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률[訴訟]=자유 평등 정의

‘5·18 헬기사격’···증언과 기록으로 보는 진실 / 경향신문

성령충만땅에천국 2017. 8. 24. 15:52

[정리뉴스]‘5·18 헬기사격’···증언과 기록으로 보는 진실

수정2017-08-24 14:35:49입력시간 보기

국방부가 23일 특별조사단을 꾸려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헬기 사격’ 과 ‘전투기 출격 대기’에 관한 진실을 규명하겠다고 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 지시에 따른 것입니다. 최근 영화 <택시운전사>로 1980년 5월 광주와 진실 규명에 대한 관심은 그 어느 때보다 높습니다.

5·18 민주화운동 당시 광주 동구 금남로 일대에 헬기가 떠 있는 모습을 기자들이 촬영한 사진. 5·18기념재단 제공

5·18 민주화운동 당시 광주 동구 금남로 일대에 헬기가 떠 있는 모습을 기자들이 촬영한 사진. 5·18기념재단 제공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을 밝히려는 시도는 과거에도 있었습니다. 일부 성과를 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헬기 사격’과 ‘최초 발포 명령자’ 등 핵심 의혹은 미제로 남아 있습니다.

1995년, 검찰이 ‘헬기 사격’ 여부에 대해 수사를 벌였지만 “헬기 사격은 없었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군 자료상 공중사격 기록을 발견할 수 없었고 광주 적십자·기독·전남대병원의 진료기록부와 관계자 조사에서도 헬기 총격 피해자가 치료받은 사실을 확인할 수 없었다”고 발표합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진상 조사 특별 위원회 청문회 동행 명령장을 수령하는 최규하 전 대통령 측(1989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진상 조사 특별 위원회 청문회 동행 명령장을 수령하는 최규하 전 대통령 측(1989년)

국방부도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를 꾸려 2007년 7월‘12·12, 5·17, 5·18사건 조사결과보고서’를 발간했지만 첫 발포 명령자가 누군지, 헬기를 동원한 발포는 몇 차례인지는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37년 동안 밝혀내지 못한 진실, 이번엔 어떨까요? 오랜 세월 많은 이들이 진실을 밝히려 애썼습니다. 증언과 증거들은 차근차근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어느 때보다 많은 증언과 증거들이 우리 곁에 쌓였습니다. 당시 증언과 기록을 정리했습니다.


■관련 증언

-고(故) 조비오 신부는 1989년 국회의 광주특위 청문회에서 “80년 5월 21일 오후 1시에서 1시 30분, 2시 정도에 상공에서 헬기 소리와 함께 기관총 소리가 드드득 세 번 울렸다”고 증언했습니다. 당시 적십자대원으로 활동했던 이광영씨와 시민 정낙평씨 등도 비슷한 증언을 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1995년에는 5·18 당시 광주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던 아놀드 피터슨 목사가 증언론을 냅니다. 증언록에서 피터슨 목사는 “5월 21일 오후 3시 30분쯤 계엄군 헬리콥터 3∼4대가 시민에게 총을 난사해 그날 하루 광주기독병원에서만도 사망자 14명과 부상자 100여명이 목격됐다”고 밝힙니다. 당시 국방부는 사실무근이라며 부인했습니다.

▶관련 기사: [단독]계엄군 만행 고발한 미국 피터슨 목사 부인 “우리집 발코니서 헬기 목격 사진은 남편이 직접 찍은 것”


-그러나 정수만 전 5·18유족회장인회장은 “군은 헬기 출동 지시는 받았으나 실제 출동은 안 했다고 주장하지만, 목격자가 있고 금남로 건물 옥상에서 2명이 죽고 무등극장 앞에서도 사람이 죽었다”고 주장해왔습니다.

