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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의 흐름
제1장. 초대교회의 형성과 성장
A. 교회의 형성과 시대적 배경
-로마는 카이사르의 친구 이두메 출신의 안티파터의 아들 헤롯을 유대인들의 왕으로 세워 팔레스타인을 다스리게 하였다. 이에 유대인들은 하스모니아 가문 출신의 안티고누스의 지휘와 함께 완강히 저항했으나 기원전 37년, 로마군을 등에 입은 헤롯은 예루살렘을 점령했다.
-헤롯은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성전을 새롭게 건축하고 도시를 정비하고 새 도시를 건축하고 경제, 문화적 호혜정책을 펼쳤으나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 그는 왕국을 분할하여 세 아들에게 주었다. 유대, 사마리아, 이두메 지역은 아켈라오에게, 북부지역은 안티파스에게, 동북부지역은 빌립에게 주었다.
-예수님께서 사역할 당시의 유대사회는 여러 종교적 그룹이 있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바리새인들이었다. 이들은 마카비 시대에 율법을 철저히 지키려 했던 하시딤의 후예로 알려져 있다. 다음으로 사두개인들은 제사장과 상류층가문 출신들이 속해 있는 보수적인 그룹으로서 바리새인들과 교리적인 측면에서 견해를 달리했다. 에세네파는 은거하면서 금욕적인 경건생활을 중요시했다. 기원전 2세기경부터 시작된 이들의 경건생활은 1947년 쿰란동굴이 발견되면서 실제생활에 대한 많은 정보가 공개되었다. 이밖에 마카비의 추종세력으로 잔존하며 유대의 진정한 독립을 꿈꾸며 저항운동을 벌였던 열심당(Zealots)도 한 그룹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에 연합하는 세례를 주고 분분하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명령하셨다. 이는 무작정 천국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믿는 자들의 모임을 제도화 할 것을 명령하신 것이다.
-승천 후, 사도들을 포함한 120명의 제자들이 함께 모여 기도할 때 오순절 날 성령께서 예루살렘교회에 강림하였다. 제자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여러 다른 언어로 복음을 증거하였다. 이는 복음이 모든 다른 민족에게 전파되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뜻이 방언이라는 상징적 사건으로 나타나신 것이다.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전혀 새로운 종교적 집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하게 하시고 약속하신 언약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시고 그의 죽음과 부활 승천으로 말미암아 존재하게 된 새로운 하나님 백성들의 공동체임을 만천하에 선포한 것이다.
-이후 예루살렘에서는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의 교회가 급속히 성장하게 되었다. 교인들은 이레 가운데 첫날 즉 일요일을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주의 날이라고 선포하고 그날에 모여 예배를 드렸다. 이렇게 함으로서 안식일 즉 토요일에 가지던 모임이 자연적으로 폐지되었고 유대교와 차별을 두었다. 예루살렘교회는 시와 찬미로 노래하고 성경말씀을 듣고 사도의 설교를 들었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으며 교제를 나누었다. 그리고 가진 재산을 팔아 교회에 바치고 가진 것을 서로 나누며 복음전도와 구제하는 일에 힘썼다. 가장 바람직한 교회 상을 우리에게 제공한 것이다.
-사도들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념하기 위하여 7인의 구제담당집사를 선출했다. 그러나 이들도 얼마 지나지 않아 복음을 전하는 일에 합류하게 되었는데 이중 스데반이 복음을 전하다가 유대인들로부터 돌에 맞아 최초로 순교하게 된다. 이것을 기화로 예루살렘교회는 핍박과 환난이 닥친다.
B. 이방인에게도 복음이 전파되다
-오순절 강림이후 사도들은 열심히 복음을 전하였으나 이방인들도 복음의 대열에 참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유대교의 배경 속에서 살아온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은 선민인 이스라엘에게만 미친다는 고장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베드로의 충격적인 사건을 통해 비로소 이방인에게도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푸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 것이다. -베드로로 인하여 이방인을 향한 복음의 길이 열렸다면 그 복음을 실제로 이방인에게 전하고 씨를 뿌린 장본인은 바로 바울이다. 바울로 인하여 예루살렘교회는 그 시야를 전 로마제국으로 돌리게 되었고 각 지역마다 교회들이 세워지게 되었다.
C. 바울과 로마선교의 기원과 과정
-12사도 이외에 또 한 사람, 즉 바울이 사도로 세움을 받은 사실은 특기할만한 사건이다. 그래서 사도행전 기자는 그 사실을 자상하게 기록하고 있으며 11장 이후부터는 모두 바울의 전도여행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아 많은 서신을 써서 그리스도의 교회와 신학의 기초를 놓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D. 바울이후 교회의 확장
-AD 64년에 일어난 네로의 박해 때에 바울과 베드로 두 사람이 순교를 당했다고 전해진다.
-AD 66년에 유대인들이 로마에 항거하자 예루살렘교회 공동체는 도시를 빠져 나가 요단강 건너편의 이방도시인 펠라로 이주하였다가 70년 로마군이 예루살렘 성을 점령하자 다시 귀환한다. 유대인들은 비애국적인 기독교인들을 미워하게 되었고 AD84년에 유대인 지도자들은 회당에서 유대인 기독교인을 제거하라고 명령했다.
-AD 133년, 유대인들은 바르 코크바의 주도 하에 다시 한 번 독립전쟁을 일으켰으나 135년 로마군대에 의해 무참히 짓밟히고 만다. 로마의 하드리안 황제(117~138)는 유대인들을 유대 땅에서 모두 축출하였으며 예루살렘은 그리스인들의 도시가 되어 이교의 사원과 극장들로 넘쳐났다.
-터툴리안의 증언에 의하면, AD 200년경에 이미 그리스도의 교회는 프랑스, 브리튼, 스페인까지 진출하였고, 지중해 연안의 아프리카에는 전역에 확산되었고, 특히 이탈리아에는 250년경에 약 100여 개의 주교구를 두게 되었다.
-안디옥이 서방교회의 전초 기지였다면 동방의 전초 기지는 유프라데스 강 상류에 위치한 에데사 교회였다. 이곳은 예수님의 72인의 제자 중 한 사람이었던 아다이가 3세기경에 설립한 것으로 전해진다. <도마의 행적>에 따르면, 기독교는 이미 3세기에 인도까지 전해졌다고 한다.
E. 기타
-기독교가 로마제국 내에 얼마나 급속하게 확산되었는지 알기 원하면 당시 소아시아의 비투니아 총독으로 있던 플리니우스가 AD 112년에 황제인 트라야누스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 총독은 점차로 확산되고 있는 기독교 세력이 만만치 않음을 보고 대책을 강구할 것을 조고하지만 황제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별다른 조처를 취하지 않는다.
-또 터툴리안(169~220)의 변증서에는 이런 글이 실려 있다. "우리 기독교의 역사는 짧으나 우리는 이제 당신들이 가진 모든 것을 다 채웠습니다. 도시들과 섬들과 요새들과 도심의 거리들과 집회 장소들, 심지어는 군대의 병사며, 부족들과 왕궁이며 법정까지 채웠습니다. 우리가 당신들을 위해 남긴 것은 사원들 뿐입니다."
-로마에서는 상류층이 먼저 교회의 지체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네로 치하에서 처형된 사람들 가운데 귀족가문출신들이 다수 포함되었으며, 도미티안황제 때는 집정관 클레멘트가 처형되었고 그의 부인이자 황족출신인 플라비아 도미틸라는 해외로 추방을 당했다.
-기독교 복음은 먼저 도시를 중심으로 하여 점차로 시골로 확산되어 갔다. 왕이나 추장이 먼저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고 백성들이 맹목적으로 이에 따름으로 말미암아 나라와 마을이 기독교화 되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에 로마에서는 노예나 하층민으로부터 복음이 스며들었다. 특히 여자들은 복음에 헌신적이었다. 어느 종교에서도 여자들이 평등한 대법을 받는 경우가 없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여자들이 오히려 대우 받았다. 로마서 16:1의 뵈뵈는 겐그레아 교회의 중직이었고, 브리스길라는 남편인 아굴라보다 더 인정받았다.(롬16:3, 딤후4:19). 그러나 얼마 안가서 여자들은 복음의 전도자보다는 사랑의 봉사자로 교회를 섬기게 되었다.
제2장. 기독교의 박해
A. 교회의 영웅시대
-핍박은 그리스도께서 예언하신 것이다. 그리스도 이후 처음 300년간 교회는 불과 같은 박해로서 시련을 당했는데 이 시기를 일러 교회의 영웅시대(The Heroic Age of Church)라고 부른다. -사도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베드로와 요한이 한 차례 이상 옥에 갇히는 등 핍박을 받았고, 스데반(Stephen)과 야고보(James)는 순교했다. 회심이후 바울은 평생 동안 핍박당했다.
B. 네로황제의 박해
-네로는 64년 동안 로마를 통치했다. 그는 로마 대화재사건을 그리스도인을 몰아내기 위한 수단으로 삼고 핍박을 가했다. 수많은 신자들이 십자가에 못 박혔고 사나운 짐승에 물어 뜯기었으며 여자들은 미친 황소에게 묶여 죽임을 당했다. 또 네로의 정원 안에 있는 말뚝에 매달려 화형을 당했다. 구경꾼들 사이로 네로는 마차를 타고 돌면서 화형식을 즐겼다. - 이 기간에 베드로와 바울이 순교한 것으로 전승된다.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리는 것을 자원하여 처형당했다고 한다.
C. 순교자열전
-네로 이후 68~160년까지는 일반적인 박해는 없었으나 제국의 다른 곳에서 많은 신자들이 죽임을 당했다. 안디옥의 감독 이그나티우스(Ignatius, 67~110)는 사자에게 먹혔고, 서머나의 감독 폴리캅(Policarp, ?~156)은 원형경기장에서 화형을 당했고, 최초의 변증가로 알려진 저스틴(Justin, 100~166)은 다른 여섯 신자와 함께 목이 베여 죽었다.
D.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160~180) 황제의 대 박해
-그는 모든 신자들을 고소하는 사람에게 신자의 재산을 빼앗아 주라는 법령을 만들었다. 거의 모든 신자들이 고소를 당했고 그리스도를 부인할 것을 강요당했으며 체포당했다. 또 그는 원형경기장에 신자들을 모아 놓고 사나운 짐승들에게 먹히도록 했고 군중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했다. 사람들은 신자들이 부활하는 지를 보기 위해 구름떼 같이 모여들었다. 죽은 시체들의 뼈는 불태웠고 그 남은 재는 론(Rhone)강에 던져졌다. -순교자 중에 브란디나(Blandina)여인의 이야기가 널리 구전되었다.
E. 박해 소강상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황제가 죽자 약 70년 동안은 박해가 소강상태에 접어든다. 그렇다고 박해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애굽의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여전히 박해가 극심하였고, 초대교회의 대표적인 교부인 오리겐(Origen)과 변증가인 이레니우스(Irenaeus) 등이 이 시대에 순교했다.
F. 카타콤시대
-249년부터 2년간 데키우스(Decius)황제에 의한 핍박이 있었다. -7년의 휴식 후, 이번엔 발레리안(Valerian0황제가 박해를 가했고, 이후 40년간 평온했다. -303년부터 약 7년간 디오클레시안(diocletian)황제가 박해를 가했다. -이런 박해를 피하기 위해 신자들은 카타콤(The Catacombs)으로 숨었다. 로마는 비교적 땅이 부드러운 돌로 되었기 때문에 대부분 지하복도를 가지고 있었다. 지하통로의 대부분은 지표에서 13피트나 그 이하에 설치되었고 미로처럼 연결되었으며 어떤 것은 그 길이가 500마일이나 되었다. 신자들은 죽기까지 그 곳에서 살았으며 지하에 다시 구덩이를 파고 죽은 자를 매장했다. 박해는 이곳가지 침투하여 카타콤이 완전 붕괴되기도 하였다.
G. 갈레리우스(Galelius)의 칙령
-310년 황제가 된 그는 처음에 박해를 가하다 자신이 불치병에 걸렸다. 311년 그는 신자들에게 다시 회합을 허락하는 칙령을 반포하였고, 신자들이 자신의 쾌유와 제국을 위해 기도해 줄 것을 공식 요청했다.
H. 밀라노칙령
-313년 콘스탄티누스황제가 밀라노칙령을 발하고 기독교를 공인하였다. -376년 게르만족의 일파인 비시고트족이 북쪽의 몽고족의 일족인 훈족에 쫓기어 남으로 내려왔고 드디어 다뉴브강을 건너 로마제국으로 들어왔다. 이후 476년, 서로마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100년간을 암흑의 때라고 부른다. 야만족들은 가는 곳마다 전 제국을 난도질하고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죽였다. 교회당들은 파괴되고 제단에는 말들을 집어넣었고 순교자들의 유물들이 파헤쳐졌다. -410년 로마의 엘러릭 황제는 고트족에 격파되었다. 밤낮 6일 동안을 고트족은 로마시를 초토화시켰다. 이 암흑의 때에 교회에는 암브로스와 제롬과 어거스틴이 살고 있었다. 제롬은 베들레헴의 동굴에서 에스겔서 주석을 쓰다가 이 소식을 들었고, 밀로의 암브로스는 이 충격적인 소식을 하나님의 메시지로 해석하고 대중설교를 한층 강화했고, 어거스틴은 기독교를 빛내는 위대한 저술로 평가받는 신의 도성(The City of God)을 저술했다. -고트족이 로마를 휩쓸고 간 다음 이번에는 반달족이 스페인과 북아프리카, 지중해를 정복한 후 455년 로마로 진격해 들어왔다. -야만족들은 제국의 모든 서방세계를 점령했다. 이탈리아 뿐 아니라 북아프리카, 스페인, 골, 화란, 영국도 그들의 수중에 떨어졌다. 제국은 무너졌다. 그런데 교회는 살아있었다. 많은 야만인들이 로마의 감독을 존경하였고 기독교에 입문했다. 교회는 서서히 그들을 교육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476년 서 로마제국은 완전히 무너지고 고대사의 역사가 마감된다. 이후 1453년 동 로마(비잔틴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이 이슬람세력에 의해 망할 때까지 약 1천년 동안을 중세시대라고 부른다.
제3장. 기독교의 발흥과 승리
A. 교회의 내적 성장
1. 사도적 교부
- 사도시대 이후에 교회내의 최고지도자는 사도적 교부(속사도, The Apostolic Fathers)였다. 그들은 2세기의 전반기에 살았다. 대표적으로 클레멘트, 로마의 허마스, 이그나티우스, 서머나의 감독 폴리캅, 알렉산드리아(추정)의 바나바 등이다. - 사도들의 직접 제자들이긴 하지만 성경에 계시된 진리에 깊은 이해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기독교에 대한 그들의 개념은 매우 단순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참되신 하나님의 지식을 나타내는 자로 생각했으며, 높은 율법과 도덕의 선포자로 생각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알고 싶어 했고 생각한 것들을 기록했다.
2. 변증가들(Apologists)
- 이교도들은 신자들을 공격하고 박해했으며 신자들을 많은 죄로 고소하고 기독교에 대하여 많은 거짓말로 유혹했다. 특히 교육을 받은 문화적 이교도들의 기독교에 대한 공격은 매우 위험한 수준이어서 이에 대한 방어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이 일을 담당한 사람들이 변증가들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교도들의 기독교에 대한 공격으로 말미암아 변증가들이 더욱 성경에 대해 더욱 깊이 연구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 최고의 변증가는 단연 저스틴(Justin)이다. 그는 사마리아지역의 세겜 성에서 출생했다. 부모는 이교도였다. 철학을 연구했고 기독교에 입교한 이후에도 철학자의 망토를 걸치고 다녔다. 에베소에서 구약 예언서를 공부하다가 회개했다. <바른길, Straigt Way>라는 책에서 "한 화염이 내 영혼 속에 불붙어졌고 ...성령으로 충만한 때문이다."라고 회개의 순간을 적었다. 153년에 로마에서 유명한 <변증, Apology>을 썼는데 이로 인해 핍박을 받다가 165년에 참수되었다. - 177년에 이교주의가 낳은 기독교 최대의 비판서가 출간되었는데 바로 이교도인 캘서스(Celsus)가 쓴 <참된 강화, The true Discourse>였다. 이 시기는 로마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황제에 의한 박해가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였다. 이런 정치 사회적 환경을 업고 캘서스는 불신자들이 기독교에 대해 가할 수 있는 주요한 공격을 논증하였다. - 캘서스의 공격은 한동안 주효했다. 그의 논증은 당시 기독교 엘리트들의 수준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이교가 기독교에 승리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캘서스의 70년 후 위대한 기독교의 변증서가 오리겐에 의해 쓰여졌다. 그것이 바로 <캘서스에 대항하여, Against Celsus>이다.
3. 거짓 사상들의 발호와 신경의 탄생
- 2세기 후반에 두 이단(hereries)이 큰 위협이 되었다. - 그노시즘(Gnosticism)은 영지주의를 말한다. 그리스도가 이 지상에 더러운 육체를 가진 인간의 형체로 결코 살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몬타니즘(Montanism)은 오순절 성령강림을 부인하고 성령강림이 임박했다고 가르치며 세계의 종말이 가까웠다며 종말론을 퍼뜨렸다. 두 이단은 상당한 지지를 받았다. 교회는 이단사상의 침투로 말미암아 고통을 겪게 되었다. 신자들 사이에서도 지지자들이 나타났다. 그릇된 교리가 교회의 내부를 장악하려는 위기의 시절이었다. - 이단들과의 투쟁 속에서 교회는 의외의 수확을 얻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신경과 교회법과 교회조직화를 이루어 낸 것이다. 특히 두 이단들의 가열찬 공격이 교회를 향해 엄습해 오자 사도들이 남겨준 기독교신앙을 지키고 이단들과의 구별되는 교리를 수호하기 위해 사도신경(The Apostles Creed)을 만들었다.
4. 교부들
1) 이레니우스 - 115년에서 142년 사이에 출생. 서머나에서 폴리캅의 설교를 듣고 감화 받고 영적으로 성장했다. 이후 골 지역(프랑스)의 리옹으로 이사했고 그곳의 감독이 되었다. <이단에 대항하여>라는 변증서를 남겼고 200년에 순교했다.
2) 터툴리안(Tertullian) - 150~155년 사이에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에서 출생. 법률가로 로마에서 개업. 회심 후 고향으로 돌아가 장로가 됨. 철학과 역사 학도답게 세련된 어휘를 사용했고 그리스도의 참된 교리를 명확하고 쉽게 설명하기 위해 노력했다.
3)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 - 고향에서 신학교를 설립하고 신학도를 양성하는데 일생을 바쳤다. 100년경 로마의 클레멘트와 이름이 같다.
4) 오리겐 - 로마의 클레멘트의 제자로 중세까지 교회가 낳은 제일 큰 학자로 추앙받았다. 깊고 독창적인 사색가로 불후의 명작들을 많이 남겼으며 특히 <캘서스에 대항하여>는 캘서스를 한 방에 무너뜨린 최고의 변증서로 꼽힌다.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이해를 위해 노력했다.
5. 교회의 조직화
- 이단과의 투쟁을 통해 교회는 조직적으로 대항했고 감독을 중심으로 단결했다. 이때부터 종교개혁의 시대까지 교회는 감독정치의 형태를 취했다.(현재도 로마 카톨릭, 희랍 정교, 감리교회 등은 감독정치제이다) - 교회조직은 처음에 매우 단순했다. 직원은 장로들과 집사들이었다. 장로라는 뜻의 Presbyter는 연장자라는 뜻의 헬라어 프레스부테로스에서 유래했다. 처음에 각 장로들의 지위는 동등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모임을 지도하는 장로가 생겨났고 그는 점점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를 도맡게 되었다. 이들 장로를 감독(bishop)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래서 점차적으로 다른 장로들이 감독에게 종속되어 갔고 감독은 교회의 치리자의 위치에 서게 되었다. - 교회조직은 도시로부터 시작되어 시골로 확산되었고 관할구역이 늘게 되자 하나의 교구가 만들어졌다. 이 교구를 관장하는 감독을 교구감독(diocesen bishop)이라 불렀다. - 정확히 언제부터 감독제를 취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를 파송했던 안디옥교회에는 110년경에 이그나티우스 감독이 있었고, 서머나에는 폴리캅이 감독으로 있었다.(이그나티우스는 감독제에 대하여 강력한 지지자였다. 그가 빌라델비아 교회에 보낸 편지에는 "너희 모두는 예수그리스도를 따르듯이 당신의 감독을 따르시오. 감독이 없이는 아무 것도 하지 마시오"라고 기록했다. 로마교회의 최초의 감독은 아니세투스(Anisetus)였다. 그는 154년부터 165년까지 로마감독으로 있었다. - 200년경에 이르자 교회는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것을 중심으로 하나의 거대한 조직으로 발돋움했다. 성경의 권위로서 신약의 캐논을 가졌고 정치형태로서 감독제를 세워 산하의 작은 교회들을 관장하였다. 점점 감독이 있는 교회의 덩치가 커져 큰 교회가 되었고 이를 두고 카톨릭 교회( The Catholic Church) 혹은 보편적 교회(Universal Church)라고 부르게 되었다. - 이 시대에 가장 대표적인 기독 사상가는 키프리안(Cyprian)이다. 북아프리카 카르타고 출신으로 평생 그곳에서 살았다. 매우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훌륭한 교육을 받았고 웅변선생이었다. 246년에 회심하여 2년 후에 감독이 되었고 258년에 목을 베여 순교했다.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하나님은 한 분이요, 그리스도도 하나요, 그러니 교회도 권위의 중심도 하나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교회는 감독의 단일에 기초한다. 만일 감독과 함께 하지 않는 자는 누구나 교회 안에 있지 않다."
B. 승리의 교회
1. 콘스탄틴 황제
- 영국과 골, 스페인을 다스리던 그는 312년, 로마로 군대를 이끌고 진격해 막센티우스 황제가 이끄는 로마군대와 치열한 전투 끝에 승리하고 서로마제국을 장악하였다. 전쟁 하루 전에 태양신인 미드라(Mithra)에게 예배를 드리던 콘스탄틴의 눈에 갑자기 십자가의 빛이 비추어졌고 그 빛 사이로 '이 표시 안에서 정복하라(hoc signo vinces)' 라는 글자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는 이 기호(십자가)를 앞에 들고 전쟁을 치루어 승리했다. 그는 전쟁에서 이긴 것이 하나님의 도움을 받은 때문이라고 확신했고 기독교신자가 된 후, 313년에 기독교를 인정하는 밀라노 칙령을 반포한다. 이 칙령은 기독교로 하여금 제국 내에 있는 다른 종교와 법률적으로 동등한 대우를 받게 하였다. 성직자는 노동의 의무를 면제받았고 하사금을 지급받았으며 거대한 교회당들이 콘스탄티노플과 예루살렘, 베들레헴 등에 세워졌다. 교회는 안전하게 주일성수를 드릴 수 있게 되었다. 황제는 주일에 일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여전히 황제의 개인적 생활은 향락과 육체의 욕망으로 가득 차 그의 진짜 신앙이 의심받았다. 이 밀라노칙령은 교회사의 전환점으로 스데반의 순교와 함께 시작된 예루살렘교회의 축출과 바울 및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된 이방세계에서의 교회설립이라는 사건과 함께 매우 의미 있는 역사적 사건이 되었다. - 황제의 기독교 신앙에 대한 강압조치로 인해 많은 이단들이 황제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이번엔 거꾸로 교회로 위장 침투했다. 교회가 양적으로는 성장했지만 질적으로는 잃은 것이 많았던 시대였다.
2. 배교자 쥬리안(Julian) - 361년 콘스탄틴의 조카인 쥬리안이 황제가 되었다. 황제가 되기 전까지는 기독교인처럼 행세하다가 권력을 잡자 기독교를 조롱하고 공격했다. 363년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허벅다리를 창에 찔려 치명상을 입었다. 죽어가며 그는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갈릴리 사람, 당신은 결국 승리하였소!"
제4장. 중세교회
A. 중세유럽의 배경-게르만족
-게르만족은 인도, 유럽어 족에 속한 민족으로서 스칸디나비아 반도남부와 발트해 연안, 흑해 주변에 살던 야만족이었다. 4세기 말 중앙아시아의 훈족(흉노족으로 추정)이 서쪽으로 진출하자 흑해방면의 동고트족(오스트로고트 족)이 위협을 느끼고 이동을 시작한 후 약 2세기동안 민족의 대이동이 일어남. 서고트족(비시고트 족)은 계속 남하하여 410년 로마시를 침공하고 다시 서진하여 에스파니아를 점령하고 여기에 서고트 왕국을 건설했다(415년). 동고트족은 이태이중부에 동고트왕국을 세웠고(493), 프랑크 족은 갈리아지방에 프랑크왕국을 세웠다(486). 브르군드족은 갈리아 남동부에 부르군드 왕국을(444), 롬바르디족은 이탈리아 북부에 왕국을 세웠다(568)
1) 반달족 -407년 반달족이 라인강을 도하한 후 프랑스와 스페인 일대를 방랑하다가 429년에 지브랄트 해역을 건너, 439년에 카르타고를 함락시키고 북아프리카 지역을 실질적으로 지배했다. 그 후 다시 바다를 건너 시실리, 코르시카, 사르디니아를 점령하고 455년에 로마시를 약탈하였다. 400년경에 이미 고트족에 의해 유린을 당했던 로마는 다시 한 번 처참한 침략을 당한다. 특히 침략자들과 한 패였던 아리우스주의자들은 철저하게 일반 신자들과 교회를 박해했다.
2) 비시고트족 -378년 아드리아노플에서 로마인들을 패퇴시키고 발칸반도 일대를 휩쓴 후 410년에 로마를 점령. 415년에 스페인에 침입하여 8세기 초 모슬렘교도들에게 정북당할 때까지 이 지역을 통치. -589년 리카드 왕이 톨레토에 회의를 소집하고 니케아 정통신앙을 받아들였다. 이후 기독교는 전 민중 속으로 뿌리를 내렸다.
3) 부르군디족 -고울 지방에 정착해 있던 이들은 516년 지그문트 왕이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기독교의 나라가 되었다.
4) 프랑크족 -원래 각 부족들의 동맹형태로 연합해 있다가 메로베우스에 의해 통일되어 이후 메로빙가 왕조의 시대가 열렸다. 메로베우스의 손자이자 영웅인 클로비스는 기독교신자인 부르군디족 공주와 결혼했는데 전쟁에서 승리한 후 496년 크리스마스날에 귀족들과 함께 세례를 받았다. 534년에 프랑크 왕국은 부르군디를 복속시켰다.
5) 엥글족, 섹슨족 -영국은 로마 하드리안 황제에 의해 남북으로 분할되어 남부는 로마제국에 의해 통치를 받았고, 북부지역은 픽트족과 스콧트족이 점령하고 있었다. 이후 로마 본토가 야만인들의 침략으로 위협을 받자 브리튼에 주둔하던 로마 병력이 철수하였고 이 틈새를 이용, 엥글족과 섹슨족이 영국 본토를 침입했다. 모두 이교도들인 이들은 이후 켄트, 에섹스, 써섹스, 웨섹스 등 일곱 왕국을 건설했다.
6) 이탈리아 -야만인들의 침입은 로마를 무정부상태로 만들었다. 명목상으로는 476년까지 황제가 존속했으나 실상은 여러 게르만족 무장들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476년 오스트로고트 족의 오도아케르가 최후의 황제인 로물루스를 폐위시켰다. 이에 동로마제국의 유스티니안 황제는 베리사리우스 장군을 파병하여 20년간에 걸친 전쟁 끝에 이들을 축출했다. -568년에는 롬바르디족이 로마를 침공했다. 그러나 이 무렵에는 동로마제국의 세력이 약화되어 교황들은 프랑크왕국 등에 도움을 청했다. 이로 인해 교황청과 프랑크 왕국 간에 동맹이 이루어졌고 교황은 샤를마뉴 대제를 서방의 황제로 임명했다. 샤를마뉴는 유럽을 통일시키기 위해 무자비한 정복전쟁을 펼쳤다. 세례받기를 거부하는 자는 즉석에서 처형시켰다. 784년에 프리지안과 섹슨족이 항복했고 이들은 강제세례를 수용해야만 했다. 그는 정복지에 마치 장군을 임명하듯이 감독을 임명했으며 주일을 휴일로 정하고 세금 징수하듯이 십일조를 바치도록 강요했다. 그리고 부패한 수도원을 개혁하기 위해 베네딕트에게 중임을 맡겼고 이후 베네딕트수도원시대가 열리게 된다.
B. 중세의 구분
-중세는 로마제국의 멸망과 게르만족의 이동으로부터 시작하여 1517년 종교개혁까지 약 1,000년간의 시대를 말한다. 중세는 헬레니즘, 게르만, 기독교의 3요소가 결합되어 유럽이 형성되어 가는 시기였다. 라틴적 요소와 게르만적 요소의 갈등은 기독교에 의해 서로 융합되어 서구문화가 완성되었고, 봉건제도가 수립되어 농노제가 고착화되었다.
1) 전기(5~9세기 초) - 게르만민족의 이동과 건국(415~774) - 프랑크왕국 형성과 변천(486~881) - 봉건제도 성립과 발전(486~751) - 이슬람제국의 유럽 침입(669~751) - 비잔틴제국의 흥기(537~565)
2) 중기(9세기 말~12세기 초) - 프랑크왕국의 분열(870) - 신성로마제국의 성립 - 노르만족 이동과 건국(800~911) - 엥글로섹슨 왕국 멸망과 노르만왕조(1017~1042) - 교황권 강화와 분열(10세기~12세기 말) - 십자군운동(1096~1270)
3) 후기(13~16세기 초) - 스콜라철학의 부흥(1225~1347) - 백년전쟁(1338~1453) - 교황청 분열과 몰락 - 비잔틴제국의 멸망(1453) - 르네상스 시작과 봉건제도 회조(1350~1450) - 종교개혁의 움직임(위클리프 등)
제5장. 종교개혁전후
<교회사의 대강과 주요 쟁점들>
1세기 1. 초기 기독교 공동체 2. 바울과 이방기독교 3. 사도시대의 마감과 예수에 대한 해석
2세기 1. 기독교의 조직화 2. 이단들-영지주의, 마르키온, 몬타누스주의 3. 변증가들
3세기 1. 로고스신학과 단일신론 2. 알렉산드리아학파 3. 교회의 제도적 발달-예배, 절기, 세례, 성찬식, 사죄 등 4. 최후의 투쟁
4-5세기 1. 콘스탄티누스황제와 기독교 공인 2. 아리우스 논쟁 3. 교황권의 성장 4. 수도원주의 5. 기독론 논쟁들 6. 동방교회의 분리 7. 암브로시우스, 크리소스톰, 제롬 등 8.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 논쟁-半펠라기우스주의 9. 대 그레고리(Gregory the Great)
중세초기 1. 기독교와 프랑크왕국-교황청과 프랑크, 샤를마뉴, 교황청과 오토제국 2. 9세기 유럽의 기독교 3. 교황청의 개혁 4. 힐데브란트와 하인리히 4세 5. 서임권투쟁의 종결
중세후기 1. 십자군운동(전쟁) 2. 새로운 신앙운동-수도원운동. 왈도파와 탁발수도회 등 3. 중세의 이단(카타리파 등)과 종교재판소. 마녀사냥 4. 스콜라주의와 신학- 아벨라르, 피터 롬바르드, 안셀무스, 토마스아퀴나스, 둔스 스코투스, 오캄 등 5. 아리스토텔레스의 재발견과 대학의 등장 6. 신비주의-보나벤투라의 영혼의 순례, 엑크하르트의 범신론 7. 교황권의 쇠퇴-아비뇽사건, 대분열 8. 개혁의 시초- 위클리프, 후스 / 개혁 공의회들
종교개혁기 1. 마르틴 루터와 종교개혁 2. 울리히 쯔빙글리와 스위스의 종교개혁 3. 재세례파, 독일의 개신교, 스칸디나비아국가들의 개혁주의 4. 존 칼빈 5. 유럽의 종교개혁-영국의 성공회, 청교도주의, 자유교회들, 스코틀렌드의 감독주의와 장로교주의 6. 소지나주의, 아르미니우스주의 7. 퀘이크 교도들 근대이후 1. 근대과학과 철학의 발전 2. 청교도들의 신대륙 이주 3. 이신론, 회의주의 유니테리온주의, 경건주의, 모리비아주의, 위슬리와 감리교 등 4. 대각성운동, 복음주의적 부흥과 근대선교의 발흥 5. 19세기 개신교 6. 근대의 로마 카톨릭과 동방교회 7. 자유주의 신학- 슐라이허마허, 폴 틸리히 등 8. 칼 바르트와 그 이후- 루이스 벌콥, 워필드, 바빙크, 영, 카이퍼 등 9. 프린스턴신학과 웨스트민스터신학의 독립-메이첸, 반틸 등 0. 에큐메니칼운동, 종교다원주의 등
A. 십자군전쟁(1095-1291)
Ⅰ. 교회가 전쟁을 일으킨 이유
(명목상의 이유) - 동로마제국의 황제 알렉시우스 콤네누스(1081-1118)는 모슬렘의 공격을 받아 위기에 처하자 교황청에 구원을 요청했다. 당시 동방제국은 약 25년 동안 이슬람교로 개종한 터키인들의 줄기찬 공격에 시달렸다. 1071년에는 황제 콤네누스 자신이 상처를 입고 사로잡히는 참패를 당했고 아르메니아와 소아시아 지역 대부분을 빼앗겼다. 터키인들은 팔레스틴과 시리아, 그리고 남으로 이집트 국경까지 세력을 넓혔으며 급기야 제국의 심장부인 콘스탄티노플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다급해진 황제는 서방교회에 지원군을 요청하게 된 것이다.
(실질적 이유) 교황 우르반이 십자군 파병을 결정한 데는 실제적인 이유가 있었다. 첫째, 예루살렘이 모슬렘에 점령당한 것은 신성모독으로 하루속히 성지를 탈환하고 싶었다. - 당시 성자들의 유품과 유골을 숭배하는 서물숭배사상이 만연해 있었고, 성지순례는 중요한 신앙행사였으며 특히 예루살렘을 순례만 해도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 예루살렘은 귀중한 장소였는데 이곳을 순례하지 못하는 현실은 그들에게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을 되찾는 것은 서방교회에 있어서 하나의 성전이 되었던 것이다. 둘째, 전쟁은 인구증가로 인한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를 해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 당시 서방은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오자 급격한 인구의 증가로 개인의 경작면적이 점점 감소되고 있었다. 사람들은 숲 속의 빈 터에 불을 질러 농경지를 개간했고, 늪지를 건조시키거나 매립하여 씨를 뿌렸다. 그러나 인구의 급속한 증가로 식량난이 가중되었다. 교회와 제국의 입장에서 전쟁은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두는 것이었다. 셋째, 교회의 재산을 증대시킬 수 있는 기회 - 전쟁에 참가하는 십자군기사들은 재산관리를 교회에 위탁했다. 교황청은 영주들과 농민들이 전사하면 그들이 위탁한 재산을 고스란히 교회의 소유로 돌릴 수 있다는 계산을 했다. 넷째, 교황권에 대항하는 세속권력을 분산시킬 수 있었다. - 당시 교황은 우르반 외에 황제 헨리가 선택한 교황 귀베르트와의 양두 체제였다. 우르반은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전전하며 고초를 겪다가 우여곡절 끝에 교황청을 장악하였는데 이로 인해 우르반은 유럽전체를 장악할 수 있는 보다 원대한 계획을 실행할 필요를 느꼈고 각 제국의 힘을 분산시키는데 십자군전쟁은 안성마춤의 전략이 된 것이다. 다섯째, 파병지원을 통해 동방교회와 제국에 대한 우월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 1054년 동, 서교회의 분리 이후 교황은 동방지역에 대한 수장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이 때에 파병은 교황제국의 기초를 닦고 동서간의 불협화음을 제거할 수 있는 기회였다. 한편, 영주들과 귀족들은 이 전쟁에 출전하여 자신이 통치할 땅을 확보하고 영예를 얻고 죄 사함을 받고자 했다. 원정을 주도했던 볼드윈은 조상으로부터 상속받은 토지가 없어 영지를 확보하기 위해 전쟁 길에 올랐고, 남부 이탈리아 출신의 타느레드는 재산을 얻을 목적으로, 헨리 4세의 가신이었던 부일롱(현 벨기에)은 교황 그레고리 7세를 대항한 죄를 용서받기 위해 원정에 나섰다. 이외 병사들은 진급과 군자금조달, 아내의 강권과 명예심 때문에 또는 모험심 때문에 원정길에 올랐고, 농민들은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다수의 사람들은 신앙심 때문에 십자군전쟁에 자원했다. 원정을 부추기는 열정적인 설교에 흐느꼈으며 옷에 십자가를 그려 넣고 하나님의 뜻에 순교하기로 결심하였다.
