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에 걸린 시어머니가 그래서 요즘은 참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고도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너는 누구냐?”는 시어머니의 반복된 질문에 짜증을 내고 화를 내던 자신이었는데, 지금은 자식에게 설명을 하듯이 차근차근 말씀드린다고도 했다.
그러한 마음은 며느리의 마음이 아니라 어머니의 마음일 것이다. 자식들이 태어나 하나 둘씩 세상을 알아갈 때, 자식이 “엄마, 저건 뭐야?”하고 물어올 때 우리는 얼마나 기뻐했던가?
가르쳐 주면 또 묻고, 가르쳐 주면 또 묻는 아이가 열 번을 물어 와도 오히려 그것을 대견해 하면서 지치지 않고 대답했었던 우리였는데, 부모가 하는 몇 번의 질문에는 쉽게 짜증을 내는 우리들 아니던가.
부모는 우리를 키울 때 업고 안고 치우고 씻기고 다 했는데, 우리는 부모를 모실 때 여차하면 도우미를 부르고, 요양원에 보내면서 남의 손을 빌리려 한다. 그것이 오히려 부모님을 편하게 하는 것이라고 스스로 위안을 하면서.
그러면서도 자식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다 해주는 우리지만, 정작 부모님이 지금 무엇을 원하고 계시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 우리 아니던가.
TV 코미디 프로를 보면 재미난 장면이 가끔 나오는데 시골에 있는 부모님으로 분장한 코미디언들이 나와 “옆집 개똥이 집에 커다란 냉장고가 들어왔는디 냉장고 문이 양쪽으로 열리는 것이 겁나게 좋더라.” 그러면서 꼭 한 마디를 하신다.
“우리는 괜찮다. 우리 집 냉장고가 쬐끔 작아서 그렇지 쌩쌩 잘 돌아강께 느그들은 걱정허지 말드라고.”
우리는 이렇게 하신 부모님 말씀을 곧이곧대로 듣지 않는다. 항상 통역을 해서 들어야 한다. “버스 두 번 갈아타고 내려서 20분만 걸어가면 되니까 아무 걱정 마라. 혼자 갈 수 있다.”는 말은 “길도 모르고, 무릎도 아프니 좀 데리러 와라”는 또 다른 말씀이다.
“요즘도 딸기가 나오냐?”하는 말씀은 딸기가 먹고 싶다는 말씀이고, “우리 손주는 잘 있냐? 김치 담가놨으니 이번 주에 내려와서 김치 가져가거라.”하는 말은 “느그들이 몹시 보고 싶다”는 부모님 마음의 또 다른 표현이다.
이렇게 부모님의 우회 화법에 대한 통역능력은 부모님에 대한 사랑과 관심의 깊이에 따라 적중률이 높아지기도 하고 낮아지기도 한다. 자식은 어려서 부모의 발을 밟더니, 커서는 부모의 마음을 밟더라는 옛말이 있다.
지금 자식을 키우면서 한편으로는 가까이든 멀리든 부모님을 모시고 살아야하는 우리가 한번쯤 생각해 봐야 할 대목이다. 그나저나 나는 누구일까? 치매 걸린 어머니가 아닌 누군가 내게 “너는 누구냐?”하고 물으면 나는 오늘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대원(대원)
박 완 규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