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재 장로(박사)소설 콩트 에세이

내가 존경하는 원로 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7. 4. 7. 04:22

내가 존경하는 원로 목사|성경 말씀 묵상

은혜 | 조회 100 |추천 0 |2017.04.06. 16:04 http://cafe.daum.net/seungjaeoh/J75F/200 

4월의 말씀 산책

    나는 1979년 오정교회에 부임하여 2004년까지 25년간 시무하다 원로목사로 추대되어 떠난 최희관 목사를 존경한다. 흔히 원로 목사로 떠날 때는 아무리 목회를 잘 했다 하더라도 권력과 이권문제 등으로 좋지 않은 뒷소문을 남기고 떠나기 마련인데 이분은 그런 일이 없다. 마지막으로 목회의 열매로 오정교회가 필리핀에 어려운 난민을 위해 교회를 하나 현지에 세워주고 싶다고 해서 추진한 사업이 현지인들의 농간으로 대지를 사기 당한 일이 있었지만 목사님은 특별히 교회에서 은퇴자금을 받은 것도 없어 교회에 누를 끼치기 싫다고 사모님이 노후를 위해 아껴둔 자금을 털어 그 일을 해결하고 떠나기도 했다.

    나는 교회 사택 옆에 집을 가지고 있어 이 교회에 출석해야 하는데 교회에 가까운 한남대학을 1963년부터 다닐 때 시내의 제일 교회에 출석했기 때문에 1969년에 대학에 교직을 가질 때도 가까이 사는 가족은 오정교회를 출석했지만 나는 1978년 도미 유학을 떠날 때까지 시내의 제일교회 교인으로 있었다. 1983년 귀국할 때 나는 김포 공항에 최 목사님과 장로 두 분이 나와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목사님이 나더러 가까운 교회에 출석해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 마중을 나온 것이었다. ‘내가 무엇이관데하는 생각으로 감격하여 나는 교적을 오정교회로 옮기고 그 때부터 21년간 그분을 모셨다. 그분은 성령의 은사를 받아 축귀의 권능, 신유의 은사, 방언의 은사를 받아 뜨겁고 뜨거운목회를 하는 분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차분하고 감동적인 설교, 교회성장을 위한 놀라운 비전과 방안으로 교인들을 끌고 가는 분은 더더욱 아니었다. 우리와 같은 성정으로 축구를 좋아하고 운동 경기 관람을 좋아 하며, 교인들을 불러 대접하고 아프고 힘든 사람들을 찾아가 따뜻이 안아 주고 위로하는 그런 분이었다. 큰 교회를 꿈꾸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고 사시는 분이었다. 은퇴 후로도 권사들이 세배를 가면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고 칼칼한 새 돈으로 세뱃돈을 준비하여 나누어주며 교인들의 안부를 물었다. 지금도 그분의 따뜻한 사랑을 못 잊어 외지로 떠난 교인도 자기네 가정에 경사가 있으면 자녀들을 데리고 인사 오는 교인들이 많다. 목회란 목사가 선봉에 서서 목표를 향해 교인들을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과 함께 동역자(co-worker)가 되고 그들에게 방향을 제시하는 일이다. 처음 나는 그것이 비전이 없고 미지근해 보였고, 교회성장의 꿈이 없는 것 같았으며, 세속적으로 보여 불만이었다. 그러나 그분은 교회 개혁을 꾸준히 해온 분이었다.

    1979년 부임 당시는 교회에 분란을 일으킨 전임 목사 때문에 교인들은 상처를 받고 흩어져서 몇 사람 모이지 않은 때였다. 그런 교회를 말 없는 봉사로 점차 일으켜 세운 분이다. 성격이 온유한 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다. 집에서는 제왕적인 폭군이었다. 뜻대로 되지 않으면 사모님께 호통을 치는 분이었다. 그러나 한양순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모님은 너무 양순해서 조금도 역정을 내는 일이 없었으며 사랑은 언제나 온유하고라는 찬양을 읊조리며 자리를 피할 뿐이었다. 오죽했으면 예장 총회장을 지낸 한완석 목사가 너무 순하기만 한 누이를 걱정해서 최목사님께 시집보내면서 잘 부탁한다고 신신당부를 하셨을까? 이 사모님이 결혼 할 때 가져온 지참금에 틈틈이 모은 사재를 털어 필리핀 오정교회에 내 놓으신 것이 사모님이다. 그러나 최 목사님은 교회에서는 제왕이 아니었다. 젊은 시절의 모세 같은, 불같은 성질을 죽이고 온유한 목사로 지내며 당회원들이 가고자 하는 길에 충고만 할 뿐 강요해서 본인 뜻대로 끌고 가지를 않았다. 순리로 조금씩 교회를 개혁해 나간 것이다.

우리 교회는 매우 보수적이어서 강대상에 올라갈 때는 신을 벗고 올라갔으며, 부활절이나 크리스마스 행사 때 학생들이 연극공연을 한다고 하면 강대상은 거룩하기 때문에 쓰지 못하고 강대상 앞에 따로 가설무대를 만들어 그곳을 쓰게 하였다. 또 청년들이 예배 시간에 악기를 쓰거나 ccm 찬양을 하는 것을 혐오하였다. 그러나 ccc 찬양단을 초청하여 간증예배를 통해 점차 열린 예배를 보게 되고 청년들은 악기를 구입하여 찬양단을 조직하고 각종 교회 활동과 선교활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리고 강대상을 무대로 허용하고 지역 청년들을 초청하여 음악회를 하고 교회 절기 행사의 성극이나 발표회 등도 하게 되었다.