Ⅱ. 전쟁의 과정
<1차 원정>
1. 동로마제국 황제의 파병요청을 받은 교황 우르반 2세는 1095년 11월에 프랑스 클레르몽에 공의회를 소집하고 십자군파병 교서를 반포한다. 교황의 설교를 듣고 군중들은 '하나님이 원하신다'(Deus vult!)고 외쳤다.
2. 수많은 선동적 설교가들이 동원되어 '십자군에 참여하면 어떠한 죄도 용서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1만 5천 명의 사람들이 은자 피터(Peter the Hermit)의 뛰어난 언변을 듣고 십자군에 자원했다.
3. 1096년, 은자 피터와 빈자 월터(Walter the Penniless) 수하의 용사들이 가장 먼저 해협을 건넜으나 터키군의 매복에 걸려 몰살당했다.
4. 뒤를 이어 프랑스 국왕 동생인 휴, 부일롱의 고드프리, 볼드윈, 이탈리아의 보헤몬드, 레이몬드와 스테픈이 이끄는 십자군 주력부대(4천명의 기사들과 2만 5천명의 보병들)가 콘스탄티노플에 도착. 이 때 동방황제는 십자군으로 하여금 황제에 대한 충성과 탈환하는 성읍들을 황제에게 돌려준다는 서약을 강요했다.
5. 1097년, 동로마군과 십자군의 연합군이 터키의 수도인 니케아를 탈환하고 이어서 도리레움을 함락.(이 때 볼드윈은 약속을 어기고 대열에서 이탈하여 에데싸와 유프라테스강 일대를 독자적으로 점령하고 지배자가 되었다).
6. 10월경에 안디옥에 도착하고 성을 포위했으나 대치기간이 장기화되자 식량난과 전염병 등으로 도망병이 속출(은자 피터도 야반도주함). 이후 로마황제와 군대가 귀환하고 10만 명 중 겨우 2만 명만이 남아 대치하던 중, 98년 6월에 성 안의 아르메니아계 크리스찬들이 성문을 열어 겨우 함락하고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 이번엔 터키 지원군이 도착하여 성을 포위하자 십자군이 고립됨. 이 때 피터 바돌로메우가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 '성창환상'을 보았다고 거짓 진술하자 성창의 신비한 힘을 믿고 있던 군사들이 성안의 어느 한 곳을 파내려갔고 이윽고 창 하나를 발견. 용기백배한 십자군들은 5일간 금식기도한 뒤 성 밖으로 돌격하여 터키군을 함락시키고 대량학살을 자행함.
7. 시리아진격- 고드프리의 지휘 아래 바라와 마라성 정복. 기근이 들자 죽은 시체를 먹었다. 1099. 6월에 예루살렘에 도착. 성 안에 거주하던 이집트계 파티마족은 성 밖의 모든 곡식을 불태우고 모든 우물에 독약을 풀었다. 십자군은 8일간 성 밖을 돈 다음, 두 개의 부교를 만들어 성벽을 타고 점령하고 성 안의 파티마조과 유태인들을 불태워 죽이고 어린아이들은 성벽에 던져 쳐 죽임.
8. 고드프리는 나라이름을 예루살렘왕국이라 칭하고 자신이 왕위에 올랐다. 산하에 안디옥과 다소성을 왕국에 편입시키고 10년간 통치 후 사망. 뒤이어 볼드윈이 권력을 계승
9. 예루살렘을 되찾자 많은 순례자와 유럽인들이 찾아왔으며 이주했다. 지배계급인 라틴인들은 토착인들을 선대했으며 종교를 강요하지 않는 등 평화의 시기를 지냈다. 동서양 문화가 잘 혼합되고 융화되어 독특한 문화가 생성되었다. 그러나 귀족들의 수가 늘어나면서 권력투쟁으로 내분이 일었고 1187년에 이집트의 술탄 살라딘의 공격으로 함락됨
<2차 원정>
1. 1144년 살라딘에 의해 에데싸가 함락됨. 이 소식을 듣고 버나드가 나서 정규군을 파병할 것을 주창함. 이에 (프)루이 7세, (독)콘라드 3세의 주도하에 20만 명의 십자군을 거느리고 원정길에 올랐으나 터키군에 의해 괴멸됨.
2. 교황 그레고리 8세는 이 패전의 소식에 충격을 받고 쓰러진 후 2달 만에 사망
3. (독)프레드릭 황제가 헝가리를 거쳐 소아시아로 진격했으나 강을 건너다가 익사함.
<3차 원정>
1. 1191년, (영)리차드, (프)필립2세의 십자군이 아크레를 탈환. 이후 프랑스군은 퇴각하고 영국군이 계속 전쟁을 수행함(프랑스는 이 때 영국 본토를 공격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음)
2. 리차드 왕은 술탄과 평화조약을 맺음- 예루살렘의 술탄 지배를 인정하는 대신, 안디옥에서 욥바까지의 해안에 위치한 도시들의 반환과 안전보장, 그리고 성지순례 및 예배참여를 허용할 것 등이 주 내용임.
<4차 원정>
1. 1198년, 37세의 나이로 교황에 오른 인노센트 3세는 모든 세속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교황제국 건설을 주창하고 교황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전 제국에 4차 십자군원정을 명령했다.
2. 이에 1204년 십자군은 동로마제국 황제 알렉시스 3세가 황위를 찬탈했다는 것을 빌미삼아 먼저 같은 기독교 제국인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고 제국을 함락시킨 다음 콘스탄티노플라틴제국을 건설함. 저항하던 비잔틴 기독교인들을 무참히 살해하고 900년의 역사를 가진 유서 깊은 유적들을 모두 파괴함. 죽은 황제들을 부관참시하고 부녀자 농간과 약탈을 일삼음. 그리고 점령지를 황제의 몫과 공신들, 그리고 십자군 자금과 선박을 제공한 이탈리아 상인들의 몫 등 셋으로 분할함.
3. 그러나 라틴제국은 불과 56년간 존속하다가 1261년 헬라인들이 세운 비잔틴제국에게 함락됨. 두 세기 후 비잔틴제국은 모슬렘 투르크 군에게 정복당하고 완전히 역사에서 사라짐.
<5차 원정>
1. 교황 인노센트가 다시 원정을 명령하여 1217년에 팔레스타인에 도착하였으나 몇 개의 유물만 습득하고 성과 없이 귀환함.
2. 본래 계획은 팔레스타인을 거쳐 이집트를 공격하는 것이 목표였으나 지원을 약속한 (독)프레드릭 2세가 약속을 어기는 바람에 철수한 것임.
<6차 원정>
1. (독) 프레드릭 황제가 파문당함. 그는 예루살렘으로 군사를 이끌고 와서 왕위에 오르고 술탄과 협정을 맺음. 이에 교황 그레고리 9세는 예루살렘지역의 순례를 금하자 예루살렘 영주들이 프레드릭을 축출함.
2. 이후 예루살렘이 무정부상태가 되자 모슬렘이 협정을 어기고 침략. 이에 1239년, 교황은 평화조약을 파기한 모슬렘을 징치하기 위해 공격을 가함. 다시 예루살렘을 탈환한 뒤 모든 성직자를 학살하고 교회당을 불태움.
<7차 원정>
1. 1254년, 모슬렘의 총공세가 시작되자 (프)루이 9세가 진두지휘하여 술탄왕국의 수도인 카이로를 직접 공격키 위해 대함대를 이끌고 이집트 해안에 상륙함. 먼저 다미에타를 점령한 뒤 만슈라 운하를 사이에 두고 적과 대치함. 이 때 루이 9세의 동생 로베르가 달랑 군사 250여 명을 데리고 이집트군을 기습하였으나 괴멸 당함. 2. 2달 동안 지루한 대치가 계속됨. 진내에 전염병이 돌아 사기가 와해되던 중 이집트의 총 공격을 받고 모두 체포당함. 매일 300명 씩 십자군을 처형함. 루이와 귀족들은 몸값을 지불한 뒤에야 겨우 석방됨
<8차 원정>
1. 16년 뒤인 1270년, 루이 9세는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원정을 시도했으나 북아프리카 튜니스에서 열병에 걸려 전사함.
2. 1291년, 최후의 점령지인 아크레가 술탄에 의해 함락되면서 십자군전쟁은 종말을 고했고, 점령지의 모든 기독교인들은 모두 노예로 전락함.
Ⅲ. 십자군전쟁이 남긴 것
<부정적 측면>
1. 전쟁의 광풍 - 기독교 역사상 가장 어리석은 광대놀음이었고 전쟁의 광풍이 불던 무시무시한 시대였다. 성전이라는 미명 하에 잔혹성이 부추어지고, 수도원마저 전투요원을 양성하는 등 미친 시절이었고 내부적으로는 이단을 색출(inquisitim)키 위한 마녀사냥(witchcraft)으로 사회가 흉흉했다.
2, 목적달성의 실패 - 십자군원정의 목적을 하나도 성취하지 못한 실패한 전쟁이었다. 교황제국의 건설, 성지탈환의 꿈, 인구과잉의 해소, 토지확보의 계획 등 하나도 이루지 못했다.
3. 살육과 약탈의 악마의 행위 - 무죄한 사람을 학살하고 심지어 같은 기독교인들인 동방기독교인들까지 살육한 것은 기독교 역사에 있어 가장 부끄러운 일이었다. 특히 목적이 선하면 방법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로마카톨릭주의의 잔혹성이 그대로 드러난 악마의 제전이었다. 결국 평화 대신 검을 가져다주었다.
4. 모슬렘에게 모두 잃다 - 십자군의 동방제국의 점령으로 찬란했던 동로마제국의 역사와 문화가 사라졌다. 이로 인해 아시아지역은 완전히 모슬렘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긍정적인 측면>
1. 동, 서양 문화의 만남 - 새로운 문화가 창출되었고 상호 시야가 넓어짐으로 세계화가 진착됨
2. 산업의 발달 - 교역과 해운의 발달, 농업과 수공업 등의 확대 등으로 산업이 발전함. 여기에 아랍과학의 우수성이 유럽을 자극하여 중세경제시대를 여는 초석이 됨. 특히 십자군에 선박과 자금을 제공한 이탈리아의 제노바, 베네치아 상인들이 자신들의 경제력을 이용하여 아드리아연안과 크레타섬, 에게해 연안도시, 이오니아해의 섬들을 장악하고 그들만의 상업제국을 건설하고 새로운 경제주체로 활약함.
3. 개혁의 시작 - 호전적이고 진취적인 분위기는 새로운 학풍과 신앙운동으로 연결되어 많은 학교와 대학이 설립되고 스콜라철학과 교회의 개혁운동이 싹트기 시작했다.
4. 국가주의의 생성과 교황권의 추락 - 전쟁 중에 생사고락을 같이 한 사람들끼리 동질감, 일체감을 가지면서 애국주의로 발전하였고, 동일 언어를 중심으로 국가의 체제가 갖추어지면서 국가주의가 형성됨. 십일조 등 헌금이 이탈리아로 유출되는 것에 대해 저항이 일어났고 점점 교황주의가 쇠퇴함. 프랑스가 앞장 서 교황청을 자국 내에 두고 운영함(이를 두고 교회의 바벨론 포로시대라고 부름)
5. 근대국가의 시작 - 국가가 형성되면서 지역별로 구별이 생기고 통행세가 요구되면서 화폐제도가 발달함. 이에 상업과 은행이 생겨나고 상인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권력층인 중산층에 의해 근대국가가 형성됨. 이것이 훗날 프랑스혁명(1789-1795)의 산실이 됨. (2강으로)
B. 새로운 신앙운동
Ⅰ. 배경 - 교황제도와 쌍벽을 이루며 중세를 이끌었던 것은 수도원주의다. 8-11세기의 서양사회는 베네딕트의 시대였다. 신앙생활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의 거의 모든 분야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수도원은 점차 수도원장들과 고위 성직자들의 탐욕을 채우는 곳으로 전락했다. 귀족들과 감독들은 수도원을 사유화하고 개인적인 출세와 영달을 위한 도구로 삼았다. - 특히 십자군운동이 가져다 준 진취적인 분위기는 교황의 권력아래 숨 쉬고 있던 경건한 신자들의 영성을 요동치게 만들었다. 그들은 독특한 시각과 형태로 그리스도를 믿기 시작했고 단순한 신앙생활을 도모하면서 탁발 수도사들이 되었다. - 이러한 일련의 현상은 교황좌를 두고 연출되는 유혈극, 성직매매, 성직자들의 탐욕과 성적 타락, 가난한 자들을 멸시하는 풍조 등에 대한 대중적인 거부감의 표현이었다
Ⅱ. 새로운 수도원운동
(1) 클루니 수도원(Cluny Cistercium) - 아퀴데인의 공작 윌리엄 3세가 설립. 베네딕트 수도규칙을 엄격히 지키고 금욕적 생활을 유지. 세속화된 성직생활을 바로잡고 교황과 감독들, 세속 황제들을 대항하고 개혁을 주장. - 초대 원장 베르노는 수도원의 토지를 베드로와 바울에게 바치고 재산을 사유화하지 모사도록 조치. 지경을 넓혀 모든 수도원을 베네딕트수도규칙에 의거한 개혁을 하고자 했으며 점차 일련의 조직망을 갖추고 중앙에서 수도원장을 임명하기 시작함. 마침내 수도사 출신인 부루노가 교황에 오름(레오 9세, 1049-1054) - 가장 큰 문제점은 베네딕트가 강조한 육체의 노동을 경시했다. 클루니 수도원에는 귀족출신의 수도사들이 많았다. 그들은 노동을 대부분 농노들에게 맡기고 성경강독, 기도, 예배 등 경건생활에 전심전력했다. 또 빈곤문제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보였고 수도사들의 재산소유는 반대했지만 수도원의 재산 소유는 반대하지 않았다. 개혁을 외쳤던 그들은 축적된 재물과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생활 때문에 11세기를 넘지 못하고 실패했다.
(2) 시토(Citeaux) 수도원 - 클루니의 타락과 문제점에 염증을 느낀 사람들이 1098년 프랑스 디용(Diyon)지역에 로베르를 중심으로 설립. 이 수도원을 중심으로 두에 시스턴 수도회가 탄생하였고 여기서 베네딕트와 쌍젹을 이루게 되는 위대한 끌레르보의 버나드(Bernard, 1090~1153)가 탄생. <v:rect style="POSITION: absolute; MARGIN-TOP: 209.47pt; WIDTH: 437.25pt; HEIGHT: 496.5pt; MARGIN-LEFT: 82.2pt; v-text-anchor: top; mso-position-vertical-relative: page; mso-position-vertical: absolute; mso-position-horizontal-relative: page; mso-position-horizontal: absolute" id=_x68497032 strokeweight="0.84pt" filled="f"><v:stroke dashstyle="1 1"></v:stroke></v:rect>- 시스턴 수도회의 수도사들은 워낙 비현실적이고 기인들의 형태를 보여 인기는 없었다. 그들은 빵, 야채, 식용유, 소금, 물만으로 식사를 했고, 옷을 입은 채로 잠을 잤으며 하루 6시간의 공공기도회를 가졌다. 이 수도회는 1115년에 이르러 4개의 수도원으로 분립하여 발전했고 점차 서유럽 전역에 확산되었다. 물론 버나드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버나드> - 디용지역 영주의 아들이었던 그는 1112년 23세의 나이에 친구 30명을 대동하고 시스턴 수도회에 가입 - 시스턴은 버나드의 영향력 아래 343개의 수도원을 거느리게 되었다.(자치권 허락) - 교황제작자(the Pope Maker)로 불리워짐...1130년에 교황청은 인노센트 2세를 교황으로 선출했는데 같은 날 다수의 추기경들이 아나클레투스 2세를 교황으로 선출하고 인노센트를 몰아냄. 이 때 버나드가 인노센트가 합법적인 교황이라고 역설하면서 전세가 역전됨 - 1130년부터 약 23년간 서방세계의 실제적인 통치자로 군림. 이 기간에 교황좌에 오른 4명의 교황은 전적으로 버나드에게 의존함. - 그는 성직자들이 여자를 두는 것을 정죄했고, 십일조 사용과 성직자 선출방법을 새롭게 했고, 각종 정치적 문제와 종교분쟁을 중재하고 조정했으며, 동시에 교회의 개혁을 단행했다. - 그의 관심은 그리스도의 인성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에 깊이 사로잡히는 것이었다. 묵상을 강조했고, 급격한 개혁보다 점진적인 진보를 주장했으며, 지식보다는 체험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며, 겸손과 사랑이 그리스도인의 최상의 덕목으로 여겼다. 대부분의 시간을 성경연구와 교부들의 작품연구에 바쳤으며 많은 저술들을 남겼다. - 그는 해박한 교리연구가로 '마지막 교부' 라고 불리웠고, 찬송가 작시자로 '감미로움의 박사'로 흠모를 받았으며 그의 설교를 듣고 수많은 인파가 2차 십자군 원정에 자원할 정도록 '뛰어난 설교가'였다. - 그는 1140년, 센스공의회로 하여금 피에르 아벨라르를 이단자로 규정하여 종신 침묵형을 선언토록 했다. 그는 어거스틴과 교회의 정통성에 입각하여 '믿기 때문에 이해한다'는 원리를 가지고 '이해하기 때문에 믿는다'는 합리적 주장을 굽히지 않은 아벨라르를 정죄했다. 아벨라르는 '우리의 인식이 없다면 죄도 없다'며 죄를 의지의 행동으로 보고 아담 때문에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된 것을 부인했다. 그러나 바나드는 어거스틴의 정통성을 고수하면서 오직 하나님의 은총과 계시로만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 그는 세속적인 지위에 관심을 버렸다. 왜소한 체구에 수줍은 성격, 풍부한 감성을 지녔지만 용기가 필요할 땐 과감히 행동했다. 그에게는 군사도 없었고, 돈도 없었다. 그러나 그에겐 하나님이 주신 영적인 권위가 있었다. 그 무기 덕분에 그는 한 시대를 호령했고 교황과 잔인한 세속군주들의 위협들을 물리칠 수 있었다. 그는 평생을 묵상과 기도와 말씀 연구와 집필과 교리 연구에 시간을 보냈다.
Ⅲ. 탁발수도사들
(1) 왈도와 왈도파들
1) 탁발수도사 왈도(Waldo, 1205~) - 리용 출신. 도매업 상인이자 거부. 고리대업으로 가난한 자들을 착취함. 아내와 두 딸 외에 기타 베일속의 인물로 알려짐. 어느 날 5세기경의 전설적인 수도사 알렉시스 이야기(성지순례자의 삶과 청빈의 실천자)를 듣고 자신이 부유하게 사는 것에 양심의 가책을 받고 회심. 이후 아내와 두 딸을 수도원에 맡기고 사도적 빈곤을 실천키로 하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순회설교자가 되었다. - 초기에 그는 복음서들과 성경의 몇몇 책들, 그리고 어거스틴, 제롬, 암브로즈, 그레고리 1세의 작품들을 프랑스어로 번역하고 평신도들에게 성경을 보급하는데 주력함.
2) 왈도파의 신앙고백과 탄압 - 점점 추종자들이 생기고 그들은 열심히 성경을 읽었다. 그리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 등 가르침을 실천했다. 소박하고 경건한 이들의 삶의 모습은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추종자들은 늘어만 갔고 왈도파들의 순수한 신앙과 청빈한 삶, 수도사적인 고행과 가난한 자들에 대한 보살핌은 기존 교회와 부패한 성직자들로부터 사람들을 멀어지게 했다. 사람들은 세상적인 부를 소유하며 온갖 권세를 누리는 교황과 감독, 성직자들이 참 목자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들은 길거리와 공공장소 등 어디에서든지 복음을 가르치고 전파하고 설교를 했다. 수많은 남녀 개종자들이 뒤를 따랐고 그들은 둘씩 짝을 지어 복음을 전도했다. 심지어 여성들도 거리에서 설교를 했다. '리용의 빈자'들로 불리어진 이들은 성직자들의 타락과 카타리파의 이단적 주장을 질타하며 초대 기독교의 소박하고 단순한 모습을 재현했다. - 로마교회는 왈도파 사람들이 무식하여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또 사도직을 우습게 여긴다고 조롱했다. 리용의 추기경은 그들의 설교사역을 금하면서 설교는 성직자의 고유한 과업이라고 못 박았다. 그러나 왈도파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설교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복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그들의 주장은 사도직 계승을 교회의 본질로 여기는 로마교회에 대하여 엄청난 도전이었다. - 교황 알렉산더 3세는 1179년 제3차 레이란트공회를 소집했다. 왈도파는 이 때 공회가 자신들의 선교활동을 공식적으로 인정해줄 것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제출하며 교황에게 자신들의 성경을 선물했다. 공회는 여러 심문 끝에 왈도파의 자발적인 빈곤서약은 용인했으나 성직자들의 초청이 없는 한 설교는 금한다고 결정했다. - 왈도파는 불가피하게 교황의 명령을 무시하고 설교사역을 계속했다. 왈도파는 교황의 명령을 지키는 것보다 당시 흥행하던 이단 카타리파의 혹세무민한 주장을 근절시키는 것이 더 시급하다고 보았다. - 교황청은 이듬해인 1180년, 왈도파들을 불러 성직자들 앞에서 신앙고백을 하도록 했고 그들은 자신들이 카타리파와는 다른 무리들임을 증명키 위해 신앙고백을 했다. 왈도파는 로마교회나 교황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교황이나 교권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더 중요하다고 이해했다. - 로마교회는 점점 왈도파들이 성가시게 되었다. 왈도파는 로마교회의 여러 가지 교리를 지키지 않았다. 그들은 사제가 아니 사람도 성찬을 베풀 수 있다고 했고,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는 성경적이지 않다고 거부했고, 모든 종류의 살인을 거부했으며, 사제에게 참회 고백하는 것과 연옥교리 등을 부인했다. 이에 성직자들은 왈도파 사람들을 싫어하여 여러 가지 제재를 가했다. - 드디어 1184년 교황청은 베로나공의회를 소집하고 왈도파를 이단목록에 추가시켰다. 그리고 1190년 바르본의 감독이 이단이라고 구체적으로 선포했으며 이에 교황 루시우스 3세는 카타리파와 왈도파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십자가 표시를 한 '신앙의 용사들'을 동원하여 검거명령을 내렸다. 이 때 검거자들은 왈도파들이 사도신경을 거부하는 것을 포착하고 잡힌 사람들에게 사도신경을 외워보라고 한 다음 거부하면 왈도파로 알고 검거했다. - 이후 교황 인노센트 3세 때부터 왈도파를 무자비하게 박해했다. 그들은 군사들을 피해 알프스산맥의 피드몬트 계곡으로 피난하여 성전(Temple)이라는 교회당을 짓고 겨우 명맥을 유지했다. 겨우 나폴레옹 이후에 신앙의 자유를 얻어 박해에서 벗어났다. 종교개혁 이후에는 개혁주의 신학을 교육받아 프로테스탄트 신앙고백을 수용했으며 남부 독일과 스위스의 종교개혁에 영향을 끼쳤다.
3) 왈도파 교회 - 이단으로 정죄당한 후 그들은 새로운 신앙공동체를 만들었다. 지역별로 소사이티(Societies)라는 신앙공동체를 만들고 메조랄(Mejoral)이라는 치리기구를 두었다. - 왈도파 교회는 감독, 사제, 집사의 직제를 교회 내에 두고 장로정치제도를 채택했다. 신자들은 상급자에게 순종했고 서로를 형제, 자매라고 불렀으며 공동체 밖에 있는 사람은 친구라고 불렀다. - 특히 하층민들에게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처음엔 남부 프랑스에서 시작된 것이 스페인, 독일, 알프스, 롬바르디를 넘어 보헤미야, 폴란드, 헝가리, 스페인 등 전 유럽으로 확산되었다. - 보헤미야 지역에서는 얀 후스의 추종자들인 후스파 사람들과 친교를 나누었으며 후스파 신학자들은 왈도파들에게 신학을 교육시켰다. 이들은 15세기경에 이르러 왈도-후스 연합기구를 만들기도 했다. - 왈도파는 신자를 '완전자'와 '신자'로 구분했다. 완전자는 집이나 재물을 소유하지 않았다. 결혼한 사람이 완전자가 될 때는 아내를 포기했다. 신자들은 완전자들을 대접하고 필요한 것을 공급했다. 완전자는 오직 설교사역에 전념했다.
4) 평가 - 로마교회의 시각에서는 왈도파는 분리주의자들이다. 그러나 개혁주의적 입장에서는 왈도파교회는 성경이 제시하는 교회의 본질에 충실한 그리스도의 몸, 정통신앙을 가진 진리의 기둥과 터이자 교회개혁운동의 귀감이다. - 다만 신앙은 마리아를 그리스도의 어머니라고 믿는 등 중세기적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2) 카톨릭 빈자들(the Poor Cathloics)과 수도회
1) 배경 - 고전적인 수도원인 베네딕트, 클루니, 시토수도원은 화려한 수도원 건물과 웅장한 교회당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영적 욕구를 채워주지 못했다. 교황청은 가난과 굶주림의 시대에서도 사치와 허영에 사로잡혀 있었다. - 로마교회의 타락과 함께 교회를 비판하는 분위기가 더욱 확산되었다. 파트리아로 알려진 사람들은 성직자들의 부패에 대해 질타했고, 아벨라르의 제자인 아놀드는 추종자들과 전 유럽을 여행하면서 교회의 세속화를 비판하며 종교와 정치의 완전한 분리를 주장했다. - 이 때 가난한 대중들은 탁발수도사들의 등장을 진심으로 반겼다. 왈도파 등의 초기 탁발수도사들의 영향으로 제도권의 수도원을 박차고 나가 가난한 대중들과 함께 생활했으며 십자가를 그려 넣은 겉옷을 입고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이교도들에게 복음을 전파했다. - 특히 알프스 산의 롬바르디 지역의 카톨릭 빈자들이 주목을 끌었다. 롬바르디 지역은 교회비판자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어 새로운 교회갱신의 중심지가 되어 갔다. 그들은 카타리파 같은 이단과 자유방임적인 아놀드의 추종자들 사이에서 올바른 기독정신을 세우고자 소녕의식에 충전되었다. 이들은 왈도파인 리용의 빈자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유사한 형태로 하나의 신앙공동체를 형성했다. - 롬바르디의 빈자들은 제국정치와 결탁하지 않고 교회갱신을 주장했다. 시골지역으로 다니며 설교를 하는 것도 사도의 사명이기도 하지만 그것만이 유일하다고 인정하지 않고 공동체적 삶이 더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노동관에서 리용의 빈자들과 관점을 달리했다. 리용의 삶들은 노동을 부를 축적하려는 유혹의 굴레로 보고 노동을 천시한 반면에 롬바르디는 노동을 봉사와 증거의 수단으로 삼았다. 리용의 빈자들은 여행하며 노래하고 설교하는 것을 좋아한 반면에 롬바르디 빈자들은 산업현장에서 일하는 것을 즐겨했다. 대표적인 인물로 두란트가 있다. - 롬바르디의 빈자들은 사회적 연대감을 깊이 인식했다. 왈도파와는 다른 길을 걸으며 로마교회와의 협력관계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새로운 관계를 모색했다. 왈도파가 로마교회와 완전히 단절한 것은 옳지 못하다고 여겼다. 드디어 1205년에 두란트는 교황 인노센트 3세의 허가를 받아 '카톨릭 빈자들'이라는 이름의 수도교단을 출범시킨다. 그들은 왈도파와는 달리 교회의 보호를 받으며 새로운 수도원 운동을 주도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제국의 정치와 연합한 것은 아니다. 필요성에 의한 협력을 통해 교회 내부의 갱신이 더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2) 제1, 제2, 제3 수도회 - 교황청은 탁발수도사들의 영향력이 점차 확대되자 이들을 제도권 내에 묶어둘 필요를 느끼고 각각 독립된 수도단으로 인정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 탁발수도원을 사회적 갈등과 교황청에 대한 반감을 해소하는 도구로 역이용한다. - 베네딕트 수도원 같은 고전적인 수도원을 제 1수도회(1st Order)라고 하고, 탁발수도단을 제2 수도회, 그리고 가정에서 수도사의 의무를 다하는 사람들을 제3 수도회로 분류했다.
(3) 수도원의 양대 산맥
1) 아씨시의 프랜시스(Francis, 1181~1226)와 프랜시스 수도회
<프랜시스>(프란체스코) - 본명: 지오반니(Giovanni). 이탈리아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인 사이에서 출생. 고향 아씨시 사람들은 그를 프란체스코(작은 프랑스인)로 부른다. 아버지는 부유한 의류무역상으로 프랜시스는 20살 가지 아버지의 일을 도왔다. 1202년에 페루기아와 아시시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 뜻하지 않게 죄수로 몇 달간 수감된 후 고향으로 돌아와 중병으로 고생함. 이 떼부터 세상생활에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내적 갈등을 겪으며 기도생활을 하기 시작함. - 어느 날, 말을 타고 가다가 문둥병자를 만났는데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다. 이후 그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고 가지고 있던 재산을 가난한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고 부자들에게 가서 구걸을 했다. 그 이유를 묻는 사람들에게 '나는 청빈이라는 부인과 결혼을 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아버지는 이런 아들의 행동이 탐탁치 않아서 그의 몫에 해당하는 유산처리를 성직자에게 맡겼고 감독은 그가 유산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판결했다. 판결 즉시 프랜시스는 입고 있던 의복조차 아버지에게 벗어주고 수도원을 찾아 갔으나 어떤 수도원도 거지같은 그를 받아 주지 않았다. - 그는 산 속에 들어가 기도생활을 했다. 그는 온전히 벌거벗은 가난한 자의 모습으로 그리스도 앞에 서기 원했다. 그 무렵에 그는 새들과 대화를 하고 고행과 기도 끝에 신비체험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은자로 지내는 동안 자발적 빈곤을 통한 기쁨을 추구했다. 그러나 그는 산 속에서 은거하는 것보다 세상으로 들어가 가난한 사람과 병든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사람들에게 설교하기 시작했다. 친구들은 누추한 이 수도사를 경멸했다. 그러나 가난한 이들은 그의 뒤를 따랐다. 무리들은 '나는 왕의 아들이라네'라는 노래를 부르며 청빈생활운동에 앞장섰다. 1218년까지 무려 3천 명에 이르렀다. 그는 사람들과 함께 무소유공동체를 만들었다. 이것이 작은 형제들(형제단, order of friars)이라고 불리워지는 프랜시스수도회의 시초이다. 그는 교황 인노센트 3세에게 가서 자신이 만든 신앙공동체를 윤허받았다. - 프랜시스는 여자들도 가난을 통해 하나님나라의 부요를 누릴 권리가 있다고 했다. 그래서 아씨시의 처녀 클라라에게 빈곤의 가치와 지혜를 가르치고 제자로 삼았다. 그녀는 1212년에 부모를 떠나 프랜시스의 공동체로 들어갔으며 이후 '빈자 클라라의 무리(The Poor Claras)라는 수녀회를 조직했다. - 프랜시스는 겸손을 강조했다. 실제로 겸손을 실증하기 위해 1220년에 수도회의 지도자 자리를 후계자에게 물려주고 그 후계자 앞에 순종의 표시로 무릎을 꿇었다. 그는 부와 명성에 둘러 쌓인 채 파멸로 치닫고 있던 기존의 수도원을 개혁하기 위해 엄격한 수도원 규칙을 제정하고 육체노동과 영적 생활을 통한 수도원생활을 일상화하고 수도사들이나 수도원들이 재산을 소유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수도사들은 갈색 옷 두벌 외에 아무 것도 가질 수 없었다. 사람들은 그럼에도 늘 기쁨으로 춤추는 이들을 두고 ';하나님의 고아대'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 1226년 10월에 어느 예배당에서 숨졌다. 그의 단 벌 옷에는 이와 벼룩이 들끓었다. 죽기 전에 "나는 책임을 다 했다. 나의 자매인 죽음아 어서 오라"고 외쳤다고 전해진다.
<프랜시스 수도회> - 수도사들은 복음서의 가르침에 따라 소박하게 살았고 회색 옷을 입었다. 개인의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준 후에야 수도사가 될 수 있었다. 갈아입기 위한 두 벌 옷은 허용되었다. 그러나 가죽이 아닌 싼 값의 천이어야 했다. 수도사들은 걸어서 여행하며 노동을 제공한 대가로 음식과 잠자리만을 제공받으며 이곳저곳을 다니며 설교를 했다. - 탁발수도사들의 모습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일체의 물질소유를 거부하고 남을 위해 봉사하는 그들의 신앙과 태도에서 하나님나라가 남의 나라가 아님을 대중들은 인식하기 시작했다. 특히 작은 형제단은 인기를 독차지했다. - 초기 프랜시스수도회는 설교나 학문의 중요성을 별로 강조하지 않았다. 설교보다 모범적인 삶을 더 우선시했다. 모든 역경과 고난과 불의와 처참한 상황을 겸손하게 참고 견디는 영성을 추구했다. 그러다 도미니크 수도회에서 대학을 설립하고 학문을 장려하자 1236년 파리대 알렉산더가 교수로 임용된 것을 시작으로 뒤늦게 대학사회에 뛰어들었다. - 프랜시스가 죽자 수도회는 두 파로 나뉘어졌다. 엄격파는 절대빈곤에 관한 그의 가르침을 엄격하게 순종할 것을 주장했고, 온건파는 상황의 변화에 따라 수도원 규칙을 문자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수도회가 재산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두 파는 결국 분열했고, 교황 그레고리 9세가 온건파를 지지하자 엄격파는 수도회를 떠났다. 온건파는 엄격파를 극단주의자, 형제애주의자, 구원주의자라고 비난했다. 이후 프랜시스수도회는 설립취지와 다르게 많은 재산을 소유하게 되면서 변질되어 갔다. - 엄격파는 기존 교회와 수도회로부터 멀어지면서 피오르의 요아킴(Joachim)의 가르침을 수용했다. 요아킴은 독자적인 수도원을 세웠는데 그는 인류 전체의 역사를 3시대, 즉 성부, 성자, 성령시대로 구분하고 한 세대는 30년이며 성부시대는 아담에서 예수까지 42세대(1260년), 다음 42세대가 성자시대, 그리고 성령시대가 이어진다고 해석했다. 그리고 성령시대는 수도사들이 주도하므로 기존의 교황이나 교회지도자들이 필요치 않다고 가르쳤다. 이로서 엄격파는 '성령파'로 불리워졌다.
