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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것들이 쏟아진다 [최기숙]

성령충만땅에천국 2017. 6. 16. 06:05

잊혀진 것들이 쏟아진다 [최기숙]

                        보낸사람

다산연구소 <dasanforum@naver.com> 보낸날짜 : 17.06.16 03:42                
제 460 호
잊혀진 것들이 쏟아진다
최기숙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HK교수)

   야마다 나오코 감독의 애니메이션 〈목소리의 형태〉(2016)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쇼코’가 한 초등학교에 전학 오면서 ‘쇼야’와 동급생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는 이야기로 시작된다(쇼코는 마르고 키 작은 장애 소녀다. 그녀는 세 겹의 불리한 옷을 입고 있다.). 아름다운 영상미와 감성 로맨스로 홍보되었지만, 왕따, 집단 괴롭힘, 장애, 트라우마 등 다소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에, 영화를 보러 오는 사람들은 그런 심리적 부담을 기꺼이 감당하려는 마음의 자세를 갖추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보다 관객의 반응이 더 인상적

   과연 영화보다 더 깊은 느낌을 준 것은 관객의 반응이었다. 침묵과 어둠 속에 스스로를 통제하기로 약속한 관객들은 영화가 시작되기 직전까지 친구들과 농담을 나누고, 사소한 일상에 대해 속삭이며, 커다란 팝콘 통을 껴안은 것만으로도 행복해 보였다. 그러나 영화가 시작되고 시간이 지나자, 어디선가 조심스럽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마치 전염성을 지닌 듯 객석의 여기저기로 파고들어, 울고 있는 사람의 위치를 소리로 알리는 어둠 속의 눈물 지도를 형성했다. 팝콘을 껴안은 두 팔은 머쓱해졌다.

   영화는 한때 초등학교 교실에서 발생했던 단속적인 사건이 그 누구에게도 결코 완전히 단절적이고 분절적인 경험으로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전하고 있었다. 어른들이 ‘철없던 시절’이라고 말했던, 초등학교 교실에서 했던 행위들은 그것을 경험하고 관찰하고 목도하거나 스쳐 지난 모든 이들의 성장에 영향을 미쳤다. 시간이 지난 뒤에도 한때 그들을 지배했던, 또는 스스로 외면했던 무시와 모욕, 슬픔과 좌절, 억울함과 분노, 죄책감은 그동안 자란 키 높이만큼 발육을 늦추지 않았고, 쐐기풀처럼 엉켜 있거나 억새처럼 웃자라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다시 만났을 때, 애초에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서로를 스스럼없이 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들이 원한 건 ‘살아가기’라는 삶의 문제이지, 위선적으로 ‘삶을 연기(acting)’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이것은 영화 속의 인물이 여전히 ‘청소년기’여서 가능한 모습일 것이다. 성인기라면 문제는 달라진다. 그러나 마음과 기억의 생리는 다르지 않다.).

   신기한 것은 영상 속 인물들이 마음 깊은 곳에 저장해 둔 오래전의 ‘그 사건’을 다시 떠올렸을 때, 내 마음속에도 문득 ‘그때의 사건’이라 할 만한 것, 평소에는 전혀 의식하지 못했던 그것이 하나의 독립된 섬처럼 의식의 표면에 떠올랐다는 점이다. 영화가 건드린 것은 인물의 과거나 심리, 무의식이 아니라,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의 기억과 망각, 의식과 무의식의 심층이었다. 관객은 단지 영화 속의 인물에 공감해 우는 것이 아니라, 영화로 인해 환기된 자신의 망각된 과거, 가려진 마음, 덮어두었던 무의식의 넋을 장례 치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하나 둘 사람들이 일어설 때에, 좌석 뒤쪽에서 누군가 “열 번 봤는데…”라고 말했다. 목소리는 담담하고 진지했다. “난 세 번째야.”라는 다른 목소리도 들렸다(아마도 그 친구였을까). 한 영화를 기꺼이 세 번이고 열 번이고 보는 심리는 무엇일까(물론 이 영화의 정서가 시종일관 무거웠던 건 아니다. 만화가 갖추는 기본기로서의 유머와 재치는 물론 서정적인 영상미가 감정의 균형을 맞추어주기 때문.). 영화를 이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영화를 보면서 떠오르는 자신의 과거, 상처, 망각된 어둠과 응대하기 위한 적극적인 모색이 아니었을까.

과거는 흘러가지 않고 저지대에 고여 있다

   줌파 라히리는 소설 『저지대』(서창렬 옮김, 마음산책, 2014)에서 “과거는 흘러가버리는 것이 아니라 저지대에 고여 있다.”고 서술했다. 애써 숨기고 감추며 살았던 것들과 섣부른 화해를 구하지 않으면서, 몸 전체로 자신의 과거, 행위, 시간을 감당하는 것이 삶이다. 조금 피곤해지면, 그저 운명이라는 단어를 내세워 잠시 빗겨서 있어도 좋다. 우리는 날마다 시간을 통과해 살아가지만, 하나도 통과해낸 것이 없는지도 모른다. 살아온 모든 것들은 몸과 마음과 정신과 무의식에 쌓이고 영혼에 아로새겨진다. 그것은 투명한 문신과 같다.

   잊혀진 것이 어찌 상처뿐이랴. 우리는 행복과 기쁨, 용서, 어설프게 시도한 사과와 화해까지도 까맣게 잊고 산다. 동시에 하나도 잊지 않고 있다. 몸은 정신보다 강하다(어쩌면 그 무엇도 속이지 못하는 바보 같은, 기억 천재다.). 잊혀진 것들이 어느 순간 내 몸과 정신 위로 쏟아질 때, 그것이 뾰족한 화살인지 보석처럼 빛나는 별빛인지 똑바로 바라보아야 한다. 그 모두가 내가 뿌린 내 시간의 씨앗이자 열매라는 사실까지도 바라보면서, 기꺼이 그 화살과 빛을 껴안아야 하는 것이다.

   영화가 막을 내렸을 때, 의식의 표면에 떠올랐던 섬은 어느새 사라지고(가라앉고), 극장 밖의 생활로 걸어 나오는 제 몸의 주인이 되어 있었다. 화살과 별빛이 온몸에 박히고 뿌려져, 피 흘리며 빛을 내는지도 모른 채, 수선스런 일상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극장 밖으로 사람들이 별처럼 화살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데카르트는 『세 번째 성찰』에서 신은 연속적인 매 순간마다 육신을 재창조한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시간은 지속의 형식이다(Descartes, in his Third Meditation, said that God re-created the body at each successive moment. So that time was a form of sustenance.).” (줌파 라히리, 『저지대』, 241쪽; Jhumpa Lahiri, The Lowland, New York: KNOPF, 2013,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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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최기숙
·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HK교수 (한국학 전공)
· 국립극단 어린이청소년극연구소 예술교육 자문

· 저서
〈Bonjour Pansori!〉 (공저), Paris: Imago, 2017
〈물과 아시아 미〉 (공저), 미니멈, 2017
〈감성사회〉 (공저), 글항아리, 2014
〈감정의 인문학〉 (공저), 봄아필, 2013
〈조선시대 어린이 인문학〉, 열린어린이, 2013
〈처녀귀신〉, 문학동네, 2010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