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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 (로마서 14장 8-9절)[부활주일] / 김민호 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7. 4. 16. 05:16

부활주일 설교.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 (로마서 14장 8-9절)|말씀………설교원고모음

김민호 목사 | 조회 290 |추천 0 |2017.04.13. 21:13 http://cafe.daum.net/cgsbong/21mg/11007 


부활주일 설교.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 (로마서 148-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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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부활 주일입니다. 부활의 영광이 여러분의 가정과 삶 위에 충만하시기를 축복합니다. 00교회도 부활의 소망을 굳게 잡고, 한마음으로 하나 되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그 중에서도 부활은 하나님이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최종 목적의 마침표와 같습니다. 9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모든 죽은 자의 주인이 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모든 산자의 주인이 되시기 위해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지 않는다면,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도, 무덤에서 살아나신 주님도, 나와는 상관없는 분이 됩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없는 사람은 기독교인이 될 수 없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 신앙생활의 모든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구원자를 믿고 죽은 사람)도 망하였으라”(고후 15:14,17,18) 부활이 없으면, 예수님을 믿을 이유도 없고, 여기 앉아서 예배드릴 이유도 없고, 예수님을 전하는 것도 다 헛것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덧 붙여서, “만일 그리스도를 믿고 사는 우리의 삶이 이 세상에서의 삶으로 끝나 버린다면, 우리는 가장 불쌍한 자들이 될 것이다”(고전 15:19)라고 말합니다. 죽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면 가장 불쌍한 모습이라는 말이 비참하게 들립니다. 우리의 몸이 다시 살아난다는 부활의 소망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 믿는 것입니다. 영광의 몸으로 부활하여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소망이 있기 때문에 복음의 능력이 전파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나는 죽지 않을 것 같아!, 자신하는 분 계십니까?” 한 분도 없으시겠죠. 그렇다면, “나는 죽긴 죽을 텐데, 죽는 순간, 죽자마자 곧바로 다시 살아 날거야라고 확실하게 믿어지는 마음을 가지고 계십니까? 나에게 지금 당장 죽음이 닥쳐온다 하여도, 죽는 순간에 다시 살아난다는 믿음이 부활 신앙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면서도 하나님께서 아들을 살려 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에 무려 100세에 낳은 사랑하는 아들을 제단 위에 올려놓고 죽이려고 했습니다. 다시 살려 주시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아들까지 죽일 수 있는 결단과 순종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살아있는 믿음이요, 부활 신앙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부활 신앙이야말로 믿음의 완성을 이루는 일입니다. 신앙생활 시작 했으면, 멈추어 서 있으면 안 됩니다. 우리 모두가, “나는 죽는 순간 반드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확신하는 수준에 이르도록 전심을 다해 노력해야 합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이 사실이 믿어지지 않으면, 믿어질 때까지 말씀 듣고, 배우면서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려는 시도를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의 최고 수준에 이른 사람들이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했던 말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숨을 거두시기 전에,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 하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기독교인중에 최초의 순교자인 스데반 집사도 돌에 맞아 순교하기 직전에,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라고 말하며 숨을 거두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죽음을 앞둔 마지막 설교에서, “오 주님 예수여!, 내 영혼을 부탁하나이다!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간절하게 호소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마지막 편지인 디모데후서에서, “의로우신 재판장이 나를 위하여 예비하신 의의 면류관을 주실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직감하고, 죽은 자의 심판자이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영혼을 받으시고, 영생을 허락 하실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 죽음의 시간을 맞이한 것입니다. 기록에는 없지만, 사도바울이 참수형을 당할 때, 나의 영혼을 받아 주옵소서라는 말을 남기고 순교 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합니다.

 

2007년도에 이슬람 국가인 터키에서 문서선교(성경책 등 기독교 서적 보급)를 하던 독일인 틸만선교사를 포함한 3명의 기독교인들이, 문서선교 팀에 의도적으로 잠입해 들어온 과격 이슬람 청년들에게 무참히 살해되는 일이 발생 했습니다. 기독교인 3명은 칼로 100회 이상 찔리고, 손가락도 잘리고, 살아있는 채로 몸과 장기가 심하게 훼손당하는 끔찍한 테러를 당합니다. (인터넷에 터키순교 동영상을 검색 하시면 자세히..) 3시간 넘게 잔혹한 고문이 자행되었지만, 이들은 끝까지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고 끝내 순교를 당했습니다. 순교한 청년 중 이슬람에서 개종한 네자티라는 36세의 현지 청년은, “나는 항상 그리스도를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라고 늘상 말해 왔었다고 합니다.