2) 도미니크(Dominic, 1170~1221)와 도미니크 수도회
<도미니크> - 스페인 태생. 어린 시절에 높은 수준의 인문과학과 신학을 공부. 20세 때, 자기가 살던 지방에 가뭄이 들자 아끼던 책들과 소유물들을 팔아 가난한 자들을 구제했다. 이후 팔렌시아에서 약 10년간 공부하고 29세 때 참사원이 되었다. - 그 무렵, 남부 프랑스지방에 카타리파가 성행했다. 교회는 그들을 진멸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했다. 이 때 도미니크는 감독과 함께 남부 프랑스지방으로 가서 카타리파를 개종하는 일에 앞장섰다. 박해받는 이단자들을 불쌍히 여기면서 사랑, 동정, 봉사를 기초로 이단에 속한 사람들을 인도하고 교화하려고 노력했다. 이단에 대항하는 것은 종교재판, 마녀사냥식의 무력사용이 아니라 교육과 설교라고 믿었다. 이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학문탐구와 기독교리교육에 충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점점 추종자들이 그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교리공부를 수도원의 일과로 삼았다. 도미니크는 6년 동안 남부 프랑스에 머물면서 수도원을 세우고(1206년), 정통신앙을 설교했다. - 그는 거창하고 화려한 의복을 입은 고위 성직자들과는 달리 맨발의 수도사였다. 거지처럼 먹을 것을 구하며 박해와 조롱을 감수하며 이단자 개종에 몰두했다. 교황이 카타리파를 진멸하기 위해 특정 지역에서 무력을 사용할 계획이 있다는 것을 미리 알고 그 지역에 먼저 가서 이단자들에게 설교하고 가르치며 그들을 개종시키려고 힘썼다. - 도미니크는 갑자기 몇 해 동안 종적을 감추었다가 44세가 되던 1214년에 다시 나타났다. 이 때 부유한 한 상인의 저택에서 자신을 따르던 인물들과 공동수도생활을 했다. 이 공동체에 감명을 받은 투울루즈 대감독이 그의 열렬한 팬이 되었다. 점점 수도사들이 그의 공동체에 가담했다. 이때부터 이들을 '도미니크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도미니크는 교황에게 이 수도회의 설립을 인가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는 어거스틴의 수도규칙을 제정하고 빈곤과 탁발을 수도생활의 원칙으로 삼았다. 드디어 1216년에 교황 호노리우스3세가 도미니크의 요청을 수락했다. 이 수도회의 공식명칭은 '설교자들의 수도회(The Order of Preachers)이며 도미니크수도회는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 - 도미니크는 사유재산을 가지지 않았다. 죽을 때도 남의 침대에 누워 남의 옷을 빌려 입은 채였다. 그는 사후에 높은 존경을 받았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수도회에 가입했고 그의 가르침을 따랐다. 죽은 뒤 13만에 그는 성자로 추대되었다.
<도미니크수도회> - 수도사들은 검정 옷을 입고 다녔다. 프랜시스수도회와는 달리 빈곤 그 자체를 신앙의 본질로 여기지 않고 단지 이단에 대항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보았다. 그들은 이단자들에게 대항하기 위해서 설교, 교훈, 교육, 신학탐구에 주로 매진했다. 훈련받은 수도사들은 전략적 요충지에 파견되어 다른 수도사들을 훈련시키고 설교자로 키웠다. 그들은 대학으로 들어가 많은 학생들을 가르쳤다. 파리대학교에서 가장 먼저 도미니크 수도사들을 학교로 초청하고 그들에게서 높은 수준의 신학을 전수받았다. 당대 최고의 지성인인 알버트와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 때 배출되었다. - 그들은 활동반경을 넓히어 유대인들과 모슬렘들을 개종시키기 위해 유럽 전역으로 선교의 영역을 넓혔다. 그들의 활동무대는 수도원이 아니라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상이었다. 수도사들은 설교를 통해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 올바른 교리를 교육시킴으로서 사람들을 이단에 빠지지 않도록 가르쳤다. - 수도회는 군대조직처럼 각 지방마다 이를 통괄하는 종신직의 원장을 두고 부원장을 선거에 의해 선출했다. 모든 수도사는 상급자에게 철저하게 복종했다. 도미니크가 사망한 지 50년 뒤 이 수도회 출신의 알렉산더 5세가 교황이 될 만큼 위세가 대단했다. - 그러나 종교재판이 진행되면서 수도회는 이단자들을 진멸하는데 앞장섰다. 민심이 돌아서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사람들은 설립자의 이름인 도미니쿠스 대신에 '도미니 카네스'(주님의 개)라는 이름을 이 수도회에 붙였다.
3) 기타 - 갈멜 수도회: 1154년 팔레스틴에서 시작. 갈멜산 선지자 엘리야의 후예로 자처. 프랜시스수도회의 규칙을 추종. 주로 묵상, 기도, 신학연구, 선교에 매진. 갈멜여자수도회로 더 유명 - 어거스틴 수도회: 이탈리아 은자들의 공동체로 시작. 점차 도시로 파고들면서 인기. 도미니크수도회의 모범을 따름. 이론적인 것보다 실제적인 것에 더 관심. 독일개혁교회에 영향.성경연구와 비평적 사고를 곁들인 인문교육을 통해 16세기 종교개혁의 징검다리역할.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가 이 수도회 소속.
C. 중세의 이단
(1) 에비온파(Ebionities) : 사이비 베드로 노선을 따르는 기독교화된 유대주의로서 그리스도는 사람이면서 하나님의 양자지만 신성은 부정. 예수는 단지 메시야로 지명된 (택함)사람. 그리스도는 이상적인 아담의 성육신이다. 동정녀탄생 부인 등. (2) 영지주의(Gnostics) : 사이비 바울적인 경향을 딘 이교사상으로서 사변적이고 신령주의를 추구. 여러 우주의 신화와 그리스와 동방의 철학사상에 기독교 교리를 혼합한 이단. 이원론적인 세계관으로 정신과 물질을 대립적인 것으로 보고 물질의 세계는 악의 원리에 지배됨으로 인간의 영혼은 몸의 무덤에서 해방되어야 한다고 주장. (3) 몬타누스파(Montanus) : 금욕생활, 금식, 엄격한 참회를 강조하면서 재혼 금지, 박해 시에 숨는 행위 금지, 가정과 남편을 버리고 페푸자에 모여 살도록 권유, 교회에는 성령은 은사가 떠났고 몬타누스가 성령이라고 주장. (4) 마니교(Manicheaism) : 배화교와 같이 페르시아의 이원론에 근거하고 빛과 어둠을 다스리는 두 신을 전제로 한다. 마니는 붓다, 조로아스터 및 예수님이 빛의 아버지로부터 인간을 구속하는 참종교를 위하여 세움을 받은 마지막 사자이다. 그 가운데서 마니가 가장 완전하다고 주장. 완전한 금욕생활을 강조. 모든 소유를 버리고 성욕도 자제하고 결혼도 포기 (5) 노바티안파(Novatian) : 250년 경 데키우스의 박해가 끝난 뒤 배교자들의 수용문제로 교회가 다투었는데 로마감독인 코르네리우스는 수용을, 노바티안은 수용불가를 주장하고 추종자들과 따로 분리. 이후 스스로를 정결파로 부르며 독자 노선을 걸음. 노바티안은 발레리안 치하에서 순교함. (6) 아리우스파(Arius) :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고 아리우스가 주장. 이후 삼위일체교리를 사이에 두고 치열한 신학논쟁을 벌이다. 318년 알렉산드리아 노회에서 아리우스가 이단으로 정죄 받고 출교를 당했고, 이후 325년 콘스탄틴 황제가 소집한 니케아 공의회는 아리우스를 정죄하고 니케아신조를 작성함. 그러나 이후에도 아리우스파가 득세하자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아타나시우스가 주도하여 니케아신조를 재확인함으로서 아리우스파 논쟁이 종식되었다. (7) 도나투스파(Donatism) : 4세기 북아프리카에서 발생. 1백년간 지속. 총독 펠릭스가 311년에 캐킬리안을 카르타고의 감독으로 임명하자 도나투스와 교회 감독들은 그가 한 때 배교자였다고 주장하며 마요리누스를 새 감독으로 따로 선출하고 교회의 정화운동을 시작. 이후 도나투스파는 교회의 성결을 강조하며 교회와 세상은 분리되어야 하고 국가권력에ㅐ 대해 부정적인 입장. 일종의 분파주의로 염세적이고 금욕, 고행, 순교, 기적 등을 내세우고 비타협적 극단적인 교회분립을 단행함. 어거스틴은 분파의 죄는 배교보다 더 무서운 죄라고 하며 도나투스파를 반대함. 411년 호노리우스 황제의 칙령으로 카르타고 공의회가 개최. 어거스틴과 도나투스파 감독 페틸리안이 치열한 논쟁. 어거스틴의 정통파가 승리. 이후 약화됨. (8) 펠라기우스파(Pelagius) : 동방과 서방은 은혜의 교리가 서로 달랐다. 동방은 헬라 철학, 유대주의, 동방의 신비주의 등의 영향을 받아 형이상학적인 사색에 관심을 둔 반면에, 서방은 인간과 구원에 대한 교리에 관심을 둠. 펠라기우스는 매 순간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값없이 주는 은혜가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죄짓지 않는 가능성을 주신 것과 상급을 얻기 위해 율법과 그리스도의 교훈을 지키는 것이 은혜라고 주장. 즉 인간은 원하기만 하면 죄를 짓는 일 없이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히 행할 수 있다고 주장. 그의 사상은 어거스틴과 정 반대의 것으로 431년 에베소 공회에서 최종적으로 파문됨. (9) 단성론, 단의론 :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칼케돈회의의 결정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그리슫의 단설론과 단의론을 주장. 피터 몽구스는 하나님의 고난설을 말하고, 단의론은 신플라톤주의적인 사상을 기반으로 한 사변적인 주장.
(10) 아놀드의 신앙운동 - 아벨라르(1140년 버나드에 의해 이단자로 규정받고 종신침묵형에 처해짐)의 제자인 아놀드와 그의 추종자들이 벌인 독특한 신앙운동. 아놀드는 성직자들과 수도사들의 토지소유를 반대했다. 토지를 소유하면 구원받을 수 없다. 부와 권력으로 구성된 교회는 진정한 교회가 아니다. 따라서 신자들은 거짓 교회로부터 성례를 받지 말아야 한다 등을 주장. 그는 프랑스 전역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주장을 펼치다 로마로 돌아와 교황을 반대하는 반란에 참여했다. 1155년에 체포되어 화형 당함.
(11) 카타리파(Cathari) - 프랑스 남부 알비젠스 지방에서 일어난 이단으로 마니교적 이원론에 기초한 교리를 신봉함. 즉, 물질은 악한 것이며 이 세상은 선과 악이라는 두 가지 영원한 힘과 원리에 따라 움직이며 양자는 모두 시간을 초월하므로 어느 한 쪽도 다른 것에 우선적이지 않다. 어느 한 쪽이 물리적인 힘이나 정복에 의해 기울어지는 것이 아니고 우월한 생명의 질에 따라 결정된다. 선을 택하는 것이 선하게 되는 길이다. - 카타리파에 의하면 구원은 육으로부터 영혼이 해방되는 것이다. 세상은 선과 악이 혼합된 상태이다. 이것은 악이 가져다 준 것이다. 정경은 신약 전체와 구약의 예언서 일부다. 성경은 우화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유령의 몸을 가진 천사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고통을 당하지 않았고 부활하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카타리파의 진리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로마교회는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잘못을 범하는 부패한 교회다. 성례, 지옥, 연옥, 몸의 부활에 관한 교리는 잘못된 교리다. - 물질을 악한 것으로 여겼으며 일체의 성적인 표현을 삼갔다. 결혼을 금하고 육류, 우유, 계란, 버터, 치즈, 등 동물의 소산을 멀리하고 채식을 했다. 생선을 먹은 것은 그들이 성관계를 하지 않고 번식되는 것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 계율과 가르침이 너무 엄격하다는 불평이 대두되자 신자를 규율을 엄격히 준수하는 완전자와 진리를 배우는 과정에 있는 보통신자로 구분했다. - 카타리파는 기존의 교회조직을 거부하고 로마카톨릭교회를 악의 집단으로 보았으며 따로 그들만의 교회조직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완전자들의 조직에서 교회의 감독과 사제를 선출했다. 완전자들은 성령의 세례를 받았으며 새로운 의식을 관장했다. 성찬식은 탁자 주위에 둘러서서 주기도문을 크게 낭독하는 가운데 빵을 나누는 방법으로 실시했다. - 카타리파는 12세기에 북부 이탈리아와 남부 프랑스에 급속히 확산되었고 막강한 영향력을 끼쳤다. 교황 인노센트 3세는 카타리파를 포함한 이단을 처형하기 위해 십자군가지 동원했다. 그것은 종교사에서 지우고 싶은 피의 살육이었다.
D. 종교재판(Inquisition) 과 마녀사냥(Witchcraft)
- 카타리파를 축출하기 위해 각 교구마다 종교재판소를 설치하고 세속군주들은 무력으로 이단자를 색출함. - 1184년 교황 루시우스 3세가 종교재판법을 공포함. 모든 교구가 최소한 1년에 한 번 이상 교인들을 조사하여 정통신앙을 고백토록 의무화. 이단자를 보호하는 사람도 이단자와 동일한 범죄로 처벌. 1215년 제4차 레이란트 공회에서는 이단자를 진멸하는 결정을 내림. 심지어 수도사들도 감독의 법정에 서서 자신의 신앙을 점검받아야 했다. 한마디로 성직주의와 교황권력에 항거하는 사람은 생존이 불가능했다. - 서방교회는 이단자를 징벌키 위해 십자군을 일으켰다. 닥치는대로 무고한 백성을 이단으로 몰아갔다. 마녀사냥은 그래서 시작되었다. 이단자들은 교수형, 화형, 팔다리를 찢고 불에 태우고 물에 빠뜨려 죽였다. 새로운 사상의 씨앗까지도 싹을 잘랐다. 이단박멸을 지지했던 버나드 조차 이단자들은 칼에 의해서가 아니라 설복에 의해 개종시켜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였다. - 그러나 교회의 이단박멸정책은 성공하지 못했다. 단지 힘으로 이단을 징치하려 했던 중세교회는 많은 선량한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은 우를 범했다. 중세교회는 최대의 살인집단이었다.
E. 스콜라주의(신학)
1. 배경 및 포인트
- 전통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성경과 기도를 통해 진리에 도달할 수 있지만 타락하고 취약한 이성은 도움이 안 된다고 평가했다. 그러므로 철학과 신학은 서로 양립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했다. - 헬라 철학자들은 인간이 경험이나 이성에 의해 자연적으로 얻을 수 있는 지식 즉, 자연적 지식의 달인들이었고 반면에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계시의 결과인 성경을 유일한 지식의 원천으로 보았다. - 기독교신학은 일찍부터 철학을 도구로 삼아 합리적인 방법으로 진리를 탐구하려고 노력해 왔다. 순교자 저스틴은 이러한 신학전통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 그런데 스콜라주의가 이 둘을(헬라철학과 기독교신앙) 상호 조화시키려고 노력했다. 스콜라는 본래 교회당부속학교였는데 이곳에서 신학자들의 학문이 진행되었고 신학을 정립시키고 교부들의 가르침을 체계화시켜 나간 것이다. - 스콜라주의자들은 신앙하는 바를 이성적으로 사유하고 논증하려고 했다. 이 과정에서 신앙이 이성적으로 뒷받침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신학자들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찾았다. 신앙과 이성의 관계를 규명하고 질문을 제기하고 반대되는 답을 제시하면서 독창적인 답을 찾았다. 그들은 이성을 통해 얼마든지 기독교신앙과 주요 교리들을 증명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즉, 이성과 관계없는 진리, 이성과 양립되는 진리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스콜라주의는 초기의 안셀무스와 아벨라르를 시작으로 파리의 알베르투스 마그네스를 거쳐 그의 제자인 토마스 아퀴나스에 이르러 절정을 이루었다. -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스콜라적 방법을 사용하면 할수록 기도교의 진리에 이를 수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윌리엄 오캄을 비롯한 후기 스콜라주의자들은 이성으로 해결할 수 없는 진리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교회의 권위와 하나님의 계시를 기록한 성경에 입각하여 신조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 한 마디로 스콜라주의는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헬라철학적인 신학을 새롭게 모색한 하나의 거대한 실험이자 중세 신학자들의 열정과 학문적 탐색이었다.
2. 신학자들
(1) 안셀무스(Anselmus, 1033-1109) - 이탈리아 태생. 프랑스 노르망디 수도원장 역임. 영국 캔터베리 대주교로 생을 마감 - 신앙은 이성 없이 불가능하고 이성 역시 신앙 없이는 목적한 바를 이룰 수 없다고 하면서, '나는 이해하기 위해 믿는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 그는 이를 확증키 위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논리적인 증명, 즉 존재론적 논증을 만들어내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라는 존재는 생각과 현실에 함께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생각에만 존재한다면 생각과 현실에 동시에 존재하는 그 무엇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의 이 존재론은 사유의 방식(3단 논법 등)에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많은 영향도 끼쳤다. - 사역 초기에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명상을 집중적으로 다룬 <모노로기온>과 하나님에 대한 존재론적 증명을 다룬 <프로스로기온>을 저술했다. 캔터베리 사역기간에는 <왜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는가?>, <동정녀 임신과 원죄에 대하여>, 그리고 서방교회의 필리오케 교리를 옹호하는 <성령의 발출에 대하여> 등을 집필했다. 말년에는 <예지, 예정, 은총이 자유의지와 일치함에 대하여>라는 탁월한 작품을 남겼다. - 그가 남긴 공헌은 다음과 같다. 첫째, 신학방법에서의 공헌이다. 그는 정통교리를 벗어나지 않으면서 이성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이용했으며 창의적인 신학활동을 했다. 그의 신학적 서술은 세심하고 정확하다.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핵심을 간파했다. 그의 신학방법은 어떤 주제를 먼저 제시하고 그것을 합리적으로 설명했다. 질문을 제기하고 그것에 답하는 스콜라주의 학문방법을 따랐다. 둘째, 존재론적 증명이다. 그는 신앙과 이성이 서로 충돌한다고 보았다. 그는 이성의 역할을 강조했다. 교회가 가르치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받아들여진 교리를 이성적 활동을 통해 논증했다. 이러한 논증을 통해 진리들이 이성에 의해 뒷받침될 수 있음을 증명해 보인 것이다. 그는 성경이나 교부들의 권위에 직접 호소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신학이론과 이단에 대한 정확한 논박들은 성경에 대한 깊은 사색의 결과이며 가르침을 지성적으로 체계화한 것이다. 그의 <모노로기온>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우주론적 증명을 담고 있다. 이에 다르면 존재하는 것이 있는 이상 최고의 존재가 있기 마련이며 최고가 아닌 존재는 최고의 존재를 전제로 존재한다. 최고의 존재는 만물의 원인인 하나님이다. 존재하는 것은 반드시 원인이 되는 존재를 가진다. 원인을 찾아 나서면 최고의 원인에 도달할 수 있다. 이 최고의 원인은 창조자 신이다. 창조주가 없으면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 우주가 생겨날 수가 있는가? 신비한 세상이 있는 것은 그것을 있게 한 창조주 하나님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셋째, 그의 가장 탁월한 기여는 <왜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는가? Cur Deus homo>라는 책에서 밝힌 구속론이다. 그리스도의 속죄와 성육신의 교리를 최초로 일관성 있게 체계화했다. 여기서 그는 성육신의 필요성을 밝히고 원죄, 하나님의 사랑, 공의의 속성을 근거로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어 오신 까닭을 성경적으로 말하고 있다. 그의 구속론은 한 가지 질문으로부터 시작된다. '왜 하나님은 동일한 방법으로 인간을 구원하지 않는가?' 말씀 한 마디로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 굳이 성육신 과 수난과 죽음, 부활이라는 방식을 사용해야 하는가하는 질문이다. 말씀 한 마디로 인간을 구원하실 는 없었는가 하는 그의 물음에 대한 대답은 기존의 속사도들과 교부들과 감독들의 가르침과 이론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신 목적이 빚을 갚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마귀에게 갚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갚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속죄사역과 희생의 필요성을 하나님의 속성에 기초하여 설명했는데 이것을 "만족설"이라고 부르고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곧장 벌하지 않으시고 공의의 속성을 만족시키는 보상을 받으시고 사랑을 베풀었다고 하는 것은 성경이 제시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의 속성을 정확히 반영한 것으로 평가된다.
(2) 아벨라르(Peter Abelrard, 1079-1142) - 프랑스의 천재학자로서 11, 12세기 중세신학을 주도한 인물로 스스로를 '세상에서 유일한 철학자'로 자부하며 사람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 그는 성경과 기도 이외에 실제로 실재하는 것(보편자, Universals)을 설명할 수 있는 또다른 방법이 있는지를 깊숙이 탐구했다. 당시 한쪽에서는 보편자가 사물이나 그것을 생각하는 사람과 무관하게 존재한다는 논리(실재론)가 있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존재하는 것은 이름뿐(유명론)이라고 주장했다. 아벨라르는 양족 모두를 비판했다. 그는 보편자는 존재하지만 물리적이 아니라 관념적이며 즉 생각에 존재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 그는 독창적인 저술을 남긴 문필가, 철학자, 신학자였다. 변증서인 <철학자, 유태인, 기독교인의 대화>, <로마서주석>, <신학입문>, <기독교신학>, <예와 아니오>등의 저술을 남겼다. 그는 이성을 중요하게 여기면서도 신앙을 간과하지 않았고 교부들이나 교회의 권위를 부정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학문이라는 것이 고작 교부들의 작품을 그대로 인용하고 재탕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한계를 벗어나서 창의적으로 발전하도록 자극한 것이다. 즉, 신학적 주제에 얽힌 어려운 문제들을 정확하게 풀어내고 자신이 인용하는 성경본문들이 내적으로 서로 일치하며 성경을 이러한 방법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실증한 것이다. - 그의 이런 가르침은 환영받지 못하였으나 기독교신학의 발전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아퀴나스 등이 그의 이런 도전을 받아들였다. 각 질문을 나열한 다음에 그것에 대한 답을 제시하고 그 옆에 반대되는 답을 열거했다. 이런 학문적 방법은 스콜라주의의 특징이 되었다. - 그러나 그는 어거스틴의 원죄론을 부정했다. 각 사람은 선행으로 하나님의 형벌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인간에게 주신 이성적 능력을 가지고 선한 것을 찾아낼 수 있다고 믿으며 '도덕적 감화설'이라고 하는 속죄관을 제시했다. - 수도사이자 당대 기독교계의 최고 실력자인 끌레르보의 버나드는 아벨라르의 삼위일체론, 속죄론, 자유의지론, 원죄론 등이 파괴적인 것이라고 규정했다. 이에 교회는 1140년 쌍스공회의를 소집하고 그를 이단자로 정죄했다.
(3) 휴(Hugh,1096-1141) - 아벨라르의 학문적 방법을 추종하며 학문의 목적이 호기심을 만족시키는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더 높은 차원의 삶을 살도록 하는데 있으며 그것은 영혼을 만족시켜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 그는 <기독교신앙의 신비에 대하여>에서 성례전의 중요성을 갈파하며 화체설을 주장했다. 성만찬에 실제로 그리스도가 임재하며 떡과 포도주는 단순한 표지나 상징이 아니라 실제적인 은혜가 작용하는 물질적 매체라고 했다.
(4) 피터 롬바르드(Peter Lombard, 1100-1160) - 버나드, 아벨라르, 휴와 동시대 인물. 이탈리아에서 수학하고 1130년부터 파리에서 가르쳤다. 나중에 휴가 차지하고 있던 노뜨르뎀신학교수의 자리를 물려받았다. - 그는 <4권의 문장서>를 통해 중세의 조직신학을 통괄했다. 1권은 하나님과 속성, 삼위일체, 예장을 논하고 2권에서는 천사들의 창조를 포함한 하나님의 창조사역, 인간, 죄, 자우의지, 구속의 필요성을 다루고 3권에서는 기독론, 구속론, 성령의 능력과 선물, 하나님의 계명을 다루고 4권에서는 성례전과 종말론을 논의하고 있다. (5) 알버트 마그누스(Albert Magnus, 1200-1280) - 도미니크수도회의 일반학연구소의 책임자로서 피터 롬바르드와 디오니시우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들을 주석하고 방대한 백과사전을 만들어 지식사회에 선물했다. - 그의 가장 큰 기여는 신학과 철학을 구분한 것이다. 신학은 계시된 원리에 따라 어떤 것을 증명하는 일이지만 다른 학문과는 달리 증명되지 않는다고 하며 이성의 관찰과 판단의 대상이 아니라고 했다. - 사람은 수동적 지성과 능동적 지성이 있는데 능동적 지성은 하나님의 조명을 통해 감각적 자료가 전달해 준 지식을 추상화하여 수동적 지식에 각인시킨다고 했다.
(6)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 - 알버트의 제자. 이탈리아 출생. 베네딕트수도회의 모체인 몬테카시노수도원에서 교육을 받고 1239년 나폴리대학교에서 수학한 후 도미니크수도회에 입단했다가 가족들이 반대하며 그를 2년간 가택에 감금했다. 겨우 탈출한 그는 파리의 알버트 산하에서 학문을 연마하고 1254년 파리대를 시작으로 교수생활을 하며 저술에 몰두하다가 49세로 생애를 마감했다. - 그가 남긴 작품들은 주로 철학서와 신학서이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의 주석서를 많이 썼다. 그러나 대표적인 두 가지 작품은 <이교도대전>과 <신학대전>이다. 전자는 모슬렘을 포함한 자연론적 세계관을 가진 비기독교인의 존재와 본성 등을 논하고 있고, 후자는 학문을 연구하는 초보자들을 위해 쓴 체계적이고 요약적인 해설서이다. 1권은 하나님과 창조, 인간의 본성과 지적 생명에 대해 논한다. 2권은 인간의 윤리적 생활을 고찰하고 3권은 그리스도와 성례를 다룬다. - 토마스의 사상적 근본은 아리스토텔레스(-384~-322)의 철학이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기독교신앙을 과감하게 종합했다. 어거스틴의 신학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구조 안에서 해석했다. 자신의 학문 안에 종교와 철학의 요소들을 다 포함시켰다 - 그는 하나님이 초자연적 진리들을 직접 계시했을 뿐만 아니라 신의 존재와 같은 철학적으로 논증될 수 있는 진리들도 계시했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자연적인 것들을 가지고 인간의 지성을 초월하는 초자연적인 진리들을 설명하는 '유비(Analogy)'가 탄생되었다. - 토마스주의의 정수는 신앙과 이성 사이의 관계에 대한 가르침과 신 존재증명 방법이다. 그는 이성으로 획득할 수 있는 진리와 이성을 넘어서는 진리를 구별했다. 철학은 이성으로 획득할 수 있는 진리를 다루지만 신학은 계시된 진리를 다루는 동시에 철학에 속하는 진리도 다룬다는 것이다. 반면에 이성은 계시된 진리를 다루는 신학활동에도 필수적이다. 이성은 계시된 진리를 증명할 수 있다. 신앙은 계시된 진리에 의해 확실성을 부여받는다. 그러므로 신앙은 이성을 넘어선다고 했다. - 그의 사상은 현재도 로마카톨릭교회의 주된 신학으로 자리잡고 있다. 사후에 카톨릭은 그에게 '천사박사' '전 교회의 박사'라는 칭호를 붙였다. 그러나 마르틴 루터는 토마스의 신학을 '영광의 신학'이라며 비판했다. 개혁가들은 이성중심의 토마스주의를 허물고 성경적 기독교를 회복코자 했다. 20세기의 칼 바르트는 토마스의 자연신학을 거부하고 토마스의 하나님은 인간의 인성에 의해 만들어진 피조물이며 결국 우상이라고 비판했다. 결론적으로 그가 제시한 신존재증명 방식은 신에 대한 이성적 물음에 답하려는 것이지 인간을 신앙으로 인도하려는 목적을 지닌 것이 아니라고 평가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그는 복음의 단순성을 간과했고 교회에 사변성을 심어 세속철학이 교회 안으로 침투되는 길을 열고 말았다. 전문가들이 아니면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와 술어, 문체들로 예수를 어렵게 만들었다.
3. 후기 스콜라신학
(1) 배경 및 포인트 -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앙과 이성 사이에 연계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이성의 합리적인 사용으로 하나님의 존재와 신적 진리를 추론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후기의 신학자들은 이 두 영역사이의 연계성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즉, 하나님의 존재, 신의 전지성, 영혼의 불멸성 등은 이성으로 증명되기에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신앙과 이성, 신학과 철학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괴리가 존재한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스콜라주의는 급속하게 무너졌다. - 도미니크학파와 프랜시스학파는 14세기에 들어서면서 서로 대립되었다. 전자는 사변적이고 이론적인 학문에 관심을 가졌고 후자는 정통적이며 실제적인 학문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프랜시스학파는 신학은 단순해야 하며 실천적이고 적용 가능해야 한다고 했다. 특히 던스 스코투스, 윌리엄 오캄 등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론을 정면으로 반박하며 이성의 제한성과 이성을 통한 신적 지식의 획득은 불가능하다고 천명했다. - 스콜라주의의 붕괴는 기독교의 계시의존적사색의 중요성을 일깨워 교회개혁운동을 자극했다. 사변적인 철학운동을 벗어나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호소했다. 교황보다 성경이 더 높은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2) 대학의 등장 - 중세사회가 남긴 유산 중 가장 위대한 업적은 대학의 설립이다. 이전의 학문연구는 사설학원이나 교회당부속학교에서가 고작이었다. 이곳은 학교를 태동시키는 역할을 했고 학자들의 연구가 진행되었다. 파리대학, 볼로냐대학에 이어 1224년에 나폴리대, 1229년에 뚤르즈대, 1244년에 바티칸대, 이후 옥스포드와 스투디움대가가 설립되었다. 13세기중엽엔 파리대가 약 7천여 명, 옥스포드대가 약 2천 명을 수용했다. - 점차 수가 늘어가자 학교조합이 생기고 15세기부터 조합을 University라 부르게 되었으며 교수는 Master, Docter, Professor로 불리웠다. 대학공부를 시작하는 연령은 대개 12세에서 15세였으며 남자에게만 허락되었다. 입학자는 라틴어문법을 익혀야 했고 4년동안 수사학의 고급과정을 이수하고 논리학을 완전히 습득한 후 졸업시험에 통과하면 문학사 학위(B.A)를 받았고 이후 법학, 의학, 신학의 상급분야로 진학했다. 35세 이후부터 박사학위를 받았다. - 상당수 대학들은 신학교육을 위해 설립되었으나 철학부와 신학부가 점차 나누어지면서 서로 독립하고자 했다. 수도사들이 신학교수를 역임했지만 도미니크와 프랜시스수도회의 두 학파 간의 치열한 다툼과 상호 공격이 전개되었다. 중세교회의 개혁자인 존 위클리프와 후기 스콜라주의자인 스코투스와 오캄은 옥스포드대에서 공부했다. - 대학은 지식인들의 비평적 사고를 고무시키고 매사를 합리적으로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성경을 읽을 수 있는 눈을 주었고 대중의 미신과 교회의 횡포에 항거할 수 있는 용기를 심어주었다.
(3) 던스 스코투스(John Duns Scotus, 1265-1308) - 프랜시스회 소속의 영국인 수도사로 토마스주의의 붕괴시키는 단서를 제공했다. 그는 미묘한 차이를 가진 신학 주제들을 세밀히 구분하고 다룬 학자로 알려져 '미묘한 박사'로 불리었다. - 그는 어거스틴과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동시에 수용했다. 그는 신앙과 이성, 신학과 철학 사이에 괴리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성적 논증의 노력을 비판했다. 인간의 마음이 물질적인 대상을 넘어 설 수 없음으로 감각적인 것들을 가지고 유추하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 있다고 한 토마스주의를 거부했다. 그는 존재가 아닌 것은 알려질 수 없으며 존재하는 것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인식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또 필연적인 존재(하나님)를 우연적인 존재(피조물)를 가지고 증명하려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고 했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올바르게 하면 하나님의 존재를 긍정할 수밖에 없다는 '후천적 논증"(posteriori)을 주장했다. 또 그는 마리아의 무흠잉태설을 주장했다. 하나님은 마리아를 가장 완전하게 지킴으로 동정녀는 원죄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했다. 그의 이 이론은 1854년 카톨릭교회의 공식교리로 인정되었다.
(4) 윌리엄 오캄(William Occam, 1285-1347) - 영국 써리 지방 오캄 출신. 프랜시스수도회 소속으로 옥스퍼드에서 수학하고 그곳에서 교수생활을 하며 신학자, 변증가로서 활약했다. - 그에 따르면 이성적 학문과 계시는 종합될 수 없다. 신의 존재와 성질은 증명될 수 없고 다만 유비로서 개연성을 추리할 뿐이라며 유명론을 부활시켰다. 신은 이성으로 추리하여 증명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신학은 결코 과학 즉 학문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스승 스코투스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절대 능력과 질서를 통한 능력 곧 제한적 능력을 구분하면서 인간은 단지 하나님께서 자유의지로 정하신 질서를 통한 권능의 범위 안에서만 논할 수 있을 뿐이라고 했다. 이런 그의 주장은 어떤 교리가 합리적인 것이기 때문에 옳다고 한 스콜라주의의 주장을 무력화시켰다. 그는 하나님께서는 항상 선을 행하신다고 말하기보다는 차라리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그 무엇을 막론하고 다 선하다고 말해야 한다. 무엇이 선인가를 결정하시는 분은 하나님이기 때문이라고 설파했다. - 그러나 오캄은 하나님의 절대능력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서 하나님은 인간들을 죄인이 아니라고 선포하실 수 있으며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죄의 값을 치르게 하실 수도 있었다고 주장해 신학적으로 물의를 일으켰다. 그의 영향으로 후학들은 하나님께서 마음만 먹으며 당나귀 속에서도 성육신할 수도 있다는 해괴한 주장까지 나오게 되었다.
4. 스콜라주의에 대한 종합적 평가
(1) 비평적(critical)이란 일반적으로 어떤 사물, 사상, 사건을 정확하게 분석하여 올바른 이해와 인지, 판단으로 좋은 결정을 하기 위한 사고의 활동을 말한다. 비평적 사고 활동은 논리를 기초로 하여 비평적인 대상에 대한 신중하고도 사려 깊은 분석과 연구의 총체적 두뇌활동이다. 그러므로 비평은 비난이나 비판과는 다른 목적의 사고활동이다. 전자들이 흠집을 잡고 쓰러뜨리기 위한 목적을 가지나 비평은 잘못된 부분을 짚어내어 개선하려는 목적을 가진다. (2) 교회의 개혁은 비평적 사고를 기초로 이루어진다. 중세의 교회는 비평적인 눈과 사고를 가지지 못함으로 교리와 관습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시행했다. 여기에 대학은 중세인들에게 비평적인 눈을 제공했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비평적인 눈을 가지고 기독교와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종합하려고 했다. 이후 스코투스와 오캄도 비평적인 사고를 가지고 신학과 철학, 계시와 이성 사이의 괴리를 발견했다. 16세기에 들어 종교개혁자들도 비평적인 안목을 가지고 교회의 부정과 부패를 발견했으며 성경에서 교회의 개혁원리들을 찾아내었다. (3) 스콜라주의적 사고방식은 합리적인 것이라면 모두 옳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합리적이라고 해서 모두 옳은 것은 아니다. 논리적으로 옳다고 해서 모두 옳은 것은 아니다. 어떤 논증이 참되고 타당성을 가지는 것은 그 논증을 구성하고 있는 주장과 근거의 참과 거짓과는 관계가 없다. 논리적으로 맞는다고 해서 그것이 참이 될 수는 없다. 명백한 거짓도 논리적 타당성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이론이 그렇고 죄파들의 이율배반적이며 모순된 주장도 그런 맥락이다. 논리라는 틀에 얽매이게 되면 형식의 노예가 되기 쉽다. 내용물의 진실과 진리보다 자신의 주장을 논리화하는 것을 더 중요시하게 된다. 이런 곳에 덕과 겸손, 양보와 희생의 미덕이 보일 리가 없다. 그것은 단지 패배자의 실패의 넋두리라고 우긴다. 자신의 논리가 먹혀들지 않으면 자신이 수난 받는 선지자인양 행세한다. (4) 목회는 비평적 활동을 필요로 한다. 교회의 현실을 논하고 교인들이 토로하는 불만을 듣고 해결책을 찾기 위해 관련된 정보와 선이해가 있어야 하며 비평적 사고능력이 있어야 한다. 나아가 찾아낸 정보를 분석하고 비평과 재창조하는 능력을 겸비해야 한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지금 현대판 스콜라주의 목회자들로 인해 교회가 타락하고 분열되며 항상 불화에 휩싸이곤 한다. 즉 자기논리에 빠진 목회자들이 자기의 교회를 세우고 자기의 목회를 하며 자기의 성공신화를 쓰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면서도 예의와 염치를 갖추고 더 나은 결과를 얻기 위한 끊임없는 비평적 사고활동을 뒤로 하고 몰인격적인 신비주의와 자기 신학적 논리로 무장한 채 교회의 진정성과 순결성, 거룩성, 영원성을 훼손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그래서 개혁은 항상 우리 앞에 하나의 도전 과제로 남아 있는 것이다.
