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이 시민들을 무참히 폭행하는 모습. 5·18기념재단 제공
1987년 6월항쟁 이후 88년 국회 5·18광주특위와 95~97년 12·12 및 5·18 검찰 수사, 재판 과정 등에서 80년 5월20일 밤 계엄군에게 실탄이 지급된 경위는 밝혀졌다. 하지만 발포 명령을 하달한 ‘상부’는 밝히지 못했다. 군 당국은 그동안 ‘우발적인 자위권 발동 차원’의 발포였다고 주장해왔다. 5·18기념재단이 24일 공개한, 505보안대(광주)가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광주 소요사태’라는 기밀문서에 나오는 ‘발포 명령 하달(1인당 20발)’이라는 대목은 발포 명령이 실제로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
■ 자위권 천명 전 발포 이 문서가 작성된 시점은 ‘80년 5월21일 새벽 0시20분’으로 나온다. ‘실탄 장전 및 유사시 발포 명령 하달’ 시기는 ‘(5월20일) 23시15분’으로 당시 보안대는 파악하고 있다. 5월20일 밤 11시 전남대 인근 광주역 앞에선 제3공수여단(여단장 최세창) 소속 군인의 발포로 시민 4명이 사망했다. 광주에서 군의 첫 발포 직후 보안대 보고에 ‘발포 명령 하달’이란 내용이 있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5월21일 오후 1~5시 광주 금남로에서 공수부대의 집단발포로 시민 34명이 숨졌다. 계엄사령부가 자위권 발동 천명 방침을 밝힌 뒤 자위권 발동을 허락한 것은 이런 일이 있은 뒤인 5월21일 저녁 8시30분이다.
1995~97년 수사에서 검찰은 ‘발포=자위권’으로 결론 내렸다. “상급 지휘관이나 별도의 지휘계통에 있는 특정인의 구체적 발포 명령에 따라 이루어진 것으로 인정할 수 있는 자료가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도 2007년 7월 ‘12·12, 5·17, 5·18사건 조사결과 보고서’를 발표했지만 발포 명령자를 밝혀내지 못했다. 다만 국방부 과거사위는 “‘총기 사용은 긴급시라도 총장 승인 후’라고 돼 있었다”며 “발포의 경우 육군참모총장의 승인을 받는 중요 사안임에도 광주에서의 실탄 분배와 발포는 공식적인 보고는커녕, 책임을 묻지도 않고 오히려 일부 관련자에게 무공훈장을 수여했다. 최소한 계엄사 당국의 암묵적 지원 아래 행해졌다고 추정하기에 충분하다”고 밝혔다.
■ 지휘권 별도 체계 의혹 5·18기념재단이 공개한 문건에 나오는 ‘발포 명령 하달’의 상부는 누구일까? 광주에 투입된 3공수여단과 11공수여단은 지휘계선상 상부인 2군사령부와 전교사령관의 승인을 받지 않고 발포했다. 5·18 연구자들은 최세창 3공수여단장 등과 정호용 특전사령관, 전두환 보안사령관으로 이어지는 비공식적 지휘체계에서 발포 명령자를 찾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월간경향>(89년 5월호) 인터뷰 기사 ‘정호용, 광주사태 책임을 밝히다’에 나온 발언은 지휘권 이원화를 암시한다. 정호용씨는 당시 인터뷰에서 “사태가 악화되자 발포 여부를 묻는 급전이 날아와서 나는 지휘 계통 안에 서 있지 않았지만 절대 발포불가 명령을 내렸다”고 말했다. 그런데 정호용씨는 ‘5월21일만은 광주에 가지 않았노라’고 강력히 주장했다. 이 때문에 당시 광주 계엄군에 대해 전두환 등 ‘신군부’가 실제적인 지휘권을 행사했다는 의혹이 제기돼온 것이다.
