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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영화 택시운전사] 실제로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가 80년 5월, 광주에 가서 찍은영상.GIF (스압)

성령충만땅에천국 2017. 8. 9. 15:29

제발 택시운전사 꼭 봐주시긔ㅠㅠ

영화보고 이글 보시면 정말 실화랑 거의 비슷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하게 되실거긔ㅠㅠ

허구가 많은 줄 알았는데 거의 사실이긔ㅠㅠ








위르겐 힌츠페터

 (Jürgen Hinzpeter)

1937년 7월 6일 ~ 2016년 1월 25일


1963년에 당시 서독의 ARD 소속 방송국인 북부독일방송의 텔레비전 카메라맨으로 입사.

몇 차례 한국을 방문하여 박정희 정권 하의 여러 공안 사건들에 대한 기록과

광주민주화운동 직전 가택 연금중이었던 김영삼과의 인터뷰를 녹화하는 등 다양한 취재를 하고 있었음.

5.18 민주화운동이 진행 중이던 1980년 5월 19일 그는 전라남도 광주시에 잠입해 영상을 찍게됨.




-출처-

2003년 5월 18일 KBS일요스페셜 <80년 5월, 푸른눈의 목격자>





그날은 5월 19일 월요일 아침이었다.

라디오에서 광주라는 단어가 들렸다.

전날 갑자기 한국에 계엄령이 선포된 것과 어떤 관계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당시 나는 그냥 라디오를 듣고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프레스 클럽에서 더 많은 정보를 얻으려 했는데 그곳에도 별다른 소식이 없었다.

나는 한국에 여러 차례 통화를 시도했지만 제대로 연결되지 않았다.

결국 한국에 있는 조사원과 연결이 되었다"





나는 바로 도쿄 나리타공항으로 가서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다음날 새벽에 우리는 광주로 향했다.

시간이 늦어 서울에서 하루를 보냈던 것이다.

광주로 가는 고속도로는 텅 비어있었다.

기이한 느낌이었다.


"당시에는 계엄령이 내려져 있었기 때문에 한국인이라해도 광주까지 가는 것은 무척 위험한 상황이었다.

곧 돌아올 수 있을 지도 불확실했다.

서울을 떠나 고속도로로 가는 길에 미리 저지당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일도 없었다.

고속도로에는 차량들이 전혀 없었고 광주 70km 정도까지 달리는 차는 우리밖에 없었다."





우리는 군대에 의해 더이상 나아갈 수 없었다.

그들은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돌아오는 길에 한국인 운전기사 김사복이 샛길을 찾아냈다.

논 사이로 나 있는 길을 달려 작은 마을을 하나 지났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다시 군대를 만났다.





"나는 이야기를 하나 꾸며냈는데,

우리는 광주에서 길이 엇갈린 부장을 찾으러 가는 길이라고 했다.

학생시위 때문에 그를 잃었다고 하니 군인들은 우리를 들어가게 했다.

그래서 우리는 광주로 들어갔다"





우리는 얼마가지 않아 트럭에 탄 학생들을 만났다.

나와 녹음 담당 기자 헤닝은 트럭으로 올라갔다.

그들은 우리를 반기는 눈치였다.

서투른 영어로 어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해주려고 애썼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촬영은 시작 됐다.




우리가 탄 차는 서서히 광주의 중심가쪽으로 향했다.

이때 그들이 낮게 애국가를 불렀는데 지금도 그 느낌이 강렬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시내 지역으로 접어들자 점점 차량에 탄 시위대는 많아졌다.


"마침내 광주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많은 군중의 환영을 받았다.

우리에게 마실 것과 먹을 것, 사탕을 주었다.

나는 사람들과 무척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했고,

사람들은 '와주셔서 다행입니다, 환영합니다' 하면서 박수를 쳐주었다."





곳곳에서 시위대는 주민들에게 환영받고 있었다.

막대기를 든 시위대에게 먹을 것을 건네주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

트럭 위에 우리 카메라를 발견하자 주민들이 다시 환호했다.

우리가 탄 트럭에는 점점 사람들이 많아졌고 사람들은 노래를 불렀다.





