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슬퍼 눈물을 흘리면서 나는 기록했다” ‘광주의 기자’ 유르겐 힌츠페터의 5·18 취재영상 글=김창헌(5.18기념재단) 80년 5월 22일, 독일 제1공영방송 ‘저녁 8시 뉴스’는 한국 소식을 급하게 보도한다. “한국의 광주와 그 주변 지역까지 확대된 민중봉기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 군대는 도시를 점령하기 위한 준비태세에 있습니다. 나흘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한국에서 다섯 번째로 큰 도시 광주는 시위대가 차지했습니다. 군대가 도시를 포위하고 있고 그곳으로의 모든 텔렉스와 전화 연락은 두절된 상태입니다. 우리 취재진은 샛길을 통해서 광주로 진입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광주의 상황이 컬러화면으로 방영됐다. TV 화면에는 죽은 사람들의 피가 선연하게 번졌다. “군경이 이틀 동안 이곳에서 시위대에 저지른 잔인함은 우리가 직접 목격한 중상자들을 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 시위대는 도시를 휘젓고 다니면서 구속자 석방, 군사독재 타도라는 구호를 외치고 있습니다. 국민들은 완전히 시위대 편이며 모든 주유소는 휘발유를 무료로 제공하고 있습니다.” 다음 날, 미국 CBS는 이 방송화면을 받아 미국 전역에 광주를 보도한다. 독일 제1공영방송의 22일 뉴스보도는 전 세계에 광주의 참상을 알리는 첫 방송보도였다. 한국의 언론은 침묵했고 계엄사령부의 발표만을 그대로 보도했다. 한국에서 광주의 진실은 ‘유언비어’로 취급됐다. 발 빠르게, 위험을 무릅쓰고 광주로 달려와 광주소식을 전 세계에 전파한 기자는 독일 공영방송 카메라 기자 유르겐 힌츠페터(Juergen Hinzpeter)였다. 광주항쟁 당시 그는 두 차례나 광주에 와, 카메라에 사실을 담아냈다. 그는 ‘광주의 기자’, ‘푸른 눈의 목격자’로 불린다. 전 세계에 광주의 참상을 알리는 첫 방송보도 “내 생애에서 한번도 이런 비슷한 상황을 목격한 적이 없었다. 가슴이 너무 꽉 막혀서 사진 찍는 것을 잠시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독일 공용방송의 일본 특파원이었다. 5월 19일 아침, 라디오에서 ‘광주’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전날의 계엄령, 그는 기자의 직감으로 한국에서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았다. 바로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5.18광주민주항쟁 비디오 시청하는 민주화합추진위원회 외국 기자로서 KOIS(Korean Overseas Information Office, 지금의 국정홍보처 해외홍보원)에 취재사항을 밝혀야 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취재가 불가능할 것 같았다. 그는 무작정 광주로 향했다. 광주 외곽은 계엄군이 통제하고 있었다. 광주로 들어가지 못했다. 운전기사 김사복 씨가 샛길을 찾아 광주로 진입했다. 또다시 계엄군이 막았다. 힌츠페터는 길이 엇갈린 부장을 찾으러 가는 길이라고 둘러댔다. 광주로 향했다. 시민군을 만났다. 도청으로 향했다. 시민들은 환호했다. 카메라로 촬영을 시작하자 박수를 치고 손을 흔들었다. 그는 구호를 외치며 의기를 다지는 시민군을 촬영했다. 그리고 트럭 위에 무참히 죽어 있는 두 시신을 촬영했다. 형상을 알아볼 수 없는 젊은 남자의 시신을 촬영했다. 학살현장 등을 10롤의 필름에 담았다. “기자가 수집한 자료를 방송으로 내보내지 않고 머릿속에 넣고 다니면 무슨 소용이 있나.” 빠른 보도가 생명이었다. 광주를 빠져나가야 했다.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다. 한국은 군부가 통신수단을 끊어놓아 기사를 송고할 방법이 없었다. 군 검문부터 걱정이었다. 그는 가장 귀한 다섯 롤의 필름을 허리 속에 감추고 나머지 필름은 다른 곳에 감췄다. 예상대로 군대와 마주쳤다. 뺏기지 않았다. 서울에 도착해 쿠키를 샀다. 쿠키상자에 필름을 넣었다. 은색 포장지로 포장을 했다. 리본까지 달았다. 결혼선물로 위장했다. 공항으로 달려갔다. 출발 5분 전에 도쿄행 비행기 1등석을 끊었다. 검색대를 지나갔다. 필름은 다행히 엑스레이 검색을 피했다. 일본 방송국에서 10롤의 필름을 방송용으로 바꿔 위성으로 독일로 보냈다. 독일 제1공영방송은 ‘광주의 살육과 ‘광주의 저항’을 보도했다.
