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것들이 우리를 이룬다
세 아이와 세상 배우기 조회수 1113 추천수 0 2017.09.01 22:39:44
여름도 방학도 길었다.
아이들은 월요일에 개학을 했고, 남편은 수요일에 휴가가 끝났다.
그래서 나는 8월의 끝자락에서야 다시 이전의 생활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아침 일찍 남편과 아이들이 집을 나가서 오후까지 반나절은 나 혼자 지내는
생활 말이다.
물론 일은 넘친다.
가을 볕이 좋으면 빨래와 이불을 널 생각에 마음이 급해진다.
읽을 책은 열권 넘게 쌓여 있다. 쓰고 싶은 글도 너무 많다.
밭엔 풀들이 넘쳐나고 마당에도 치울 것들이 가득 쌓여 있다.
슬슬 여름 옷을 정리하고 간절기 옷도 꺼내야 한다. 돌아보면 한숨만 나온다.
그래도 밀린 글이 많아 작정하고 노트북을 끼고 도서관에 갔다.
반나절 열심히 글을 쓰다보니 맹렬한 허기가 느껴진다. 이럴때 갈등한다.
어디가서 나 혼자 밥을 사 먹을까. 들어가서 밥 차릴 일이 귀찮고 지겹다.
그러나 여름동안 외식이 너무 잦았다. 마음을 잡고 집으로 들어갔다.
밖에서 힘들게 일하고 글 쓰고 들어오면 따듯한 밥상을 차려내는
우렁각시, 우렁총각이 내게도 있으면 좋겠으나 가족에게 우렁엄마인
나는 아무리 힘들어도 내 손으로 내 밥을 차려야 한다.
장을 본지 며칠 지나서 냉장고에도 별 게 없다.
야채칸 한 구석에서 진작에 사 놓고 잊어 버리고 있던 가지 세개를 발견했다.
시들시들하다.
시든 가지와 반 정도 남아서 냉장고에 넣어 두었던 양파를 썰었다.
고기살때 딸려온 파채도 한 봉지 찾았다. 같이 넣고 볶기로 했다.
기름 슬쩍 두르고 달달 볶다가 마늘과 파채를 넣고 참기름과 간장, 소금 약간
으로 간을 했다. 시든 가지는 질겼지만 그런대로 먹을만했다.
무엇보다 간단하게 한끼 먹을 수 있는 반찬이 되었으니 만족한다.
더운 밥과 가지볶음이면 훌륭하다.
버릴뻔 했떤 야채를 알뜰히 요리 해 먹는다는 자부심도 있다.
돈으로 해결하지도 않고, 인스턴트에 의지하지도 않고 어째튼 내 손으로
밥 한끼를 차려냈다.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읽으며 천천히 먹었다.
맛있다. 뿌듯하다. 큰 일 해낸 것 같이 대견하다.
끼니를 벌어오는 일의 지난함을 이해한다. 그러나 끼니를 차려내는 일의
지난함에서는 평가가 인색하다. 벌어오는 것은 대단한 일이고, 차려내는
일은 대수롭지 않을까.
'정희진처럼 읽기'라는 책 말미에 저자는 이런 글을 적었다.
'나는 어렸을 적에 이미 그것을 알았다.
밥상에는 깍두기를 먹는 사람과 깍두기 국물을 먹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것을.
그것이 역할이든 윤리든 취향이든 그냥 버릴 수 없는 아까운 '깍두기 국물'의 세계를
아는 사람과 그러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우리의 일상은 보이지 않는 노동으로 부양된다.
돈이 밥이 되는 과정은 잘 보이지 않는다. 우린 눈 앞에 차려진 음식에만 주목할 뿐이다.
김치밖에 없다고, 먹을만한게 없다고 불평하긴 쉽다. 나도 철없을땐 그런 소리 많이 했다.
그러나 김치를 직접 담가먹게 되고부터 버릴 수 없는 깍두기 국물의 세계를 알게 되었다.
파김치를 좋아하는 아들을 위해 텃밭에서 뽑아온 쪽파를 오랜 시간 다듬느라 맵고
아려서 눈물을 한 웅큼 쏟고 나서는 쪽파 한단을 다듬어 보지 않은 사람과는 인생을
논하지 않겠노라 결심을 했을 정도다.
잘 보이지 않는 것을 헤아리게 되는 것이 어른이 되는 과정이 아닐까.
수없이 많은 이의 노동으로 내 삶이 지탱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일에서 성숙은 시작된다.
보이지 않는 노동의 귀함을 알고, 보이지 않는 손길을 존중하는 마음을 갖는 일,
그 사람들의 삶도 충분히 안전하고 안락할 수 있어야 제대로 된 사회다.
하루에 세 번, 때로는 그보다 더 자주 나는 밥 하는 아줌마가 된다.
어느 여성 정치인은 밥 하는 아줌마 주제에 나선다고 비난을 했지만
지금껏 그 사람을 키운 것도 어느 밥 하는 손이었을 것이다.
타인의 정성이 아니고서는 우리는 살 수 없다. 그러니까 한 끼 음식에
담겨 있는 노동과 수고앞에 겸손해야 한다. 거기서부터 어른이 된다.
가끔 시내에 나가면 육교나 전철역 입구에 앉아 하염없이 고구마 줄기 껍질을
벗기고 있는 할머니들을 본다.
데쳐서 껍질 벗겨야 반찬을 만들 수 있는 재료가 되는 고구마 줄기..
고구마 농사를 짓고 있으면서도 밭에서 따서 데쳐서 껍질 벗기는 수고가
너무 고단해 2천원 주고 손질해 놓은 고구마 줄기를 사 먹곤 하는 나다.
그 안스러운 수고에 2천원이란 댓가는 너무나 헐하다. 해 본 사람은 안다.
어제는 반나절을 고구마 밭 풀을 맸다.
여름내 밀림처럼 풀이 우거졌던 고구마 밭이 이제서야 제 꼭을 갖추었다.
내일은 넉넉히 고구마 줄기를 따서 아이들과 껍질을 벗겨야 겠다.
손톱에 꺼먼 물이 들도록 껍질을 벗겨내야 좋아하는 나물도 되고
고구마 줄기 깔고 조린 생선찜도 나온다는 것을 아는 아이들이기를 바란다.
내 아이들만이라도 세상 어떤 일보다 제 손으로 제가 먹을 음식을
장만하는 일을 소중하 여기고, 그 일을 어렵지 않게 해 내는 어른으로
키우고 싶다.
제 밥도 못 차려 먹는 사람은 어떤 일에도 큰 소리 칠 자격이 없다.
제가 먹을 것을 벌고, 제가 먹을 것을 만들 줄 아는 사람이
내 육아의 최종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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