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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귀한 삶 [이숙인]

성령충만땅에천국 2017. 6. 30. 07:09

고귀한 삶 [이숙인]

                        보낸사람

다산연구소 <dasanforum@naver.com> 보낸날짜 : 17.06.30 03:42                
제 462 호
고귀한 삶
이 숙 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정부 고위직 후보들의 과거 행적을 놓고 왈가왈부하는 국회 청문회를 보면서 질문 속에 답이 있다는 말을 실감한다. 후보자를 향한 질문은 대개 묻고 있는 그 자신이나 화면 밖의 관객 모두를 향한 것들이다. 때론 안타깝고 때론 불쾌한 장면이 연출되지만, 청문회는 탐욕의 파트너 염치(廉恥)를 자신과 연결해보는 국민 교육의 효과도 있는 것 같다. 이것을 계기로 평범하게 사는 것의 고귀함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옛사람에게 물어보았다.

황희, 아들 때문에 부탁하다

신의 아들이 뇌물죄를 범해 관직을 삭탈 당한 지 11년이 되었습니다. 신의 나이 지금 89세이니 죽음이 조석(朝夕)에 달려 있습니다. 늙은 소가 새끼를 핥아 주는 심정이고 보니 아들의 일은 목숨이 다할 때까지 해소되지 못할 고통이옵니다. 감히 천위(天威)를 범하고 죽음을 무릅쓰며 아룁니다. (『문종실록』1년 2월 2일)

   아들의 죄를 구원해달라는 이 늙은 아버지는 20년을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자리를 지키며 세종의 시대를 빛낸 명재상 황희다. 조선에서는 부정한 방법으로 재물을 얻었거나 뇌물을 먹은 관리를 다루는 법이 엄격했다. ‘장리(贓吏)’로 판명되면 일신(一身)의 추락은 물론 그 자손들의 과거 응시가 금지되었다. 황희의 둘째 아들 황보신은 부정한 재물을 취한 죄로 세상의 낙오자로 살 수밖에 없었다. 영의정으로 있으면서도 10여 년을 망설이던 아버지는 죽음이 임박해서야 아들과 손자들의 앞날에 평생의 영예를 내려놓았다. 강자에게 아첨하거나 약자에게 교만하지 않았던 황희였다.

   신하들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왕은 황보신의 직첩을 돌려주며 노(老) 대신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었다. 하지만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났지만 황보신의 사위와 아들은 장리의 자손으로 호명되며 벼슬의 변방에서 서성거리는 신세가 되었다.

   1545년 을사사화에 연루된 이문건(李文楗)은 유배지 성주(星州)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불행 중 다행으로 성주는 동성(同姓) 친족들이 모여 사는 고을이었다. 인근의 친족들은 번갈아가며 술과 안주를 들고 와 억울한 유배객의 복잡한 심사를 위로해주었다. 그중의 한 사람, 이춘양(李春陽)도 술과 안주를 들고 오는데, 첫 만남에서 그는 자기 아들을 가르쳐달라고 한다. 비록 유배의 몸이 되었지만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를 지낸 이문건에게 취할 만한 게 무엇인가를 누구보다 빠르게 읽은 것이다. 그 요청이 괴이했는지 이문건은 그와의 첫 만남을 일기에 기록해두었다.

   이춘양의 말과 행위는 계속 기록되었다. 그는 소송하기를 즐기며, 이익을 얻고자 동분서주했다. 그런 이춘양에게 성주 지역의 수령들과 교분이 두터운 이문건은 활용 가치가 높은 존재였다. 진황지를 입안(立案)하도록 해 달라, 토지 소송에서 이기도록 해 달라, 아들을 향교 학생으로 넣어 달라, 대리 시험을 치다 발각된 아들을 구제해 달라, 군역에 차정된 아들을 빼 달라, 심지어는 사노(私奴)에게 구타를 당해 관(官)에 소송을 해야겠다며 관아의 담당자를 보내달라고도 한다. 유배객의 심사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 이춘양은 자신의 이익 챙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마늘·토란·생강·닭 등의 식품을 잔뜩 보내면서 ‘만나서 할 말이 있다’는 이춘양의 전갈이 이문건에게는 번거롭기만 하다. 유배객이 다리를 놓아주기에는 버거운 청탁들이라 대부분 거절되었다. 이춘양이 내방하면 이문건은 아픈 핑계를 대면서 나가지 않는 날도 있다.