    1992년부터 나는 김진홍 목사가 인도하는 두레성서연구 모임의 대전지역 회장을 하고 있었다. 당시 김진홍 목사는 월 일회씩 각 지역(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 전주, 경주, 안동)을 순회하며 성경연구모임을 주도했는데 각 교회 교인들은 김 목사의 말씀 듣기를 좋아 했지만 교역자들은 김 목사는 좀 위험스런 인물로 인정하여 교회 장소를 빌려 주지 않았다. 그래서 이곳저곳을 섭외하기에 힘이 들었는데 오정교회는 1997년부터 3년간 매월 김 목사의 일정에 맞는 화요일 밤 7:30부터 장소를 허락해서 시내 각 교회 교인이 혼란스럽지 않게 집회에 참석했다. 자연스럽게 우리 교회는 널리 홍보가 되었다. 어떤 교인은 김진홍 목사에게 집회를 허락한 최희관 목사가 어떤 분인지 한 번 보고 싶다고도 했다.

    1990년 중순부터는 각 교회의 저녁예배에 출석인원이 점차 줄어질 때였다. 우리 교회는 1995년부터 주일 저녁예배를 없애고 오후예배로 바꾸었는데 대전지역에서는 이것을 실천한 몇 안 되는 교회 중의 하나였다. 이때는 교통수단이 다양화 되어 가까운 곳에 있는 교회를 선택하기 보다는 교회의 프로그램을 따라 먼 교회도 상관하지 않은 때였다. 그러나 관성에 젖은 교인들은 저녁예배를 없애면 그 시간에 무엇을 하느냐고 반대했다. 그러나 저녁예배는 오후예배로 대치되었다. 이것도 작은 개혁이었다. 대신 대예배와 오후예배 사이의 공백을 전교인성경공부로 대체했다. 지금도 이 전교인성경공부는 유익한 시간으로 이어지고 있다.

최 목사는 매우 학구적인 분이며 학자이기를 소원했던 분이었다. 대전신학교, 장로회 신학대학원, 연대신학대학원 목회연구과를 거치고도 만족하지 못해 일본 동경신학대학원을 수료하셨다. 그렇다고 그분의 설교가 훌륭해 진 것은 아니었다. 서론, 본론, 결론. 이렇게 틀에 맞는 설교를 하셨지만 재미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설교는 재미로 듣는 것이 아니다. 듣는 사람의 귀가 열려 말씀 속에서 꿀을 빨아 먹는 꿀벌의 은사를 받은 사람만이 설교의 꿀 같은 단 맛을 아는 법이다.

    그분은 학자 가정을 좋아하셔서 두 사위는 다 박사 학위를 가진 사람을 맞았다. 그리고 며느리는 훌륭한 의사다. 자기가 원한다고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분의 인품에 끌린 탓이기도 하겠지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그분의 노년을 축복해 주신 것이다. 그래서 은퇴 후로도 훌륭한 자녀들과 자·외손들이 모여 늘 아름다운 천국의 삶을 미리 체험하며 살고 계신다.

    왜 나는 이 원로 목사를 좋아하는가?

    첫째, 그분은 나를 따르라! 나를 도우라!”가 아니라 남의 의견을 묻고 더불어 일하자!”고 동역자의 자세를 취하기 때문이다.

    둘째, “우리에게 5,000교인을 허락하소서!”하는 맹세와 함께 주님의 지상명령 성취를 강요하거나 신입교인 환영을 위한 물질 공세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셋째, “행복한 교회, 행복한 가정!”을 앞세우고 구제와 세계 선교에 이름 없이 동참하는 섬김을 귀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최근에 아내가 골절로 두 달 동안 종합병원에 입원한 일이 있다. 입원 중 구정을 맞아야 했는데 구정에 목사님 막내가 그 아내 의사와 함께 우리 문병을 왔다. 아버지께 세배를 드리러 갔더니 문 권사가 입원에 있는데 지금 당장 문병을 가라고 해서 앉아 있지도 못하고 왔다는 것이다. 거동이 불편해서 외출을 못하시는 목사님이 대신 아들 내외를 보내신 것이다. 그분은 그렇게 교회를 떠나서도 자기 교인이었던 양을 아끼는 분이다. 양을 먹이는데 사랑보다 무슨 이론이 더 필요하겠는가?

    나는 은퇴하면 흔히 목회자들이 기도원을 세워 죽기까지 주님을 섬기겠다고 교회에서 은퇴 자금을 받아 나오는 경우가 많은 것을 본다. 다윗은 성전을 세울 모든 준비를 마쳤지만 하나님께서 너는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순종했다. 교회를 떠날 때 하나님을 죽도록 섬겨 영광을 돌리겠다는 명분을 버리고 그냥 후계자에게 맡기고 은퇴하는 목사님을 나는 더 존경한다



'오승재 장로(박사)소설 콩트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랑의 일기  (0) 2017.05.14
Newsletter-북한  (0) 2017.05.14
조기퇴원  (0) 2017.03.21
300 기도용사  (0) 2017.03.07
봄이 오는 소리  (0) 2017.0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