제6장. 교황권의 역사와 쇠락
A. 교황권의 성장
1. 로마교회
-로마교회는 사도 베드로와 바울의 무덤을 지키며 교회의 중심이 되었고, 콘스탄틴황제는 그 사실을 높이 평가해 성 베드로 성당과 성 바울 성당을 바티칸 언덕에 건축했다. 또 그는 밀티아데스 교황에게 도나투스파를 판결토록 힘을 실어주었다. 이후 로마의 주교에겐 '최고의 사제'라는 칭호가 주어졌다.
-율리우스 교황(주후337-352)은 동방교회로부터 아타나시우스와 마르켈루스를 폐위해 달라는 요청을 받음으로 그 지위를 인정받았다. 그러나 366년에 리베리우스 교황이 사망한 후 우루시누스가 로마주교로 선출되었는데 다수파인 다마수스파가 소수파인 우루시누스를 습격하여 3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다마수스파가 승리하고 다마수스(주후366-384)가 교황에 올랐다. 이후 교황들은 로마교회의 우위를 지키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그의 계승자인 시리키우스 교황(주후384-399)은 밀라노의 암브로시우스보다 영향력은 없었으나 유럽 전역에 강제적인 치리권을 행사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5세기 들어 이노센트 1세(402-417)에 이어 레오1세(440-461) 부터는 교황이 로마기독교국가의 실질적인 수장이 되었다. 레오1세는 예수가 영원한 반석인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약속했으므로 로마의 주교가 베드로의 권위를 계승했다고 하는 교황제도의 이론적 기틀을 마련했다. 이후 지금까지 265명의 교회군주들이 베드로왕국을 계승하면서 로마카톨릭주의를 실천하고 있다.
2. 프랑크족의 성장과 교회의 관계
-5세기 이후 야만족의 침입으로 드디어 서로마는 멸망한다. 476년 고트족의 오토아케르는 서로마의 로물루스황제를 폐위시킨다. 이 때 서부독일지역에서 프랑크족이 세력을 형성하고 클로비스왕(481-511)때 서유럽을 장악할만큼 성장한다. 그런데 그는 490년에 크리스찬인 클로틸드와 결혼하고 6년 뒤에는 3천 명의 병사와 함께 세례를 받고 니케아신조를 수용한다.
-이후 6세기엔 중부 유럽 대부분에 프랑크왕국이 세워지고 왕국과 교회는 급속히 가까워져 좋은 관계를 계속 유지한다. 프랑크왕은 교황의 신임을 업고 통치권을 안정화시켰고, 교황은 가장 위협적인 롬바르도족의 침입을 프랑크왕국의 힘을 빌려 막을 수가 있었다.
-7세기 들어 포팽왕(751-768)은 롬바르도족을 섬멸한다. 그리고 샤를마뉴 대제(769-814)는 대부분의 서방지역을 장악하고 800년 12월23일에 로마로 진군하여 교황 레오3세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아 황제에 임명되고 나라 이름을 신성로마제국이라고 칭했으며 교회와 왕국을 동시에 치리하게 되었다. 그는 교회 주교들을 직접 임명하고 모든 수도원에 학교를 세웠으며 수도사들의 활동을 지원했다.
-이제 교황들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의 눈치를 보아야 했다. 1세기동안 44명의 교황이 임명되었지만 비합법적인 교황들이 함께 세워지는 과정 속에서 치열한 싸움을 전개했다. 891년 포르모스 교황을 시작으로 896년 스테파노 교황은 전임자의 시체를 참시했고(시체공회), 교황청 역사에 있어서 가장 추문으로 얼룩진 시기는 세르기우스3세(904-911)부터 요한네스 13세(965-972)에 이르기까지의 '도색정치'(pornocracy, 창녀정치)의 시기이다. 창녀인 마로치아가 3명의 교황을 임명하고 배후 조종했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955년에는 교황 요한 12세가 '악마를 위해 축배를 들자'고 할 정도였다. 이 기간 동안 살해된 교황이 9명, 해임 9명, 추방 7명의 진기록을 남겼다.
3. 교황청과 오토제국
-9세기 들어 교황청은 지역군주들과 로마귀족들의 노리개가 되었다. 영주들은 교회의 재산을 사용하여 권력 신장을 꾀하였고 추종자들과 일가친척들에게 성직록으로 하사했다. 성직자들의 도덕적 추문과 규율해이현상이 극에 달했다. 이러한 때 노르만족과 사라센족의 로마침입은 혼란을 더욱 가중시켰다.
-10세기 들어 개혁의 바람이 불었고 그 중심에는 클루니수도원이 있었다. 910년 이퀴텐의 공작 윌리엄은 베네딕트의 설립취지를 살리고 새로운 신앙운동을 일으켰다. 10세기 후반에는 클루니대수도원장의 권위가 모든 수도원을 압도했고, 11세기 들어서는 공식적인 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영국도 이에 영향을 받아 둔스탄 등을 중심으로 교회의 개혁을 일으켰다.
-그러나 유럽에서 벌어진 회복운동에서 가장 강력한 매체역할을 한 것은 독일의 섹슨족의 왕들, 특히 사냥꾼이라 불린 하인리히 1세(919-936)부터였다. 당시 독일은 헝가리족의 위협에 직면해 있었는데 성직자들과 지방공국의 지도자들이 하인리히를 왕으로 선출했고, 그는 933년 헝가리와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의 후임으로 독일제국의 기초를 놓은 오토1세(936-973)가 즉위한 것이다.
-오토가 직면한 것은 왕권 신장과 왕국 강화였다. 그는 자신을 하나님께로부터 기독교백성을 보호하고 양육할 책임을 받은 신정왕으로 보았다. 그는 독일주교들과 대수도원들의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확보하고 서임권(성직임명권)을 주장했다. 그리고 951년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교황 아가페투스2세에게 자신을 황제로 기름부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교황은 이를 거절했다. 오토는 야심을 이루기 위해 기다리다가 교황 요한네스12세로부터 황제로 기름부음을 받았다. 그러나 오토는 백성들로 하여금 로마교회가 아닌 자신에게 충성 서약을 하도록 강요했다. 교황은 오토의 정적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요토는 로마에 교회회의를 소집하고 963년 교황을 폐위시켰다. 대신 평신도인 레오8세를 앉혔다. 그러나 오토가 로마를 떠나자마자 시민들은 레오를 몰아내고 요한네스를 다시 복직시켰다. 그리고 964년 교황이 죽자 황제의 동의없이 베네딕트5세를 교황에 선출했다. 오토는 즉시 로마로 돌아와 베네딕트를 독일로 추방하고 레오8세를 복직시켰으며 그의 후임인 요한네스13세도 직접 임명했다
-그러나 그의 가문은 그의 아들 오토2세(973-983)때부터 기울기 시작했다. 오토2세는 이탈리아에서 사라센족과 전투를 벌이다 죽었다. 이어 오토3세는 3살에 왕이 되어 8년을 다스렸으나 로마귀족들에게 교황청을 빼앗겼다. 이어 하인리히 2세(1002-1024)와 콘라드2세(1024-1039)가 독일 다스렸고 베네딕트 9세는 이 때 교황이 되었다.
-오토제국은 카롤링왕조가 가졌던 기독교국가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역할을 담당했으나 역사는 그들이 진정한 로마제국을 이끌었다고 평가하지 않는다. 그저 독일제국의 교회에 대한 지배와 간섭의 시대였다는 결론을 내릴 뿐이다.
4. 교황청의 개혁
-11세기가 저물어 갈 무렵, 개혁의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다. 클루니수도회의 이상과 철학이 보급되었고 영국에서는 둔스탄의 개혁이 빛을 발하였으며 로렌과 이탈리아도 뒤를 이었다. 유럽 전역에 규율, 단순한 생활, 사제직에 온전히 전념하려는 정신에 대한 자각이 일어났다. 부패하고 세속적 관심사들에 빠져 있던 성직자들의 실태가 비판을 받았다. 특히 제도적인 악이었던 성직매매와 성직자의 결혼 또는 축첩관습은 개혁의 일차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의 바람에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곳은 교황청이었다. 당시 교황 베네딕트8세(1012-1024)와 요한네스19세(1024-1032)는 황제들의 비위를 맞추며 자기 가문 지키기에 급급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3세(1039-1056)는 재위 기간에 교회 개혁작업을 주도했다. 그는 독일인 주교출신의 레오9세(1049-1054)를 교황으로 임명했다.
-레오9세는 성직자들의 기율을 바로잡고 정화하며 교황의 권위를 강화해 나갔다. 그리고 로마와 이탈리아의 파발들로부터 독립을 꾀했다. 그는 교회법을 제정하여 로마교회의 수위권을 내세웠다. 자신의 지지세력을 확보키 위해 비록 외국교회출신이라도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교황청의 핵심그룹인 추기경(cardinal)으로 임명했다. 그가 주도한 새로운 교황청은 성직매매라는 이단을 최고의 적으로 간주했다. 1049년 라테란회의에서 그는 성직자들에게 성직임명, 직위제정, 교회당축성 등을 금지시켰다. 이후 마인츠회의에서 성직자의 결혼을 정죄했다. 그런데 동방교회 즉 쿤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인 케룰라리우스(1043-1048)가 로마교회와의 관계에 있어서 동등성과 독립성을 주장함으로서 분쟁이 발생했다. 교황 레오는 두 교회의 통일을 위한 대화를 목적으로 훔베르투스와 프리드리히, 페트루스를 사절로 보냈지만 케룰라리우스가 이를 거부하여 결국 1054년 7월 16일, 교황 레오9세가 죽은 후 사절단은 콘스탄티노플을 떠나가기 전에 동방교회의 수장에게 파문장을 전달함으로서 공식적인 분열이 시작되었다.
-레오 9세의 죽음 이후 빅토르 2세(1055-1057)가 교황에 올랐고, 1056년에 하인리히3세가 갑자기 죽고 후임으로 6살 난 아들인 하인리히 4세가 즉위했다. 어머니인 아그네스가 섭정을 맡았다. 빅토르에 이어 북부 이탈리아의 실질적인 지배자였던 고드프리의 형제인 스테파누스9세(1057-1058)가 교황이 되었고, 이 때 사절단이었던 훔베르투스가 개혁에 앞장섰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왕은 세속사에만 권한이 미치는 단순한 평신도일 뿐이라고 주장하며 왕의 성직자 임명은 월권행위라고 공박했다. 이로 인해 그동안 왕에 의해 임명받았던 주교들은 임명이 원래 잘못되었기 때문에 주교로 인정받을 수 없다는 평신도서임권 문제로 비화되었다. 그러나 로마귀족들은 1058년 스테파누스 교황을 앞세우며 개혁작업에 반기를 들었고, 힐데브란트와 개혁파 추기경들은 로마시민들과 고드프리의 지원에 힘입어 그들을 몰아내고 니콜라스2세(1058-1061)를 교황으로 옹립했다. 이후 1059년 로마교회회의에서 교황선출에 대한 법령을 통과시켰다. 이후 교황은 추기경들에 의해 선출되는 역사와 전통으로 이어졌다., 이후 힐데브란트는 대중들에 의해 거의 떠밀리다시피 하여 교황에 선출되어 그레고리 7세가 되었다.
-힐데브란트가 죽자 추기경들은 모테 카시노의 대수도원장을 빅토르 3세라는 이름의 교황으로 선출했다. 이어 힐데브란트의 제자인 우르바노 2세(1088-1099)가 즉위하여 십자군운동을 이끌었다. 이어 파스칼리스 2세(1099-1118)는 하인리히5세와 협상하여 세속적 서임과 영적인 서임을 구분했다. 즉, 교회는 영적인 권위를 왕은 세속적인 권위를 갖는다고 주장했다. 이 협약은 1122년 보름스정교협약에서 하인리히5세와 교황 칼릭스투스2세(1119-1124)사이에 정식으로 체택되었다.
5. 교황권의 쇠락
-그러나 교황권과 제국 사이의 경쟁은 보름스협약으로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공방을 주고 받았다. 특히 프랑스와 잉글랜드처럼 민족국가들이 등장하면서 상황은 악화되어 갔다. 십자군전쟁 이후 전투적인 기독교를 상징하던 성전기사단이 해체되고 청빈을 강조하던 프란체스코회가 정죄되었다. 뿐만 아니라 토마스 아퀴나스 이후 신학을 주도하던 오캄의 윌리엄을 비롯해 학자들의 사상이 단죄를 받고서 교회 안에서 침묵을 강요받았다.
-농촌인구는 줄고 도시인구는 폭발했다. 스콜라철학의 영향을 받은 도시민들은 내세보다 현세에 집중되었다. 교육을 받은 일부 평신도들이 빈부격차와 불안정한 상태에 불만을 품고 조직적인 운동을 벌였지만 그들을 통제하지 못했다.
-교황권은 점점 약화되어 갔고 반면에 세속군주들은 영향력을 확대했다. 교회는 대성당과 비대한 조직을 유지하기에 급급했다. 영성이나 신앙의 성장보다 돈벌이에 매달렸다. 교회는 성물을 보관하는 장소가 되었다.
-1294년 추기경들은 거룩한 은둔자로 유명한 첼레스티누스5세를 교황으로 선출했다. 청빈과 거룩함을 강조하는 프란체스코 수도회 출신답게 그는 맨발로 나귀를 탄 채 교황청에 입성했다. 그러나 5개월 만에 그는 수도사의 삶과 화려한 궁중 정치사이의 괴리를 극복하지 못하고 추기경들을 소집하고 스스로 법복을 벗었다. 추기경들은 거룩함만으로는 교황직을 훌륭히 수행할 수 없다는 교훈을 깨닫고 이번엔 냉혹한 정치가인 보니파시우스8세(1295-1303)를 교황으로 선출했다. 그는 로마주교가 사방세계 전부를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인물이었다. 1302년 그는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라는 교서를 발표하고 모든 이들이 교황의 권위에 복종해야 한다고 공표했다. 이 교서는 각국에 심각한 갈등을 불러 일으켰다. 1303년엔 성직자의 세금징수문제로 프랑스의 필리프 왕이 교황과 대립했고, 이에 위협을 느낀 교황은 이탈리아 아나니 성으로 피신했다. 그러자 필리프의 수하들이 아나니 성으로 쳐들어가 교황의 따귀를 때렸다. 이에 충격을 받은 교황이 한 달 만에 세상을 떳다.
-추기경들은 이제 프랑스의 국왕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그들은 국왕의 친구인 클레멘스5세(1305-1314)를 교황으로 선출했지만 국왕의 눈치를 보느라 로마로 들어가지 못하고 아비뇽에 거처를 정했다. 얼마 뒤 신임 교황은 무화과를 먹고 독살되었고 이후 6명의 프랑스 출신의 교황들이 자리를 이었고 그들은 아비뇽에서 국왕이 주는 호화로운 생활을 했다. 시민들은 분노했다. 결국 그레고리우스11세(1371-1378)가 1376년 72년 만에 로마로 돌아오게 되었다.
-하나님은 이런 교황청의 부패와 타락에 대해 심판을 가했다. 1340년 대에 들자 페스트가 유럽전역을 휩쓸었다. 이탈리아를 시작으로 1347년엔 도망쳐 나온 이탈리아인들에 의해 전염되어 콘스탄티노플의 시민들이 떼죽음을 당했고(88%), 프랑스를 거쳐 1349년엔 도버해협을 건너 영국에 상륙하여 인구의 절반이 목숨을 잃었다. 1350년에는 북유럽을 거쳐 아이슬란드와 러시아로 진군했다. 흑사병으로 인해 유럽인구는 2/3가 몰살당했다. 14세기의 작가 보카치오는 <데카메론>에서 1348년에 흑사병이 플로렌스에 닥쳤을 때의 끔찍한 상황을 생생하게 소개했다. 사람들은 희생자들의 두 볼에 불그스레한 반점들을 하나님의 표시라고 믿었다. 유대인들이 흑사병과 관련이 있다는 소문이 돌자 사람들은 닥치는대로 유대인들을 학살했다. 흑사병은 교회의 절대권력을 붕괴시켰다. 사람들은 이 병이 교황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시대상황에서 잉글랜드에서 위클리프가 주도하는 평신도중심의 개혁운동이 싹트기 시작했다. 교회개혁의 시동이 걸린 것이다.
제7장. 중세교회개혁운동
A. 시대적 배경
1. 중세 후기의 서방교회와 수도원은 축적된 부와 권력 때문에 타락하여 영적인 능력을 상실하였다. 이에 교황청의 아비뇽시대를 겪은 후 국가주의가 확산되면서 교황의 권위가 출가했다. 여러 명의 교황이 등장하고 이를 해결키 위해 공의회운동(Counciliar Movement)이 펼쳐졌다. 전체교회를 대표하는 공의회가 교황을 결정하고 교회의 분열을 치유하고 이단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이 또한 실패했다. 개혁을 외치던 사람들도 서서히 부정부패로 얼룩지고 교회는 다시 만신창이가 되었다.
2. 이때에 부패한 교회를 개혁하고자 의분의 사람들이 일어났다. 위클리프, 롤라즈, 후스(후스파), 타볼파, 사보나롤라 등이 개혁운동의 불씨를 지폈다. 그들은 하나님을 제도보다 더 사랑하며 하나님의 말씀이 교황보다 더 높은 권위를 가졌다고 확신했다.
B. 개혁의 선구자들
1. 존 위클리프(J. Wyclif 1330-1384)
-영국 출생. 옥스퍼드에서 박사학위를 받음. 1354년에 메르톤대학, 1360-1361년에는 발리올대학, 1365-1367년에는 캔터베리홀대학에서 교수로 활약했다. 1381년, 에드워드3세에 이어 미성년자의 나이에 왕위에 오른 존은 위클리프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1376-1378년까지 그를 왕실의 외교가로 초빙했다.
-그는 교황과 교회에 대해 증대되는 대중의 혐오감을 의식하면서 교회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표시했다. 그는 누가 예정을 받은 사람인지 분별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신앙생활에서 맺어지는 열매를 보고 짐작할 수 있다고 하면서 선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교황은 예정의 은총 아래 있는 자가 아니며 따라서 구원받을 수 없다는 폭탄선언을 했다. 나아가 그는 부도덕한 성직자들의 재산을 정부가 몰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무렵 교황청은 프랑스왕국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교회세 징수와 교황의 세속권력의 문제로 교황청과 갈등을 보이고 있던 영국의 왕실은 즉각 위클리프의 주장을 환영했지만 그것이 자기들에게도 유리하지 않게 전개되자 곧 지지를 철회했다. 그의 이 주장은 뒤에 교황 그레고리 11세에 의해 정죄 당했다.
-교회의 타락을 혐오한 그는 성경의 권위가 교회의 전통이나 권위자들보다 수위에 있다고 선포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주신 것이지 부패한 성직자들이 독점하도록 준 것이 아니라고 했다. 성경이 교황의 독점물이며 교회만이 성경을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다는 기존의 관념을 거부했다. 교회는 모든 택정한 사람들로 구성된 그리스도의 몸이므로 성경은 그들의 손에 넘어가야 하며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강조했고 성경번역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성경만이 기독교 교리의 유일한 표준이며 교황제도는 성경적 근거가 없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의 철학의 핵심은 어거스틴의 실재주의(realism)를 반영한 것으로 개인은 우주적인 계급(hierarchy)을 통해 왔으며 본질적으로 불변하고 파괴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회의주의에 대해선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는 어거스틴의 가르침에 따라 교회를 눈에 보이는 유형적인 계급이 아니라 영원하고 불가시적이며 이상적인 실재(ideal reality) 즉, 참교회는 택정한 사람들로 이루어지는 무형의 몸으로 여겼다.
-특히 <하나님의 주권에 관하여>와 <세속주권에 대하여>라는 책에서 그는 하나님만이 다른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는 정당성과 필연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주권은 모든 주권의 근거가 된다고 주장했다. 또 모든 합법적 통치권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으므로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 사용되어야 하며, 지배자가 아니라 피지배자의 이익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고 했으며, 이를 위반한 통치는 권한을 부여한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며 더욱이 교회권력이 세속권력까지 확장하는 것은 비합법적이라고 힐난했다.
-그의 성만찬교리는 격렬한 논쟁의 중심에 섰다. 당시 교회는 1215년 제4차 레이란트공회를 통해 화체설(성만찬에서 물질이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살과 피로 변한다는 설)을 공식 교리로 선언한 것에 대해 위클리프는 이 교리가 미신을 조장하고, 성육신의 교리를 부정하며 합리적이지 않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본질과 연합했을 때 신성의 임재가 인성을 파괴하지 않은 것 같이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떡 속에 임재하지만 떡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는 신비적인 형태로 성찬에 임재하시므로 떡은 여전히 떡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수도사들과 귀족들은 그가 과격하다고 하여 등을 돌렸고 1381년엔 대학당국이 그의 성만찬론을 이단사상으로 규정하였다. 이어 1382년의 블렉프레아 공회에서도 정죄했다.
-1381년에 은퇴하여 루터워스에서 조용히 저술에 몰두했다. 그는 마지막 10년 동안 어거스틴에 견줄만한 학문적 역작들을 대량으로 쏟아내었다. 1384년 뇌출혈로 사망했고 1415년 콘스탄스 공의회는 그를 이단자로 정죄했으며 교회 부속묘지에 안장되어 있던 그의 유골을 파내어 화형에 처했고 그 재를 스위프트 강에 뿌렸다. 그의 사상은 영국에서는 환영받지 못했지만 체코슬라바키아의 개혁신앙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16세기 종교개혁가들에게 중심적 지침이 되었다.
2. 롤라즈운동
-위클리프는 가난한 설교자들이라고 불리워진 롤라즈 전도자들을 여러 마을로 파송했다. 이 무리는 그의 가르침에 따라 하나님의 예정과 성경을 강조했다. 그들은 성경은 교황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일반 신자들 모두의 것이며, 성경은 최종적인 권위이며 모든 인간은 그것을 읽고 해석할 권한을 가졌다고 외쳤다. 나아가 성직자들의 세속관직을 겸하는 것을 반대했고, 화체설, 죽은 자들을 위한 예배와 기도, 면죄부판매, 성지순례 등은 모두 거짓된 것이며, 성상의 사용과 성직자들의 독신제도는 신성모독이라고 가르쳤다.
-이 운동은 처음에 귀족층에서 시작되었지만 차츰 서민층으로 파고 들었다. 1413년 존 올드캐슬 경이 롤라즈운동을 기초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처형당했다. 이후 롤라즈운동은 점점 극단적으로 변해갔다. 교회의 명령을 무시하고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였으며, 이단처벌법 개정을 위해 투쟁했다. 그러다 1431년 롤라즈음모사건이 터지고 이들은 교회개혁과 정부전복을 시도했다는 미명아래 추종자 대부분이 사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이 운동은 저변으로 확대되었다. 16세기 초의 영국종교개혁운동의 기초가 되었다. 영국은 헨리8세의 결혼문제와 롤라즈운동 등의 정치적 사회적 변화와 함께 개혁이 시작되고 완성되었다.
3. 얀 후스(Jan Hus, 1372-1415)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샤를4세에게는 앤(Anne, 1366-1394)이라는 명석한 딸이 있었다. 그녀의 오라버니는 체코슬로바키아의 국왕인 웬체슬라스 4세였다. 그녀는 영국의 리차드2세와 정략 결혼해 왕비가 되었다. 그녀는 성경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함께 오빠의 나라, 체코의 보헤미아에서 우수한 학생들을 선발하여 옥스퍼드로 보내 공부를 계속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아니했다. 그들이 고국으로 귀국하면서 위클리프의 책들과 사상을 수입했으며 보헤미아지방은 교회개혁운동의 진원지가 되었다.
-보헤미아의 개혁운동의 기수는 얀 후스였다. 그는 샤를대(프라하대학)를 졸업하고 1390년에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1400년에 사제로 서품되었고 1401년에는 모교의 철학교수로 부임했다. 1402년에는 학교 근처의 베들렘헴 교회에서 매주일 설교를 담당했다. 당시 금서로 알려진 위클리프의 책을 읽고 감명을 받은 후 개혁의 기수가 되었다.
-후스는 먼저 성직자들의 도덕적 타락과 성직매매를 강하게 질타했다. 교회관습의 개혁과 성직자들의 생활개혁을 주창했다. 동료 성직자들은 그의 거친 설교를 싫어했다. 그는 위클리프의 성직자 재산 몰수와 성만찬론을 제외한 예정론과 교회론을 진지하게 수용했다. 그는 위클리프의 책과 영국에서 수입한 신학관련 책들을 번역했고 보헤미아는 들끓기 시작했다. 특히 당시 교회는 평신도들에게 떡만을 분배했는데 포도주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해 이후 포도주를 담는 그릇이 체코 교회개혁의 상징이 되었다. 그이 친구들과 동료들이 그를 적극적으로 도왔고 추기경도 번역의 일을 적극 도왔다.
-당시 프라하대학은 독일인과 체코인 교수로 구성되었는데 독일인 교수들은 위클리프와 후스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았다. 그들은 프라하를 떠나 라이프찌히에 대학을 설립하고 프라하를 이단사상의 온상이라고 매도했다. 이에 체코인들은 격분했다. 반독일정신이 고조되었다. 이때 신임추기경이 프라하에 임명되어 왔고 그는 교황으로부터 칙서를 받아 위클리프의 책을 읽는 것을 금지했다. 성직자들에게는 자기 교구 안에서만 설교하라고 족쇄를 채웠다. 후스를 염두해 둔 조치였다. 1407년에는 교황 인노센트 7세는 후스의 설교사역을 완전히 금지시켰다. 그러나 후스는 명령에 불복종하고 계속 베들레헴교회의 설교를 했고, 이에 1410년 로마교황청은 그를 소환한다고 통보했다. 후스는 불응했고 1411년 교황청은 그를 파문했다. 체코의 국왕과 국민들은 분노하며 후스를 적극 지지했다. 사태가 확산되자 교황 존 23세는 후스를 재차 파문했다. 그리고 국왕에게 압력을 가했고 국왕은 할 수 없이 후스에게 침묵하라고 요청했다. 후스는 강단을 떠나 시골에 은거하며 저술에 전념했다. 이 기간에 그의 <교회,De Ecclesia>가 저술되었다.
-그러나 후스에 대한 압박은 계속되었다. 지기스문트 황제는 후스에게 콘스탄스 공의회에 출석하여 자신을 변호하라고 명령했다. 황제 자신이 직접 회의에 참석할 것이며 신변을 보장한다는 전제를 두었다. 후스는 황제를 믿고 참석을 했지만 교황 존 23세는 황제의 의사와 상관없이 후스를 체포했다. 교황은 그에게 이단사상을 철회하라고 명했다. 그러나 후스는 자신의 무엇이 이단사상인지 증명하라며 오히려 역공했다. 격렬한 언쟁이 오갔고 후스는 죄인으로 간주되어 결국 수도원의 독방에 감금되었다. 황제는 교황에게 항의했다. 그러나 계속 그를 옹호했다가는 이단자로 낙인찍힐까봐 황제도 잠잠했다. 마지막 공의회에서 온몸을 쇠사슬로 묶인 채 자신의 주장을 철회할 것을 강요받았지만 그는 '공의로우신 심판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항소할 것이며 처분은 그의 손에 맡긴다"는 말로 뜻을 굽히지 않았고 드디어 1415년 7월 6일 화형에 처해졌다. 그의 사제복은 찍겨졌으며 머리는 삭발당했고, 그가 저술한 책들과 위클리프의 저서들이 함께 불탔다. 그는 큰 소리로 마지막 기도를 외쳤다. "주 예수여, 나는 바로 당신을 위해 이처럼 잔인한 죽음을 아무 불평 없이 감당합니다. 부디 나의 적들에게 자비를 내려주소서" -그리고 불에 타 죽으면서 시편을 끝가지 암송했다. 사형집행이 끝난 후 집행관들은 타다가 남은 재를 모두 쓸어 담아 호수에 뿌렸다. 이단자의 흔적도 남기지 말라는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1년 뒤, 후스의 동료 학자이자 개혁운동가인 프라하대학의 제롬도 똑같은 방법으로 후스의 뒤를 따랐다.
4. 후스의 추종자들
-보헤미아인들은 분노했다. 452명의 귀족들이 만장일치로 콘스탄스공의회를 거부한다고 발표했다. 그들은 후스의 신념을 따르기로 엄숙히 맹세하며 자격 없는 교황에게는 복종할 필요가 없음을 선언했다. 후스는 체코의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프라하대학은 지금까지 순교자 후스를 높이 기리고 있다.
-이후 후스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세 그룹으로 나뉘어졌다. 후스파는 귀족들과 부르주아계급으로 구성되었고, 온건한 개혁파이자 후스의 적극적인 지지자들의 모임인 타볼파는 농부들과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으며 특히 종말론적인 기대감을 가진 대중들의 지지가 있었다. 호렙파는 타볼파의 유형이면서 온건한 종말관을 지닌 점에서 달랐다.
-이들은 모두 성경의 권위를 수위에 두었다. 그러나 교회개혁에 대한 방법론에서 의견을 달리 했다. 후스파는 성경이 구체적으로 거부하는 것 외의 교회관습을 유지할 수 있다고 보았고, 타볼파는 성경이 구체적으로 지시하지 않은 일체의 교회의 관습들을 거부했다. 예컨대 예배 중에 촛불을 사용하는 문제에 대해 후스파는 성경이 금하지 않기 때문에 사용할 수 있다고 했고 타볼파는 성경이 그것을 행하라고 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금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여기에 타볼파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여자들과 어린이들도 성경을 읽돌고 해야 하며 사제복 착용과 성화와 악기의 사용을 금했다. 값비싼 옷을 입거나 댄스를 하거나 사치스럽게 사는 것을 죄로 여겼다. 그들은 저항운동의 상징이 된 프라하의 4개 헌장을 발표하고 체코의 교회개혁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체코의 국왕이 죽자 독일황제 지기스문트가 합법적인 후계자로 대두되었다. 보헤미아인들은 신임황제에게 4개 헌장을 받아들이고, 예배의 자유보장, 독일인의 공직임명금지 등을 약속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황제와 교황의 연합군은 3차에 걸쳐 보헤미아를 공격했지만 후스의 추종자들이 결사대가 프라하 인근까지 침공한 연합군을 완전히 궤멸시켰다. 이에 교황은 협상을 원했다. 일부가 협상에 응하고 로마교회의 소속으로 돌아갔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존 교회를 떠났다. 그들은 모라비아 지역의 후스추종자들과 연합하여 보헤미아형제연맹을 조직했다. 그리고 15세기 들어 이들은 왈도파와 연합하여 성경적 교회개혁의 이상을 실현했다.
5. 지롤라모 사보나롤라(1452-1498)
-이탈리아의 세례요한이라고 불리우는 교회개혁가. 토마스 아퀴나스의 가르침과 요아킴의 묵시문학을 결합시키고 성경적 기독교의 회복을 주창. 1474년에 도미니크수도회에 입단.
-1482년 하나님의 영감을 받았다고 하며 플로렌스에서 타락한 교회와 성직자들, 시민들을 향해 회개하라고 외침. 그의 강연과 설교가 점점 인기를 얻음. 그는 학문연구가 교회개혁의 추진력을 제공한다고 확신하고 수도사들과 함께 라틴어, 헬라어, 히브리어, 아랍어, 갈대아어를 공부했다. 그는 프랑스의 침공으로부터 플로렌스를 지켜낸 이후 플로랜스를 지도하며 부흥 발전시켰다. 그러나 그이 엄격한 태도는 점점 사람들이 싫어하게 되었고 교황 알렉산더 6세는 1497년에 그를 파문했다. 이에 불복종하자 폭도들이 마가수도원을 급습하여 그를 결박하고 고문으 가했다. 플로랜스정부는 교황으로부터 신병을 인도받아 그를 화형시켰다. 우명한 변증서인 <십자가의 승리>를 남겼다.
6. 윌리엄 틴테일(William Tyndale, 1494-1536) - 위클리프 영어성경의 문제점을 보완키 위해 히브리어와 헬라어성경을 근거로 영어성경 번역에 착수해 1526년 신약을 출판한 뒤 모세5경과 구약을 번역 중 1536년 체포되어 화형.
제8장. 대중운동과 르네상스
A. 근대경건운동
- 14-5세기 들어 독일에서 가장 왕성한 활동을 벌인 신비주의자들은 경건생활과 영적행복을 추구하면서 거룩한 명상을 즐겼다. 사치와 향락을 배격하고 평화와 내적인 기쁨을 얻고자 했다. 기존 교회의 방해와 탄압으로 변두리 지역에 머물며 방외인들이 되었다.
- 특히 게르트 흐로테(Geert de Groote, 1340-1384)는 이러한 풍토에서 근대 경건(Devotio Moderna)이라고 하는 신비주의 대중운동을 주도했다. 그는 1379년에 공동생활규칙서를 만들어 그것에 기초한 공동생활형제단을 설립하고 성결과 경건의 생활에 전념할 것을 가르쳤다. 그는 소명을 받은 직업에 충실하면서 근대경건의 원칙을 따라 살도록 했다. 그의 지도 아래서 많은 사람들이 공동생활을 하면서 학문연구와 명상에 전념했다. 형제단원들은 그리스도의 삶을 모방하면서 엄격한 금욕생활을 했다. 내적 자아의 계발에 힘썼다. 그리고 서로 간에 죄를 고백하며 성결을 이루어 갔다. 이 운동은 네덜란드에서 시작하여 독일과 유럽 전역에 확산되었다. 경건운동에 동참한 사람들은 매일 노동을 하고 성경과 경건서를 읽으며 명상과 기도에 힘썼다. 서로 충고하고 서로의 양심을 점검했다. 공동생활규칙을 지키며 서로 권면하며 겸손을 유지하는 일에 서로 협조했다.
- 근대경건운동은 신학적인 논쟁을 피하고 영적생활에 역점을 둔 탓에 그다지 탁월한 신학자가 배출되지 않았다. 서간문, 수기, 전기 등 경건서들만 남겼다. 그러나 근대경건운동이 낳은 가장 탁월한 작품은 토마스 아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 Imitatio Christi>이다. 그가 남긴 기도문은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 공동생활형제단은 학교를 설립하고 개혁의 강한 열망을 가진 졸업생들을 배출했다. 인문주의 종교개혁자로 불려진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Erasmus)가 여기서 배출되었다.
