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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평강의 왕이 다스리게 하라.[노벨 문학상 수상작가인 알렉산더 솔제니친에게 전한 복음](종려 주일) / 호현낙선

성령충만땅에천국 2017. 4. 7. 05:48

평강의 왕이 다스리게 하라 슥9:9-12, 마21:1-17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당시의 장면은 이렇습니다. 서기 30년 즈음 유대인들의 최대 명절인 유월절 첫날 예루살렘에는 각기 다른 두 행렬이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마태복음에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장면만을 그리고 있는데, 사실은 빌라도총독의 입성이 그 반대편에서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서쪽으로부터는 빌라도 총독이 말을 타고 위풍당당하고 질서정연하게 행진하는 로마군의 행렬이 있었고, 동쪽으로부터는 예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시고 입성하는 모습을 보며 왁자지껄하게 웃고 떠들며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 찬송을 부르며 들어오는 억압 받고 멸시와 천대를 받았던 가난한 백성들의 행렬이 있었습니다.

당시 군대행진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자주 볼 수 있는 장면이었을 뿐더러 로마 군대가 절기 때마다 성에 주둔하는 것은 하나의 관행이었습니다. 그렇게 주둔하는 것은 유월절 순례자들로 인해 예루살렘에 평소의 열배이상 사람이 모여 치안문제가 생기기도 하고, 더구나 이 유월절은 유대민족이 이전의 제국인 애굽의 노예생활로부터 해방된 날을 기념하는 절기이기 때문에 그날을 기해서 로마제국 지배하에 있는 상황에서 독립을 위한 항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미리 방비하고자 함이었습니다.

오늘은 사순절 마지막 주일이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때에 백성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호하였다고 해서 종려주일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오늘은 예수님의 생애 마지막 주간이 시작되는 첫날입니다. 목요일 밤에 예수님께서는 로마 군병들에 의해 체포가 되고 빌라도 법정에서 사형 판결을 받게 되고 금요일 아침에는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언덕을 올라 정오경 십자가에 달리시고 오후 3시경에 이 땅에서의 숨을 멈추시게 됩니다.

그래서 이 주간을 고난주간이라 부르고 모든 기독교인들은 이 한 주간을 매우 의미 있고 엄숙한 자세로 거룩한 주간으로 보내려고 합니다.

오늘은 두 본문을 중심으로 "평강의 왕이 다스리게 하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예수님은 만주의 주요, 만왕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세상 대부분의 왕처럼 권력과 무력으로 통치하시는 왕이 아니십니다. 권력과 무력은 백성들 사이에서 무력충돌을 일으킬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은 처절한 살육만이 남을 수밖에 없기에 주님은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유대 역사를 보면 마카비우스에 의한 독립항쟁도 처절하게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되었습니다. 헤롯대왕이 죽었을 때 또 다시 항쟁이 일어나 예루살렘에서만도 2천명이나 살해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권력과 무력으로 통치하는 왕들과는 몇 가지 전혀 다르신 모습을 가지신 분입니다. 그 다른 모습을 보면 먼저 온유와 겸손으로 섬기시는 왕이십니다. 구약 본문 슥9:9에 "그는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했습니다.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대로 신약 본문 마21:7에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했습니다. 죄인을 구원하기 위한 온유한 마음과 겸손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이 입성하시는 장면은 빵파레가 울리거나 장엄한 왕의 행렬로 앞에서 군인들이 도열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처럼 백마 위에 않아서 근엄하고 화려하고 오만한 모습으로 백성들을 내려다보는 모습이 아닙니다. 겸손히 섬기는 초라한 모습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만유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이 말씀 하시면 자연도 복종하는 권세를 가지신 분입니다. 군대를 모을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깜짝 놀라도록 행차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히려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초라하고 겸손한 모습으로 오시므로 도리어 가난에 시달리고, 억압으로 고통당하며, 죄악으로 가슴 아파하며 어두움에 살고 있는 백성들에게는 더 없는 희망과 소망을 주는 장면이었습니다.

다음에 평화의 왕이십니다. 본문 슥9:10에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평강의 왕으로 오신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희생 제물이 되셔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죄의 담을 허무시고 하나님과 참 평화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선지자들은 예수님께서 평강의 왕으로 오실 것을 자주 예언하였습니다. 사 9:6-7에 "이는 한 아기가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을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 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요14:27에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평강의 왕 예수님을 내 마음에 모시면 강 같은 평안이 임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내 가정에 왕으로 모시면 가정에 평강이 임하게 됩니다. 백성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섬기면 나라에 평안이 임합니다.

그리고 공의와 사랑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죄와 불의를 책망하시는 공의로우신 분입니다. 본문 마21:12-13 에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했습니다. 공의의 모습입니다.

14절에서는 “맹인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주시니”했는데, 이 모습이 예수님의 사랑의 모습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세상 죄를 지고 고난 받으심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셨고,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신 사랑으로 인류에 속죄의 길과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신약 본문 8-9절 에 많은 군중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찬송을 부른 것입니다. 호산나는 히브리말로 “구원하소서!”라는 기도와 찬양인 것 입니다.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찬양하고 그의 구원을 간구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왕으로 모십시다.

2.나와 나의 모든 것들이 왕 되신 예수님의 다스리심을 받아야 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주요, 왕으로 믿는다는 말은 주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살겠다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그 때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본문 마21:3에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라고 합니다. 주님의 분부를 따라 나귀의 주인에게 말하자 두 말 하지 않고 허락했습니다.