 

틸만선교사의 아내인 수잔나선교사는 남편이 무참히 살해 된 후 TV에서, “나는 남편의 영혼이 부활의 주님 품에 안긴 것을 영광으로 받아들입니다. 나는 남편을 죽인 사람들을 용서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들이 한 일이 진실로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나는 떳떳한 남편의 아내요, 남겨진 자녀들의 자랑스러운 어머니가 되기 위해서, 남편이 했던 일을 이어가고 싶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순교를 당한 분들이나, 남겨진 가족 분들이나 참으로 위대한 신앙의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예수님, 스데반 집사님, 주기철 목사님, 터키에서 순교한 문서 선교팀원들, 이들도 똑 같이 우리와 성정이 같은 인간의 나약한 육체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왜 그렇게 무모하기 짝이 없이 처절한 고통을 이겨냈겠습니까? 다시 살아난다는 확신, 죽은 자 가운데서 우리 영혼을 다시 살려주실 하나님의 능력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앞서간 믿음의 선배들이 죽음 앞에서도 의연할 수 있었다면,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고난 없이는 의로운 죽음도 없고, 의롭지 못한 죽음에는 부활도 없습니다. 고난과 죽음을 착실하게 준비해 나가는 것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일입니다.

 

오늘 말씀 9절에,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다고 합니다. “이를 위하여가 죽으시고 살아나신 이유, 바로 부활하신 이유인데, 그 이유가 8절입니다. 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아멘.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다는 앞의 부분은,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 되셨고, 나는 예수님의 종이 되었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주인과 종이 되게 하신 것이 어떤 계약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권세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여기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예수님 믿고 살아가는 순간부터 우리의 삶은 전적으로 주인이신 예수님의 권한에 달려있습니다. 주인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살려줄 권한, 죽일 권한을 다 갖고 계십니다. 그럼, 인격체인 나라는 존재는 어디에 갔습니까? 나라는 존재는,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으실 때 이미 사망 선고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죽이시기 원하십니다. 목숨을 앗아 가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죄의 덩어리인 육체가 다시 살아나지 못하도록 확실히 죽이고, 대신 성령 받고 다시 태어나서, 영혼이 살아 숨 쉬는 삶을 살아가도록 만드십니다.

 

우리는 종이 되었기 때문에, 오로지 주를 위하여 죽고, 주를 위하여 사는 것”, 오직 복종, 오직 충성만 있을 뿐 입니다. 부활의 주님은,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주를 위하여 죽고, 주를 위하여 사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저를 포함한 성도들의 삶은 주님의 기대에 한참 미치지 못합니다. 정말로 그러한지, 우리의 삶의 현장을 들여다보며 확인해 보겠습니다.

 

개인적인 삶을 살펴보겠습니다. 하는 일이 잘 풀리고 좋아질 기미는 안 보이고, 자꾸 곤고해져만 가고, 하루하루 사는 것이 버겁고 힘들기만 합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환경이나 경제적 빈곤 때문이 아닙니다. 주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나를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십자가에서 자신을 죽이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펄펄 끓는 용광로처럼 자신의 자아가 교만으로, 고집으로, 자랑으로, 욕심으로, 음란으로 마구마구 분출되는데, 예수님을 위해 살라는 말이 들리기나 하겠습니까? 자기 앞가림도 하기 힘든 고단한 삶이 반복될 뿐입니다. 항상 돈 때문에 고민입니다. 아는 사람들이 돈 많이 벌어가는 것을 보면 자존심 상하고 울화통이 터집니다. 돈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어서, 범죄와, 분노와, 이간질과, 불화 등을 일으키는 엄청난 파급력으로 내 삶을 망가트리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모릅니다. 나를 병들게 하고 인생을 망가트리게 하는 돈이, 나를 행복하게 해 줄 유일한 수단이라고 맹신하며 살아갑니다.

 

교회 안의 신앙생활을 살펴보겠습니다. 신앙경력이 오래 되었는데도 점점 의욕이 없어지고, 목적도 없이 무의미한 시간을 무상하게 흘려보내며 지냅니다. 신앙의 연수와 반비례 하여 열심이 점점 사라지는 이유는, 주를 위하여 죽으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죽을 각오로 일하라고 분명히 맡겨주신 사명이 있음에도, 게으름을 피우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게으르고 나태한 사람들은, “나는 할 만큼 했고, 지금까지 배우고, 익히고, 알고 있는 것으로도 충분해라고 말하는 자만의 태도가, 올무가 되어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합니다. 직분과 신앙의 연수가 공동체 내에서 덕으로 꽃 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권위와 위력으로 작용해서, 다른 사람들의 걸림돌이 되어 버렸습니다. “뭐 별게 있겠어, 특별한 것도 없네, 난 안해도 될 거 같아교만함과 매너리즘은 점점 신앙교착 상태를 불러 옵니다. 그럼에도 나는 이미 목적지에 다 왔다는 안일함에 빠져서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습니다.

 

교회 밖의 세상(사회, 직장)의 삶을 살펴보겠습니다. 수많은 유혹과 거짓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이고, 오히려 그것에 동조하거나 앞장서기까지 합니다. 거룩함은 나하고는 무관한 듯 살아갑니다. 사고방식도, 행동 양식도, 언어구사에서도, 전혀 그리스도인다운 겸손과 품위를 느낄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구별되지 못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은, 종으로 살기 싫어서 주인집에서 뛰쳐나와 독단적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주인의 명령이 있었음에도 무시하고 살기 때문입니다. 모든 고민의 해법이 담겨있는 진리의 성경 말씀도 있고, 모든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는 전지전능한 능력도 구할 수 있고, 도와주고, 위로해 주시는 성령이 함께 하시는데도, 무조건 혼자 결정하고 좌충우돌 하다가 낙심하고 분노하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오늘 실패하여 넘어졌음에도, 내일 아침 기억망상증 환자처럼 같은 일을 또 다시 반복하는 어리석음으로 살아갑니다.

