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사전의 한국어 계통 외래어 명단에 요즘 하나 더 추가되게 생겼다. 바로 ‘갑질’이다. 착취·억압에 극심한 인격 모욕, 아니 하위자의 인격 부정까지 포함하는 현상을 정확히 표현하는 단어는 찾기가 쉽지 않다. 그러니까 ‘갑질’이라는 개념어를 도입하지 않으면 안 되는 셈이다.
한국 정부는 원조분배권을 독점하여 미국이라는 ‘슈퍼갑’ 그늘 아래에서 자본 위에도 군림하는 ‘갑’이 됐다. 박정희 시절에 원조가 차관 등으로 대체됐지만, 국외자금을 독점적으로 배분하면서 정부의 위상은 그대로 남았다. 이런 상황에서는 국가의 초대형 갑질은 당연지사였다.
주체사상의 ‘주체’, ‘김치’, 그리고 ‘한류’…. 영어사전에 그다지 많지 않았던 한국어 계통의 외래어 명단에 요즘 하나 더 추가되게 생겼다. 바로 ‘갑질’이다. 인터넷을 보면 예컨대 한국 대학에서 석·박사 공부하면서 ‘교수님’의 아이를 자기 차로 학원에 데려다주는 등 사역에 시달리는 한국인 대학원 동료들의 갑질 피해 사례를 소개하는 외국인의 글들을 볼 수 있다. 영어 아닌 러시아어 인터넷까지 본다면 한국계 자동차 공장에서 일하면서 맨 먼저 배운 한국어 단어가 바로 “개새끼”라고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는 사람의 글도 읽을 수 있다. 착취·억압에 극심한 인격 모욕, 아니 하위자의 인격 부정까지 포함하는 이런 현상을 정확히 표현하는 단어는 찾기가 쉽지 않다. 그러니까 ‘갑질’이라는 개념어를 도입하지 않으면 안 되는 셈이다.
갑질이란 대한민국에서 모든 비대칭적 사회관계에서 다 감지된다. 고래로 국가가 지배해온 사회인지라 갑질 문화도 국가가 이끌어왔다. 노동계에 대한 대한민국의 모든 통치권자들의 태도는 한마디로 갑질의 전형에 가깝다. 문재인 대통령의 집권을 가능케 한 촛불항쟁의 서곡이라고 할 수 있는 2015년 11월의 민중총궐기를 계획한 ‘죄’로 박근혜 정권 밑에서 3년형을 받은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은, 문재인 정권이 들어서도 계속 감옥에 갇혀 있으며 사면을 받아 나올 전망도 불분명하지 않은가?
전세계의 노동운동가로부터 수년간 비판받아온 처사지만, 노동계의 위치가 ‘을’로 고정돼 있는 한국에서는 거의 당연지사다. 노동계에 가까우며 좌파민족주의 색채가 있는 정치단체라면, ‘갑, 을, 병, 정, 무, 기’도 아닌 임(壬)이나 계(癸) 정도다. 정치 지도자로서 보수층 표심을 얻을 필요만 생기면 좌파민족주의 계통의 양심수들이 줄줄이 감옥 가고 사면을 꿈꾸기도 어렵다. 징역 9년형을 살고 있는 이석기 전 의원은 국내외 인권단체에 의해 양심수로 지목돼 그 석방운동에 유럽의 종교인·정치인도 가세하고 있지만, 인권변호사 출신(!)의 문재인 대통령이 그를 석방시키려는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 점만 봐도 좌파민족주의 계열에 대한 국가의 갑질이 어느 정도인지 쉽게 알 수 있다. 위에서 국가가 선도하고 있지만, 아래에서 가맹점 주인을 상대로 갑질을 벌이는 ‘미스터피자’ 회장 같은 기업인들이나 알바에게 갑질을 해대는 가맹점 사장들을 흔히 본다. 온 사회가 갑질의 끈으로 묶여 있는 느낌이다.
대한민국이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되었나? 왜 국가부터 시작해서 ‘갑’의 위치가 되기만 하면 ‘을’이나 ‘병’, ‘정’들과의 관계를 법이나 양식이 아닌 강자의 편의대로만 구성하는가? 근대사회에서 약자 보호를 위한 이기(利器)가 돼야 할 법은, 왜 대한민국에서 한상균이나 이석기와 같은 양심수들을 양산하는 흉기(凶器)로 둔갑했는가? 왜 형식적 민주화가 시작된 지 거의 30년 가까이 된 시점에서 파업하는 노동자들이 여전히 구사대의 폭력에 시달리고, 알바 노동자들이 “임금 떼여도 신고하지 않는 게 공동체 정신”과 같은, 못 믿을 정도의 오만하고 폭력적인 훈계를 법률가(!) 출신의 국회의원으로부터 들어야 하는가? 왜 갑질은 한국 사회를 설명하는 만능 코드가 됐는가? 갑질의 뿌리를 이해하자면 한국 근대국가의 역사와 한국 자본의 특징부터 살펴봐야 할 것이다.