내 필름은 피할 수 없는 진실 유르겐 힌츠페터는 영상을 넘기고 다시 한국으로 향했다. 한국 신문을 읽어봤다. 사실은 없었다. 5월 23일 다시 광주로 들어갔다. 처음 찾았을 때와 다르게 도청광장에는 젊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여성과 노인들도 많았다. 그러나 그 사이 훨씬 많이 사람이 죽었다. 관들이 즐비했다. 산자들의 통곡이 끊이지 않았다. 자식을 잃은 어머니는 ‘내 새끼 어쩔거나, 어쩔거나’ 하며 울었고 아버지는 ‘거룩한 죽음이 돼다오, 거룩한 죽음이 돼다오’ 하며 오열했다. 그도 눈물을 흘렸다. “나는 그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를 모두 들었다. 너무 슬퍼 눈물을 흘리면서 나는 기록했다. 한국 언론에서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진실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내 필름에 기록된 모든 것은 내 눈 앞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 피할 수 없는 진실이기 때문이다.” 유르겐 힌츠페터 9월, 광주에서 찍은 필름의 마지막 1cm까지 사용하며, <기로에 선 한국>이라는 45분짜리 다큐멘터리를 제작한다. ‘어두운 그림자가 한국을 뒤덮고 있습니다. 1948년 정부수립이후 3번째 독재자가 권력을 잡아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는 모든 기회를 막아버렸습니다. 49세의 전두환은 한국의 새 독재자가 되었습니다’ 라는 설명으로 시작하는 다큐멘터리는 광주 5·18을 차근차근 더듬으며 전두환 군사정권의 치부를 들춰낸다. 그는 다큐멘터리를 독일 본사로 넘기면서 그 필름 중 일부라도 편집하거나 삭제하면 일을 그만 두겠다고 선전포고했다. 유르겐 힌츠페터가 위험을 무릅쓰고 기록했던 생생한 광주 장면은 한국의 민주주의를 앞당기데 큰 역할을 했다. 그의 영상은 한국에 비밀리에 반입돼 ‘광주비디오’로 태어났다. 군사정권의 폭압 아래서 눈과 귀가 먼 채로 살았던 한국인에게 광주의 비극을 알렸다. 슬픔과 분노가 불의에 저항할 수 있는 용기를 불러 일으켰다. 1986년 유르겐 힌츠페터는 서울 광화문 시위 현장에서 ‘한국인’ 서너 명에게 이유 없이 끌려가 두들겨 맞았다. 목과 척추를 크게 다쳤다. 큰 수술을 받았다. 2005년 5·18민중항재 25주년을 맞아 광주를 방문한 그는 “5·18 당시 새벽에 총소리가 나면 불안한 마음으로 바깥을 내다봤다. 광주를 떠올리면 그 총소리에 죽어간 젊은이들, 그 젊은이들을 잃은 부모들이 떠올라 가슴이 저려온다. 내게 이 고통의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며 “당시 수많은 이들이 피를 흘린 것을 바탕으로 한국의 민주화가 이뤄졌음을 절대로 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한국에서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희생하는 젊은이들을 보면서 그것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며 “광주를 경험한 뒤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투쟁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독일 카메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는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광주시내를 활보하며 ‘시민들이 무참히 죽어간다’는 기사를 세계에 전파했다. 1980년 5월 28일자에서 조선일보는 “우리는 우선 전두환 대통령의 당선을 온국민과 더불어 축하하며 그 전도에 영광이 있기를 회원해 마지 않는다”고 썼다. 사설에서는 “광주사태를 진정시킨 군의 어려웠던 사정을 우리는 알고 있다”며 “군의 노고를 우리는 잊지 않는다”고 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