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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햇발] 말이냐, 칼이냐 / 한겨레

성령충만땅에천국 2017. 4. 15. 05:24

[아침햇발] 말이냐, 칼이냐

한겨레 등록 :2017-04-13 18:16수정 :2017-04-13 23:04

 

정남구
논설위원

조선 세종 때 판중추부사 벼슬을 하고 있던 민대생이란 분이 나이 아흔을 맞았다. 남부러울 것 없이 잘 먹고, 고된 일에 시달리지도 않고, 뛰어난 의원을 옆에 둔 당시의 왕들도 평균수명이 50살을 밑돌던 시절이었다. 당나라 때 두보의 시에 “70살까지 사는 사람은 드물다”고 했는데, 아흔까지 살았으니 자식들이 효자 소리를 귀가 닳도록 들었을 만큼 장수하고 있는 것이었다.

노인이 아흔살을 맞은 정월 초하루에 조카, 손자들이 와서 세배를 하고, ‘오래 사시라’고 축수를 했다. 그런데 그중 조카가 말하기를 “백세를 누리시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노인은 버럭 화를 냈다.

“그런 박복한 말이 어디 있느냐?”

그러고는 조카를 쫓아내버렸다.

그다음 사람이 들어가 절을 했다. 이 사람은 말을 바꿔, “백살까지 사시고, 또 한번 백세를 누리십시오”라고 했다. 그러자 노인이 기뻐하며 “그래야지, 축수를 하려면 그렇게 해야 도리지”라면서, 음식을 잘 차려 먹여 보냈다고 한다. <용재총화>에 나오는 이야기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라는 말이 이래서 나왔겠구나 싶다. 조카가 ‘백살을 누리시라’고 한 축수의 말이 왜 노인을 화나게 했을까? 이미 아흔인 노인 처지에서 보면 “10년만 더 사시라”는 말로 들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사람은 아무리 오래 살고 있더라도, 계속 삶을 이어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것이다. 중국 전설 속 북방 천제 전욱의 자손 가운데 팽조라는 인물이 있다. 성이 전이고 이름이 갱이었는데, 요순시대부터 주나라 초기까지 800여년을 살았다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아주 맛있는 꿩탕을 끓일 줄 아는 재주가 있었는데, 꿩탕을 만들어 천제에게 바치니 천제가 하도 기뻐서 800년의 수명을 줬다고 한다. 49명의 아내, 54명의 자식을 먼저 저세상으로 보내며 800년을 넘게 산 팽조도 죽을 때는 자신의 단명을 한탄했다고 한다. 그게 사람의 마음이다.

말을 할 때는 상대방의 처지를 헤아려야 한다. 그렇지 못한 말은 공감을 얻지 못할 뿐 아니라, 마음에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민대생은 실제로는 96살에 세상을 떠났다.

허균은 조선의 양반 관료 가운데 역모죄로 처형당한 뒤 끝내 신원을 회복하지 못한 두 사람 가운데 한 명이다. 다른 한명은 정여립이다. 그 허균이 젊어서 용감하게 글 하나를 썼다. 사림의 중시조 격인 김종직을 비판한 글이다. 김종직은 수양대군(훗날 세조)이 조카를 몰아내고 권력을 차지하자 이를 겨냥한 글(<조의제문>)을 쓴 바 있다. 그래 놓고 세조 치세에 과거에 합격하고 여러 관직을 맡았다. 젊은 허균은 이를 두고 “이록을 취하고 명망을 훔쳤다”고 거칠게 비난했다. 그것이 두고두고 허균의 삶에 짐이 되었다. 허균의 거친 입을 걱정한 사명대사가 경계하여 써준 시가 이렇게 남아 있다.

“남의 잘잘못을 말하지 말게나. 이로움이 없을 뿐 아니라 재앙까지 불러온다네. 만약 입 지키기를 병마개 막듯 한다면, 이것이 바로 몸 편안케 하는 으뜸의 방법이라네.”

대통령 선거전이 한창이다. 온갖 말이 넘친다. 정치학자 도리스 그레이버의 말대로 정치의 기본 요소는 ‘말’이다. 입을 병마개 막듯 지낼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말을 어떻게 쓰느냐다. 공감을 얻고 설득하는 쪽으로 쓸 것인가, 남을 공격하고 무찌르기 위해 쓸 것인가? 전자가 글자 그대로 말이라면, 후자는 칼이 되는 말이다. 요즘 쏟아지는 말 가운데 듣기에 섬뜩한 것이 적지 않다.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한다’는 사실을 상기했으면 좋겠다.

je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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