한국의 근대국가는 식민화 이후로부터 외삽성이 강했다. 아래로부터의 합의가 아닌, 외부로부터의 폭력으로 만들어진 국가였다. 식민지국가는 비록 국내 지주층이나 일부 상인, 관료층을 성공적으로 포섭했다 하더라도 궁극적으로 외부의 힘, 즉 일본군의 총칼로 유지됐다. 한데 남한이라는 신생국가의 외삽성은 같은 친미 독재정권 중에서도 특기할 만했다. 사실상 미국의 힘으로 성립된 이승만 정권은 지속적으로 미국의 돈으로 유지됐다. 1945~61년 미국이 냉전의 최전선이 된 한국에 투입한 원조액은 약 31억달러로, 아프리카 전체에 쏟아부은 원조와 맞먹을 정도의 액수였다.
물론 이 원조는 자선은 아니었다. 그 유지비용의 약 58%를 미국이 조달한 이승만 시대의 60만 한국군 대군은 사실상 동북아에서 미군의 보조병력 역할을 했으며 박정희 집권기에 넘어가서 미국의 베트남 침략에 총알받이로 이용돼야 됐다. 미군기지는 그때나 지금이나 한국 정부에 치외법권의 영토다. 그러나 기지와 보조병력을 제공한 대가로 한국 정부는 원조분배권을 독점하여 미국이라는 ‘슈퍼갑’ 그늘 아래에서 일반인뿐만 아니라 자본 위에도 군림하는 ‘갑’이 됐다. 박정희 시절에 원조가 차관 등으로 대체됐지만, 궁극적으로 미국의 힘으로 유지되고 국외자금을 독점적으로 배분하면서 사회 위에 폭력적으로 군림하는 정부의 위상은 그대로 남았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의 초대형 갑질은 당연지사였다. 또 미국 자금이 들어오는 원천적 이유는 반공과 냉전적 대립이었던 만큼 특히 좌파민족주의적 경향의 운동을 분쇄하는 것은 한국 심층국가(Deep State: 국가 특수보안기관들의 총칭)의 존재 이유처럼 되고 말았다.
1980년 말기의 형식적 민주화로 재벌들이 국가만큼이나 그 이상의 갑이 됐다. 그러나 이들 기업이 ‘재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일차적으로 기술혁신도 ‘상재’(商才)도 아니고 바로 국가와의 ‘특수’ 관계와 특혜금융 등이었다. 국가와 유착돼가면서 재벌들도 군사정권의 병영문화를 그대로 받아들여 공장을 군부대처럼 운영하는 등 독재국가와 닮아갔다. 또 하나의 자본축적 원천은 바로 임금착취와, 핵심부(구미권과 일본)에서 유해성 등으로 더 이상 운영할 수 없는 산업부문들을 한국 기업만의 틈새로 가꾸는 것이었다.
1987년 대투쟁 이후로 민주노조를 갖게 된 직영공장의 정규직들을 더 이상 초과착취할 수 없게 되자 임금착취의 중심은 점차 하도급 중소기업과 비정규직 등으로 옮겨졌다. 유해성 물질 생산으로 자본축적이 이루어진 가장 대표적인 부문은, 현재 삼성전자와 에스케이(SK)하이닉스 등이 74%의 기록적인 세계적 점유율을 갖고 있는 반도체다. 반도체 생산 공정에 쓰이는 EGE(에틸렌, 글리콜, 에테르) 등 독성물질들이 노동자 건강에 얼마나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는지가 알려지고 미국의 생산업체들이 노동자 집단소송에 직면하자 반도체 생산의 중심은 한국으로 옮겨지게 됐다. 한국 반도체공장 생산직의 대부분은 무노조 기업에서 일하기에 집단소송의 위험이 훨씬 더 낮을 것이라는 포석이었다. 노조를 지속적으로 파괴하고 한상균 위원장 같은 활동가들을 구속시키는 한국 자본과 국가의 갑질에 그런 차원에서 경제적 의미가 상당히 있다. 노조가 아예 없거나 위축돼 있어야 한국 자본의 수익모델이 잘 돌아가기 때문이다.
고급관료와 재벌가로 이루어진 한국의 지배연합에서 또 한 가지 빠질 수 없는 요소는 바로 법조다. 검사와 판사, 고수익 변호사들은 고급관료나 재벌 대주주 내지 재벌 임원들과 혼맥을 맺고 이웃에서 살고 같이 골프 치러 다니고 아이들을 같은 학교·학원에 보낸다. 그래서 검사와 판사의 손을 빌려 한상균이나 이석기를 감옥에 보내는 것은 한국 국가·자본으로서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지배연합의 너무나 가시적인, 대대적인 갑질은, 수많은 중소기업인이나 심지어 돈이 있는 개인 소비자들에게도 하나의 롤모델이 된다. 삼성 반도체·엘시디(LCD) 직업병 피해자 중 79명이나 사망해도 공장이 별다른 법적 문제 없이 계속 돌아갈 수 있다면, 알바의 임금을 체불하고 대학원생에게 대필을 강요해도 무엇이 무섭겠는가? 큰 도둑들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작은 도둑들도 그 흉내를 내게 돼 있다.
외삽성이 강하고 사회 위에서 군림하는 폭력적 국가와 독점기업들의 배타적 지배는 갑질이라는 사회적 코드를 낳았다. 이 악순환을 끊는 유일한 방법은 약자의 조직화와 갑질에의 집단적 저항이다. 알바 임금 체불이 당연하다는 막말을 해대는 국회의원의 낙선을 보장할 만큼 알바 조직이 위풍당당하다면 헬조선이 그래도 조금 더 살만한 나라가 되지 않겠는가?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