광주민주화운동으로 발생한 희생자들의 시신과 관을 촬영하는 기자와 사람들/ 경향신문 자료사진

광주민주화운동으로 발생한 희생자들의 시신과 관을 촬영하는 기자와 사람들/ 경향신문 자료사진

-올해 1월에는 5·18기념재단이 헬기 사격에 관한 목격담을 담은 증언 기록이 공개됩니다. 천주교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가 1995년 검찰의 5·18 관련 수사 당시 헬기 사격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제출한 시민 증언 자료집인데요, 자료에는 전남 나주의 한 시민이 “5·18 당시 광주로 통학하던 딸을 마중 가던 중 금당산 부근에서 헬기 난사로 사람이 숨진 사실을 기억한다”고 광주교구 정평위에 증언한 내용이 담겼습니다. 또 당시 광주대 근처에 살았던 서모씨(당시 28세)는 “많은 총 소리가 났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천장에 구멍이 뚫려 기왓장 틈으로 하늘이 보였다. 벽에도 총알이 박혀 있었다”고 증언한 것으로 돼 있었습니다.

▶관련 기사: 5·18때 헬기 사격 목격” 시민 증언 공개


-고은 시인의 시 ‘만인보’에도 헬기 사격에 관한 내용이 나옵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헌혈을 하고 돌아오다 계엄군의 총을 맞고 숨진 여고생 박금희양(당시 17세)의 죽음을 다뤘는데요. “양림동 건너가는 양림다리 다급한 호소였다/ 중략 / 피를 나눠주세요 / 중략 / 저도함께 가겠어요 / 전남여상 3학년 여고생 박금희/ (…) / 기독교병원 헌혈하고 돌아오는 길/ 탕 탕 탕 / 헬기에서 쏜 / 총 맞아 / 거리에 피 다 쏟아버렸다” 고 묘사합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검찰의 희생자 검시조서에, 박양은 1980년 5월21일 오후 2시쯤 광주 금남로 수미다실 앞에서 M-16 총탄에 배와 허리부분을 맞고 숨진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관련 기사: ‘만인보’가 기록한 5·18당시 헬기사격…여고생 죽음서 다뤄


-지난 21일에는 보다 충격적인 증언이 나옵니다. 5·18 당시 수원 제10전투비행단 101대대에서 복무했던 전투기 조종사들이 “5·18 사나흘 뒤인 5월 21일에서 22일 사이 비행단 전체에 출격 대기 명령이 내려졌다”고 증언했습니다. 500파운드 짜리 공대지 무장을 한 채로 말이죠. 그리고 출격지는 ‘광주’로 알고 있었다고 증언했습니다.

▶관련 기사: [5·18 특별조사 착수]“광주 폭격 위해 대기했다” 공군도 개입


고 조비오 신부/ 경향신문 자료사진

고 조비오 신부/ 경향신문 자료사진

■관련 기록

현재까지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이 헬기에서 사격했다는 공식 기록은 확인된 게 없습니다. 그러나 이를 시사하는 기록들은 존재합니다.

-우선 헬기들이 당시 광주 상공에 무장한 채 떠있었다는 기록은 실재합니다. 5·18 당시 계엄군이었던 전투병과교육사령부 작전처의‘보급지원 현황’ 문서에는 1980년 5월23일 벌컨포탄 1500발이 항공대에 보급된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2군 계엄상황일지’에도 1980년 5월24일 AH-1J(일명 코브라헬기) 2대와 500MD 헬기 2대가 지상 엄호를 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당시 지원된 헬기 등은 40여대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떠있었을 뿐 아니라 사격까지 했음을 시사하는 증거도 나옵니다. 지난해 9월 광주 전일빌딩 외벽 등에서 총탄 흔적이 발견됩니다. 12월까지 150여개의 총탄 흔적이 발견되는데요. 전일빌딩은 1980년 당시 인근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고, 이 건물에서 계엄군과 시민군이 총격전을 벌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탄흔을 조사한 국과수는 “10층에서 발견된 총탄자국의 각도가 수평에 가깝고 1980년 당시 주변에 고층 건물이 없었던 정황으로 볼 때 헬기에서 발사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습니다.