나는 필름속의 이 남자를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이 남자는 죽었다. 며칠 뒤에.

이름은 모르겠다.

머리에 총상이 있었다.

이름은 다 알지는 못한다.

모든 걸 적어 둘 여유가 없었다.

이 남자는 살아남지 못한 것을 보았다."



가는 곳마다 우리는 사람들의 환영을 받았다.

외국기자인 우리를 왜 이렇게 환영하는지 잘 알 수는 없었지만

그들이 진심으로 기뻐하는 모습은 너무나 감동적이었다.


우리가 광주시내에 도착한 시간은 사건이 일어난지 3일째가 되는 화요일 낮이었다.

우리는 도시 전체를 찍기 위해 높은 건물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동안 이곳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었을까.



5월 18일 오후 4시 모든 일은 시작되었다.

광주의 가장 중심가인 금남로에 군용 트럭이 도착했다.

공수부대원들이 차에서 내렸다.

사람들은 무슨일인가 구경하고 있었고 공수부대원은 다가왔다.

갑자기 사람들은 비명을 질렀고 군인은 힘껏 몽둥이로 후려쳤다.



사람들은 당황했다.

믿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길에 있던 사람들은 놀라 황급히 달아났다.

공수부대는 달아나는 사람들을 집요하게 추적했다.

더 심각한 문제는 공수부대가 여자나 노약자에게도 폭력을 사용한데 있었다.




그러나 그 다음날 5월 19일, 공수부대의 등에는 대검이 보이기 시작했다.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온 군인이 총에 대검을 꽂은 것이었다.





우리는 잔인한 상황을 직접 목격한 국제사면위원회 소속의 두 외국 젊은이를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이 먼저 우리에게 말을 걸어왔다.


"카메라로 촬영하면서 그들에게 지난 며칠동안 무엇을 겪었는지 물었다.

그들도 기꺼이 승낙했고 그리고 그 사진에 있는 지붕위에서 우리와 인터뷰를 했다.

그때 그들이 목격하였고 다행히 우리가 보지 못한 그 끔찍한 일에 대해 알게 되었다.

군인들이 폭력을 쓰고 학대하면서 시위대를 진압했다는 것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잔혹함이 처음 며칠동안 일어났던 것이다."



나는 국제전화로 이 상황을 독일 본사로 알리려 했지만 외부로 나가는 호텔 전화선은 이미 끊겨있었다.

이날 밤 늦도록 시위대의 함성은 들려왔다.

그런데 또 다른 사건이 일어났다.


"새벽 4시, 4시반경 날이 밝을 무렵 우리가 묵고 있던 곳에서 총소리를 들었고 우리는 나가지 말자고 했다."



밤새 무슨일이 일어났는지는 아침이 되자 드러났다.

한 곳에 사람들이 모여있었고 유리창은 깨져있었다.

나는 한국인 운전기사 김사복에게 가까이 가보자고 했다.

시신이 보였다.

건물 안에서 나온 시신은 트럭 위에 올려져 있었다.

우리는 두 사람의 죽은 젊은이를 봤다.

밤 사이에 죽은 것이다.

대학생들이 막고 있는 건물 안으로 우리는 들어갔다.

그곳에서 우리는 젊은 사람들의 시체를 또 볼수 있었다.





★움짤 뒷부분 피 주의





"이것이 방금 그 건물안에서 일어났다.

이 젊은 청년은 머리에 총상을 입은 것이 분명하다.

옆에서 총알이 날아 왔거나 아니면 큰 파편이었는지 수류탄이었는지는 아마추어라 잘 모르겠다.

여기도 총에 맞았는지...아마 총알이 이렇게 관통했을 것 같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어떤 상황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밖에서 보았을 때 그 건물은 파괴되었고 유리창문은 깨져 있었다."




이날 오후 힌츠페터가 광주를 빠져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 동안 도청 앞에서는 또 하나의 커다란 사건이 벌어졌다.

희생자는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났다.

피가 모자랐다.

광주시내 병원마다 바닥에는 피가 흥건했고 숨진 사람들을 보는 것은 흔한일이 되버렸다.





나는 사람들이 건설장비를 몰고 나오는 모습을 촬영했다.