이 나귀 주인의 자세가 곧 주님을 주인으로 모신 자의 자세입니다. 나의 모든 것이 주님이 쓰실 도구입니다. 나의 지식이나, 시간이나, 능력이나, 재물이나, 몸이나, 생명까지 모두가 하나님의 도구가 되게 해야 합니다. 어느 하나도 하나님의 도구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작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도구가 되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주님의 도구로 쓰임 받는 것은 가장 가치 있게 쓰임을 받는 것입니다. 주님이 타고 가신 나귀 새끼도 다른 것 등에 태우기 전에 가장 먼저 예수님을 자기 등에 태우는 기쁨과 영광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가도 영광인데 하물며 얼마나 큰 영광이겠습니까? 손만 잡아도 기쁨인데 등에 태웠으니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크리스토퍼’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이 이름은 ‘크리스토’라는 말과 ‘등에 업다’는 뜻의 ‘오페이로’라는 말이 합성된 단어입니다. 이 이름은 그리스도를 등에 업는다는 뜻을 가진 이름입니다. 이렇게 좋은 이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업을 수 있다면 예수님이 아니라 내가 영광입니다.

누가복음의 안나와 시몬은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리다가 성전에서 할례 받기 위해 부모님의 품에 안겨 온 예수님을 안고 축복하는 은총을 받은 사람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자기 집에 예수님을 모시는 기쁨을 누린 사람들로 너무 감사해서 매우 비싼 라드 향유를 주님께 아낌없이 부어 드렸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자신의 묘지에 예수님을 모시는 은혜를 누린 사람입니다. 니고데모는 향 재료 백 근을 가져와 정성스럽게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했습니다. 이런 자들이 다 예수님을 등에 업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의 사랑을 생각하면 내가 어떠한 형편에 처하든 상관없이 그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해 주님의 도구로 쓰임 받는 사람이 참으로 주님 안에서 존귀한 자가 됩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작품을 남긴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의 생애는 그의 작품처럼 아름답지 못한 고난의 연속인 삶이었습니다. 10살도 되기 전에 부모님을 여의었습니다. 그를 키워준 형은 그를 몹시 미워하였습니다.

성장하여 가정을 이루었는데 결혼 한지 13년 만에 부인과 사별하였습니다. 재혼하여 전 부인에게서 난 자녀와 함께 모두 20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10명은 어려서 죽었습니다. 남은 자녀 속에는 20살이 넘어서 잃은 아들도 있고 정신박약가도 있었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노년이 되어 이 사람은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이 되었고 뇌출혈로 쓰려져 반신불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계속 작곡을 하였습니다. 수많은 사람의 영혼을 완전히 사로잡을 만큼 웅장하고 장엄한 찬양과 경배와 감사의 노래들을 말입니다. 참으로 불후의 명작이었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음악을 작곡하면서도 비참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 바로 독실한 신자로 세계 역사상 교회 음악가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인 바하입니다. 그가 이처럼 심오한 믿음과 찬양의 세계를 알 수 있었던 원인은 그가 인생의 고난을 누구보다도 더 깊이 체험했기 때문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함께 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감사로부터 나온 신앙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살을 찢는 고난의 삶 속에서도 그는 오직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삶으로만 살았고 그래서 불후의 명작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사는 동안 가장 가치 있는 삶은 내가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는 일임을 기억하고 주님의 도구로 쓰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3.예수님은 최고의 사랑과 찬송과 영광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본문 마21:8-9에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했습니다. 누가복음 19장에 보면 이런 모습을 보고 바리새인이 예수님께 떠드는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할 때 주님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들은 너무 당연히 할 일을 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나의 구원을 위해 생명까지 주신 주님을 최고의 사랑으로 사랑하고 헌신하는 일과 주님을 찬송하고 영광 돌리는 일은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구원 받은 백성으로 지극히 자연스럽고 합당한 일입니다.

소련의 스탈린 통치시절, 보리스 콘펠드라는 젊은 유대인 의사가 시베리아 강제 수용소로 끌려갔습니다. 그 수용소에서 신실한 그리스도인을 만나 그의 열정적인 전도로 인해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이 의사는 예수님을 영접한 후 영혼의 자유와 평안을 얻고 두 가지 결심을 했습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쳐 준 그 그리스도인처럼 “이웃을 사랑하며 살겠다.”는 것과 “복음을 열심히 전하면서 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다시 의사로서 일하게 되었는데 한 젊은이가 암으로 고생하고 있음을 안타깝게 여겨 불법 수술을 해주었습니다. 그는 수용소 법을 어겼기 때문에 사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사형 전날, 이 의사는 수술해 준 젊은이 곁에 앉아서 밤늦도록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진지하게 전하였습니다.

이튿날 아침, 의사는 처형 직전에 그는 마지막으로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선택한 것에 후회가 없습니까??이 때 그는 이런 유명한 대답을 남겼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결코 후회함이 없습니다.” 그는 한 영혼을 사랑하여 복음을 전했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약속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때 이 의사로 인해 살아난 젊은이가 바로 후일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인 알렉산더 솔제니친입니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함을 알게 해주는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겉옷은 물론이고, 우리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들을 동원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삶이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정리합니다.

오늘은 종려 주일을 맞아 두 본문을 중심으로 "평강의 왕이 다스리게 하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예수님은 만주의 주요, 만왕의 왕이십니다.

◐.나와 나의 모든 것들이 왕 되신 예수님의 다스리심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최고의 사랑과 찬송과 영광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아멘.

<2017. 4. 9. 성산 교회. http://cafe.daum.net/sungsansarang>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호현낙선 원글보기
메모 :

슥9:9-12,마21: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