- 근대경건운동은 교황에게 충성을 했던 프랜시스수도회나 도미니크수도회와는 달리 독자적인 공동체를 구성했으나 종교성과 도덕성만 추구함으로서 로마교회의 틀을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 그러나 신비주의는 로마교회를 통하지 않고도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길이 있다는 신념을 확산시켰다. 이 신념은 사람들의 마음에 교황의 권위와 제도교회의 존재에 대한 의구심을 심었다. 그들은 복음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기존교회의 행습과 거짓교리와 결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신비주의자들은 스콜라신학자들이 지식은 많으나 신앙생활은 바르게 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지식과 신앙이 별개라는 결론을 내렸다.
B. 대중운동
1. 배경
- 부패와 타락, 개혁에 대한 저항으로 로마교회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여러 명의 교황들이 서로 정통성을 주장하며 싸우는 통에 사람들은 손사래를 쳤다. 그럼에도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전파에 열중한 것이 아니라 고대 로마의 영광을 복구하는데 열심을 냈다. 성직자들은 양떼를 돌보는 것이 아니라 세속권력을 확보하는 데 혈안이 되어 전쟁을 일으킬 음모마저 꾸미고 있었다.
- 이에 공의회운동은 교회 안에 만연해 잇는 타락과 무질서를 개혁하고자 했다. 특히 성직궐석제도, 성직중임제도, 성직매매를 바로잡고자 노력했다. 한편 교회가 부패하고 영적 활기를 상실하자 극단적이거나 비정상적인 신앙운동이 생겨났다. 이른바 신비주의운동이 대중적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교회라는 제도의 도움 없이도 직접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다고 하며 복음에 충실하려면 타락한 교회와 결별하라고 대중에게 호소했다. 교회세와 십일조에 시달리던 대중은 이들의 반 성직운동에 적극 가담했다.
- 마침 인쇄술의 발달로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하여 일반 대중에게 보급하는 일이 증대되었다. 여기에 국가주의가 팽창되면서 신대륙의 발견과 더불어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감이 부풀려졌다. 대중은 새로운 교회를 원했으며 선각자들은 올바른 신앙을 세우기 위해 골몰하기 시작했다.
2. 대중운동의 실제
- 중세에는 교항청의 인가를 받지 않은 여러 형태의 수도공동체가 있었다. 이들은 기존의 프랜시스와 도미니크에 입단하고 싶었지만 여러 조건 상 허락을 얻지 못한 사람들로 쇼규모 공동체를 만든 것이다 그들은 빈곤하지만 경건하게 살았다. 남성들을 '베가드'로 여성은 '베긴'이라고 불렀다.
- 채찍질고행자들에 의한 새로운 대중운동도 획기적이었다. 그들은 종말이 임박했음을 강조하면서 자신의 몸을 학대하며 참회에 몰입했다. 인간이 회개하지 않으면 하늘이 벌을 내리고 전염병 같은 재앙을 내린다고 경고했다. 어떤 때는 수천 명이 모여 33일간, 또는 반 나절도안 무릎을 꿇은 채로 찬양을 계속하면서 등에서 피가 날 때까지 자신을 채찍질 했다. 채찍질을 제2의 세례라고 했다.
- 한편 위클리프와 후스의 가르침은 전 유럽에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었다. 개혁신앙은 초기에는 학자들과 귀족들 사이에서 수용되다가 점차 가난하고 억압당하는 사람들, 종말론적 기대감을 가진 사람들에게로 이동했다. 그들은 교황의 권위에 복종할 의무를 느끼지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서 교회는 더 이상 신앙의 요람이 아니었다. 교회는 불신과 억압과 착취의 상징이었다. - 이 때 한스 뱀(Hans Bohm)이 나타났다. 당시 교구 감독은 흉년임에도 고액의 교회세를 요구했다. 독일 부르쯔부르크 출신의 젊은 목동이었던 뱀은 1475년 사순절에 순례자들에게 설교를 했다. 그는 성직자들의 탐욕과 부패를 질타하며 세습과 십일조 납부를 거부하라고 외쳤다. 그의 추종자들이 점점 늘어나 5만여 명에 달했다. 그들은 평등한 사회의 도래를 외치며 시위행진을 벌였다. 그러나 감독은 병사들을 동원해 그들을 체포했고 뱀은 화형을 당했다.
- 뱀의 죽음으로 대중운동은 구심점을 잃었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구전으로 전해지며 서유럽사회의 기존질서를 위협하는 집단정신으로 부상되었다. 부유한 종교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입지와 기득권을 위태롭게 하는 일체의 저항운동을 억압했다. 그러나 억압하면 억압할수록 대중운동은 더 확산되어 갔다.
C. 르네상스-인문주의
1. 배경
- 중세의 암흑기를 지나면서 이탈리아는 경제적으로 번영하고 있었다. 전염병과 전쟁이 안겨준 어려운 사회상황을 극복하면서 교역과 금융업을 발달시켰다. 그것의 수익으로 부유한 생활을 했다. 사람들은 상속받은 부를 유지하기 위해 부지런히 지식과 기술을 연마했다. 여기에 이탈리아인들의 특유의 진취성과 활동성, 창의성이 가미되어 예술과 인문주의에 대한 관심과 노력이 배가되면서 르네상스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특히 상업도시 플로렌스는 유럽전역에 은행지점망을 가진 메디치 가문의 후원아래서 가장 부강한 도시국가로 발전했다. 지성인들과 예술인들은 메디치 가문의 재정 후원을 받아 다방면에서 그들의 창의성을 발휘했다.
2. 발전과정
-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주의자들은 중세기를 암흑시대라고 불렀다. 중세사회의 가장 큰 오류를 무지라고 파악했다. 그들은 하나님, 우주, 인간, 사회에 대한 인문적 사색을 예술과 문화 활동으로 전환시켰다. 망각하고 있던 고대문명의 재생을 위해 전력을 다했다. 문학, 예술, 철학, 신학 등 각 분야에 걸쳐 인문주의가 영향을 끼쳤다.
- 이탈리아인들은 열심히 고전작품을 필사했고 키케로의 양식을 모방한 문학작품을 생산했다. 또 1453년 마지막 서로마제국(비잔틴제국)이 투르크인들게 멸망하면서 콘스탄티노플로부터 피신한 헬라 작가들이 막대한 분량의 헬라 고전 작품들을 가지고 왔는데 이것이 기폭제가 되어 고전작품에 대한 관심의 열기가 고조되어 독일과 프랑스 등지로 보급되기 시작했다.
- 인문주의는 14세기와 15세기에 이탈리아에서 서유럽전체로 확산되었다. 처음에 이탈리아에서 발흥되었지만 15세기 말부터 메디치가의 경제가 쇠퇴하자 중심은 유럽의 다른 나라로 이동하였다.
3. 특징들
- 플로렌스의 인문주의는 특히 단테에 의해 흥기되었다. 그는 그리스-로마문화의 영감을 받아 르네상스문학을 이끌었다. 르네상스는 특히 건축과 조각, 미술 분야에서 두드러진 발전을 보였다. 예술가들은 기독교예술품 뿐만 아니라 고대 예술품에서도 영감을 받았다. 이교예술에서 고전미를 재발견하고 그것을 작품에 응용하는 것이 유행하였다. 부가 축적되면서 사람들은 새로운 이상을 꿈꾸었고 세상의 아름다움을 즐겼다. 교양을 쌓으며 인격의 완성을 도모했다. 시인, 작가, 철학가들은 로마와 그리스의 고전을 선호하고 연구했다. 예술가들은 귀족들과 부르조아들의 후원을 받아 아름답고 화려한 예술품을 만드느라 혈안이 되었다.
- 예술품을 만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목적이 아니라 인간의 위대함을 나타내기 위한 목적이었다. 미켈란젤로(1476-1564)가 그린 아담은 중세기 작품에 등장하는 창백한 인간이 아니라 기상이 흘러넘치는 청년의 모습으로 르네상스시대의 인간관을 상징하고 있다.
-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는 인간능력의 가능성을 그림에서 뿐만 아니라 기계공학, 보석학, 탄도학, 해부학에서도 보여 주었다. 라파엘(1483-1520)은 미켈란젤로와 더불어 성경의 인물들과 사건들을 주로 그렸지만 인체의 아름다움과 힘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그의 원근법은 미술사에 한 획을 그었다.
- 인쇄술의 발전은 고전학문의 부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고대작품들의 원문들이 광범위하게 보급되었고 원문의 정확성을 밝히고자 하는 본문비평이라는 학문의 방법을 잉태케 했다. 필사과정에서 삽입되거나 오류가 생긴 부분들에 대한 확인 작업이었다. 이 때 키케로나 제롬의 작품에 이어 신약성경의 원문에 대한 확인과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이 작업에 의해 콘스탄틴 황제가 교황들에게 서방전체를 다스리도록 권한을 하사했다고 하는 '콘스탄틴의 기증서'가 조작된 것임이 밝혀져 다시 한 번 교황청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
- 종합적으로, 인문주의는 다음의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부르조아계급에 속한 사람들이 가진 인간중심적 정신을 말한다. 다음으로는 문학과 예술에서 추구된 것으로 플라톤철학에 근거한 지적 부흥운동이다. 결론적으로 인문주의는 인간의 가치와 개인의 창의성을 강조하는 정신이다. 인간의 위대성과 개인의 긍정적인 면을 강조하면서 무지로 인한 맹목적인 신앙과 미숙한 편견에서 벗어나고자 한 새로운 차원의 대중운동이었다.
4. 영향
- 르네상스시대의 문헌연구는 지식인들 사이에서 이루어졌지만 그들의 노력은 대중화되어 초기 기독교를 회복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신념을 신자들에게 각인시켰다. 당시 로마교회가 원래의 모습과 다르다는 것을 깨달은 신자들은 신약성경이 제시하는 원래 교회의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는 갈망을 가지게 되었다
- 르네상스시대의 인문주의는 인간의 세속적 가치를 부각시키고 인간 중심의 사고를 진작시켰다. 17세기의 계몽주의는 이러한 인문주의에 뿌리를 두고 그 정신을 계승한 것이다. 나아가 계몽주의는 전통적 기독교신앙을 부정하는 자유주의신학과 탈권위적인 포스터모더니즘을 낳은 것이다.
- 인문주의가 기독교신앙에 부정적인 양향만 끼친 것은 아니다. 종교개혁운동의 선두주자들과 신학자들은 인문주의 풍토에서 교육을 받았다. 인문적 소양을 가지고 기독교신앙을 변호했다. 그들은 인간의 천부적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면서 중세교회의 모순을 자각했다. 로마교회의 교권적 횡포와 성직자들의 도덕적 타락과 미신적 교리, 계급적 성직제도의 모순, 종교재판에 의한 잔인한 인간학살과 독선들이 모두 하나님의 뜻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것임을 깨달은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인문주의가 제공한 비평적 눈 덕분에 얻은 것이다. 인문주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을 아는 지식의 균형을 제공했다.
제9장. 종교개혁운동
A. 종교개혁전야
1. 성직자들의 타락
- 중세말기 사람들의 화두는 대부분 성직자들의 타락이었다. 특히 동성애를 비롯한 성적인 타락은 극에 달했다. 중세문학에 나타나는 귀족부인의 정부는 언제나 사제였다. 실제로 16세기 종교개혁자 에라스무스는 사제와 교회 여인 사이에 태어난 사생아였다. 교회당과 수도원 지하에는 낙태들이 즐비하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감독과 사제는 자식을 낳아 공개적으로 부양했다. 평신도 지도자들은 성자들의 유품을 수집하는 일에 열을 올렸다.
- 종교개혁전야의 성직자들의 지적 수준은 최저 상태였다. 초급라틴어와 기초교리문답 그리고 미사를 올리는데 필요한 문구를 배워 서품을 받았다. 사제들 중 극히 일부만이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그들은 바늘 꼭대기에 천사가 몇 명 앉을 수 있는가 하는 논쟁으로 허송세월을 보냈다.
2. 교황들의 탐욕
- 교황 니콜라스5세(1447-1455)는 바티칸을 기독교의 수도로 만들기 위해 예술적으로 치장하는 일에 몰두했고, 칼릭스투스3세(1455-1458)는 전쟁광이 되어 이탈리아를 혼란에 빠트렸고, 폴2세(1464-1471)는 사치와 향락의 밤을 즐기다 중풍으로 사망했고, 식스투스4세(1471-1484)는 추기경들에게 막대한 금품을 제공하고 교황직을 매수했다. 그는 재위기간 돈을 벌기 위해 온갖 부정부패를 저질렀다. 로마시민들은 굶고 있는데 바티칸의 시스틴채플(Sistine Chapel)을 화려하게 장식하는데 눈이 팔렸다.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도 이 때 만들어졌다. 인노센트8세(1484-1492)는 자기의 자식들에게 막대한 재산과 관직을 하사했다. 사생아들인 아들들은 면죄부를 팔아 부를 축적했다. 알렉산더6세(1492-1503)는 탐욕과 정욕의 대명사였다. 투르크족이 침략해 오자 술탄과 비밀거래를 했다. 그는 남을 독살시키기 위해 만든 음식을 실수로 자기가 먹고 죽었다. 줄리우스2세(1503-1513)는 폭군이었다. 로마의 영웅이었던 시저를 본받기 위해 자신의 교황명도 시저의 이름을 본땃으며, 전쟁과 약탈을 일삼았다. 레오10세(1513-1562)는 메디치가문의 아들로서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나던 시기의 교황이다. 그의 관심은 교회 치장이었다. 베드로대성당을 완성시키기 위해 자금조달의 방편으로 면죄부를 팔았다. 교황들은 새로운 수입을 늘리기 위해 기발한 방법들을 개발했다. 성직에 임명받으면 첫 해의 수입을 교황에게 바치는 것을 제도화했다.
3. 콘스탄티노플의 함락과 흑사병
- 서로마가 이슬람 투르크족에 의해 무참히 함락되자 서양세계는 공포의 도가니에 빠졌다. 교황들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술탄에게 아부를 떨어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흑사병이 창궐하여 유럽인구의 절반이 희생되었다. 전염병이 돌자 성직자들은 직무를 저버린 채 도망을 쳤다.
4. 자각- 눈을 뜨다
- 교회가 도덕성을 상실하자 양식을 가진 신자들은 분노를 터뜨렸다. 실망한 사람들은 점차 종말론적인 기대를 가지고 급격한 변화를 갈구하게 되었다. 이 때 신비주의운동과 한스 뱀의 저항운동이 일어나 대중들을 사로잡았다. 교황을 적그리스도라고 공공연히 칭했다.
- 르네상스와 인문주의로 인해 신자들은 부패와 타락의 온상인 교회를 개혁하는 첩경은 기독교의 원천, 즉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임을 깨달았다. 여기에 교회의 개혁에 대해 진지한 자각을 가지게 된 일단의 성직자들이 있었다. 이들이 종교개혁의 기치를 올렸다. 그들은 기존세력과의 의견충돌은 물론이거니와 핍박과 희생을 감수하면서 교회의 근본적인 개혁을 위해 온 몸을 던졌다. 그것이 종교개혁을 탄생시킨 것이다.
B. 마르틴 루터
1. 생애요약
- 1483년, 11월 10일 독일 아이스레벤에서 출생. 1501년, 에어푸르트대학교 법학과 입학. 1505년, 6월경에 집에 갔다가 학교로 돌아오던 중 학교 친구가 번개에 맞아 갑자기 죽는 사건을 목격하고 깊은 충격을 받고 수도사가 되기로 결심. 7월 17일, 어거스틴 수도원에 가입. 1507년, 에어푸르트 성당 사제가 되었으나 이상한 죄책감에 계속 시달림. 이 때 수도회의 선배이자 스승인 요한네스 슈타우피츠(1460-1524)로 부터 좋은 가르침을 받고 크게 깨달음. 1510-1511년, 로마여행 중 이신득의를 깨달음. 1512년, 신학박사 학위 취득. 스승의 소개로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교수가 됨. 이 때 시편, 로마서, 갈라디아서, 히브리서의 주석을 썼다.
- 1517년, 어느 날, '돈 상자에 돈이 떨어지는 순간에 불타는 연옥으로부터 영혼이 곧장 날아온다'고 외치는 면죄부 판매원 테첼과 토론을 벌이기로 결심하고 테첼의 주장이 그릇되었음을 증명하는 95개 조의 반박문을 작성하여 10월 31일 비텐베르크교회 정문에 내걸었다.
-1518년, 잉골슈타트대의 신학교수이자 루터의 친구였던 요한 마이어(1486-1543)가 obelisci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고 루터를 이단으로 고소함. 이에 루터는 asterici라는 논문으로 답하고 이어 '하이델베르크 논제'를 통해 자유의지와 신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배격하고, '십자가의 신학'을 정립하게 됨. 그리고 마르틴 부처(1491-1551)와 요한네스 브렌츠(1499-1570)라는 든든한 지지자를 확보했다. 면죄부에 대한 보다 정교한 내용의 <해설>도 이때 저술되었다.
- 1520년, 교황 레오10세는 '주님, 일어나소서'라는 교서를 발표했다. 이에 루터는 로마교황청이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타락한 곳이라고 질타하며 로마여, 안녕이라는 내용의 편지를 발송했다. 2개월 뒤인 1521년, 황제 카를 5세가 주도하는 제국회의의 소환장이 발부되었고 루터는 독일의 제후인 프리드리히의 약속을 굳게 믿고 4월16일 보름스 회의에 도착하여 10일간 교황청의 심문을 받았으나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에 많은 민중들이 루터의 신앙심에 감동을 받아 루터의 종교개혁사상은 급속도로 확산되어졌고 많은 추종자들이 루터를 따르기 시작했다. 프리드리히는 급히 아끼던 루터를 보호하기 위해 바르트부르크 성에 그를 은신시켰다. 루터는 여기서 1년을 숨어 지내야 했다.
- 1524년, 농민들의 봉기가 일어났다. 루터를 추종하던 뮌처가 주동이 되어 남부 독일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뮌처는 농민들에게 지상의 천년왕국에 대한 기대를 불어 넣고 지배층의 회개를 요구했다. 그리고 정당한 이자의 도입, 농산물의 십일조, 농노제의 폐지 등 농민들의 권익을 보호해 달라는 요구를 했다. 그러나 루터는 이 때 결혼을 발표하며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농민운동이 점차 폭력적 양상을 띠게 되자 오히려 군주들에게 단호한 진압을 요구하는 등 태도를 달리해 세간을 놀라게 했다.
2. 메시지 및 의미
- 루터는 세계의 역사를 근원적으로 변경시킨 몇 안 되는 인물들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조직가나 정치가도 아니었고 혁명가는 더더욱 아니었다. 오직 심원한 종교적 신앙의 힘으로 사람들을 감동시켰고, 구원에 대한 성경적이며 확고한 신학적 토대를 닦았다.
- 루터는 수세기 동안 로마 카톨릭으로부터 이단자이자 교회의 분리주의자라는 신랄한 공격의 대상이 되었지만, 오늘날은 진정한 신앙인과 가치 있는 신학적 대화의 상대자로 카톨릭권 안에서도 널리 존경받고 있다. 루터는 교회사에 있어서 아주 탁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나라로부터 썩은 카톨릭교회를 도려내는데 쓰임 받은 하나님의 확고한 도구였다.
C. 울리히 쯔빙글리
- 종교개혁이 시작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스위스의 취리히 역시 로마교회의 지시를 공개적으로 거부했다. 취리히는 에라스무스의 영향으로 인문주의적이고 성서의 권위를 존중했다. 이후 스위스는 설교자와 학자로 유명한 쯔빙글리(Ulrich Zwingli,1484-1531)가 주도했다. 그는 성상을 제거하고 미사를 금지하고 수도원을 해산했다. 교황과 맞서 싸움을 벌이고 있는 루터와 쯔빙글리가 연합을 위해 마르크부르크에서 만났다. 두 사람은 성만찬에 대한 견해의 차이로 끝내 연합을 이루지 못했다. 둘은 화체설이 잘못이라는 데는 의견이 같았지만 특별한 대안을 찾지 못했다. 루터는 성만찬의 요소들은 변하지 않지만 그리스도의 몸은 떡과 포도주를 통해서 눈에 보이는 요소로 임재한다고 했다. 루터에게 "이것은 나의 몸이다"라는 주님의 말씀은 문자적으로 사실이었다. 그러나 쯔빙글리는 그리스도의 발언이 그저 "내 몸을 기념하라"는 의미 이외에는 없는 것이라고 했다. 5일동안 둘은 열심히 토론했지만 서로의 차이를 확인하는 데 머물렀다. 둘은 "양심이 허락하는 한 그리스도의 사랑의 정신을 상대방에게 보여줄 것"을 확약하는 선에서 마무리짓고 결국 갈라서게 되었다.
- 쯔빙글리는 1531년 카펠전투에서 사망했다.
D. 칼빈(John Calvin, 1509-1564)
1. 생애
- 1509년 북부 프랑스 <노와이온>시(市)에서 탄생하였다. 아버지는 노와이온시의 유력한 인사로서 교회의 서기와 회계를 오랫동안 맡아보았다. 그의 머리는 예리하였고 판단력이 빨라 특출하여 그 지방 고급 귀족들에게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칼빈은 이러한 아버지로부터 지식욕과 조직적 두뇌를 물려받았다. 어머니는 매우 경건한 여성으로서 칼빈에게 경건을 물려주었다. 그의 가정은 사회적 지위와 부를 함께 가졌으므로 어린 시절 칼빈은 행복하게 성장할 수 있었다. 칼빈은 어려서 귀족의 자녀들과 사귀면서 공부하였다. 11살 때 노와이온 주교가 지불하는 장학금을 받았고 그때부터 교회에서 섬기는 직책을 갖게 되었다. 그런 이유로 교직을 목표로 훈련을 받았다. - 14살 때 칼빈은 파리에 유학의 길을 떠났다. 귀족들이 들어가는 대학에 입학하였다. 라 마르슈(La Marche)대학은 당대 프랑스의 인문주의 신문화의 대 본산이며 국왕의 교육정책에 따른 건실하게 발전되었다. 칼빈은 다시 몬테그(Montaigue) 대학으로 옮겼는데 이것은 아버지에 지시에 의하여 교회적 분위기를 가진 곳에 와서 교직을 목표로 한 신학 공부를 준비하기 위해서인 것 같았다. 이 대학은 파리의 보수주의 진영의 중심지였다. 칼빈은 이곳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문학사가 되었다.
- 1527년 몬테그 대학에서 문학사의 학위를 받은 후 칼빈은 그의 행로를 변하여 법학을 배우려 돌연 오를레안(Orlean)대학에 입학하였다. 이것도 역시 아버지의 지시로 대로 순종 하였다. 아버지는 칼빈의 성품을 보아 교직자보다 법률가가 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1531년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하여 그 후에는 칼빈의 자유 선택에 의하여 다시 신학으로 되돌아섰다. 이렇게 칼빈의 회심은 루터와 같이 급격한 것이 아니라 점진적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 그 당시엔 헬라어 공부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헬라어를 배우면 신약성경 내용을 알게 되고 성경공부는 교황청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칼빈과 그 친구들은 비밀리에 헬라어를 익히고 성경의 원문을 접하며 조금씩 종교개혁에 동조해 가고 있었다. 칼빈의 친구인 니콜라스 꼽이 1533년 11월 파리 대학의 총장으로 취임했을 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산상수훈을 주제로 설교를 했다. 내용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꼽은 이 연설 이후 사회 권력층, 성직자들의 많은 비난과 핍박을 받았다. 결국 꼽은 바젤로 피신했다. 연설문을 함께 작성했던 칼빈도 핍박 때문에 도망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시절에 아주 유명한 ‘기독교 강요’의 체계를 세우게 되었다.
- 피난 생활을 하던 칼빈은 ‘기독교 강요’ 출간한 후 제네바에서 개혁 운동을 일으켰다. 책의 출간으로 인해 그는 가톨릭 성직자들과 싸웠고 때로는 국가에서 추방 명령을 받아 떠돌이 생활을 하기도 했다. 14년 동안 제네바의 종교 개혁을 위해 싸웠던 칼빈의 개혁은 전 세계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 네덜란드, 스코틀란드, 영국, 독일 등에서 그의 사상은 많은 사람들에게 계승되었다. 하지만 그 동안 칼빈은 건강을 잃었다. 위궤양, 관절염, 천식, 폐병, 결석, 늑막염 등으로 고통스러운 생을 보냈다. 결국 그는 1564년 55세의 나이로, 비명 없는 무덤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긴 채 하나님 품으로 돌아갔다.
2. 제네바 종교개혁의 배경
- 스위스 개혁 운동의 배경은 종교적인 면에서보다 정치적인 영향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제네바는 신. 구 사이에 낀 중간 위치였다고 볼 수 있었다. 후대의 학자들은 평하기를 "프로테스탄티즘의 가면을 쓴 '에라스무스'의 휴머니즘과 로마 카톨릭의 겉옷을 입은 '루후에부르그'(프랑스 인문주의 운동의 선구자)의 프로테스탄티즘이 사라지고 칼빈의 명백하고 적나라한 프로테스탄티즘이 '기독교강요'(基督敎綱要)라는 참신하고 박력 있는 운동으로 역사의 무대 위에 등장하였다"고 하였다. 칼빈의 「기독교강요」는 오늘날 모든 개혁 교회들 특히 장로교회의 교리의 근간을 이룩하게 한 유일의 책이 되었다.
- 칼빈의 개혁 당시 제네바의 인구는 약 1만 3천 정도로서 신성 로마제국의 치세 하에서 매우 복잡한 정치적 입장에 있었다. 스위스가 유럽 정치사에 등장한 것은 1291년경 독일어를 말하는 세 주(州)가 소위 '영원한 언약'이라고 불리는 상호 방위조약을 맺고 연방을 조직한 이후부터이다. 스위스 사람들은 유럽에서 영국과 같이 근면하고 용감한 국민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자유에 대한 정열과 애착심은 어느 민족보다 강했다. 그들은 자연의 여러 악조건과 싸우면서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쳐 들어오는 외국 세력을 물리치는 동안 민족 스스로가 과감한 저항 정신을 배양하였고 진취적 기상과 자유의 정신을 갖게 되었다. 1291년 이후 수 차례의 위기를 극복하면서 주(州)의 수(數)를 증가시켰다. 그리하여 1499년에는 신성 로마제국으로부터 정치적 독립을 인정받았다.
- 종교개혁 전야에 스위스는(1513) 자치주(自治州)가 13으로 증가하여 일종의 연방 체제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들 연방의 여러 도시들과 외부 도시와의 관계는 매우 미묘하고 복잡하였다. 그 중에서도 제네바는 스위스 연방에 가입하지 않은 도시 공화국(City-Republic)이었다. 외형적 표면상에서는 제네바는 국왕의 주권 하에 있었지만 실제적인 행정권과 사법권은 로마교회의 주교(Bishop)가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시당국과 주교 양자 사이에는 지배력의 우열을 둘러싸고 심각한 대립과 긴장이 그칠 사이가 없었다. 시민들은 황제권(皇帝權)과 교황권(敎皇權)의 싸움의 틈바구니 속에서 어부지리를 노림으로써 그들의 세력 신장을 펴 나아갔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유시(自由市)로서의 특권과 자치권을 획득하려고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 그러던 중 13세기에 있어서 새로운 요인이 나타났다. 그것은 사보이(Savoy) 국왕의 출현이었다. 신성 로마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난 사보이 왕국은 근 2세기에 걸친 교회와의 싸움 끝에 결국 주교(主敎)의 지위를 왕가(王家)에서 선출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함으로써 사실상 제네바 시를 수중에 장악하는데 성공하였다.
- 한편 제네바 시민들은 이와 같은 사보이왕의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서 시민 전체를 대표하는 '총회'(總會)와 20인의 대표로 구성되는 ‘소의회’를 조직하였다. 정세는 급변하여 이번에는 정치와 종교를 한 손에 쥐고 좌지우지하는 사보이왕과 투쟁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무력이 우세한 사보이군(軍)을 상대로 싸우고 있던 제네바는 한때 위기 속에 빠졌지만 연방 도시의 원조로 위기를 모면하고 최후에는 승리를 쟁취하였다. 이 승리는 정치와 종교가 동시에 로마교회로부터 해방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때가 1519년이었다. 1535년 8월10일 제네바 시는 로마교회의 미사 의식을 폐지하기로 결의하고 시민 총회에서 복음주의적 신앙을 따를 것을 서약하였다.
3. 칼빈과 제네바
- 칼빈은 귀욤 파렐(G. Farel, 1489-1565)을 만나면서 제네바와 인연을 맺게 된다. 파렐은 유명한 기독교강요의 저자가 제네바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밤에 여관으로 칼빈을 찾아와 제네바에 머물 것을 강력히 요청했다.
- 칼빈은 제네바를 그리스도의 학교로 만들었다. 그곳에서 성직자는 어떤 권력도 누릴 수 없었다. 교회생활은 목사와 장로로 구성된 종무원의 치리를 받았다.
- 처음에 칼빈은 성경 강사의 일을 담당했는데 점점 파렐보다 영향력이 커져갔다. 그는 파렐과 함께 제네바시의회에 3가지 사업 제안서를 제출했다. 그 내용은 첫째, 매월 성만찬의 시행이었다. 이를 위해 시의회는 행실이 바른 사람과 바르지 못한 사람을 따로 구분해서 보고하도록 했다. 둘째, 칼빈이 만든 교리문답을 채택하라는 것이었다. 셋째, 제네바 시민들은 파렐이 작성한 신조를 고백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 시민들은 그들의 계획에 동조하지 않았다. 갈등을 빚자 시의회는 그들에게 떠날 것을 요청했고 1538년에 칼빈은 스트라부스로 떠났다. 그곳에서 그는 심각한 생활고에 시달렸고 건강을 해쳤다. 그러나 그의 학문은 깊어만 갔다.
- 그 때 제네바에는 로마교회의 신학자가 개혁주의 신앙에 대한 공격을 가했다. 이에 제네바시는 1년 뒤 칼빈에게 다시 제네바로 돌아와 달라고 요청했다. 이후 그는 교회법과 도덕법을 제정하고 제네바를 개신교의 로마로 만들어 갔다.
- 1559년엔 그의 제네바플렌에 따라 아카데미를 설립했다. 교회의 직접적 통제를 받는 모두 7년 과정이었는데 어린이부터 16세 까지 참석할 수 있는 스콜라 프리바타와 대학과정의 스콜라 푸블리카로 나누었다. 나중에 제네바대학으로 발전한 이 학교를 통해 최초로 개혁 장로교회를 세운 존 낙스가 배출되었다.
4. 칼빈과 인문주의(人文主義)
- 칼빈은 젊은 날에 인문주의적 교양과 지식의 습득으로 그의 위대한 신학적 저술에 깊이 반영되어 타에 추종을 불허하였다. 그는 불어는 물론, 라틴어 문장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었고, 그는 대중에게 쉽게 전달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한결같은 염원이었다. 칼빈이 회심한 후에도 여전히 고전에 대한 존경심과 인문주의에 대하여 호의적 태도를 가지고 있었으나, 그러나 그는 인문주의 사상 그 자체에 대하여 결코 긍정한 일은 없었다. 즉 기독교의 본질과 인문주의(Humanism)사상은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바탕 위에 서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칼빈의 인문주의적 사상이란 것은 세속적인 인문주의자들과 구별해야 한다. 그래서 칼빈을 일반 인문주의자들과 구별하기 위하여 <기독교 인문주의자>(Christian Humanist) 또는 <성경적 인문주의자>(Biblical Humanist)라고 부른다.
5. 그의 신학 사상(神學思想) - 칼빈의 신학은 후대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관점에서 그의 신학 사상을 정리하려고 했지만 요약하면 "말씀" 신학이다. 그는 하나님의 힘에 억압되어 "말씀"에 계시된 하나님을 만났고 이것이 그의 신학의 특징이다.
1) 신인식(神認識)
- 칼빈은 신인식을 "말씀"에 계시된 것으로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의 신학을 "말씀의 신학"이라고 일컬으며 이로 인해 복음주의 신학의 전통으로 이어졌다. 그는 철저하게 "말씀"이 신인식의 길이라고 단정하였다. 그는 그의 역작인 「기독교강요」 초판(1536년)부터 신인식이 신학의 주제라고 스스로 말하였다. 그러기에 1542년 공표한 제네바 신앙 문답 첫문답에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이뇨"라고 묻고 "그것은 하나님을 알고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답하였다. 바로 이것이 개혁 교회와 장로교회의 신앙 문답의 전통이 되었다. 이것도 신인식이 인생의 궁극의 목적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2) 신인식은 인간편에서는 불가능하다.
- 다만 하나님께서 스스로 낮추어 인간의 능력에 적합한 방도를 취하여 계시함으로 가능하다고 했다. 에스겔 9:3-4절을 강해하면서 "하나님은 자신을 우리의 지식수준에 적응시키지 않으면 우리에게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이것은 창조자와 피조물 사이에 있는 균열을 다리 놓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스스로 어떤 모양으로 내려오심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본질은 알 수 없고 가까이 할 수 없으며 단지 그의 존재를 알게 함으로 그에게 경외의 마음을 일으키며 의뢰하며 찬미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지식은 하나님으로부터 생긴다고 했다. 이러한 신인식의 객관적 지식이 어디에서부터 오는가? 그것은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였다.
3) 절대 복종. - 부패한 인간에게 잔존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우상 숭배와 미신의 원천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래서 참 지식의 근원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입증하시려고 계시하신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는 데서 성립한다고 했다. 신인식의 올바른 자세가 바로 이 복종(服從)이다. 복종한다는 것은 그 대상의 권위를 받들어 모시는 것이다. 그 구체적 대상이 바로 이 "말씀"이었다.
4) 칼빈주의
- 루터는 로마서 1: 17절에서 얻은 <복음의 이해>에서 전체성서의 주제를 찾고 이것을 기점으로 하여 성서의 성서 됨을 판정함으로 극단적으로 기울여 졌지만(로마서, 요한복음이 가장 가치 있고 야고보 요한계시록은 이차적인 것으로 봄) 칼빈에게서는 그래서 「서책으로서의 말씀」을 강조함으로 이것을 극복하였다. 즉 성서가 글로 쓰여짐으로 제한성이 있기는 하나 반면에 시대가 흐르고 사람의 기억이 변전(變轉)하고 또 그릇됨에 떨어지는 경우에도 오히려 성서 본문만은 일정한 사상을 지시하고 있기 때문에 혹 오해될 수도 있으나, 다시 또 새롭게 그 참 뜻이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을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라고 보았다. 이렇게 칼빈은 성서 각책의 경중의 차를 보기 전에 먼저 주어진 권위의 책으로서 어느 책에서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는 태도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신구약 전체를 하나 하나 주석 하였다. 이렇게 말씀의 권위를 주장한 칼빈이었기에 오늘까지 그의 사상은 복음주의 신학에 중심이 되었고, 개혁 주의 교회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후에 칼빈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의하여 칼빈주의(Calvinism)가 형성되어 그의 사상을 여러 가지로 체계화 시켰다. 그러나 그 중에는 칼빈 스스로의 직접적인 주장은 아니지만 칼빈의 사상을 주석하며 해석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들이 생겨 오늘날 칼빈주의 사상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5) 칼빈의 예정설(Predestination)
- 흔히 칼빈의 신학에서 예정설이 중심 사상인 것처럼 생각하기 쉬우나 칼빈 자신은 이 말을 처음부터 사용하지 않았다. 칼빈의 예정설은 신학의 출발점이 아니고 논리적 귀결점이었다. 그에게서 최우선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었다. 처음 그에게서 이 말은 교회론을 말할 때 '선택 받은 자의 무리'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행위로서 구원함에 이르게 한 것도 하나님의 선택이라면 그 반대의 경우도 하나님의 뜻에서 그렇게 하신 예정이란 것이다. 이러한 말에 대하여 칼빈을 비판하는 무리들의 반론이 제기되었다. 그렇다면 사랑의 하나님이 인간의 행위에 의하지도 않고 "영원한 포기"를 한다면 옳지 않은 것이 아니냐? 라는 질문에 대답으로 소위 '이중 예정설(二重 豫定說)'을 주장하였다.
