으로 승리의 단계에 이른 것은 제자들이 와 보라.”에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의 단계로, 또 신앙고백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부활해서 새 사람으로 거듭나 영생을 누리는 단계에 이른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나는 300 기도용사가 되기에는 너무 멀리 있다고 생각을 한다. 내 기도는 아직도 의심하고 하나님을 검증하는 의심의 단계인가?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단계인가? 주와 함께 죽고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을 힘입어 그의 증인으로 살고 있는 성도가 하는 기도의 단계인가를 생각한다.

기도의 길고 짧은 것이 문제가 아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다. 주 앞에서 할 말을 잃어버리는 것이 맞다. 할 말을 잃고 주 앞에서 나에게 자비를 베푸시옵소서!”라고 할 때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해 주시기를 빌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