■ 군 내부 자료 공개해야 발포 명령자 등의 진상이 규명되려면 군 내부의 5·18 관련 자료부터 공개돼야 한다. 검찰 수사기록 등을 보면, 군의 발포 명령과 관련된 수사기록 일부가 아직까지 군사기밀보호법 등에 따라 공개되지 않고 있다. 검찰은 5월20일 밤 광주역에서 실탄을 배분한 3공수여단장(최세창 준장)의 수사기록을 일부 누락하고 공개했다. 5월21일 옛 전남도청 앞 집단발포를 행했던 11공수여단의 지휘 책임자인 최웅 준장의 수사기록은 아예 삭제됐다. 김양래 5·18기념재단 상임이사는 “조사권을 가진 진상규명위원회를 통해 발포 명령자와 지휘권 이원화 문제 등의 진상이 밝혀져야 한다”고 말했다. 광주/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5·18 ‘발포 명령 하달’ 첫 군기록 나왔다5·18기념재단, 보안사령부 505보안대 기밀문서 공개
5월20일 23시15분 전남대 부근 병력 ‘발포 명령 하달’
1980년 5월 당시 ‘현장 지휘관이 자위권 차원에서 발포했을 뿐 상부의 발포명령은 없었다’는 군 당국의 지금껏 설명과 달리 ‘발포 명령 하달’이란 군 내부 문건이 처음으로 공개됐다. ‘현장의 군인이 알아서 총을 쐈다’는 설명에 대해 군 지휘체계 특성상 누군가 발포명령을 내렸을 것이란 반론이 끊이지 않고 있다. 사진은 80년 5월 보안사령부(현 기무사령부) 광주지역 관할 부대가 작성한 것으로 된 ‘광주 소요사태’라는 기밀문서. 5·18기념재단 제공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군 당국이 시민들을 향해 총을 쏘도록 발포 명령을 하달했다는 군 내부 기록이 처음으로 나왔다. 국회와 검찰, 국방부 등이 벌인 4차례 5·18 조사에서 ‘현장 지휘관이 자위권 차원에서 발포했을 뿐 상부 명령에 의한 발포는 없었다’고 줄곧 주장해온 군의 주장을 뒤엎는 것이다.
24일 5·18기념재단이 확보한 보안사령부(현 기무사령부) 505보안대(광주지역 관할 부대)가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광주 소요사태’라는 기밀문서를 보면, 80년 5월20일 ‘23시15분(밤 11시15분) 전교사(전투교육사령부) 및 전남대 부근 병력에게 실탄 장전 및 유사시 발포 명령 하달(1인당 20발)’이라고 적혀 있다. 당시 전남대 부근에 주둔했던 병력은 제3공수여단(여단장 최세창)이다. 최세창 여단장(육사 13기)은 신군부 실세 전두환 보안사령관(육사 11기)이 제1공수여단장이었을 때 부단장을 지낸 측근이다.
당시 공수부대 실탄 지급 분배 사실이 확인됐고, 발포가 이뤄져 시민들이 숨졌지만 37년 넘게 발포명령자를 밝혀내지 못한 상태다. 2007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기록 보고서 등을 보면, 최세창 3공수여단장은 5월20일 밤 10시30분 ‘경계용 실탄’을 위협 사격용으로 공수부대 각 대대에 지급했다. 육군본부 군사연구실이 낸 <광주사태체험수기>(1988)에도 이상휴 중령(당시 3공수여단 13대대 9지역대장)이 “전남대학교에서 급식 후 중대장 지역대장에게 M16 실탄 30발씩 주고, 사용은 여단장 통제”라는 부분이 나온다. 3공수여단은 지휘계선상 상급부대인 제2군사령부로부터 발포 금지 및 실탄 통제 지시(5월20일 밤 11시20분)가 있었는데도 발포했고, 5월20일 밤 광주 시민 4명이 총탄을 맞고 숨졌다. 다음날인 5월21일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옛 전남도청 앞 금남로에선 공수부대원들의 집단발포로 시민 34명이 총을 맞고 사망했다.
하지만 2007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는 발포 명령자에 대해서는 “판단 불가”라며 밝히지 못했다. 정수만 5·18기념재단 비상임연구원은 “당시 신군부 실세인 보안대가 작성한 군 자료에 ‘발포명령 하달’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누가 어떻게 이런 명령을 내렸는지 발포 명령권자를 밝히는 단서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날 공개 문서엔 ‘마산주둔 해병 1사단 1개 대대 목포로 이동 예정’이라는 내용도 있다. 공군 조종사들이 5월21~22일 공대지 폭탄을 전투기에 싣고 광주 출격 대기중이었다는 증언에 이어 신군부가 광주 진압에 해병대까지 동원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실제 해병대는 광주에 투입되지 않았다.
광주/정대하, 김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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