- 칼빈의 예정설을 반대하는 주장은 아래와 같다. (1)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원리에 모순된다. (2) 하나님은 모든 인간이 회개하기를 참고 기다린다는 성경에 배치된다. (3) 로마서 9:13절에 '강퍅하게 할 자를 강퍅하게 한다'고는 있어도 멸망시킬 자를 멸망에 정한다고 한 것은 없다. (4) 설교가 필요 없어진다. (5) 사람에게서 성결에 이르는 동기를 제거하게 된다. (6) 사람의 운명이 영원 전부터 작정되었다면 그리스도로 인한 계시도 필요 없다. (7) 하나님은 주지 않고서 가지지 않았다고 벌하시는 분이 되지 않겠는가?
- 칼빈의 답변은 다음과 같았다. "이러한 생각은 매우 무지하고 유치한 일이다. 선택이란 기각을 전제한 말이며 하나님의 의지가 절대적이라면 당연히 기각도 그에게서 당연한 일이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자기의 성질에 따라 그 사람을 심판하기를 택한다면 그가 사람에게 얽매인 무슨 의무가 있기에 그것이 마땅치 않다고 하겠는가?" 라고....그러면서 결론적으로 "우리는 모두 미움을 받은 존재들이다"라고 했다. - 이렇게 볼 때 칼빈의 예정설은 하나님의 주권적 권위를 강조한 결과에서 얻어진 논리적 귀결이었다. 즉 구원의 은총을 받는 입장에서 볼 때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그렇게 되도록 작정한 하나님의 예정이란 논리적 귀결이다. 그 이상 더 인간으로는 할 말이 없다. 그러므로 예정설은 숙명론도 아니고 개인의 운명을 알아내는 암호 읽기도 아니란 것이다. 그래서 칼빈은 "우리의 예정의 최대의 목적은 하나님의 은총을 찬송하게 함이라" 고 하였다.
6) 칼빈주의 기본교리 (T-U-L-I-P)
- 전적 타락 (Total Depravity) -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 제한적 속죄 (Limited Atonement) - 불가항력적 은혜 (Irresistible Grace) - 성도의 견인 (Perseverance of the Sai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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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순길 박사 (전 고신대학 신학대학원 원장)
신앙고백서 입장에서 본 개혁교회와 장로교회
교회의 정체성은 그 교회가 가진 공적인 신앙고백과 교회정치(질서)와 이를 기반으로 한 교회 생활에서 나타나게 된다. 이 시간에는 신앙고백적 입장에서 본 개혁교회와 장로교회의 생활의 차이를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1. 개혁교회와 장로교회의 신앙고백
개혁교회와 장로교회는 그 신학과 신앙과 교회생활의 뿌리에 칼빈에게 두고 있으며 교회의 이름을 달리해 오고 있다. 유럽 대륙에서 출발한 칼빈주의 교회들이 개혁교회(Reformed Church)라 불리어 지며, 스코틀랜드(Scotland)에서 출발한 칼빈주의 교회들이 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 )라 불리어 왔다. 유럽대륙의 칼빈주의 교회를 “개혁교회”라 부르게 된 것은 변질된 로마교회로부터 신학과 교회정치면에서 개혁된 교회라는 의미에서 처음부터 자연스럽게 불리어져 왔다. 그리고 스코틀랜드(Scotland)에서 “장로교회”라 부르게 된 것은 감독에 의한 정치가 아닌 장로회에 의한 정치라는데 강조점을 두게 된대서 온 것이었다. 개혁교회와 장로교회는 같은 칼빈의 신학적 신앙노선을 따르면서도 또한 각기 다른 신앙고백서들을 가지고 있다. 이는 각기 역사적인 환경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개혁교회는 세 가지 신앙고백서들을 가지고 있는데 이를 “삼 일치신조(The tree fors of unity) 라고 부른다. 이렇게 부르는 것은 작성된 배경의 나라와 저자와 시대가 각기 다르지만 진리를 표현하는 면에서는 서로 모순이 없이 일치 하다는 뜻에서이다. 세 신앙고백 가운데 둘(Belgic Confession, Heidelberg Catechism) 은 종교개혁이 진행되고 순교자들이 생겨나던 16세기 중반에 작성된 것이었다. 그래서 그 신앙고백들 속에서 그 시대의 뜨거운 신앙적 정서를 읽을 수 있고, 사용된 어휘에서도 성경적인 단순성을 가진 어휘가 사용되어 있음으로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란 종교개혁시대의 정신을 느낄 수 있다.
개혁교회의 첫째 신앙고백서는 37장으로 된 “벨직신앙고백(Belgic Confession)”이다. 이 신앙고백은 지금의 벨기에(Belgium)에서 산 귀도드 브레(Guido Bres)가 여러 동역 신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1559년에 작성하여 1561년에 발표했다. 이 고백서의 내용은 1559년에 나온 불란서 개혁교회신앙고백(the Gallican Confession)의 본을 따랐다. 그는 이 신앙고백서로 당시 개신교들을 무참히 박해하는 스페인의 왕 필립2세에게 개혁신자들이 단순한 반란 자들이 아니라. 성경의 진리를 따라 살고자 하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임을 밝힘으로 신앙의 자유를 확보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1567년 순교를 당했다. 이 신앙고백이 벨기에와 화란의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으로 받아들여졌다.
개혁교회의 둘째 신앙고백서는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이다. 1560년데에 독일의 루터파 교회는 로마교회의 화체설(transubstantiation) 입장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루터의 동재설(consustantiation) 을 따랐으며 대부분의 독일 선재후들이 루터가 쓴 요리문답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때 팔레스틴네이트(Palestinnate)지역이 서로 다른 성만찬 견해를 내세우며 싸우는 중심이 되어 있었다. (Zwingil, Luther, Calvin) 당시 이지역의 선재후였던 프레데 3세는 칼빈의 신앙사상의 영향을 받고 자기 영지 내에 있는 교회들의 신앙 일치를 위해 새 오리문답을 작성해야겠다는 뜻을 가지고 당시 하이델베르그 대학의 신학부의 유능한 두 교수들에게 이 일을 위촉했다. 위촉을 받은 두 신학자들은 칼빈에게서 배운 우르시누스(Zacharius Unsinrus)와 올레비아누스(Casper Olevianus)였다. 이들은 1563년에 이를 완성하였다. 프레데릭3세는 이 요리문답을 그의 영지 안에 있는 교회들에서 가르치고 설교하게 했다. 이 요리문답을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이라 부르게 된 것은 그 영지의 수도였던 도시의 이름을 따랐기 때문이었다. 이 요리문답의 첫 문답이 매우 인상적이다. “살아서는 죽어서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가 무엇입니까?”라고 묻고 그 답이 “내가 나 자신의 것이 아니라 몸과 영혼이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의 신실하신 구주 예수그리스도께 속해 있다는 것입니다...” 이다. 이것은 순교자가 많이 나던 당시 환경을 잘 알려주고 있다.
그런데 나중에 이 교리문답이 칼빈 사상의 색채가 짙다고 하여 문제가 되어 프레데릭3세가 독일 황제 찰스의 소환을 받아 재판을 받게 되었다. 이때 그는 황제 앞에서 단호하게 자신의 신앙이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과 같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자신은 칼빈을 알지도 못하고, 다만 성경의 가르침을 따랐을 뿐이라고 했다. (하지만 사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작성한 두 신학자는 칼빈의 제자들이었다.)그래서 프레데릭 3세는 황제로부터 ‘경건한 사람(The Pious)’ 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 요리문답은 빠르게 팔레틴네이트 지역뿐 아니라 다른 지역과 나라들에도 확산되어 개혁신앙을 대변하는 가장 널리 알려진, 그리고 개혁주의 교회들이 선호하는 중요한 요리문답이 되었다.
개혁교회의 첫째 신앙고백서는 “돌트신경(The Canons of Dort)” 이다. 화란 개혁교회는 하나님의 예정 교리를 부인하는 아르미니안주의(Arminianism) 문제를 다루기 위해 1618~1619년에 돌트에 총회를 소집하고 여러 외국 개혁교회들의 대표를 초청했다. 이 총회는 아르미니안주의 자들의 5개항 항의를 반박 정죄하고 소위 칼빈주의 5대 교리를 천명함으로 돌트신경을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받아 들였다. 결과 200명의 아르민우스의 추종자 목사들이 면직을 당했다. 이 돌트 총회는 화란 개혁교회의 터를 굳건히 세우는 이정표가 되었다. 기존의 신앙고백서들(벨직신앙고백,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과 돌트신경을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으로 받아들일 뿐 아니라, 기존의 교회질서를 정리하여 “돌트 교회질서(Kerkenordening van Dordrrecht) 를 받아 개혁교회의 터를 공고히 했던 것이다. 오늘 화란, 미주 등 여러 나라에 있는 개혁교회들은 이 신앙고백과 교회질서를 그대로 받아 생활하고 있다.
장로교회는 17세기 중반에 영국 런던에서 모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소요리문답”을 교회의 공적인 신앙고백으로 받고 있다. 스코틀랜드 교회는 1560년 개혁자 낙스(John Knox,d 1572)에 의해 세워졌을 때에 그의 주도로 초안 된 스코틀랜드 신앙고백(Scots Confession)을 받았었다. 낙스는 피난 중 제네바에서 영국계 피난민을 위한 목사로 봉사하면서 신학적 교회정치적 입장에서 칼빈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어 1559년에 스코틀랜드에 돌아와 교회개혁을 단행하여 장로교회를 세우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었다. 그러나 그의 개혁에서는 아직 유사 감독제가 수용되었었다. 낙스를 이어 등장한 멜빌러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를 더욱 견고한 자리로 이끌었었다. 멜빌러는 제네바에서 5년 동안 칼빈의 후계자인 베자와 교제하며 연구하고 1574년에 돌아와 감독정치를 완전히 제가함으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기반을 확고히 했다. 그런데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17세기에 영국 정치적 교회적 변화와 연관되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새로이 채용하게 되었다.
17세기 중반 영국에는 칼빈주의적 개혁사상이 청교도들 가운데 지배를 했다. 당시 청교도 편에 선 영국의회는 찰스 1세의 독재에 맞서 싸웠다. 이때 의회는 영국교회의 감독체제를 페지하고, 스코틀랜드처럼 대륙의 개혁교회의 본을 따른 새로운 장로회 정치체제를 수립하기 원하여 1643년에 신학자 회의를 웨스트민스터 대 교회당에 소집하게 되었다. 의회는 121명의 신학자들과 상원위원10명, 하원위원20명에게 이 일을 위촉했다. 이때 교회는 스코틀랜드 교회에 유능한 신학자 8명을 자문위원으로 파송하였다. 이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작성하는 일에 주도적인 영향을 끼쳤다.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은 1646년 12월에 완성되어 (예배모범1644년 장로회 정치 1644년 대요리문답1647년) 이것이 1647년에 영국의 의회에서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곧 독립교회주의자들의 지원을 받은 크롬웰 장군이 호민관으로 등장하여 영국의회가 무력하게 됨으로 영국에 장로교를 세우려던 기도는 실패하게 되었다. 결과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은 영국교회에 전혀 수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표준문서들은 1649년에 스코틀랜드 교회 총회와 의회에 의해 수용되었다. 그 결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문서들은 스코틀랜드 장교교회의 새로운 신앙고백적 문서가 되고, 이후 그 교회생활에 뿌리를 깊이 내리게 되었다.
그런데 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로마교회가 트렌트 공의회(1545~1563)에서 반 종교개혁적 교리 선언을 하고,루터와 칼빈의 노선이 완전히 갈리게 되고, 아르미니안주의가 화란 돌트총회(Dort, 1618~1619)에서 정죄를 받음으로 아르미니안 논쟁(Arminian controversy) 이 끝난 후에 작성된 것이다. 그 결과 이 신앙고백은 그동안 쟁점이 되어온 교리를 밝히 정리한 거의 완벽한 신앙고백문서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고백서는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와는 달리 스콜라스틱한 청교도적 특성을 띠고 있고, 온화한 성격은 결핍되어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이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은 곧 17세기 이후 신대륙으로 이주한 스코틀랜드계 장로회 교인들에 의해서 미주에 전해지고 약간의 수정이 가해졌다. 이것이 19세기에 미 장로교회 선교사들에 의해 한국에 전해졌다.
2. 신앙고백에 대한 양 교회의 관점
한국 장로교회는 한국교회의 터를 놓은 미국, 캐나다, 호주의 장로교회의 전통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그 가운데 미국 북 장로교회 소속 선교사들의 수가 가장 많았기 때문에 그들의 영향이 거의 절대적이었다. 그런데 저들 중 대부분은 19세기 미국을 휩쓴 부흥운동에 크게 영향을 받은 분들이었다. 19세기 전반에 나타난 장로교회 목사 피니(Charles G.Finny 1792~1875)와 이어 나타난 초교파 인물인 무디(Dwight L. Moody, 1837~1899)에 의한 부흥운동은 모든 교파를 초월한 지지를 얻었다. 대부분의 장로교회도 예외 없이 이 부흥운동에 휩싸였었다. 그 결과 19세기 후반부에 한국에 나온 선교사들의 대부분은 이 부흥운동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받은 분들이었다. 결과적으로 저들은 장로교회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장로교회의 교리와 생활의 기반이 되는 신앙고백 문제에 대하여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것은 다음 두 가지 면에서 증거를 들 수 있다.
첫째로 저들은 선교 초기부터 아르미니안주의를 경계하지 않고 한국선교지 교회들의 교회일치를 주장하였다. 1905년 미 장로교 선교회의 “재한 서울 장로회 일치 위원회( The Seoul Presbyterian Committee on Union = 선교단체임)’ 는 “대한예수교회(혹은 대한 그리스도교회 = the Church of Christ in korea)”를 설립할 때가 무르익었다고 보고 그 해 9월에 장로교, 감리교 선교사 150명이 함께 조직한 “재한 복음주의 선교회 총공의회(The General Council of Evangelical Mission in Korea)”에 한국에 하나의 “그리스도의 교회 혹은 예수교회”를 세울 것을 제의하게 되었다. 총공회는 이 제의를 받아들였다. 이 총공회의의 목적은 “선교활동의 협력과 단 하나의 원주민 복음주의 교회의 조직(Cooperation in missionary efforts and eventually the organization of but one native evangelical Church)” 이었다. 이런 하나의 교회 운동은 곧 같은 때에 캐나다에서 일어난 장로교, 감리교, 회중교회의 일치 운동의 소식에 고무되어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 하나의 교회를 세우고자 한 운동은 그 결실을 쉽게 보지 못했다. 그 들을 파송한 본국 교회가 이것을 수용하지 않았고 한국장로교회 안에서도 이를 반대하는 분들의 수가 차츰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감리교회와 합해서 하나의 교회를 이루고자 하는 희망은 1920년대 말까지도 계속되었다. 1925년 캐나다의 일치 운동이 결실을 맺어 “캐나다 연합교회(The Uniting Church in Canada)”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1929년 개신교 기관지인 “기독신문”이 당시 교회지도자들에게 교회통합에 대한 의견을 질문지를 내어 물어보았다. 답을 준 36명 가운데 대부분이 찬성을 보였다. 신학 면에서 진보적 경향을 가졌던 낭궁혁, 백낙준, 부산의 김길창 등이 찬성을 표했던 것이다. 그러나 초대 한국 교회의 목사인 선천의 양전백, 임택권 목사 같은 분들은 장로교회, 감리교회는 신학과 정치가 다름으로 양 교회 일치는 불가하다고 했었다.
한국 초대교회 선교사들이 대부분은 보수적인 복음주의자들이었지만 칼빈주의적 개혁주의자들은 아니었다. 초대 미 장로교 선교사들의 일치 운동은 첫 복음선교사였던 언더우드가 주도 했었다. 그는 철저한 교회 일치 주의자였었다. 그가 미 장로교회의 한국 선교사 모집에 응모했을 때 선교부 총무인 엘링우드에게 한국에 복음전하는 자로 보내면 가고, 장로교회를 세우기 위해 보내면 가지 않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한국의 첫 선교사의 장로교회에 대한 입장이 그러했으니 한국 초대 선교사들의 교회관을 짐작할 수 있다.
초대 선교사인 소안론(W. Swallon)같은 분도 성경의 완전영감은 철저히 믿었으나, 교리 문제에 있어서는 “한국에서 감리교회와 장로교회가 그 교리의 조화를 찾는데 어려움이 개재한다고 보지 않는다”라고 했다. 1925년부터 평양신학교 교장으로 봉사한 라부열(S. L. Roberts)같은 분도 장로교회, 감리교회 양 교회의 일치문제에 있어서 양 교회가 다 한국교회이니 한국교회의 의견을 듣기 원한다 하면서 중립태도를 취했었다. 감리교는 그들 독특한 신학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있다면 인본주의적, 체험주의적 부흥신학이고, 일반적으로 아르미니안 신학을 좇고 있다. 이 신학은 화란의 돌트 총회(1618~1619)에서 칼빈주의자들에 의해 이단으로 규정된 신학이었다. 그런데 한국 초대 선교사들에게는 아르미니안주의가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 이런 태도는 선교구역을 분할할 때에도 나타났다. 1890년대부터 시작된 장로교회, 감리교회, 선교회의 협의로 선교구역이 확정되었다. 그 결과 장로교회 선교회는 지난날 자기들이 세운 장로교회를 감리교회에 넘겨주게 되었다. 이때 갑자기 장로교에서 감리교로 넘어가도록 강요를 당한 장로교인들이 항거하게 되어 상당한 어려움을 겪게 된 일도 있었다. 이런 일들은 선교사들이 신학과 신앙고백(교리)를 간과한 데서 온 사건들이었다.
둘째는 한국 장로교회 독노회를 조직할 때(1907년) 한국 장로교회의 터를 놓으면서 선교사들은 역사적 장로교회의 신앙고백 내용인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신앙고백과 대소요리문답을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1904년 인도의 장로교회가 채용한 간단한 소위 “12신조”만을 받아들인 것이다. 표면적 이유는 교회역사가 오래지 않은 어린 교회가 이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데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한국에는 선교가 시작된 지 이미 23년이 되었고 그동안 하나님의 축복으로 교세는 세계 어느 나라 장로교회 공동체에 뒤지지 않을 만큼 큰 공동체를 이루었던 것이다. 당시 교회당 수가 1472개요 성찬에 참여하는 교인수가 18061명 교회지도자인 조사가 160명 전도인이 330명이나 되었다.
독노회는 12신조를 “대한장로회신경”으로 채용하면서 그 서문에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신앙고백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특별히 웨스트민스터 신경과 성경요리문답 대소 책자는 성경을 밝히 해석한 책인즉 우리교회와 신학교에서 마땅히 가르칠 것으로 알며” 라고 한 것이다. 1907년 한국장로교회의 조직으로 교회의 터를 놓으면서 장로교회의 신앙고백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채용하지 않은 내적인 이유는 선교사들이 가졌던 교회 일치에 대한 염원 때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바로 2년 전인 1905년에는 한국에 하나의 “예수교회”를 세우기로 감리교 선교사들과 합의를 보았다. 그러니 아르미니안주의자들이 받아들이지 않는 하나님의 무조건 선택과 유기의 교리들을 고백하는 장로교회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채용하게 되는 경우에 염원하는 하나의 교회를 세우는 일이 불가능하게 될 것이라는 우려에서 구체적인 교리를 담지 않은 아주 간단한 12신조를 채용했던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이런 초대 선교사들이 신앙고백에 대한 소극적 견해와 접근태도를 볼 때 한국교회 초대 선교사들이 보수적 복음주의자들이었음은 틀림없으나 개혁주의 신앙고백을 귀중히 여기고 정체성 있는 장로교회를 세우는 데는 매우 소극적이었다. 곧 저들이 개혁주의 신앙고백을 터로 하고 장로교회를 세우고자 힘쓴 분들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1907년에 첫 졸업생을 낸 평양 장로신학교가 보수적인 신학을 가르치는 학교였지만 칼빈주의, 개혁주의 신학을 가르친 학교라기 보다는 근본주의적 복음주의 신학을 가르친 학교였다. 이 사실은 이미 앞서 언급한 소안론 교수와 라부열 교장의 신학적 입장에서도 분명하였지만 1930년대 평양신학교에서 공부했던 박윤선 박사가 그의 자서전에서 밝힌 말에서도 분명했다. 그는 신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칼빈주의, 개혁주의라는 말을 들어 보지 못하고, 성경신학이란 말도 들어보지 못했다고 했다. 그는 단지 평양신학교에서 근본주의적 복음주의를 배웠을 뿐이라고 했다.
결과적으로 한국 초대 미 장로교 선교사들은 개혁주의 신학입장에서 서있지 않았고 신앙고백 문제에 있어서 해이한 교회생활의 전통을 남겨 주었다. 그래서 한국 장로교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1960년대가 이를 때까지 자기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받아들이지를 않았다. 한국 대부분의 장로교 교파들은 1960년대 말과 70년대 초에 이르러서야 총회에서 이를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받아들였다. (고신이 1969년에 받음) 그런데 한국 장로교회 총회들이 1960~1970년대에 이르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이 신앙고백이 실질적으로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총회의 신앙고백 채용은 하나의 사건으로 지나갔을 뿐이고 교회의 실제 생활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교회설립 시초부터 거의 일세기 동안 신앙고백과 먼 거리에서 살아온 교회가 갑자기 신앙고백의 가치를 발견하고 이것을 귀중하게 여길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한국의 장로교회는 신앙고백을 형식적으로 받았을 뿐이고 지금도 이것이 교회의 생활과는 별 관계가 없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개혁교회의 신앙고백관은 한국의 장로교회와는 매우 다름을 보게 된다. 그들은 그들이 받은 소위 일치신조(TheThree Forms of Unity)를 교회의 신학적,교리적 기반으로 삼고, 이를 교회의 가치(Symbolum)로 내세우며 거기서 개혁교회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다. 한국교회는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신앙고백서를 교회적인 공식 신앙고백문서로 채용했으나, 현재 이를 참고서 정도로 여기고 있는 형편이다. 목사와 장로 등 직분자들까지도 이에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목사가 임직 시에 이 신앙고백내용을 “성실한 마음으로 믿고 따릅니까?” 라는 물음을 받고 “예”라 답함으로 서약을 한다. 그렇다면 그가 가르치는 내용이나 설교의 내용이 이 신앙고백에 일치해야 한다. 그러나 한국장로교회목사 상당수의 설교들은 장로교 설교로서 정체성을 보여주지 않고 있다. 대부분의 설교 내용이, 개혁주의적이라기 보다 아르미니안적 경향을 띠고 있음을 보게 된다. 개혁교회는 이와는 달리 목사의 교육과 설교에서 신학과 교리의 정체성이 뚜렷이 드러난다. 그래서 개혁교회는 고백교회로서의 면모를 뚜렷하게 나타내는 편이다.
3. 신앙고백서에 대한 양 교회의 상이한 접근
장로교회와 개혁교회는 누가 신앙고백을 하며, 그 신앙고백을 따라 살 것을 서약하는가에 대해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 한국 장로교회는 직분자들만이 임직 시에 장로교 신앙고백을 수락하고, 서약할 뿐이고, 일반교인들은 이에서 제외된다. 그러니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직분자들만의 신앙고백일 뿐이고 일반교인들의 신앙고백은 아니다. 원래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신앙고백은 장로교회에 속한 모든 신자들의 신앙고백으로 작성되었었다. 대요리문답은 강단에서 교리적 해설과 설교를 하기 위함이었고 소요리문답은 청소년들의 교육을 위해서 였다. 그래서 원래 장로교인들은 이 신앙고백문서로 교리교육을 받고 당회 앞에서 이 신앙고백내용으로 문답시험을 거쳐, 신앙고백(입교)시에 “이것을 성실한 마음으로 고백하고 믿는냐?”라는 물음에 “예”라고 서약함으로 장로교의 모교회라 할 수 있는 스코틀랜드의 자유 장로교회는 지름도 그 전통을 지켜오고 있다. 신앙고백(입교)를 할 때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신앙고백으로 서약을 하게 된다.
그런데 한국 장로교회는 초대 선교사들로부터 이런 전통을 받지 못했다. 목사, 장로, 집사만이 장립 혹은 임직 시에 “신앙고백 대. 소요리문답은 구약과 신약 성경에서 교훈한 도리를 총괄한 것으로 알고 성실한 마음으로 믿고 따릅니까?”라고 묻고 서약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일반 신자들이 세례를 받기 위해 문답을 할 때는 교회의 공식적인 신앙고백에 관하여는 묻지 않는다. 단지 “예수가 구주임을 믿느냐” “교회의 치리에 복종하겠느냐?” 라는 아주 초보적이고 보편적인 것만을 묻고 서약한다. 그렇기 때문에 세례를 위한 문답(신앙고백)을 한 분은 이런 과정을 통해 교적에 오름으로 장로교회의 교인이 될 뿐이지 장로교회가 믿는 바를 믿고 고백함으로 장로교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 한국장로교회가 가진 큰 문제가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목사, 장로, 안수 집사들만이 장로교인이요, 일반 다른 교인들은 어느 교회라고 넘나들 수 있는 보편교인이 되는 것이다(물론 장로 집사도 신앙고백의 내용을 알지 못한다. 모르면서 임직 때 “예”라고 답하는 것은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라고 한 제 9계명을 범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현재 일반교인들은 아무 거리낌없이 장로교회에서 감리교회로 혹은 침례교회로 드나들게 된다.
이런 신앙고백에 대한 접근 생활은 교회의 권징 문제에 있어서도 관계가 된다. 교리적으로 크게 탈선하였을 때에도 신앙고백을 두고 서약한 직분자들에게는 법적으로 징계를 가할 수 있지만 일반 신자들에게는 가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직분자들은 신앙고백을 두고 서약을 했지만 일반교인들은 그렇지 않기 대문이다. 그러니 개혁교회가 언급하는 참 교회의 표지 중 하나인 권징 문제에 있어서도 윤리적인 권징만 할 수 있고 교리적인 면에서의 권징은 불가능한 것이다.
개혁교회는 교회 직분자 뿐만 아니라 모든 교인이 다 교회의 공식적인 신앙고백문서 내용을 자기의 신앙고백의 내용으로 수용하고 고백한다. 이를 위해서는 교회에서 신앙고백내용에 대한 철저한 교육이 뒷받침된다. 일단 교회 청소년들이 12세가 되면 매주 한 시간씩 목사로부터 직접교리교육(Catechetics)을 받기 시작하여 18세 안팎이 되어 입교문답(신앙고백)을 할 때까지 계속하게 된다. 신앙고백을 할 때쯤이면 청소년들은 일치신조(TheThree Forms of Unity)에 대한 내용을 거의 익히게 된다. 그 결과 이들은 교리 교육을 통해 개혁교회가 역사적으로 참된 교회이며 성경적인 가르침을 좇는 교회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개혁교회에서 입교 시에 서약을 위해 묻는 물음 가운데는 “신앙고백서에 요약되고 이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가르침을 받은 하나님의 말씀의 교리를 진심으로 믿습니까?” “또 하나님의 말씀과 충돌되는 이단과 모든 오류를 거절하며 하나님의 은혜로 생사 간 이 교리를 계속 굳게 붙들고 살기를 약속합니까?” 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개혁교회 안에서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은 철두철미하게 신앙고백 내용을 그대로 믿고 고백하고 사는 개혁교인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그러기에 개혁교회에 속한 신자들은 거의 다른 교파 교회로 옮기는 일이 없다. 자기 교회에 대한 큰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간다. 이들은 칼빈주의 개혁교회와 아르미니안주의 교회를 분명히 구별할 줄 안다. 이들은 어느 지역, 어느 나라로 이동을 해도 개혁교회를 찾아간다.
4. 신앙고백관에 대한 차이의 근거
장로교회와 개혁교회가 신앙고백을 접근하는 것이 이렇게 다른 이유는 신앙고백서 내용에 나타난 교회관에서 오게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장로교의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신앙고백은 25장에서 교회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이 고백에 나타난 교회관은 매우 현실적이면서도 교회에 대해 매우 상대적인 사고를 쉽게 갖게 한다. 25:4에 “이 공동의 교회에 속하는 개 교회는 복음의 교리를 가르침과 받아들임, 규례의 집행, 그리고 공적 예배가 행해지는 순수의 정도에 따라 혹은 더 순수하기도 하도 혹은 덜 순수하기도 하다”로 함으로 더 순수하고 덜 순수한 교회를 구별하고 있다. 25:5에서 “세상에 있는 가장 순수한 교회도 혼합과 잘못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어떤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라 하기 보다 사단의 회가 될 정도로 타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상에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께 예배하는 교회가 항상 있을 것이다”라고 한다. 이런 교회에 관한 내용은 매우 현실적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신앙고백 내용을 잘 알고 사는 신자들은 더 순수한 교회에 가담하고 사단의 회가 될 정도로 타락한 교회에 대한 경계심을 가지게 될 수도 있다. 그런데 단순히 교회의 순수성의 차이를 언급하게 될 때 교인들로 하여금 교회에 대한 상대주의적 사고를 쉽게 가지고 어느 교회에든지 안주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할 위험이 있다.
그런데 개혁교회의 벨직신앙고백 제29장은 참 교회(The true Church)와 거짓 교회(The false Church)를 구분하고 있다. 그리고 이 참 교회의 표지로 순수한 복음설교(the pure Peraching of the gospel) 순수한 성례의 집행(the pure administration of the sacraments) 교회권징(Church discipline) 을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제28장에는 “누구든지 교회의 일치를 지탱하고 이 교회에 속하고 연합할 의무가 있다(But all and everyone are oblized to join it and unite with it, maintaining the unity of the Church)”라고 한다.
개혁교회 신자들은 이런 교회관을 가진 신앙고백을 수용하고 서약했기 때문에 참 교회의 표지를 따라 참 교회를 분별하는데 노력한다. 물론 세상에는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없는 것처럼 완전한 교회도 없다. 그러나 개혁교회 신자들은 참 교회 표지를 따라 교회 중에 참된 교회로 판정되는 교회를 택하여 속해야 한다는 신자의 의무감을 가지고 교회생활을 하게 된다. 이런 신앙고백에 나타난 교회관이 개혁교회의 신자들로 하여금 신앙고백 내용을 귀중하게 생각하도록 하고 개혁교회가 명실공히 고백교회로 자리를 잡게 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맺는 말
한국 장로교회 초대 선교사들의 대부분은 성경을 영감된 절대무오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보수주의 근본주의 신학을 좇는 분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대부분은 그 시대의 부흥운동에 영향을 받은 복음주의자들로 순수한 개혁주의 신앙고백을 따른 교회건설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은 일반적으로 아르미니안주의에 대한 경계심을 갖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포옹하기를 주저하지 않은 교회일치주의자(Unionists) 들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이들은 한국 장로교회를 장로교의 역사적 기반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터로 하는 개혁신앙 고백교회를 건설하지 못했다. 한국 장로교회는 지난날 성경관에 있어서는 매우 강한 입장을 취해 왔지만 다른 교리문제에 있어서는 같은 강조를 하지 않았다. 결국 한국 장로교회는 하나의 복음주의교회로 성장해 왔지 색깔이 선명한 장로교회로 성장해 오지 않았다. 한국 장로교회의 많은 분열에는 교리가 아닌 다른 것이 요인이 되어 왔었다. 이는 교회가 선명한 신앙고백 내용 위에 굳건히 서 있지 못한 데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한국 장로교회가 개혁신앙고백교회가 되지 못함으로 현재 중대한 도전을 받고 있는 것으로도 보인다. 2007년에 “한국 교회 연합을 위한 교단장 회의”의 주도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한국기독교총연합회”는 “한국 교회연합을 위한 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에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1905년 장감 선교회로 이루어진 “재한 복음주의 선교회 통합공의회”의 전통을 이어 왔음을 자랑스럽게 밝히고 있다. 그리고 “한국교회는 서구교회의 교파선교…군사 독재 등의 시기에 발생한 신학과 신앙 사회 윤리적 문제에 대한 대처 방법 차이로 인해서 분열의 아픔을 겪었다”고 한다. 나아가 “한국교회 연합을 위한 기본원칙”에는 이 연합운동이 “한국교회의 궁극적인 일치를 지향한다”고 되어 있다. 결과 이 연합운동은 분명히 1905녀에 장로교, 감리교 선교 자들이 “재한 복음주의 선교회 통합공의회”에서 하나의 “대한예수교회”를 세우고자 했던 이상을 따르고 있음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 연합 일치운동에 합동, 고신 등 지난날 자유주의 신학을 배격하고 정통개혁주의 신학을 파수하며, WCC적 에큐메니칼 운동을 반대해 오던 교파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런 신학과 신앙고백적인 입장을 초월한 교회연합과 일치운동에 소리 없이 동조하는 이 교회들의 지도자들과 신학자들의 침묵에 세상의 무상함을 느끼게 된다. 오늘의 교회일치운동은 종교다원주의 운동과도 맥이 통하는 자리에 있다. 이런 교회생활의 변질을 가져오는 교회연합과 일치운동 가운데 사는 우리는 오늘날 주께서 기뻐하실 교회운동이 무엇인지를 묻고 우리들의 역사적 위치를 한 번 더 점검할 필요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지난날 한국 교회 초대 복음주의 선교사들이 희망대로 하나의 “대한예수교회”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은 교회의 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섭리적 간섭이었다고 보게 된다. 한국교회가 지난날 놀라운 성장의 축복을 받은 것도 거기서 찾게 된다. 같은 때에 장로교, 감리교, 회중교회가 하나의 교회를 이룬 캐나다 연합교회(1925년)는 오늘날 세계에서 속화된 교회 중에서 가장 속화된 교회가 되어버린 것이 우리들에게 큰 교훈을 주고 있는 것이다.