▶관련 기사: 5·18때 계엄군 헬기서 총격 흔적 80개 발견…옛 전남도청 앞 빌딩 10층서


광주 동구 금남로 전일빌딩 10층 기둥에서 발견된 총탄의 흔적 /광주시 제공

광주 동구 금남로 전일빌딩 10층 기둥에서 발견된 총탄의 흔적 /광주시 제공

-지난해 12월에는 당시 계엄군이 헬기 사격을 요청했다는 내용이 담긴 군 보고서가 공개됩니다. 5·18 계엄군이었던 전투병과교육사령부가 1980년 9월, 육군본부에 제출한 ‘광주 소요사태 분석 교훈집’에 실린 내용인데요. 5·18 당시 광주에 배치했던 항공기의 임무와 운영 방식, 문제점을 다룬 이 보고서에는 ‘헬기 능력 및 제한 사항을 고려한 항공기 운용’ ‘유류 및 탄약의 높은 소모율로 고가(高價) 운항’이라고 기재돼 있습니다. 당시 ‘항공기가 운용됐고, 유류와 탄약을 많이 썼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특히 ‘표적 지시의 불확실, 요망 표적 위치에 아군 병력 배치, 공중 사격 감행 시 피해 확대 우려’ 라는 대목은 사격 요청이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관련 기사: “5·18 당시 공중 사격 요청 있었다”…軍 보고서 확인


5.18광주항쟁 당시 헬기 기총소사 등 관련증언하는 아놀드A,피터슨 목사/1995년

5.18광주항쟁 당시 헬기 기총소사 등 관련증언하는 아놀드A,피터슨 목사/1995년

-올해 4월에는 ‘헬기 사격’에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탄피가 공개됩니다. 당시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5·18 당시 사용됐을 가능성이 높은 탄피 6개에 대해 감식을 진행해‘이 중 3개가 1980년 5월 이전에 생산됐다’는 결과를 내는데요. 그 3개는 20mm구경 벌컨포와 기관총용 탄피였습니다. 국과수는 구경 20㎜의 벌컨포는 전투기 탑재용, 헬기 탑재용, 차량 견인식 등 3가지 무기류에 사용될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에 당시 검사를 의뢰한 5·18기념재단은 발견된 탄피와 총탄이 5·18 당시 헬기에 장착된 기관총에서 발사됐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2017년 2월 광주 서구 쌍촌동 5·18기념재단 사무국에서 김양래 재단 상임이사가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이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중화기 탄피를 공개하고 있다. /연합뉴스

2017년 2월 광주 서구 쌍촌동 5·18기념재단 사무국에서 김양래 재단 상임이사가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이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중화기 탄피를 공개하고 있다. /연합뉴스

-올해 5월에는 ‘헬기 사격’이 군 작전 지침에 의해 실시됐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기록도 공개됩니다. 1980년 5월22일 육군본부에서 5·18 진압작전을 지휘하고 있던 2군사령부로 내려보낸 ‘헬기 작전계획을 실시하라’는 제목의 지침서를 광주시가 공개했는데요. 지침서에는 “시가지에 부대 진입 시 고층 건물이나 진지 형식 지점에서 사격을 가해올 경우 무장폭도들의 핵심점을 사격 소탕하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또 당시 계엄군이던 20사단 작전일지에는 (1980년) 5월27일 오전 5시16분쯤‘무장헬기 위력시위’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날은 전남도청 진압작전이 펼쳐진 날이었습니다.

▶관련 기사: “5·18 당시 계엄군 헬기 사격” 광주시 “육본 작전지침 확보”


-그리고 이번에 실시되는 특별조사에서 5·18과 관련한 국군기무사령부(과거 보안사령부)의 존안자료 등 그동안 미공개로 분류됐던 군 기록물도 공개될 것으로 보입니다.

그 기록들이 마지막 퍼즐을 맞춰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관련 기사: 국방부 “5·18 당시 전투기 출격대기 및 헬기 기총사격 의혹 특별조사 착수”


향이네 페이스북 바로가기 ‘향이네’ 페이스북 페이지를 열었습니다. 업데이트되는 새로운 소식을 접하세요!(▶바로가기)

<박용필 기자 phil@kyunghyang.com>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