   좀 더 많은 이익을 좇느라 분주했던 이춘양. 그의 죽음은 “오늘 이춘양을 장사지냈다고 한다”는 한 줄 기사로 처리되었다. 신분의 높고 낮음과 재물의 있고 없음을 막론하고, 심지어 노비의 죽음에도 정성을 보내며 애도를 표했던 기록자 이문건이었다. 16세기의 백성 이춘양은 보통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고귀한 삶이 어떤 것인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 인물이라 하겠다.

염치, 형벌보다 두렵고 고귀함을 지키는 것

   18세기의 학자 이광사(李匡師)는 생전의 아내와 나눈 대화를 기록으로 남겼다. 그는 죽은 아내의 사실을 적은 실기(實紀)에서 궁핍한 가운데 갖춰야 할 기본 품격을 주문한 아내를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지방수령으로 나가 있는 친구와 자주 편지를 주고받곤 하는데, 편지를 다 쓰고 나면 아내는 반드시 읽어 달라 한다. 그 속에 무언가를 달라는 말이 있으면 아내는 냉큼 “별것도 아니네요. 기껏해야 그 값이 얼마나 하겠어요? 며칠 내로 마련해 올 테니, 달라는 말 빼고 편지 다시 쓰시지요” 한다. 나는 웃으며 “친구 사이에 이런 부탁은 예사인데, 당신이 까다로운 것이오!”라고 하면, 아내는 다시 “당신이 세속의 예사 선비를 원한다면 내가 무슨 말을 더 하겠어요?”라고 되받는다. 나는 겸연쩍게 웃으면서 끝내 고쳐 쓰고 만다. )

  남에게 부탁하거나 얻는 것을 구차하게 여긴 부인 류 씨는 공자가 말한 가난하지만 알랑거리지 않고[貧而無諂]과 가난하지만 인생을 즐기는[貧而樂] 태도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맹자(孟子)는 취(取)할 만도 하고 취하지 않을 만도 한 것을 취하면 염치를 손상하고, 줄만도 하고 주지 않을 만도 한 것을 준다면 은혜를 손상시킨다고 했다. 이 말을 이익(李瀷)은 취할 이유가 없는데 취한다면 염치를 손상하고, 줄 이유가 없는데 준다면 은혜를 손상시킨다고 풀었다. 즉 마구 취하는 것이 옳지 않듯이 마구 주는 것도 마땅하지 않다는 것이다. 재물을 대하는 자세가 엄격해야 한다는 뜻이다.

  돈 전(錢)이라는 글자는 창[戈] 두 개가 금(金)하나를 따르는 형상이다. 이것은 곧 창을 잊고 금만 쫓다가는 죽임을 당한다는 것을 뜻인데, 『산림경제』에 나오는 말이다. 시비(是非)를 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탐하여 얻기만을 힘쓰는 자, 얻으려 안달하고 잃을까 걱정하는 자를 옛 성현들은 비루하게 여겼다. 그들은 형벌보다 더 두려운 것이 염치라고 했다. 고귀한 삶을 약속하는 것은 돈도 명예도 권력도 아닌 염치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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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이숙인

·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 한국 철학

· 저서
〈신사임당〉, 문학동네, 2017
〈정절의 역사〉푸른역사, 2014
〈동아시아 고대의 여성사상〉 도서출판 여이연, 2005
〈노년의 풍경〉글항아리, 2014 (공저)
〈일기로 본 조선〉글항아리, 2013 (공저)
〈선비의 멋, 규방의 맛〉글항아리, 2012 (공저) 등 다수

· 역서
〈열녀전〉글항아리, 2013
〈여사서〉도서출판 여이연,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