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 스승의 주일설교.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마태복음 11장 25-3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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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9대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확정되었습니다. 대한민국 건국 이래 12명의 대통령이 배출되었지만, 임기 말이나, 퇴임 후의 말로는 순탄치 않았습니다. 특히 이번 대선은 대통령이 중도에서 물러나고 보궐선거로 치러졌습니다. 많은 우여곡절 끝에 선출된 대통령이기에, 국민들은 새 대통령에게 기대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정말 이번 대통령은 국민만 바라보고 정치했으면 합니다. 시작이 좋은 대통령이 아니라, 끝이 아름다운 대통령이 되기를 바랍니다. 강력한 자주 안보의 틀 위에서,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고, 사회 대통합을 이루어 가는 미래 지향적 정권이 되기를 바랍니다. 정치권도, 국민도, 종교계도, 모두 한 마음이 되어서, 부강하고 품격 있는 대한민국을 건설하는데 협력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은 어버이 주일이자, 스승의 주일입니다. 국가의 지도자는 백성들의 어버이가 되고, 스승이 되어야 합니다. 가정에서 좋은 부모, 학교에서 좋은 스승 밑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이 훌륭한 인물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호랑이 새끼는 역시 다르다”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 참 부모요 스승은 당연히 예수님입니다. 이 세상 어떤 사람도 예수님을 대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가르쳐 주시고, 몸으로도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그야말로 언행일치, 신행일치의 표본이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앞으로도 예수님과 비견되는 스승은 나타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이 살아 움직이는 교과서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스승이 예수님 이라는 사실을 평생 고마워하고, 자랑스러워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스승이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입니다. 배우는 것을 말하기 전에 먼저 살펴볼 것들이 있습니다. 25절에, “그 때에(At that time)”으로 시작합니다. ‘그 때’라는 말은 대부분 시간적으로는 연속선상에 있는 말로, 전자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이끌어 갑니다. 즉, 앞의 20~24절에, 회개하지 않는 도시들에게 저주를 내리셨는데, 저주의 말씀을 하신 그 때로 이해가 됩니다. 이렇게 일반적인 시간의 개념을 그리스어를 빌어서, ‘크로노스(χρόνος)’의 시간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의 “때”는 시간의 연속이 아니라, 확정된, 그리고 명확하게 지정된 어떤 시간을 말합니다. 이러한 시간의 개념을 ‘카이로스(Καιρός)’의 시간이라고 합니다. ‘카이로스’는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정해서 행하는 특별한 시간입니다. 인간이 관여하지 못합니다. 지금 예수님이, “그 때에”라고 말씀하시려 하는 장면은, 인간이 범접 할 수 없는, 신적인 권위를 가지고 매우 중요한 말씀을 하시려는 순간입니다.
“그 때에” 예수님은 기도를 하셨습니다. 아버지께 기도를 드렸는데, 아버지 앞에 “천지의 주재”라는 말을 붙였습니다. ‘주재’는, 하늘과 땅의 주님, 곧 모든 만물의 창조자라는 뜻입니다. 창세기 14장에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인 살렘(평강)왕 멜기세덱이 아브람(개명 전이었으므로)에게 축복할 때도 “천지의 주재”라고 했습니다. 이 멜기세덱은 예수님을 예표(豫表, 미리 보이는 징조)하는 인물입니다. 수천 년의 시공간을 초월하여 멜기세덱과 예수님이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여 기도하는 장면을 보면, 성경이 얼마나 정확하고 일관성 있게 전개 되는지 실감할 수 있습니다.
기도문의 내용을 보겠습니다.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어린 아이들 앞에는 “저것을”이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은, 좁게는 외식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말하고, 넓게는 복음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세상 모든 사람들을 뜻합니다. 주님을 거부하고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복음이 숨겨져 있는 것과 같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젖 먹이 아기’, ‘경험이 없는 사람들’, ‘순진한 사람들’을 말하는데, 이들은 복음을 온전하게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어린아이 같이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복음의 빛이 충만하게 임하여서 영생의 소망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자칭 잘났다고 하는 자들에게는 복음을 숨기시고, 낮아지고 겸손한 자들에게 복음이 나타나도록 역사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26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들에게 복음을 나타내시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옳으신 뜻이라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를 하십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기도를 드리신 것은 제자들에게 아주 중요한 가르침을 주시기 위한 사전 작업입니다. 우선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사람들을 연결하는 통로요, 매개체가 되신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려 하셨습니다. 27절을 보겠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27절에서 “내 아버지”가 주어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원어에서는 “모든 것”이 주어이고, 단수가 아니라 복수형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모든 것들”을 주셨다는 겁니다. ‘모든 것들’은 권세와 능력을 말합니다. 죄 사함의 권세, 질병을 치료하고 죽은 자도 살리실 권세, 귀신을 쫓아내고 멸하실 권세, 율법과 사람에 대해 판단하고 심판할 권세는 모두 다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시지만, 하나님 아버지는 이 모든 권세를 아들에게 다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들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 안에서 보호 받을 수 없습니다. 아들이,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을 체험 할 수 있는 통로이고, 매개체입니다.
