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적 가치가 반영되지 않은 판결입니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태의 문제를 지적하고 비판해온 문화예술인들과 법조인들은 4일 오후 2시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블랙리스트 1심 판결을 다시 묻다-조윤선은 과연 무죄인가’란 제목의 토론회를 열고 이같이 목소리를 높였다. 이번 토론회는 300여개 문화예술단체들이 참여한 ‘적폐청산과 문화민주주의를 위한 문화예술대책위원회’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참여연대 공익법센터가 공동 주최했으며, 블랙리스트 1심 판결의 문제점을 짚어보고 향후 대응책을 모색하는 자리였다.
이날 토론회에서 발제자로 나선 민변의 하주희 변호사는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51)이 집행유예 선고를 받은 것과 관련해 “판결문에 따르면 2015년 문화예술진흥기금(문예기금) 공모접수 과정에서 블랙리스트가 적용됐으며 ‘정무수석실의 스크린을 거쳤다’는 부분이 나온다”면서 “2015년 문예기금 공모접수는 2014년 10월쯤으로, 피고인 조윤선이 정무수석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다. 그런데도 조윤선이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은 (판결문에서) 인정한 다른 사실관계에 모순된다”고 말했다. 이어 “판결문을 보면 김상률 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에 대해서는 이미 블랙리스트 계획이 수립된 상태에서 보고를 받고 승인했다는 이유만으로 직권남용을 인정한 것에 비해 조 전 장관에게는 구체적인 기획과 직접적인 지시·실행까지 요구하고 있는데 형평에 맞지 않다”고 덧붙였다.
토론회 참석자들은 재판부가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78)에게 징역 3년을 선고하고 조 전 장관에게 무죄를 선고한 것에 대해 “납득할 수 없다”는 입장을 재차 밝혔다. 그러면서 재판부가 밝힌 ‘양형 이유’가 “반헌법적”이라고 비판했다. 하 변호사는 “재판부는 ‘피고인들이 보수주의를 표방한 대통령을 보좌하는 정무직 공무원들로, 문화예술계가 지나치게 좌편향 되어 있다는 인식에 따라 이를 단기간에 바로잡겠다는 의욕이 지나쳐 범행에 이른 것으로 보고, 특정 개인의 사익추구를 목적으로 국가권력을 남용한 국정농단 범행과는 다르다’고 판단한 부분이 있는데, 국민을 나누고 지원에서 배제하는 등의 행위는 전혀 공익적이지 않다. 헌법적 가치에 반한 것이 아닌가라고 묻고 싶다”고 말했다. ‘좌편향 돼 있다는 인식에 따라 바로잡겠다는 의욕’ 자체가 헌법적 가치를 위반한 것인데도, 그 부분에 대한 판단을 하지 않고 사익추구가 아니라는 점을 피고인들에게 유리한 양형 요소로 거론한 것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얘기다.
토론자로 나선 김미도 연극평론가는 “블랙리스트를 처음 접하고 든 생각은 ‘이것은 헌법에 위반된 일’이라는 것이었다”면서 “이 사건이 헌법 위반이라는 걸 더 강조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단순히 지원배제 문제로 몰고가는 것이 있는데, 이 때문에 구체적인 증거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조 전 장관이 석방되는 일이 벌어진 것 같다”고 말했다. 다큐멘터리 영화 <다이빙 벨> 배급으로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시네마달의 김일권 대표는 “행정기관의 수장인 대통령, 공무원들이 헌법적 가치라든가 공익실현의 의무를 저버린 일을 했는데, 그런 기준에 근거해서 판결이 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면서 “꿈을 접고 현장을 떠나고 고통받은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법적으로 처벌할 수 없다는 것이 도저히 납득도 되지 않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허망한 심정이 든다”고 말했다.
두 번째 발제자로 나선 이양구 연극 연출가는 “이번 블랙리스트 판결은 피해자의 목소리가 사라진 재판이었다”면서 “문체부 및 산하기관 직원들이 피해자로 법정에 서면서 블랙리스트로 실제 고통받은 이들의 목소리는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 연출가는 “조 전 장관이 ‘오해를 풀어줘 고맙다’며 사과 한 마디 없이 집으로 돌아갔는데, 중요한 행정 기관의 책임을 맡았던 사람으로서 아무런 정치적 책임의식을 보여주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 연출가는 “여전히 블랙리스트 실행자들은 사과 한 마디 없이 그 자리에 앉아 있고 큰 고통을 받았던 사람들은 여전히 치유받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이날 하 변호사는 판결문을 분석한 발제문을 통해 국정원이 알려진 것보다 블랙리스트 사태 초기부터 광범위하게 조직적으로 개입했다는 점, 국가인권위원회가 블랙리스트 실행에 관해 인지하고도 아무런 의견 표명이나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새롭게 확인됐다고 밝혔다. 토론자로 나선 이명원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판결문에 제시된 국정원의 정보보고를 보면 특정 문인들을 거론하고 있다. 또한 한국예술종합교 교수 임명 등에 정보보고도 있는데, 문화예술계뿐만 아니라 지식인·시민사회에 국정원이 조직적으로 개입해서 총체적인 문제들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것은 충격적”이라면서 “이 문제는 의제화가 돼서 충분히 조사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참석자들은 2심 재판과 더불어 지난달 31일 출범한 ‘블랙리스트 진상조사위원회’ 활동, 헌법재판소 헌법소원, 민사소송 등을 통해 블랙리스트 사태의 진실규명과 관련자 처벌 조치, 재발방지대책을 마련해나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