교회가 역사적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신학과 신앙고백적인 면에서 순수성을 확보해야만 한다. 이런 교회로부터 생명력이 있는 메시지가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 장로교회는 성경의 무오 교리를 견지하는 동시에 그 범위를 더욱 넓혀 개혁주의 신앙고백교회 건설에 관심을 두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이다. 장로교회에 속한 모든 분들, 직분자들이나 평신도들이 왜 내가 장로교인인지 누구 앞에서나 그 이유를 당당히 밝힐 수 있고, 장로교인 된 것을 감사하며 자부심을 가질 때 한국 장로교회는 참으로 개혁주의 장로교회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 개혁해 가는 교회에서 발췌 - |
허순길 박사
1. 한국 교회의 현실 흐릿한 정체성
한국 교회는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다. 교회는 있어도 주소는 없는 것 아닌가! ‘OOO교회’라고 하지만, 구체적인 소속이 없다. 예를 들면 ‘대한예수교장로회 OOO교회’라고 쓰지 않는다. 이것은 유감이다. 이름만 다르고 간판만 다를 뿐 교회의 구별이 없다. 교회마다 설교의 내용이 거의 같다. 장로교, 성결교, 침례교, 순복음, 감리교회가 차이가 없다. 교리와 신학의 차이를 볼 수 없다. 대부분의 목사들이 시장전략을 가지고 목회를 한다. 마치 코카콜라, 월마트처럼 크게 성장해 가기 원한다. 대형 교회는 지 교회를 세운다. ‘대성전’이 있고 ‘지성전’이라는 개념이 있다. 마치 큰 회사가 문어발식 적은 회사를 세우는 것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이런 교회들은 세상을 시장으로 보고 사람을 고객이라고 생각한다. 고객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 TV에는 오락 프로그램 많다. 다른 나라에는 이런 오락프로그램이 많지 않다. 이렇게 가벼운 것에 익숙한 현대인들은 부담되는 말 싫어한다. 그래서 교회 성장 전략가들은 대교회를 세우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설교에 부담되는 말을 하지 말라고 한다. ‘죄 값’, ‘사망’ 같은 어두운 단어와 주제를 설교하지 말라고 한다. 교리는 딱딱하니 말하지 말라고 한다. 들으면 항상 좋고 즐거운 말만 사용하도록 권한다. 번영과 치유의 목회하도록 유도한다. 노래 방에 가지 않아도 교회에서 즐길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팝송을 닯은 복음 송을 부르는데, 몸을 흔드는 행위는 오락을 즐기는 것으로 존엄한 하나님을 멀리하게 된다. 이런 현상은 강단으로부터 참된 말씀의 선포가 사라지게 만들었다. 하나님의 거룩과 존엄이 사라지고 있다. 고신 교회도 전혀 다르지 않다. 모 목사가 “예배는 즐겁게 드리면 되지 신학과 예배는 관계가 없다”고 말하는 것 보고 참 가슴 아팠다. 그 후 그 교회는 가고 싶은 마음이 없다. 참으로 심각한 문제이다. 한국 성도들은 장로교, 성결교, 순복음, 침례교 등 교파에 관심이 없다. 말씀이 즐거운 교회면 찾아간다. 한국 교회는 한 없이 넓다. 장로교, 침례교, 순복음을 오가는 성도들은 26km나 될 정도로 넓지만, 신앙의 깊이는 2~3mm밖에 되지 않는 것은 아닌지...... 한국 교회 신자들은 예수 믿으면 잘 되고 병 낫는다는 것은 잘 알지만, 교리적 지식 없다. 유치원 어린이에게 묻는 물음으로 세례 문답을 한다. 왜 장로교회인지, 다른 교회와 차이가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하는 가운데 신앙고백을 한다. 분명한 주소 없는 교회가 되고 있다. 강단 교류하는 옅은 신앙 가운데서 신앙생활을 하는 옅은 신앙을 가진 자들은 박해가 오면 인사도 없이 소리도 없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정체성이 없기 때문이다. 교파의 특이성이 분명히 있는데, 이것을 정확하게 드러낼 때 정체성이 나타난다. 무분별한 교회연합 운동 무분별한 일치 운동과 연합운동은 사탄이 주는 독주라고 생각한다. 많은 교회가 이 독주에 취해 비틀거리고 있다. 결국 이렇게 가다가 넘어지고 말 것이다. 오늘 우리 세대만 속한 것이 아니라, 우리와 우리 후손들과 직결된 문제이다. 우리의 신앙, 교회 선택, 생활은 우리 자신 분 아니라, 우리 자녀들과도 관계가 있다. 기독교 신앙은 개인주의가 아니다. 우리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내가 내 언약을 너와 네 후손과 맺어......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라고 하셨다. 부모와 자손의 관계는 끊어질 수 없다. 나와 나의 손자들을 함께 보아야 한다. 내 손자들도 다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우리 자손과 후손을 위해 바른 믿음, 교회, 생활을 해야 한다. 개인주의적 신앙
개인주의에 젖어 있는 현대 교회는 심각한 문제 있다. 나의 믿음 나의 교회의 선택이 나의 자녀들의 신앙과 직결된다는 것 알아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가? 간판만 장로교라고 하지만 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다. 장로교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대소요리문답을 가르치고 공부해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교회를 찾아보기 힘들다. 장로교회이면서 장로를 세우지 않는 것도 문제이다. 장로는 목회에 거리낌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이다. 알미니안적 교회 하도례 목사의 예를 보라. 정직한 말을 했다. “한국 교회는 장로교회가 아니라, 집사 교회입니다.” 서리 집사들이 너무 많은 것을 빗대어 한 말이다. 장로교회는 감리교회와 다르다. 감리교회는 알미니안주의를 따른다. 인간의 전적인 부패를 믿지 않는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을 믿지 않는다. 구원을 위한 자신의 선택을 믿는다. 그러나 장로교회는 영적으로 부패하고 완전히 죽었다고 믿는다. 교회 정치도 감리교회와 다르다. 감독정치를 하는 감리교회는 본래 영국 국교회와 비슷하다. 성공회는 천주교회와 같이 감독이 다스린다.
장로교회는 사도들이 특별히 후계자를 세우지 않고, 교회에 장로를 세우신 것으로 믿는다. 장로교회 정치는 감독이 아닌, 장로들에 의해 정치를 한다고 보았다. 감독은 장로이고, 목사도 장로이다. 가르치는 장로와 다스리는 장로가 당회를 구성한다. 순복음교회는 그 신학과 교리와 정치에 있어서 엄청난 차이가 있다. 정치적으로 장로가 없고, 목사가 절대권을 가지고 있다. 독립교회와 회중교회와 같은 정치를 한다. 장로는 성경적인 확신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냥 장로교회를 본 딴 것에 불과하다.
세례관
가장 큰 차이는 세례관이다. 침례교와 순복음 교회는 유아세례를 거부한다. 세례는 믿고 고백하는 사람에게만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유아는 믿지 않기에 세례를 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구원이 개인주의적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성경은 이런 개인주의를 가르치지 않는다. 믿는 개인과 자녀를 함께 보신다. 자녀도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본다. 그의 아들과 자녀를 함께 본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출생되는 이삭도 그에게 속한 것으로 보았다. 그 증거로 할례를 주신 것이다. 8일 만에 할례를 받는다. 사람이 증거를 원하니 주신 것이다. 그러니 침례교회와 장로교회는 이렇게 다르다. 고신교회가 침례교회와 강단교류를 하는 데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침례교 목사가 ‘믿음’을 강조하는 것은 개인주의에서 나온 것이다. 신약의 세례는 할례를 대신해서 세운 것이다. 언약을 무시하는 침례교와 순복음은 성경 해석에 있어서 매우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니 강단교류를 할 수 있을까?
의미 잃은 유아세례
유아세례는 하나님의 언약의 자녀라는 표이다. 믿는 자의 자녀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그들은 언약의 자녀이다. 하나님에게 속하고 언약을 받은 자이다. 하나님은 불가해한 그의 뜻에서 데려 갈 수 있다. 그러나 구원의 약속을 받았다. 여기에 믿는 자들의 참된 위로가 있다. 친구 목사(개혁교회)가 죽은 자녀의 사진을 그대로 보관하는 것은 천국에 간 아이를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아세례를 부인하는 것은 언약의 복을 거부하는 것이다. 마가복음 15장 15-16절, “믿고 세례를 받은 자들은 구원을 받은 것이요.....”라는 것을 인용하는데, 이 말씀은 특별한 선교 상황에서 말씀한 것이다. 초대교회는 믿고 세례를 받은 자들뿐만 아니라 그 자녀들도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보고 유아세례를 주었다. 베드로는 “세례를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이렇게 베드로도 세례와 관련해 ‘너희와 너희 자녀’를 포함시켜 생각했다. 예수를 믿은 간수는 베드로에게 자기와 자기 가족에 속한 모든 가족 구성원이 다 세례를 받았다고 전한다. 유아세례는 하나님의 언약의 표현이다. 놀라운 은혜의 복을 무시하고 장로교회를 떠나 순복음과 침례교회로 넘나드는 것은 신학과 신앙의 깊이가 얕다는 것을 잘 보여 준다.
시류를 따라 목회하는 목사의 문제도 심각하다. 교회 간판만 정확하게 정체성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그대로 목회해야 한다. 신앙고백을 공부해야 해야 한다. 그래야 자기가 속한 교회의 교인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게 될 것이다.
2. 장로교회와 개혁교회의 차이
칼빈 신학 안에 ‘개혁교회’와 ‘장로교회’가 속한다. 16세기 개혁교회는 칼빈을 따르는 스위스, 프랑스, 네덜란드 교회를 가리킨다. 장로교회는 요한 낙스를 중심으로 한, 웨일즈, 스코틀랜드, 영국에 있는 교회를 가리킨다. 두 교회는 칼빈의 신학을 따라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각기 자기 특징을 가지고 있다. 개혁교회는 세 가지 일치 신조(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 벨기에신앙고백 + 도르트 신조)를 고백하지만, 장로교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소교리문답을 가지고 있다. 두 교회 모두 정치적으로 반 교권적인 입장과 그리스도의 왕권을 분명하게 주장한다. 그러나 이 원리를 적용하는 면에서는 양 교회가 큰 차이를 보인다. 본인은 장로교회 목사로 개혁교회에 봉사해 보면서 차이를 볼 수 있었다. 장로교에 속한 우리는 16세기 이후 칼빈의 신앙을 더 잘 보존해 온 개혁교회의 특징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1) 개혁교회
(1) 교회관이 뚜렷해 개혁교회 교인들에게는 교회관이 뚜렸하다. 신앙고백을 교육 받는 가운데 참 교회가 무엇인지 그 표와 증거가 무엇인지 알기 때문이다. 벨기에 신앙고백 29항으로부터 교회의 표지(복음의 순수한 설교 + 성례의 집행 + 권징(죄의 교정과 지도)를 잘 알고 있다. 이것을 알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생활하지 않고 교회를 구분 없이 선택하지 않는다. 그러나 장로교회는 참 교회에 대한 관심이 없다. 이것은 장로교회의 신앙고백과도 관련이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는 ‘개 교회는 공적 예배가 얼마나 순수하게 시행되는 가에 따라..... 차이가 있다.’라고 선언한다. 그러나 교회를 평가하는 데는 이것 가지고는 힘들다. 참 교회에 대한 분명한 얘기가 없으니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교회를 상대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보도록 만드는 위험 있다.
(2) 교리 교육을 중요하게 여겨 유아세례를 받은 아이들은 철저하게 교리교육을 받는다. 1주일에 한 시간씩 교리 교육을 받는다. 교리 교육은 5년 정도 계속 된다. 신앙고백을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는 교리로 받는가가 매우 중요하다. 입교와 세례 때 고백하는 내용은 너무 평이 하고 넓어 구체적인 신앙의 내용에 들어가면 믿는 바가 너무나 다양하다. 그렇게 해서는 교인이 이단 교회의 교리를 거절하기 힘들다. 또 고백하는 신앙고백대로 살겠는가, 라는 구체적인 질문이 없다. 그리고 교회의 신앙고백에 대한 내용과 이단에 대한 내용 없다. 자녀들이 교리 반에 참석하도록 할 의미가 부모에게 있다. 부모가 자녀교육에 대한 약속을 하면 철저한 책임을 져야 한다. 한국 교회에는 신앙고백에 대한 내용이 전혀 없다. 기도는 하고 주일학교는 보내지만 장로교가 속한 신앙고백에는 관심이 없다. 부모는 장로교회에 나오지만, 자녀들은 침례교회와 감리교회에 보내는 경우도 있다.
개혁교회 성도는 초등학교만은 절대로 불신자에게 맡기지 않는다. 공립학교에 보내지 않는다. 아무리 적은 교회라도 초등학교는 한다. 주일 두 번 설교 가운데 한 번은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을 듣게 된다. 결과적으로 개혁교회의 장년 청소년 대부분이 정체성 있는 개혁교회의 교인이 된다.
(3) 교회 역사를 귀중하게 여겨 개혁교회 성도들은 기독교 학교 꼭 세운다. 초등기독교학교는 기본이다. 성경과 교회사를 필수적으로 가르친다. 자기 교회와 다른 교회가 다른 것이 무엇인지 모르면 자부심을 가질 수 없다. 그리스도인으로 교회사를 모르면 교회의 정체성을 알 수 없다. 지난 해 캐나다 교회를 방문했다. 기독교학교 교육과정 개발위원회에서 교회역사 책을 출간한 것을 보고 놀랐다.
(4) 일반 신자의 직분의식이 분명해
모든 성도가 직분자! 개혁교회는 공식적 직분자만이 교회에 봉사를 한다고 믿는다. 성경에 근거가 없는 권사를 세우고, 직분자를 많이 세우는 것 한국 교회의 문제가 아닌가! 개혁교회 성도들은 모두가 직분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 자체가 직분이다. ‘기름 부음 받았다’는 것이 제사장으로, 왕으로, 선지자로 직분을 받았다. 그리스도는 왕으로, 자비로우신 대제사장으로, 선지자적 직분자로 사역하셨다. 이는 곧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세 가지 직분자로 세움을 받았다는 뜻이다.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 32문답을 보라. “그분의 기름부음에 참여했으니, 제사장, 왕, 선지자로...... ”
명예로서의 직분? 한국 교회는 직분자를 명예로 보는 것이 문제이다. 많은 목사와 장로들이 면류관을 쓰기 원한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면류관을 약속한 적 없다. 오히려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고 하셨다. 집사를 마구 주고 있는 문제이다. 교회의 반 수 이상이 집사이다. 세례 받고 몇 년 지나 집사 받지 못하면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풍토이다. 이것은 한국 교회의 무서운 속화이다. 오순절 예루살렘 교회는 3천, 5천으로 늘었는데, 이 때 사도들 12명이 다스렸다. 집사는 겨우 7명이었다. 자비 사역이 받은 사명이니, 사도들의 숫자의 반인 7명이 임명 받았다. 개혁교회에는 장로가 많고, 집사는 1/3 혹은 1/4밖에 되지 않는다. 감독자는 많고 집사는 적어야 맞다. 장로가 15명 되어도 집사는 몇 되지 않는다. 명예를 추구하는 한국 교회는 심각 문제가 있다. 모든 신자가 기름 부음 받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 한다.
직분을 호칭으로 삼는 것의 문제 교회 직분을 호칭으로 부르는 것은 세계에서 우리나라 밖에 없다. ‘사장님!’이라고 부르는 한국 문화에서 생긴 것 같다. 한국에는 집사직을 주어야 십일조 내고 충성한다는 얘기 있다. 십일조 내는 사람만이 집사의 자격이 된다, 라는 문구는 물질주의에 따른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것이 주님의 교회라고 할 수 있나? 그러면 어떻게 부를까? 가족 공동체이기에 ‘아버님, 어머님, 형님, 주님’ ‘장로 형제, 집사 형제’라고 부르는 교회도 있다. 가족 공동체로 만들어 가는 것 필요할 것이다.
반교권 철두철미해 개혁교회는 교권을 멀리 한다.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교회의 감독이다. 한국 장로교회는 원리뿐이고 교회 생활은 다르다. 직분 사이에 높고 낮음이 있다. 집사로 있다가 장로가 되면 승진으로 간주하는 경향 있다. 의식하지 않으면 교회의 직분을 계급으로 인식한다. 목사는 장로를 세우지 않고 작은 교황으로 일하려는 문제가 있다. 장로도 순수하게 봉사한다는 생각보다는 군림하거나 목사를 경계하려는 태도가 있다. 교권의식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개혁교회는 출발부터 교권을 멀리 했다. 1571년에 엠던(Emden)에서 첫 총회가 모였는데, 첫 조항에, ‘어느 교회도 어떤 형식으로든 다른 교회를 지배하지 않아야 하면 어떤 직분도 다른 직분을 지배하지 않아야 한다’고 규정했다. 도시 교회가 지역 교회를 지배하거나, 감독 있는 교회가 지역교회를 지배 했다. 목사와 목사, 목사와 장로, 장로가 집사를 지배하는 경향이 있었다. 종교개혁 이 후 개혁교회는 500년 동안 교회는 교권을 허용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아름다운 전통으로 남아 있다. 목회를 하면서 감사했던 것은 목사와 장로의 높고 낮음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장로와 집사의 높고 낮음이 없다. 목사에 대해 존경하고 높이는 것이 있다. 네덜란드에서는 목사를 ‘주님’이라는 단어인 ‘도미네이’(dominee)라고 부른다. 그러나 목사는 서로 동역자라는 관점에서 일한다. 담임목사와 부목사라는 개념이 없다. 이런 원리가 개혁교회를 지배하고 있다. 장로가 목사 위에 군림하는 일이 전혀 없다. 그래서 교회의 직분자는 자신의 책임을 맡아 일하는 동역자일 뿐이다. 동역자라는 의식으로 교회에 봉사한다.
한국에서 당회장을 직책으로 생각하는 것은 문제이다. 당회의 사회권자라는 의미에서 당회장이지만, 회의를 인도하고 법적인 대표로 서명하는 것 외에 다른 어떤 직분자도 아니다. 이 부분은 개혁교회에서 분명하다. 장로교회는 이 점에서 분명하지 않다. 상회와 하회의 구조도 문제이다. 선거운동에서 금권선거가 난무하는 것 이해할 수 없다. 한기총의 문제가 그 예가 아닌가! 목사가 선거운동으로 사용했다는 수억을 어떻게 벌었을까? 교회의 것을 썼다면 도적과 마찬가지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중세 교회의 부패 중 하나가 돈으로 교회의 지위를 사는 것이었다. 개혁교회는 당회만의 치리회이고, 노회, 총회, 대회는 교회의 공동유익을 위한 넓은 범위의 회(Broader Assembly)이다. 대의원들이 모이는 임시회에 불과 하다. 개혁교회는 교권의 자리를 잡을 수 있는 자리를 주지 않는다. 이를 위한 눈치도 보이지 않고 그냥 봉사한다. 1998년 ICRC(고신교회가 회원 교회)가 열렸는데, 본인을 회장으로 세웠다. 10일 동안 회의를 인도했다. 그런 것에 대해 아무런 감각이 없다. 스스로 생각해서 결정한다. 이것이 개 교회의 방식이다. 교권은 무서운 속화를 가져온다. 이런 교권이 자리를 잡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리스도만이 왕이고 영광을 받으시도록 해야 한다.
한국 교회는 정말 변해야 하고 개혁되어야 한다. 장로교회면 장로교회의 정체성을 찾아야 할 것이다. 설교를 달리하고 시류를 따라가지 않아야 한다. 산 물고기는 시류를 거슬러 올라 간다. 개혁교회의 정체성을 찾고 보여 주어야 한다.
[출처] 개혁교회와 한국교회 (The Band of Puritans) |작성자 솔라피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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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 : 역사신학 교수(고신대학교 Th.D)
교회사를 통해 본 교회 개혁과 한국교회의 문제
교회개혁은 우리 시대의 화두가 되었고 범람하는 물결을 이루고 있다.‘교회개혁’을 이루려는 단체도 조직되었고, 문제가 있다고 여겨지는 교회를 항의 방문하거나 피켓을 들고 시위하기도 한다. 많은 이들이 한국교회는 개혁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처럼 한국교회에서 개혁에 대한 요구가 높은 것은 한국교회에는 뭔가 개혁되어야 할 것이 많고, 개혁되지 않으면 안 될 그 무엇이 있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한국교회의 개혁을 말할 때 현실적인 문제에 앞서 보다 근원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되고, 이런 점에서 교회사적 측면에서 교회 개혁의 문제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교회 개혁의 문제를 역사적 안목으로 살펴보고, 이를 기초로 한국교회의 문제와 쇄신에 대해 말해 보고자 한다.
서양 전통에서 교회가 본래적 교회로부터 이탈했고 따라서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인식한 구체적인 최초의 경우는 사도이후 첫 기독교 문서라고 할 수 있는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 of Rome)서신에서부터 나타난다. 96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이 서신에서 비록 클렌멘트는 오늘 우리가 말하는 식의‘개혁’을 말한 것은 아니지만, 기독교 본래적인 사랑과 순종, 겸손이 없는 교회 분규에 대해 비판하면서 저들을 질책하고 그런 삶으로부터 돌아설 것, 곧 쇄신을 요구했다. 클렌멘트는 고린도교회 신자들에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고, 교만, 자만, 탐욕, 투쟁, 그리고 분열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음”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리고는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겸손을 따라야 한다고 강조했다. 클레멘트는 평화와 화목을 위해 목회자들이나 장로들을 존중하고 복종할 것을 권하고, 목회자의 권위와 권한을 강조했다. 이렇게 본다면 교회쇄신의 요구는 교회 역사만큼이나 긴 역사임을 알 수 있다.
특히, 2세기 중반(156-172) 몬타누스(Montanus)는 당시 교회의 속화와 타락을 심각하게 생각했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비록 그의 교회쇄신에의 의지는 이단운동으로 발전하지만 영지주의자들이나 마르키온파 등과 같은 초기 이단들과 달랐다. 몬타누스는 창조주 하나님과 구속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기 때문이다. 2세기 당시 임박한 재림에 대한 기대가 식어지고 교회 안에 안일과 나태가 구체화되자 이에 대한 반발로 보혜사 성령을 강조하였는데, 이것은 성격상 교회개혁적 동기를 지니고 있었다. 비록 현실 교회의 나태와 안일, 그리고 속화 현상에 대한 그의 쇄신의 의지가 오도된 방향으로 전개되어 드디어는 거짓 계시운동(僞經運動)으로 발전하였지만 그는 2세기 당시 교회의 속화현상을 인식했던 인물이었다.
수도(원) 운동(제도) 또한 당시 교회의 타락과 속화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물론 수도원 운동은 자연과 은총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이원론이 이념적 기초가 되었다고 말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교회의 속화와 타락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안토니우스(Anthonius, c.250-c.356)로 시작되는데, 그는 270년 경 재산과 사회적 지위를 버리고 명상에 전념하기 위해 은둔의 길을 갔는데 이것이 수도운동의 기원이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이집트의 금욕주의 운동은 시리아와 소아시아 그리고 서부 유럽에까지 퍼져나갔고, 소아시아에서는 바질(Basil), 나시안주스의 그레고리(Gregory of Nazanzus), 닛사의 그레고리 등에 의해 수용되었다. 이 운동은 아다나시우스(Athanasius, 295-373)에 의해 서방에 소개되었는데, 마틴(Martin of Tours, c. 316-397), 히에로니우스(Hieronius), 제롬(Jerom), 암브로스(Ambrose), 어거스틴에게 영향을 끼치게 된다. 후에는 베네딕트(Benedict of Nursia, 480?-542?)에 의해 서방교회 수도원운동의 기본 토대가 형성된다. 교회의 부패와 타락이 이런 수도원 운동의 전개의 현실적 동기였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고 교회가 세속화되자 이에 대한 반동으로 금욕생활이 강조되었고, 교회가 조직화되고 규율화 됨에 따라 새로운 제도의 신앙생활에 대한 욕구가 수도원운동으로 확산되어 간 것이다.
일반적으로 313년 기독교 공인을 교회가 본래적 교회 혹은 사도적 교회로부터 이탈한 뚜렷한 시기로 보고 있다. 312년 밀비안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콘스탄틴은 313년 1월 {밀란칙령}(Edict of Milan)을 발표함으로서 기독교를 합법적인 종교로 인정했다. 이 당시 제국의 기독교 인구는 약 10% 정도로 파악되는데,(Norman H. Baynes, Constantine the Great and the Christian Church (Oxford: Oxford Univ. Press, 1931), 4. 기독교 공인 이후 기독교회의 신앙과 삶은 현격한 변화를 보여주었다. 이제 박해는 종식되었고 기독교는 로마제국의 보호를 받았고 차츰 차츰 권력의 비호까지 받게 되었다. 예배를 위해서 교회당이 건축되었고, 감독과 설교자들은 국가로부터 급료를 받았고, 교직자의 납세는 면제되었고(319), 주일(主日)은 안식하는 날로 지정되어 그 준수가 의무화 되었다(321). 380년대를 경과해 가면서 기독교는 제국의 국교(國敎)가 되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고난의 길이었고 그리스도인의 삶은 신앙적 용단을 필요로 했으나, 이제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영광과 지위와 명예를 얻는 길이었다. 탄압받던 기독교가 보호받는 기독교로 변화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 속에서 교회는 차츰차츰 신약 교회로부터 이탈하기 시작하였고, 기독교회 안에는 이교적 풍습과 미신, 신비주의적 의식과 거짓된 경건이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 고난과 희행, 겸손과 봉사, 혹은 성결과 거룩과 같은 신령한 가치는 그 의미를 상실하였고, 현세적 부와 권력을 지향하는 인간적 탐욕이 교회를 지배하였다. 이런 점들은 이전의 교회와 구별되는 뚜렷한 변화였고, 차츰 교회의 제도화와 교권체제가 확립되어 갔다. 그래서 4세기 이후의 교회를 이전 시기와 구별하여 ‘콘스탄틴적 기독교’(Constantinian Christianity)라고 부른다. 그래서 4세가 초를 거쳐 가면서 교회는 본래적 교회와 다른 변질된 교회라고 인식하게 된 것이다. 이 점을 달리 말하면 4세기 이전의 교회를 참된 교회로 인식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개혁을 말하는 이들은 4세기 이전의 기독교회, 혹은 사도적 교회를 이상적인 교회로 인식하게 된다. 특히 재세례파는 4세기 이후의 교회 곧, 중세교회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보아 그 의미를 완전히 부정하는 역사의 비연속성(discontinuity)을 주장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개혁의 목표는 313년 이전으로 돌아가는‘복귀’(restitution)였다. 재세례파가 삼위일체론이나 예정론에 대해 부정적인 이유는 그런 교리들이 313년 기독교의 공인 이후 제정된 교리라는 점 때문이었다.
흔히 기독교의 공인이나 국교화 이후의 기독교회를 본래적 교회로부터 이탈한 변질되고 타락한 교회로 말하지만,윌리엄 커닝헴은 교회의 변질은 이미 2세기 초부터 있어왔다고 지적한다. 윌리엄 커닝헴(William Cunningham)은 그의[역사신학](Historical Theology)제1권 7장에서 교회의 부패는 이미 2세기부터 나타난다고 지적하고, 그 징후로 3가지를 지적한 바 있다. 첫째는 고위성직(Prelacy)의 발생과 발전, 둘째는 은혜의 교리에 대한 모호하고도 잘못된 견해의 대두, 셋째는 덕(Virtue)과 성만찬의 효과에 대한 오도되고 과장된 개념의 대두가 그것이다. (William Cunningham, Historical Thology, Vol. 1, 202). 말하자면 2세기 초부터 보여주는 인간중심주의가 교회의 변질과 타락의 시작이라고 지적했다. 이런 점은 2세기부터 서서히 나타나는 감독정치 제도와 괘를 같이 한다. 독일의 교회회사가 슈미트(K. D. schmidt)는 95년경부터 카톨릭교회가 시작되고 200년경에는 상당한 정도의 확고한 조직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있는데, (K. D. Schmidt, Kirchengeschichte, s. 73.) 그도 1세기 말에서부터 교회의 제도화가 시작되었다고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의 점을 고려해 볼 때 교회의 속화나 타락은 중세시대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가 태동한 이후부터 줄 곧 제기된 문제임을 알 수 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제도이지만, 사람들로 구성된 공동체”(Divine institution, human constitution)이기 때문에 지상의 교회는 완전하지 않고 완전할 수 없다. 그래서 교회의 역사에는 “영적인 비상(飛上)과 부흥이 있었는가 하면, 쇠퇴와 퇴락(頹落)의 날들도 없지 않았다. 마치 산등선을 넘으면 계곡이 있고, 계곡을 지나면 다시 산등선이 나오듯이 교회의 역사도 개혁과 타락, 부흥과 쇠퇴 등 갱정(更正)과 쇠락(衰落)의 긴 여정은 지내왔다.”(이상규, {교회개혁과 부흥운동} (SFC, 2004), 8. 교회의 역사를 보면 영적 부흥과 쇠퇴는 “때로 우리 믿음이 올라가기도 하지만(up) 때로 우리의 믿음이 내리막길로 내려가는 것(down)과 같다는 흑인영가의 가사처럼 부침(浮沈)의 역사를 겪어왔다.
교회 역사에는 영광과 오욕이 반복되었고 굴곡과 요철이 있어왔다. 이런 영욕의 자취는 외국교회의 역사만이 아니라 오늘 한국교회의 현실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우선 정리할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실이다. 첫째, 지상의 교회는 완전할 수 없으며, 완전한 교회란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 교회의 쇄락과 부패 혹은 오욕의 자취는 근본적으로 교회를 구성하는 인간의 타락에 근거한다. 셋째,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하며, 지상의 교회가 완전할 수는 없지만 끊임없이 완전한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1세기 사도시대의 교회를 가장 성경적인 기독교회로 간주하고 이를 가장 이상적인 교회로 인식하고 있다. (이 점에는 일면 타당성이 있지만 반드시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특히 교회의 제도와 관련해서 볼 때 더욱 그렇다. 사도시대의 교회가 어떤 제도를 가졌는지 교회 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지침이나 모범이 없다. 사도 시대의 교회는 이제 성립된 교회로서 제도면에서 조직화되어가는 과정에 있었다.) 그래서 초기 사도적 ‘교회상’으로부터의 이탈을 흔히 교회의 속화 혹은 타락이라고 간주해 왔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4세기 이후 교회관, 교회구조에는 많은 변화가 수반된다. 특히 평신도와 교직자간의 구별이 뚜렷해지기 시작하였고, 교회는 이 두 계층으로 구분되기 시작한다. 점차 교직자들은 교권을 행사하게 된다. 수도생활이나 금욕이 박해 하의 순교에 해당하는 영광스러운 일로 인식되고 수도승들이 출현하게 된다. 이 시대는 평신도와 교직자 간의 구별이 뚜렷해졌을 뿐만 아니라 교직자들 간에도 계층화가 나타났다. 이 계층화는 신분상의 계층화만이 아니라 수입에도 현저한 차이가 있어 고위 성직자들이 거의 생계를 유지할 정도였고 구두수선공보다 못한 급료로 살아갔다. 가난한 성직자들은 가죽 제조업, 직조, 제조업, 버터와 치즈 행상을 하기도 했다. 로마교회의 수위권이 인정되면서 로마감독이 교황권을 주장하게 되, 우리가 흔히 말하는 중세로 접어들면서(590), 교황권의 세속권에 대한 우위를 주장하게 되고 교회는 절대권력으로 군림하여 소위 황제교황주의(Caesar-papim)가 대두한다.
첫째, 교리와 신학의 변질이다. 오도된 교리와 인간중심의 신학, 공로사상, 거짓된 경건과 신비주의는 이 시대의 변질된 신학의 교회관의 일면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익숙하게 알려져 있으므로 여기서 재론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중세교회의 가장 중요하고도 근원적인 문제는 신학적 혹은 교리적 변질이지만 이 점에 대해서는 이미 많이 논의 되었으므로 여기서는 논외로 하였다.)
둘째, 교회 제도나 구조에 있어서의 비신학적 혹은 비윤리적 성격을 들 수 있다. 계층적 교권체제, 제도상의 문제등이 그것이다. 예컨대, 성직자들을 윤리적이지 못한 행위를 정당화 하는 ‘겸직제도’(pluralism)나 ‘부재직임제’(absenteeism), 성직자들의 취첩을 묵인하게 해 주었던 세금제도(Concubinage fee)등이 그것이다.
셋째, 부에 대한 지나친 탐욕이었다. 물질적 부요(富饒)에는 영적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는데, 교회 지도자들이 부에 탐닉하엿다는 말은 교회가 세속적 가치관을 다스릴 통제력을 상실했음을 의미한다. 교회 지도자들의 부에 대한 탐욕은 정도를 넘어섰다. 예컨대, 교횡 보니페이스 8세(Boniface VIII, 1294-1303)의 교황 관저에는, 공식기록에 따르면, 48개의 루비, 72개의 사파이어, 45개의 에머랄드, 66개의 커다란 진주들이 박혀 있었다고 한다.(부루스 셜리, [현대인을 위한 교회사], 277) 돈 만드는 천재로 알려진 요한 22세 (1316-1334)는 각종의 징세제도를 창안하여 교회 질서를 극도로 문란 시켰고, 성직을 매매하고 면죄부를 판매했다. 넷째, 교회가 세속 권력을 탐닉했다는 점이다. 영적 공동체인 교회가 권력 지향적 계급체계로 변모되었고, 교회 지도자는 세속권력을 추구했다. 교황은 교회의 수장으로만이 아니라 세속까지도 다스리는 교황이었다.
이렇게 교회 지도자들이 세속적 가치인 부와 권력을 움켜지게 되자, 도덕적 윤리적 표준을 상실하였고 극도의 문란한 일면을 보여주었다. 예컨대, 종교개혁 직전의 교황이었던 알렉산터 6세(1492-1503)는 교회의 관행과 규율을 무시하고 극도의 타락과 방종한 생을 살았던 대표적인 인물이다. 교황이 되기 전에도 몇 사람의 정부와 3남 1녀를 두고 있었으나, 교황이 된 후에 7명의 자녀를 더 얻었다. 1447-1517년 어간의 교황 중 절반이 사생아를 두었고, 15세기 말 콘스탄츠교구의 경우 매년 약 1,500명의 사생아가 출산했다. 스코틀랜드의 성(性) MaTaggart는 ‘사제의 아들’(son of the priest)이란 뜻이고, MacNabb이라는 성은 ‘수도원장의 아들’(son of the abbot)이란 뜻에서 기원했다. 독일의 여러 도시에는 소위 여성의 집(Frauenhausen)이라는 환락가가 있었고, 여성의 주 고객은 성직자들과 고위 관리였다. 교회의 윤리적 부패는 심했는데, 이런 상황에서 16세기에는 반(反)성직주의 사상이 심화되고 있었다.(이상규, 19ff)
이런 도덕적 타락에 대해서는 카톨릭 측에서도 인정했다. 즉 교황 아드리아누스 6세(Adrianus VI, 1522-1523)는 신성로마제국의 뉘른베르크국회(1522-23)에 파견한 교황사절 프란체스코 치에레가띠 추기경에게 보낸 훈령에서 “루터 이단으로 교회가 받는 어려움의 책임은 성직자들, 특히 교황청과 그 성직자들에게 있다.”고 시인했다. 이 훈령에서는 “교회 안에는 가증할만한 폐습이 많이 있으며, 이러한 병폐들은 교황을 포함하여 성직자들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각자는 자신의 잘못을 자각하고 반성해야 한다.”고 했다.