군대와 직접 대결할 모양이었다.

시위대들이 급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었다.




시민들은 어디선가 총과 실탄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이를 서로 나눠가졌다.




이때 사람들의 구호는 '우리를 죽여라 싸우다 모두 죽자'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정말 그들은 죽을 준비가 된거 같았다.

상상도 못했던 엄청난 일이었다.

나는 남은 필름을 모두 사용해 이상황을 촬영했다.


그러나 우리는 더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이날 시민들이 불태워버린 KBS방송국을 촬영하려 했으나 포기했다.

이제 정말 광주를 빠져나가야 했다.


"그 자료가 너무 엄청났기 때문에 가방 안에 둘 수 만은 없었다.

군대를 통해서 어떤 명령이 떨어질 것이라고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언론인이 수집한 자료를 방송으로 내보내지 않고 머릿속에 넣고 다니면 무슨 소용이 있나?"





이미 중요한 기본적인 사실들은 모두 필름에 담았다.

나는 모두 10롤의 필름을 촬영했다.

그러나 나는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5개만 따로 추려냈다.

그리고 허리 속에 모두 감추었다.

만약 필름을 빼앗기게 되면 나머지 5개는 내주더라도 이것만은 보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의 모험이었다.

모든 자료가 빼앗길 수도 있었다.

이를 군대가 압수할 수 있었다.

광주에서 나오면서 2번 검문 받았는데 그것도 촬영해 두었다.

직접 촬영하지는 못했지만 나는 자료를 차안에 숨겨두었고

대게 군인은 그 안에 총기가 있는지 살폈지 촬영자료를 발견하지 못했다.

정말 다행이었다."


총구가 우리에게 향해있던 검문소를 통과해 우리는 서울로 향했다.

서울에는 캄캄한 밤에 도착했다.




조선호텔 근처에서 우리는 쿠키 몇 통을 사고 필름을 그 속에 숨겼다.

 결혼 선물인거 처럼 포장하고 쿠키통만 든 채 혼자 일본행 비행기를 탔다.

필름은 일본공항에서 바로 독일로 보내졌다.




그날 저녁 독일 제 1 공영방송은 나의 필름을 방송할수 있었다.






<요약>


1980년 5월 18일 저녁 힌츠페터는 광주 소식을 라디오로 듣게됨 -

5월 19일 김사복의 택시를 타고 녹음 담당 기자 헤닝과 함께 광주에 잠입 -

5월 21일 오후 광주를 빠져나옴 -

5월 21일 저녁 힌츠페터 혼자만 일본 나리타공항으로 가서 곧장 독일로 필름을 보냄 -

5월 22일 저녁 서독 전역에 광주 다큐가 방영 -

5월 23일 계엄군이 일시 퇴각한 상태의 광주로 재차 잠입 후 촬영 - 

1986년 11월 광화문에서 시위를 취재하던 도중 사복경찰에게 집단 구타를 당해 목뼈와 척추가 부러져 독일에서 1년간 병원 생활을 함 -

1995년 은퇴 -

힌츠페터는 5.18 묘역에 묻히고 싶다는 소망을 밝힘 -

5.18단체의 추진으로 유가족 측에서 시신을 한국으로 보내는 것은 힘들어서 그 대신에 모발과 손톱 그리고 생전의 유품을 2016년 기념식 때 5.18 묘역 입구에 안치







나는 그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를 모두 들었다.
너무 슬퍼 눈물을 흘리면서도 나는 기록했다.
한국 언론에서 거짓을 말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진실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도 알고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내 필름에 기록된 모든 것은 내 눈 앞에 실제로 일어났던 일,
피할 수 없는 진실이기 때문이다.

- 위르겐 힌츠페터 -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알려줘서 너무 감사하긔ㅠㅠ

영화에는 혼자 나오지만 헤닝 루모어라는 녹음 담당 기자분까지 두분이셨긔ㅠㅠ

힌츠페터 그곳에서는 부디 평안하시길ㅠㅠ


그리고 김사복 기사님 어디 계시나요ㅠㅠ

출처 : 소울드레서 (SoulDresser)
글쓴이 : 눈뜨자마자소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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