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전 대통령이 세 권짜리 회고록에서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해 자신을 ‘씻김굿의 제물’로 표현했다. 1권 <혼돈의 시대> 서문에서 그는 “나에게 가해져 온 모든 악담과 증오와 저주의 목소리는 주로 광주사태에서 기인”한다며 “상처와 분노가 남아있는 한, 그 치유와 위무를 위한 씻김굿에 내놓을 제물이 없을 수 없다”고 했다. “군에 의한 의도적이고 무차별적인 살상행위”는 없었고 “발포명령은 존재하지 않았다”고도 주장했다.
내란죄의 수괴이자 학살의 책임자가 자기변명 장황한 2천여쪽의 책을, 그것도 아들 소유의 계열 출판사를 통해 내놓은 뻔뻔함 자체에 우선 기가 막힌다. 애초 전씨에게 광주학살에 대한 ‘석고대죄’까지 기대한 건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사람이라면 나이가 들수록 자신을 돌아볼 줄 아는 법이다. 그에겐 부질없는 기대였다. 권좌에 올랐던 37년 전이나, 구속되던 22년 전이나 전씨의 인식은 달라진 게 없다. 1995년 검찰 소환을 거부하는 ‘골목성명’에서도 그는 자신에 대한 수사가 ‘이념적 이유’라는 궤변을 폈다. 지금도 그는 ‘광주사태’라는 표현을 일관되게 써가며 모든 탓을 ‘시대 상황’과 ‘잘못된 언론보도’로 돌리고 있다.
전씨의 범죄는 이미 세상에 드러난 것이다. 1997년 대법원은 광주 재진입 작전명령에 대해 “그 작전의 범위 내에서는 사람을 살해하여도 좋다는 발포명령이 들어 있었음이 분명하다”고 그의 내란 목적 살인 혐의를 확정지었다. 또 <한겨레>가 확보한 군 내부 기록에는 ‘자위권 발동’ 천명을 결정한 1980년 5월21일 국방부 회의에 ‘전 각하’가 참석해 자위권 발동을 직접 강조한 것으로 나와 있다. 12·12 군사반란과 80년 민주화의 봄을 짓밟은 비상계엄 확대, 공수부대를 투입해 광주시민을 짓밟은 만행 등 일련의 과정에 대한 정치적·사법적·역사적 책임이 전씨를 수괴로 하는 신군부 집단에 있음은 너무나 명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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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 ‘국민대통합’ 명분으로 행해졌던 특별사면이 전씨에게 ‘면죄부’만 줬다는 비판은 다시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그가 이런 황당한 주장을 하는 데는 구체적 발포명령자가 밝혀지지 않은 탓도 있다. 역설적으로 전씨의 회고록은 제대로 된 적폐 청산만이 역사의 퇴행을 막을 수 있음을, 그리고 5·18 진상규명이 더 철저히 진행되어야 함을 웅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