또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다”는 말씀을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아는 것은 피상적으로는 알고 있는 정도이고, 확실하고 실체적으로 예수님을 알고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뿐 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고 싶으면, 아들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 나아가서 물어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하나님께로 나아갈 방법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찾아갈 길도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27절 말미에서,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다”고 합니다. 아들이신 예수님만이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서 가르쳐 주실 수 있습니다. 아들을 통하지 않고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27절의 말씀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아들이라는 통로(매개체)가 계시는데, 아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을 우리에게 공급해 주시고, 아들을 통해 우리의 기도와 소망이 하나님께 전달된다는 설명입니다. 아들이 없으면 하나님과 우리는 끊어진 다리를 사이에 두고 멀뚱하게 바라보기만 하고, 만나지 못하는 이산가족과 같습니다. 앞서 기도문에서 보셨듯이, 자칭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호기 부리고 교만한 자들은, 아들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능력도 권세도 받을 수 없습니다. 반면에, 어린아이와 같이 아들만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사람들에게는 권세와 능력으로 사랑과 은혜를 부어주시고, 간구하는 소원도 다 들어주십니다. 지금 이 말씀을 들려주시는 예수님의 심정은, “제자들아! 나만 바라보아라, 나를 마음껏 이용하라!”고 신신당부하는 모습이 역력하게 보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과 우리들을 연결해 주는 축복의 통로가 되심을 깨닫게 해 주신 후에 말씀 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수고한다(헬, kopiw'nte")’는 말은 육체적으로 곤하고 지치다(physically, become weary or tired)는 뜻과, 감정적으로 용기를 잃고 낙담하다(emotionally, become discouraged, give up)는 말이 섞여 있는 표현입니다. 몸과 마음이 다 지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할 정도인 최악의 상황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이 한 단어에서 우리의 고달픈 인생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습니다.
‘짐 진 자들 (pefortismevnoi)’이라는 말은 선박이나 동물 등에 무거운 짐을 싣는 다는 말인데, 수동 형태로, 누군가가 우리의 몸에 무거운 짐을 얹어 놓는다는 뜻입니다. 이 짐은, 바리새인들이 요구하는 율법의 준수와 종교 의무를 다해야 하는 부담감, 그리고 사탄이 매일 같이 우리를 유혹하고, 걸려 넘어지게 하는 죄의 무게들을 말합니다. ‘짐 진 자들’이라는 단어 속에는,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강제적으로 떠안게 된 짐의 무게에 짓눌려서, 도저히 헤어 나올 수 없는 현실의 극한 상황을 이야기 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일상의 탈출과 쉼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에, 무언가 특단의 조치와 돌파구가 필요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무너진 몸과 마음을 긍휼하게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 말씀 하십니다.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하리라” 여기서 ‘쉼’이라는 단어는 안식을 말하며, 특별이 영적인 휴식, 영혼의 평안을 의미합니다. 삶의 무게, 죄의 무게를 지고 살아가는 우리가, 예수님께로 나아가기만 하면, 교만함 마음을 버리고 어인아이와 같은 마음이 되게 해 주십니다. 예수님께로 나아가기만 하면, 낙담 상태의 수고한 심신을 온전하게 회복 시켜 주셔서 다시 일어설 새 힘을 공급해 주십니다. 예수님께로 나아기만 하면, 죄의 무게를 벗어버리는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주님께 나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냥 나아오기만 하라고 하시는데, 이것도 못한다면 정말 은혜도, 사랑도, 구원도 받을 자격이 없는 부끄러운 자가 됩니다.