독일의 에밀 부른너(Emil Brunner)는 ‘에클레시아’가 ‘키르헤’(Kirche)로 바뀌면서 교회가 부패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신앙공동체가 제도화 되면서 본래적 교회관을 상실했다는 주장이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제국의 영토에 살았으나 정신적으로는 그 사회로부터 이민을 떠난 이들이었다. 기독교 공동체는 심리적으로 그 시대를 초월해 사는(living in an imagined exile)이들이었으나 로마제국의 질서에 정주해 가면서 본래적 교회로부터 이탈했다는 것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을 ‘파로이코이’(헬), 곧 ‘나그네(들)’라고 불렀다. 베드로전서 2장 11절, “나그네와 행인 같은....”에서 처음 사용된 이 말은 기독교인들의 살므이 방식과 현실 세계에 대한 태도를 반영하는 용어였다. (유사한 용어로 파로이키아(벧전 1:17), 파레피데모이(행인,2:11)등이 사용되었다. 고대 헬라세계에서 사용된 파로이코스는 법적인 용어었다. 즉 시민권이 없이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을 가리키는 용어였는데, 이에 해당하는 라틴어가 pregrinus였다. 영어의 필그림(pilgrim)은 여기서 기원하였다. 이 말속에는 비영속성, 일시성, 잠정성등의 의미가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교적인 세계에서 이질성(heterogeneity)을 인식하고 이 세상의 가치와는 구별된 삶을 지향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구원사적인(salvation-historical)중요성을 지니는 구별된 방식의 삶을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4세기를 거쳐 가면서 나그네 공동체가 4세기 이후 안주 공동체로 변모되면서 교회관의 변질이 나타나고 교회가 속화되고 타락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듯이 이 땅에서는 나그네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 땅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이 땅의 가치와 이 세상의 조류를 따르다 보니 교회의 본질에서 이탈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중세교회의 문제는 결국 교회지도자, 더 직접적으로 말하면 성직자들의 문제였다. 우리가 교회가 부패했다고 말할 때, 이 말을 보다 직접적으로 말하면 교회지도자가 부패했다는 말이고, 좀 더 정직하게 말하면 성직자들이 부패했다는 말이다. 결국 중세교회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볼 때 성직교육의 부제와 성직자의 양산이었다. 이것이 중세교회가 부패할 수 밖에 없었던 인적 요인이었다. 티르나겔(N. S. Tiernagel)에 의하면 16세기 초 유럽 인구 중 85%가 농민, 노동자였고, 10%가 통치 그룹 혹은 귀족이었고, 성직자가 5%에 달했다고 한다. 1500년 당시 세계 인구를 약 5억으로 추산하는데, 유럽의 인구를 1억으로 본다면 성직자 수는 무려 5백만 명에 달한다. 16세기 초 독일 지방 쾰른(Cologne)만 해도 무려 5,000명의 사제들과 수도사들이 있었다. 전 독일에 수도사들과 수녀들의 숫자는 무려 1백 50만 명에 달했다. 어떤 지역은 인구 30명당 1명의 성직자가 있었다고 한다. 이럴 경우 이들을 성직자로 구별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성직자의 과대 배출은 성직자의 지적, 영적, 도덕적 수준을 저하시켰고, 이들을 상호 경쟁적으로 만들었을 뿐 만 아니라, 성직자의 권위와 신뢰를 상실하게 만들었다. 또 성직자의 양산은 성직자들간의 경제적 불균형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성직자 수의 급증은 성직자들의 혜택을 감소시킬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상호경쟁적인 관계가 형성되었고, 어떤 성직자들은 어마어마한 부를 향유하고 사치와 방종을 일삼았으나, 다른 한편의 성직자들의 빈곤과 가난은 극에 달했다.(이상규, 20.) 중세교회의 근원적인 문제는 결국 지도자, 곧 성직자들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제도나 조직의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사실은 제도나 조직도 그 제도와 조직을 이끌어 가는 사람들에 의해 좌우된다. 그러기에 교회의 부패가 극에 달했던 중세말기에 나온 유명한 경구가 “성직자의 삶은 평신도의 복음이다”(Vita clerici est evangelium laice)라는 말이었다.
4. 한국교회 무엇이 문제인가?
1960년대 이후 한국교회는 ‘성장’이라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국내외적으로 상당히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 왔으나, 동시에 ‘성장’이라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다른 많은 가치를 포기하기도 했다. 다시 말하면 수적인 성장이라는 한 가지 가치를 절대적 가치로 받아드리다 보니 성장 아닌 다른 것들을 부차적인 것으로 경시하거나 무시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그 결과가 건실한 신학에 대한 무관심, 교회의 명분 없는 분열, 교회공동체의 도덕적 윤리적 계도성의 상실, 치리에 대한 무관심, 기복주의적인 설교, 무분별한 신학교의 난립과 신학교육의 부재 등과 같은 결과를 가져왔고, 한국교회의 혼란을 초래했다.
개혁자들의 주장처럼 신학은 교회를 이끌어 가는 터이자 축이었다. 건실한 신학이 없거나, 신학이 잘못되면 모든 것이 잘못되지만, 한국교회는 신학 그 자체를 무시하거나 경시했다. 또 ‘신학 없는 교회’ 나 ‘교회 없는 신학’을 추구하는 양극단은 한국교회 안에 극단적인 현상을 가져왔다. 즉 교회가 안중에 없는 신학운동은 극단적 자유주의 혹은 종교다원주의 신학으로 발전하여 기독교의 고유성과 독특성을 파괴하고 있고, 신학 없는 교회운동은 극단적인 주관주의 혹은 신비주의 운동으로 발전하여 한국교회를 게토화 하고 있다. 심지어 ‘일천번제’(一天燔祭)라는 기상천외한 헌금관행이 자연스럽게 받아드려지고 있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종교적 권위주의 또한 한국교회의 커다란 문제점이다. 당회, 노회, 혹은 총회가 지나치게 권력구조화 되었고, 세속 정치계와 방불할 정도로 엽관제도화(spoil system)되어 가고 있다. 그래서 교회구조나 조직이 복음 전파를 위한 형식이 아니라, 복음운동을 방해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이런 점들과 함께 교회 지도자들의 도덕적이지 못하거나 비윤리적인 일들도 심각한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심심찮게 보도되는 교회나 교회지도자의 비리는 교회에 대한 신뢰성을 상실하게 만들고 사회적 지탄을 받게 한다. 이런 현실에서 한국교회 쇄신의 길을 없을까?
성직자의 자기 혁신
오늘 우리가 한국교회가 부패했다고 말할 때 그것은 지도자들이 부패했다는 뜻이다. 역으로 말하면 한국교회를 쇄신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도자들의 자성과 자각, 그리고 자기 쇄신이다. 앞에서 지적한 한국교회의 문제들은 교회지도자들과 직 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예컨대 한국(장로)교회의 분별없는 분열은 지도자들에 의해 자행되어 왔고, 공인이자 지도자로서의 바르지 못한 삶이 한국교회가 지탄받았던 이유였다. 따라서 한국교회를 쇄신하는 가장 중요한 점은 지도자들, 특히 성지자들의 자기 혁신이 가장 중요하다. 특히 교회지도자나 목회자가 권력과 물질과 명예로부터 자유할 때 한국교회에서 문제시되는 상당한 문제를 해결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곧 성실한 목회활동, 규모 있는 삶, 투명한 재정 관리와 집행, 깨끗한 은퇴 등은 교회의 불필요한 잡음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성직자에게는, 불교식 용어를 빌리면, 진정한 출가(出家)정신이 있어야 할 것이다. 어느 시대든 교회 쇄신의 가장 중요한 길은 성직자들의 삶이었다. 중세교회의 경우처럼 한국교회에서도 성직자의 과대베출은 성직자의 질적 저하와 교회 난립, 그리고 분열 등 여러 문제를 야기하는 원인이 된다.
신학교육의 제고
한국교회 쇄신에서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신학교육의 쇄신이다. 앞에서 중세교회 타락의 근원적인 원인은 성직자의 과대 배출과 성직교육의 부제를 말한바 있는데, 이와 동일한 환경이 오늘 한국의 상황이다. 신학교육의 내용은 차치하고 우선 신학교육기관의 정비가 시급한 현실이다. 신학교의 난립은 교회 분열과 상관있다. 현재 한국에는 약 3백 개에 달하는 무인가 신학교 혹은 신학교육기관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중 상당수는 교단적 배경이 없거나 불분명한 사설 신학교이며, 많은 신학교들은 신학교육적 소명이나 사명의식을 의심케 하는 운영상의 문제점을 노출시키고 있다. 무자격신학교는 한국교회 문제의 진원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많은 신학교들이 목회자 양성이라는 고유한 목적만을 가지고 운영되고 있는지를 솔직하게 반성해 보아야 한다. 도리어 ‘신학교’라는 특수성을 이용하여 다른 목적을 추구하는 경우가 적지 않을 것이다. 현재 한국에서는 연 2천500명에서 3천명의 목회자가 배출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정규학교가 아닌 경우 신학교육에 대한 감독기관이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건실한 신학교육의 부재는 한국교회의 수준을 격하시키고 천박한 기독교로 전락하게 만든다. 무인가 신학교, 아니 무자격 신학교가 문제시 되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무자격 교역자를 양산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한국교회를 병들게 하는 자기 파괴적 요인이 된다는 점 때문이다. 합리적 사고, 건전한 평가와 판단 능력, 부분과 전체에 대한 반성적 성찰 능력은 목회자적 자질과 인격과 더불어 정신적 지도자의 필수적 조건이라고 볼 때 오늘의 무자격 신학교를 통해 배출되는 ‘교육받지 못한’교역자들이 가져올 부정적 기능은 대천덕 신부의 ‘미숙한 신학의 위험성’이란 논문에서 잘 지적된 바 있다.
신학교육에 대한 제고와 함께 목회자 양성 방식에 대해서도 고려해 볼 점이 있다고 생각된다. 스펄전이 말한‘이중 소명’ 정신에 부합되게 목회자 양성은 신학수업을 지향하는 본인의 자원과 함께 교회적 추천을 받도록 하는 새로운 목회자 양성 방식을 고려해 봄직하다. 현재는 자신의 자원에 의해 신학교육을 받게 되고 그 후에 교회의 청빙을 소명으로 간주하지만, 필지는 교회적 추천을 받은 자가 신학교육을 받도록 하고, 교회적 후원 속에 목회자가 양성되어야 보다 합리적인 목회자 양성 방안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어떻든 신학교육의 재고는 한국교회를 쇄신하는 중요한 길이 될 것이다.
설교의 갱신
한국교회를 쇄신하는 또 하나의 길은 설교의 갱신이다.(한국교회 설교 관행과 쇄신에 대해서는 이상규, “한국교회에서의 설교, 그 역사와 평가,” [헤르메네이아 투데이] 30호(22005년 봄호), 52-69.) 설교란 바로 ‘그 시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하는 행위라고 볼 수 있는데,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것이 바로 설교이다. 따라서 설교의 갱신은 한국교회의 쇄신을 가져올 수 있는 중요한 방편이 된다. 현재 한국에는 약 5만여 개의 교회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한국교회의 정기적인 설교자는 약 8만명에 달한다. 이중 장로교회는 전체교회의 68%를 차지하고 있고, 감리교회는 13%에 달한다.
1960년대 이후 한국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는 ‘성장’이었는데, 전도행위가 하나님의 나라 건설이라는 넓은 의미의 전도명령의 수행이라기보다는 개 교회 성장에 보다 큰 강조점을 둔 교회의 수적 확장을 의도한 것이었다. 그래서 설교도 현세적 안녕이나 물질적 축복, 소원성취를 위한 방편으로 강조되어 기복적 설교가 특징이었다. 구약은 한국특유의 기복신앙의 관점에서 축복과 저주라는 맥락에서 이해되었고, 이를 위한 모범으로 예화가 인용되었다. 이러한 경향 때문에 설교는 흉(凶)과 화(禍)를 피하고 길(吉)과 복(福)의 추구를 신앙의 이상으로 삼기 때문에 차원 높은 생활윤리나 공의(公儀), 가치의식, 혹은 삶의 문제를 제시하지 못했다. 기독교 신앙을 양재(讓災)나 치병(治病)등과 같은 측면으로만 본다면 본래적 기독교회가 가르치는 이타적(利他的)성격은 크게 훼손되고 말기 때문이다.
1980년대부터는 구속사적(heilsgeschichtlich)설교가 소개되고, 강해설교가 강조되기도 했으나 한국교회를 움직이는 소위 대 교회의 설교는 여전히 성경의 세계와 현대 사이의 역사적 문화적 간격(then and now)을 무시하는 ‘모범론적’ 설교가 특징을 이루고 있고,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는 풍유화(諷遊化, Allegorizing)와 신령화(神靈化, Spiritualizing)가 적지 않다. 구약본문에 대한 상대적 무관심과 함께 비 교리적 설교가 유행한다. 무엇보다도 성경원전의 의미를 천착하려는 진지한 노력이 부족하다. 특히 한국교회 강단에서 얼마나 좋은 설교를 할 것인가? 혹은 얼마나 감동적인 설교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본분의 가르침을 바르게 드러내는 ‘정직한’ 설교일 것이다. 정직한 설교를 하기 위해서는 성경 본문을 신학적으로 헤아릴 수 있는 건실한 신학교육과 성경 언어에 대한 이해일 것이다. 이런 진지한 노력이 동반될 때 한국교회 강단이 새로워지고, 이런 일련의 노력이 근원적으로 한국교회를 갱신하게 될 것이다. 종합적으로 말하면 한국교회 강단의 쇄신이 이루어 져야 한국교회가 변화될 수 있고, 이를 통해서 이 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문제를 진지하게 선포될 수 있을 것이다. 설교야말로 한국교회를 갱신하는 최선의 길이다. 이런 점을 특히 강조했던 집단이 청교도들이었다. 청교도들에게 있어서 설교는 교회 개혁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다. 한국교회에서 설교의 갱신은 시급한 과제가 되었다.
교회구조와 제도의 문제
한국교회 갱신의 또 한 가지 측면은 교회 제도나 구조의 문제이다. 우리는 교회의 구조나 제도에 대해 무관심하기 싶다. 그러나 이 점도 결코 경시될 수 없다. 루터는 로마 카톨릭에 대한 반발 때문에 교회를 ‘성도의 모임’(communio sanctorum)이라는 개념으로 말함으로서 교회를 제도임을 강조하지 않았다. 루터파는 이 제도면에 대한 소홀 때문에 결과적으로 중세 카톨릭의 감독 제도를 그대로 답습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예배 의식도 소극적으로 개혁한 것을 볼 수 잇다. 반면에 칼빈은 교회란 성도들의 모임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기관(institution)임을 인식했기 때문에 로마 카톨릭과는 다른 교회제도를 생각하게 된 것이다. 칼빈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제도로서의 교회의 개념이 성도의 모임으로서의 교회의 개념보다 선행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 있고, 그리고 이에 응답하는 신자들의 모임이 있어서 교회가 성립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고려해 본다면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도 교회제도는 중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서양 기독교 전통에서 전수받은 전통을 중시하면서도 우리 한국교회가 정한 제도, 교회구조, 그리고 각종 규정에 있어서도 갱신의 여지가 없는지를 살펴봐야 할 것이다.
목사의 직분을 중요하게 여기는 장로교 전통 때문에 우리에게는 성직주의(clericalism)나 중세적인 계층구조로 빠져들 위험이 항상 있다. 또 한국적인 문화적 상황에서 교회구조를 계급적이거나 지나치게 권위적인 구조로 이해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 이런 점들에 대해서도 신학적 정리가 필요할 것이다. 현실적으로 제기되는 문제이지만 교회가 정한 규정이나 관행에서도 쇄신의 여지가 없는가를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일예를 든다면 공로목사, 공로장로, 혹은 명예권사 등과 같은 제도가 정당한가를 검토하는 것이다. 교회 역사적으로 보는 정치적인 제도나 교회 구조와 함께 한국 교회의 고유한 제도들에 있어서도 개혁과 쇄신이 필요할 것이다.
이상에서 말해왔듯이 한국교회 개혁의 가장 중요한 것은 교회지도자 곧 목회자의 의식이다. 신학적인 분별력, 균형 잡힌 윤리의식, 보편적인 사고, 상식과 교양, 동양적 예(禮)와 덕(德)이 어우러질 때 한국 기독교의 쇄신은 가능할 것이다. 신학교육, 설교, 바른 가치의식 등은 다 목회자와 관련되어 있다. 오늘 한국에서 교회개혁을 말하는 이들은 교회의 구조적인 문제 혹은 현실적인 문제에 집착하는 것 같다. 목회자의 세습을 반대한다든가, 조용기목사 은퇴반대를 반대한다든가 하는 문제는 사실은 보다 근원적인 문제에 대해 무관심한 체 지극히 지엽적인 문제에 매달리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사실 교회의 제도나 구조, 또 한국교회가 정한 제도들은 따지고 보면 그 제도를 만든 인간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이미 하우츠바르트(B. Goudzwaard)가 지적했지만 구조나 제도란 것은 그런 구조나 제도를 고안한 인간의 마음에서 연유하기 때문에 그런 구조에 집착하기 보다는 그런 구조를 만든 인간이 어떠하냐가 더 중요하다.
교회사가 보여주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은 나그네 의식으로 사는 것이다. 중세교회가 ‘나그네성(性)’ 혹은 ‘나그네 의식’을 상실하고 이 역사현실 속에 안주하려고 했을 때 지상의 제도나 지상의 세력과 타협했던 역사적 경험은 우리에게 나그네적 삶의 방식을 권장해준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삶 속에 깊이 새겨준 삶의 방식을 이 땅에서는 나그네란 의식이었다. 이 땅에 살면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게 함으로서, 이 땅에서는 나그네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고, 이 땅의 가치들, 곧 권력, 명예, 물질로부터 자유하는 삶을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기독교의 타락은 그 정체성 상실에 있었다.”는 좌파적 철학자인 폴라니(Karl Polanyi)의 말은 진실이다. 마지막 한 가지 고려할 점은 한국교회 일각에서 개혁에 대해 말하지만, 정작 자기 자신은 개혁의 대상이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자신은 개혁의 주체이며, 상대는 개혁의 대상인 듯이 행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교회가 개혁되어야 한다고 말할 때 ‘한국교회’를 대상화 혹은 객관화하고 비판하지만, 정작 자기 자신도 한국교회의 일원이라는 점을 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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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준 목사 저녁시간이네요... TV를 틀다가 CTS에서 여자목사가 나와 설교인지 신세한탄인지 모를 비슷한 것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자목사 제도에 대해 생각이 들었다기보다, 성경이 금하고 있는 것을 버젓이 행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도, 하나님의 권위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이 한국교회가 무섭습니다. 여자 목사들은 "교회에서 여자가 가르치지 말라" 는 본문을 어떻게 설교할까요? 로마 가톨릭 교회가 성상을 만들기 위해, "하나님을 형상화하지 말라"는 구절을 가르치지 않듯, 이제 우리도 여자들에 관한 설교는 하지 말아야 할까요? 어제는.....교회 사무실에서, 온갖 "주일" 들로 뒤범벅이 된 교회달력을 보았습니다. 선교사 주일, 장애인 주일, 환경 주일....어버이 주일, 어린이 주일, 스승의 주일... "주일"이란 "주의 날" 이요,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거늘, 왠 사람의 날들이 이리도 많단 말입니까? 어버이 주일에, 어버이의 사랑을 "설교" 하면서, 그것을 어떻게 "하나님께 예배한다" 할 수 있는지요. 중세교회가 1년 365일 중, 성자숭배와 관련하여 거의 빈 곳이 없을 정도로 달력의 모든 날을 "모모 성자의 날" 로 도배를 한 것이, 지금 한국교회와 무에가 다릅니까? 스테인드 글라스로 찬연한 빛의 효과를 연출하고, 성가대의 천정에 울리는 배음을 이용해 음악적으로 신도들의 감정을 조종하고, 지구상에 가장 커다랗고 화려한 건물들을 지었던 중세교회와 700억짜리 예배당에서, 온갖 치장으로 교회를 세우고, 음악과 긍정의 힘으로 사람의 정서를 휘어잡으려 하고 있는 한국교회는 무엇이 다릅니까? 과연, 한국교회는 어떤 면에서 종교개혁의 후손이라 할 수 있습니까? 어느 방향에서 보아도, 한국교회는 로마 가톨릭의 후예이지, 종교개혁의 후예가 아닙니다. 한국교회가 앞으로 어떻게 될까를 생각하고 기도하면 불빛이 전혀 보이지 않는 암흑 속을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청빈과 간소함을 자랑으로 여겼던 종교개혁의 전통은 부자가 되기를 갈망하는 성도들과 그것을 부추기는 목사들, 그리고 정권과 결탁한 세력있는 신자들 앞에 완전히 허물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해야 할 강단은, 하나님의 엄위로우신 말씀이 드러나기 보다는, 사람들이 휴일에 와서 기력을 충전할 수 있도록 돕는 메시지들과 간증과 예화와 유머로 범벅이 되었습니다. 목사는, 어느샌가, 자기에게 맡겨진 양들의 영적인 상태를 염려하고, 그들을 신앙적으로 성숙시키는 데 목적을 두는 목자라기보다, 독재를 휘두르는 기업의 CEO가 되었습니다. 교회가 외형적, 물량적으로 거대기업처럼 성장하는 것이 많은 목사들의 숙원이 되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삶을 닦고, 가다듬고,하나님 앞에서의, 그리고 말씀 안에서의 진실한 삶이란 어떤 것인지를 배우고, 연마하고, 돌이켜 보기 보다는, 업적주의에 빠져, 많은 사람을 전도하는 것에, 교회에서의 일들(봉사가 되었건 직분이 되었건)을 얼마나 성공적으로 이루어 내느냐에 사활을 거는 모냥새가 되었습니다. 본질은 사라지고, 거대외형과, 업적주의, 그리고 하나님은 간데없는 인본주의만 남았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이런 교회의 모양에 이미 젖어버린 사람들과 말이 통하지 않는 정도의 시대가 이미 되어 버렸습니다. 같이 "신앙"을 이야기하는데, 신앙의 정의가 다르고, 같이 "지복"을 이야기 하는데, 복의 내용이 다르고, 같이 "하나님께 충성"을 이야기하는데, 어디에 대한 충성인가가 다릅니다. 말 그대로......서로 다른 종교를 믿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신앙은 제가 믿고 있는 신앙과 거의.....다른 종교입니다. 저는 두렵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 땅의 교회가 두렵습니다. 하나님을 무서워하지 않는 이 땅의 목사들이 두렵습니다. 아........ 주님! 이 땅의 교회들을 어찌하시렵니까? 아........ 주님! 회복이란 것이 가능하기는 한 것입니까? 아....... 주님! |
출처 : 조에 신학연구원
캐나다 개혁교회의 예배와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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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어가면서
먼저, 장로교회와 개혁교회는 하나님에 대하여 믿는 내용이 거의 같습니다. 즉, 두 교회가 고백하는 신앙고백의 내용이 같다는 말입니다. 둘째로, 우리 고신교회는 장로교회의 신앙 전통과 함께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신앙 전통에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 예로, 1980년부터 1989년까지 약 10년간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목사 2명이 저희 신학교에서 교수선교사로 섬기면서 개혁교회의 신앙과 생활을 많이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저희 교회의 많은 목사님들이 개혁교회 신학교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와 교수와 목사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셋째, 캐나다 개혁교회는 네덜란드 개혁교회에서 캐나다로 이민을 떠난 성도들이 세운 교회입니다. 그래서 캐나다 개혁교회는 전통적인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예배와 생활의 좋은 유산을 잘 전수받은 교회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들의 예배와 생활을 우리의 예배와 생활과 비교해 볼 때 우리가 배울 점들이 있습니다. 배울 점이 있기 때문에 단순히 외국 개혁교회에 대한 환상 속에서 그들의 모습을 그대로 흉내 내자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가 물려받지 못한 그들이 가진 신앙의 좋은 유산을 알고서 우리 각자의 삶 속에서, 그리고 가정과 교회 속에서 우리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가자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세대뿐만 아니라 우리의 후손들에게는 더 좋은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도록 하자는 말입니다. 바로 이 점이 오늘 강의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 본론
바로 이 화란 자유개혁교회가 캐나다 개혁교회의 어머니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성경과 신앙고백에 근거한 올바른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치는 가운데 세워졌습니다. 이처럼, 그 교회의 시작은 고신교회의 시작과 비슷한 상황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일제시대 때 한국장로교회가 일본 우상 신에게 절하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며 지었던 죄에 대해 회개를 외치며 교회의 개혁을 시도할 때, 한국장로교총회가 우리교회의 선배들을 교권을 이용해 교회 밖으로 쫓아내버린 것입니다. 이런 유사점이 화란개혁교회와 우리 고신교회가 자매관계를 가질 수 있었던 이유 중에 하나가 되기도 했습니다.
2.교회가 감당하는 일
2.2.선교
이들은 ①라디오 선교, ②원주민 선교, ③해외 선교, ④도시 선교, 그리고 ⑤세계 구제 기금 등을 통해 선교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3.Ancaster Church에서의 교회 생활
3.2.예배와 예배 순서
그러나 그는 예배가 언약 회중들의 모임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단지 주일 아침에 예배 전에만 기도할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집에서 주중에 예배와 설교를 위해 많이 기도할 것과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준비를 좀 더 일찍, 좀 더 많이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G. Van Dooren, 36-37쪽). 실제로 그 성도들은 가족들이 식사를 할 때마다, 언제나 교회의 예배와 설교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을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우리나라처럼 예배 전에 묵도라는 것을 안 한다고 해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예배당에 들어와서 기도하고, 또 매일 식사 때마다 주일 예배와 설교자를 위해 기도하며 예배를 준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론 그는 교단 신학교가 아닌 다른 신학교에서 이미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기에 대독을 할 정도의 능력은 있습니다. 청소년과 20대 중반까지 방탕하게 살다가 10년 전쯤에 큰 사고로 두 다리를 잃고서 자신의 죄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고 신학을 공부하고 지금은 병원 선교를 하고 있습니다. 늘 연설하는 사람이니 대독 설교도 다른 사람보다 잘 할 수 있음이 분명하지만, 그가 장애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저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의 장애인에 대한 시각과 그들의 시각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 방식은 우리한국교회가 하는 방식과 비슷합니다. 첫 번째 방식으로 할 경우에 시간이 많이 걸리고 필요이상으로 말이 반복되는 것과 위생상의 문제 때문에 2003년 7월부터 성찬 방식을 바꾸었습니다. 성찬상이 하나만 준비되고 장로들이 회중 앞에 놓인 상 앞에 앉아 떡과 잔을 나누고, 동시에 회중들도 떡과 잔을 나누어가진 후에 다같이 먹고 마십니다. 한국교회가 성찬을 시행하는 방식과 비슷하지만, 모든 성도들이 떡을 가지고 개인잔을 가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일제히 마시는 것이 좀 달랐습니다. 교회의 하나됨을 위한 상징적인 행위였는데, 괜찮은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성찬의 방식이 바뀌기까지 이들은 1년 이상을 토론을 해왔습니다. 2001-2년 사이에 출간된 캐나다 개혁교회의 잡지들을 보면 성찬식에 대해 얼마나 깊은 토론이 이루어졌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3.3. 교육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학생 수에는 상관없이(한명을 보내든 10명을 보내든 학비는 똑같다는 말입니다) 학교에 매달 돈을 지불하는데, 어떤 집의 경우 우리 돈으로 100만원이상 지불하기도 했습니다. 학교의 학사일정이나 각종 행사에 관해서는 교회 주보를 통해 매주 소식을 접할 수 있습니다. 교리문답 교육을 위해서 목사와 1명의 중등학교 선생님이 학년별, 나이들로 나누어 주중에 실시합니다.
3.5. 장로들의 심방
시험관은 청빙한 교회가 속한 노회의 각 교회에서 2명의 대표를 파송하는데, 주로 목사1명과 장로1명이며, 목사가 공석인 교회는 2명의 장로가 시험관으로 파송됩니다. 시험은 모두 구두로 질문하고 답하는 식이고, 석의 논문과 설교 1편을 원고로 제출하고 설교를 해야 합니다.
다시 1년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지만, 그를 잘 아는 몇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는 청빙받기 어려울 것이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인격적인 면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저는 그 사람을 본 적이 없어 왜 그런지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그를 가르친 교수님 한분과 함께 공부를 했던 한 학생의 말은 그가 교회로부터 청빙 받을 것에 대해 비관적이었습니다. 또 청빙받기를 기다리는 본인도 1년이 훨씬 지나도 청빙을 받지 못하자, 새로운 일자리를 찾았다고 들었습니다. 여기서 저는 두 가지를 말하고 싶습니다.
첫째는, 교회가 목사를 청빙하는 일에 대해 아주 신중한 태도를 취한다는 점입니다. 교회에 목사가 없어 어렵지만, 신학교를 졸업한 자라고 무조건 목사로 청빙하지는 않는다는 점이지요. 교회 목사로서 그의 신앙과 인격적인 면까지 철저히 확인하고 신중한 자세로 목사를 청빙한다는 점은 우리교회가 본받아야 할 점입니다.
두 번째는, 청빙 받지 못한 자가 취한 순종하는 태도입니다. 교회의 말씀 사역자가 되기 위해 어렵게 시작해서 힘들게 신학공부를 마치고도 교회의 부름을 받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는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목회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곧 다른 길을 찾아갔습니다. 자신의 확신을 하나님의 뜻인양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공적인 판단에 순순히 따르는 모습은 분명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의 태도라 생각합니다. 자신이 신학교를 졸업했다고 해서 자기 마음대로 개척해서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제 개인적으로 소명이라는 것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3.7.성도들의 가정 생활
■ 나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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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신문 사설
종교개혁 492주년을 지나며
“여러분은 지금 조그만 새를 죽이지만, 100년이 지난 후 나타나는 큰 새는 죽일 수 없을 것입니다”
1415년 얀 후스가 죽기 전에 남긴 말이다. 정확히 102년이 지난 후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의 불길을 일으킨다. 개혁의 불길은 아무도 막을 수 없었다. 개혁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혁명이 아니다. 루터와 깔뱅의 종교개혁 이전 시대 개혁을 외치던 무명의 개혁자들이 있었다. 개혁은 수많은 살아있는 종교지도자들의 끊임없는 외침 속에 익어진 열매다. 목회는 개혁이고 목회자는 개혁가다. 지금 깨어있는 목회자들은 개혁의 씨앗을 뿌려야 한다. 그래야만 한국교회도 하나님의 눈길에서 외면되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막을 수 없는 개혁의 불길이 492년 전에 일어났던 것처럼 우리의 잘못과 죄악된 모습들에 대해 단호하고 분명한 철퇴를 내려야 할 것이다.
한 마을 사람들에게 어떤 사람이 매일 100달러씩을 주는 실험을 했다고 한다. 첫날 마을 사람들은 몹시 의아해하면서도 멈칫하며 그 돈을 받아 갔다. 며칠이 지나자 아예 현관 앞에 나와서 돈 주는 사람을 기다렸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돈 받는 일을 당연시 여겼다. 드디어 돈을 주지 않자, 동네 사람들이 “오늘은 왜 돈 100달러를 안 주고 가는 거요?”라며 항의하더라는 것이다.
“내 백성을 유혹하는 선지자들은 입에 물것이 있으면 평강을 외치나 그 입에 무엇을 채워주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전쟁을 준비하는 도다…”(미 3:5)라고 외친 미가 선지자의 외침을 보라. 지금이 미가 선지자가 지적한 그런 시대가 된 것은 아닌가?
옛날 순수할 때는 결혼 주례 후 사례를 받으면 거북스럽고 불편했는데 서서히 당연시되고, 언제부턴가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섭섭하다가, 이제는 왜 사례하지 않느냐고 따지는 풍토까지 생겼다고 한다. 왜 이렇게 모든 것이 빗나가고 있으며, 어디서부터 잘못 된 것인가?
바울 사도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작금의 한국교회는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몸에 배었다. 돈을 너무 좋아하고, 금과 은은 없지만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세상이 되었다. 하나님의 큰 구원을 당연시하고 직분을 특권화 시키는 풍토는 결코 옳지 못하다.
개혁자 칼빈 탄생 500주년과 종교개혁 주일을 지나면서 한국교회는 금욕과 경건을 위하여 철저한 반성을 해야 한다. 교회의 이기성과 사명의 망각을 통탄해야 한다. 교회는 부흥하지만 사회는 점차 악해지는 한국교회를 하나님께서 축복하실 이유가 없을 수도 았다.
현재 위기에 직면한 한국교회와 달리 급성장하는 이슬람은 1934년 2000만 명에 불과했던 신도수가 현재 약 10억의 신도수로 500%의 증가율을 보였다.
기독교는 거대한 도전 앞에 직면해 있다. 한국교회가 위기의식을 가지고 악한 관행들을 타파하지 않으면 엄중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마이너스 성장과 장기 침체,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하는 상황 속에서 한국교회가 개혁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거나 거부한다면 제2의 부흥은 커녕 하나님의 진노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교회개혁실천연대’는 창립선언문을 통해 한국교회를 이렇게 진단한 바 있다. “교계정치가 금권에 좌우되고, 무자격 목회자가 양산되며, 비성경적인 관행과 타성에 젖어있는 지금의 한국교회 상황은 종교개혁이 일어났던 중세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교회는 무기력한 교인을 양산했지만 투철한 신앙인을 길러내는 데는 실패했다”
한국교회가 새롭게 거듭나려면 자신부터 철저히 개혁해야 한다. 한국교회 목회자들은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면서도 ‘신앙과 삶의 불일치’ ‘종교 다원화와 세속화’ 등을 시급히 해결 할 과제로 꼽았다. 교회 갱신을 위한 선행 작업으로 목회자 스스로 철저히 자기 갱신부터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은 것이다.
나아가 한국교회의 가장 큰 과제 중 하나는 교회의 자정능력 회복이다. 이것은 구호를 외치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종교개혁이 그랬던 것처럼 복음의 본질을 재발견하고 그것을 현재 상황에 맞게 효율적으로 적용시켜 나갈 때 가능하다. 복음의 재발견이 영적 각성으로 이어질 때 교회는 자정 능력을 회복하고 국가와 사회에 대해 책임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
교계를 이끌어가야 할 지도자들이 영적으로 깨끗하지 못하면 한국교회는 유럽교회들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다. 종교개혁은 역사적 유물이 아니다. 개혁은 계속되어야 하며, 한국교회는 자기방어에 급급하지 말고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동자 앞에 항상 개혁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박윤선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개혁이란 자신에게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한국교회 목사들이여! 자신부터 개혁하라. 그것이 하나님의 지속적인 쓰심과 영적 침체에서 벗어나게 할 불길이 될 것이다. 정작 개혁의 대상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있으면서, 광야에 외치는 자의 외로운 소리가 허공에만 맴돌고 끝나지 않도록 이 시대를 살다가는 한 사람으로서, 목회자로서 책임 있는 삶의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한다. 항상 그러하듯이 교회가 개혁의 가장 큰 대상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기독신문> |
튜립 신학연구원 김명도 교수
서론
지금은 세상을 떠난 분이지만 옛날 영국 Oxford 대학의 교수로 있던 C.S.Lewis 라는 분이 쓴 책이 있다. 그 책의 이름은 Screwtape Letters 라는 책이다. Screwtape 이란 마귀의 우두머리의 이름이다. 그가 그의 부하 마귀에게 하는 말은 “세상이, 교회가, 모두 잘 되어간다고 믿도록 교인들을 안심 시키라” 는 명령이다. 기독교 신자라면 한번 쯤 꼭 읽어 보아야할 양서중의 양서 이다. 우리의 대적 마귀가 무엇을 획책하고 있는가를 알라. Lewis 박사는 이 책 말고도 Mere Christianity 라는 책을 써서 나름대로 기독교의 변증학을 강론하고 있다.
주일학교가 시작되고, 문서선교회, 성서공회, 주일학교연합회 등이 조직되고, Princeton 신학교, Union 신학교 (Richmand, VA), Columbia 신학교 (SC) 등을 세워 목사를 키워내며 부흥의 불길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로부터 근 2세기가 흘러간 지금은 그런 불은 꺼져간다. 바른 신앙을 가르치는 신학교 교수나 교회 목사는 인기가 없다. 아무도 설교를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와 같은 현상이 일어 날 것을 아신 주님은 요한계시록 11장에서 사도 요한을 통해서 <두 증인이 죽는 것으로, 그리고 그 두 중인이 진리의 말씀을 전하다가 죽으니 사람들이 기뻐하는 것> 으로 이 악한 마지막 때의 불신앙의 현장을 묘사하고 있다.
내용은 5 는 입으로만 신앙을 고백하지 말고 옛날 선진들처럼, 특히 Scotland나 Netherlands의 개혁가들처럼 실제 생활에서 성경대로 살자는 것이다. 오늘의 문제는 성경대로 실천하지 않는 것, 즉 성경의 권위를 무시하는 것이다. 성경의 권위를 무시하면 그리스도의 선지자의 직분을 무시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3중직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는 이미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김명도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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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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