 

어떻습니까? 개인적인 시간, 교회 안에서의 신앙생활, 교회 밖, 세상에서의 생활에서 겪고 이러한 실상들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곧 나의 모습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공감하고 동의가 됩니까? 살아가면서 안 풀리고, 막히고, 꼬이고, 다투고, 넘어지는 모든 문제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나에게 주인은 필요 없다고 생각하거나, 주인이 있음에도 전혀 의식하지 않거나, 주인이 명령하는 것이 있음에도 하나도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주인이 내 마음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주를 위하여 살고, 주를 위하여 죽는 것은 원초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부활 신앙이 중요합니다. 주님은 죽으셨지만 분명하게 살아 나셨습니다. 눈에 안 보이시실지라도 살아나신 주님이 저와 여러분의 눈 앞에 와 계십니다.

 

제발, 살아계신 주님을 그림자로 취급하지 마십시오. 도마처럼 못 자국 난 주님의 몸을 두 눈으로 확인해야 주님이 살아 계심이 믿어지시겠습니까? 살아계신 주님을 확인하고 싶다면, 주님께 말 좀 걸어 보십시오. 눈웃음도 지어 보이시고, 울어도 보시고, 하소연도 하시고, 생떼도 써 보시고, 애교도 부려 보십시오. 그래보면, 우리 앞에 성령으로 와 계신 주님이 말씀으로 화답해 주실 것입니다. 오늘, 부활 주일이 바로 살아계신 주님을 확인하고, 내 마음에 주님을 영원한 주인으로 모시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주님을 만나보지 못하고, 우리 곁에 와 계신 주님을 그냥 보내신다면, 일 년 내내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 곁에서 그림자처럼 묵묵히 계시면서 아무 말씀도 안하실 겁니다.

 

부활 하신 주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신 사람만이 주를 위하여 살고 주를 위하여 죽을 수 있습니다. 주를 위하여 살고, 주를 위하여 죽을 수 있다는 각오가 확고부동하여, 삶 속에서 믿음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 사람이라면 한 걸음 더 나아가서, 8절 후반부의 신앙고백을 자신 있게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입니다아멘. 이 얼마나 위대한 신앙고백입니까! 부활의 영광을 받으신 주님은 오늘 우리 모두가 다 이 고백을 드리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 다함께 믿음으로 이 고백을 드려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겠습니다. “나는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입니다큰 소리로 고백합니다. 시작~ 나는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입니다아멘. 할렐루야.

 

김상용 시인은, “남으로 창을 내겠소라는 시에서, “왜 사냐건 웃지요라는 유명한 싯구를 남겼습니다. “왜 사냐건 웃지요너무나 허무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인생이 무엇이란 말입니까? 어떤 분은 왜 살아가십니까?”라고 묻자, “로또 한번 맞아서 대박 나는 인생이 오리라 생각하면서 죽지 못해 삽니다,”라고 대답합니다.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을 로또 같은 도박에 걸다니요. 참으로 어리석은 인생입니다.

 

독일의 여성작가 루이제린저(Luise Rinser), 왜 사느냐고 묻거든이라는 에세이집에서, “빛이 무엇인지 설명하기 위해 어둠이 필요하듯이 죽음은 오로지 삶이 무엇인지 이해케 해주는 표상이다라고 말합니다. 어려운 말인 것 같지만, 풀어서 설명 드리자면, “잘 죽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라는 표현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죽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시각은 매우 정확한 통찰력 입니다. 이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온 인생의 평가를 받음으로 다시 시작하는 첫날, 곧 다시 살아나는 출발점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왜 살아가십니까? 누가 물으시면 당당하게 대답 하십시오. “잘 죽기 위해서 삽니다. 언젠가는 죽게 되겠지만 죽음이 전혀 두렵지 않습니다. 내가 죽더라도,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신 분이 내 옆에 계시다가, 내가 죽는 순간 즉시 나를 살려 주실 겁니다. 다시 살아난다는 소망이 내가 살아가는 이유입니다얼마나 당당하고 시원시원 합니까? “주를 위하여 살고, 주를 위하여 죽겠습니다!,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입니다!” 이 두 마디의 고백만 믿음으로 외칠 수 있다면, 어느 누구라도 반드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생각할 때마다, “나의 몸과 영혼은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입니다.” 이 고백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이 말씀으로 나는 예수와 함께 살고,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다시 살아난다는, 확실한 부활 소망을 반드시 붙잡으시고, 천국 가는 그날 까지 믿음으로 승리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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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주님께 영광을 올려 드립니다. 우리가 오직 주님을 나의 주인으로 마음에 모시고, 주를 위하여 살고, 주를 위하여 죽고,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고백하면서, 부활 소망의 믿음을 가지고, 충성된 종의 삶을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부활이요 소망이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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