진정한 쉼(안식)은 하나님이 아들을 통해서 인간에게 주는 가장 위대한 선물입니다. 스승이요, 어버이신 주님은 우리에게 절대로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으십니다.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하리라” 이 말씀을 듣고 불쌍한 영혼들이 주님 앞에 나아오기만을 바라시면서, 늘 고대하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느 누구라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통로가 24시간 열려 있습니다.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주님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멈칫거리며 나아가기를 주저 하는 사람들을 위해, 주님은 더욱더 좋은 조건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29절 앞부분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하신 것은, 주님이 우리와 똑 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우리를 수시로 만나 줄 눈 높이를 낮추어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결코 무서운 분이 아닙니다. 높은 권위의 담을 허물고, 만남의 장벽과 경계를 낮추어 놓았기 때문에, 우리는 아주 자연스럽고 평안한 마음으로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정말, 눈만 뜨고, 주님 앞에 손만 내밀면, 언제든지 두 손 들고 환영해 주실 완벽한 준비를 해 놓으셨습니다. 마치, “이래도 내가 주는 평안을 안 받을래”라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완벽하게 우리를 만날 준비를 해 놓으셨는데도 주님께 나아가지 않는 사람은, 바쁘다, 힘들다, 어렵다, 두렵다고 하는 여러 가지 이유들이 다 핑계일 뿐입니다.
주님은 마지막으로 말씀 하십니다.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멍에’는 비유로 말씀 하신 것인데, 유대인들이 말하는 구원의 조건인 율법을 의미합니다. 614가지나 되는 유대 율법의 교훈과 계명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완벽하게 지켜야 하는 멍에가 이제는 필요 없어졌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 받기 때문에 멍에가 쉽고, 가벼워졌습니다. 그냥 예수님께 나아오기만 하면 멍에는 자연스럽게 벗겨집니다.
“내게 배우라”고 하셨는데, ‘배운다’(헬, mavqete)는 뜻에는 어떤 방법으로든지 배우고 익히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배우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지식적으로 알아야 하고, 사용과 실행을 통해서 배우고, 또 배워서 습관에 이르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말하기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벧후 3:18)고 하였습니다. “내게 배우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가장 좋은 스승이요, 어버이가 되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예수님에게서만 그 어떤 것도 배울 수 있고, 만약에 예수님을 떠나서 배우게 되는 모든 것은 스스로 무거운 멍에를 지는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깨우치게 합니다.
사람은 배운 대로, 배운 만큼 산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우되 집중해서 참된 것을 배워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참된 것을 배우지 않기 때문에 바른 인격자가 되지 못합니다. 참된 것 바른 것을 배우지 않기 때문에 바른 삶을 살아가지 못합니다. 우리는 참된 것을 배우고, 바르게 배워야 합니다. 오늘부터 주님께 나가서 배워야겠다는 자세를 취해 보십시오, 그러면 주님은 우리를 어린아이와 같이 대해 주시고, 품에 안으시고, 무릎에 앉히시고, 사랑의 언어로 대화를 하면서, 세세하게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귀찮은 숙제도 내주지 않으시고, 어려운 질문도 하지 않으십니다. 단지, “내게로 나아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보자로 계셔서, 주님께 나아오는 자들에게 아버지가 주시는 능력과 권세를 마음껏 경험하도록 은혜를 주십니다. 또한 우리가 간절히 바라고 원하는 소망을, 아버지께 그대로 전달해 주셔서, 다 이루도록 요청해 주십니다. 주님께 나아가기만 하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과 멍에도 다 버리게 해 주십니다. 또, 친절하게도 우리를 만나 주실 문턱도 낮출 대로 낮추어 주셨습니다.
만날 준비, 가르쳐 주실 모든 준비를 다 해놓으신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 하십니다. “내게 나아오라”,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참 스승 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셨다면, 어린아이와 같이 순종하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참 안식(쉼)의 은혜를 주시는 주님께 날마다 나아가셔서, 구원의 은혜를 더욱 배우고 익히셔서, 스승이신 주님의 마음을 시원하고 기쁘게 해드리는 사랑 받는 제자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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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참 스승이요, 어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고, 날마다 동행하며 소망 가운데 살아가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내개 나아오라”,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주님의 음성에 순종하여, 날마다 만나고, 듣고, 배우고, 실천하는 믿음의 제자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를 불러주시고, 평안주시고, 구원의 은혜를 가르쳐 주시는, 우리의 참 스승,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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