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우리가 평소에는 잊고 있는 인간 존재의 불편한 진실이다. 그런데 이 불편한 진실이 이따금 심각한 질문 하나를 던지게 한다. 그것은 ‘날 것 그대로의 사실’이 존재할 수 있느냐는 문제이다. 우리가 보고 듣는 것이 문턱에서부터 이미 특정한 틀 속에서 시작되는 것이라면 그 결과로서 조형되는 ‘사실’ 또한 이미 특정한 색깔로 채색된 것일 수밖에 없다.
이것이 불가피한 일이라면 그 채색의 농도를 최소화하는 방법은 두 가지일 것이다. 하나는 열린 태도로 가급적 많은 사람의 ‘사실들’을 함께 수합하여 크로스 체크함으로써 하나의 ‘사실’을 확정해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주장하는 ‘사실’ 역시 이미 특정한 색깔에 물들어 있는 것이라는 점을 끊임없이 성찰함으로써 그것이 독단으로 탈바꿈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다. 이 둘이 함께 이루어지면 금상첨화임은 물론이다. 이를테면, 교내에 있는 초대 총장의 동상 앞에 그의 친일 행위를 알리는 팻말을 기존의 안내문 옆에 함께 세우겠다는, 근래 들리는 이화여대 학생들 소식이 그런 경우이다. 생활보수와 생활조폭의 공통점 얼마 전에 ‘생활보수’라는 말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신설된 정부부처 한 곳의 장관 후보자로 내정된 사람의 역사관이 뉴라이트 계열에 편향되어 있는 것으로 확인되자 청와대가 이를 변호하기 위해 내놓은 설명에 등장했던 말이다. 생활보수란 “본인이 깊이 있게 보수와 진보를 고민한 게 아니라 내재화된 보수성이 있었다”는 뜻이라는 부연이 이에 덧붙여졌다. 요컨대, 무슨 확고한 신념이나 주의주장에 입각하여 그런 역사관을 가진 것이 아니라 그냥 주변에서 이야기되는 일부의 입장을 생각 없이 그대로 받아들인 결과라는 것이다.
그즈음 휴일에 TV 채널을 돌리다가 〈우아한 세계〉라는 영화를 방영하는 것을 우연히 보았다. 10여 년 전 개봉할 때 영화관에서 본 것이기는 하지만 나름 재미가 있었고 주인공 역할의 송강호 연기도 일품이었던 생각이 나서 기억이 새로웠다. 폭력조직의 중간보스로 있는 사내가 조폭을 평생 직업으로 삼아 살아가는 일상을 담은 이야기이다. 말하자면, 생활인으로의 폭력조직 조직원의 삶을 그린 영화인 셈이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나이가 들어서도 조폭의 세계를 떠나지 못하는 사내는 조직에서도 가정에서도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한다. 특히 아내와 고등학생 딸아이의 노골적인 무시는 그를 더욱 힘들게 한다. 이 때문에 조직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보스의 동생에게 일정한 지분을 요구하는데, 중간에 의도하지 않게 그를 죽여 보스의 분노를 사는 일이 벌어지자 다른 파 친구의 힘을 빌려 엉겹결에 조직 전체를 장악하게 된다. 그렇게 하여 형편이 나아진(?) 사내는 조폭 보스로 생활하면서 아이들의 공부를 위해 아내와 자식을 외국에 보내고 기러기 아빠로 살아간다는 줄거리이다. 어느 날 아침 해장 라면을 끓여 먹으며 가족이 보내온 외국생활 비디오를 보며 웃음 짓다가 마치 다른 세계 사람들인 듯한 그들의 행복에서 소외되어 있는 자신의 처지를 오버랩시키며 사내가 울컥하는 마지막 장면은 명불허전인 송강호의 연기에 힘입어 여전히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면서 ‘생활조폭’이라는 말이 뜬금없이 떠올랐다. 아마 ‘생활보수’라는 말이 일으킨 연상 작용 때문이었을 것이다. 생활조폭과 생활보수는 공통점이 있다. 자신의 ‘생활’을 성찰적으로 바라볼 줄 모른다는 것이다. 성찰이 결여된 삶은 개인적으로 불행할뿐더러 그 자체로 죄악이다. 한나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을 이야기하며 예로 든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생각하지 않는 삶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극단적이며 끔찍한 사례이다. 적폐 청산을 비판하려면 성찰이 전제되어야 적폐 청산에 대한 논란이 갈수록 뜨겁다. 지난 정권들에서 국가기관에 의해 자행된 불법 행위에 대한 분노가 주류이기는 하지만, 일각에서는 무언가 정해진 시나리오에 따라 진행되는 의도된 혐의가 있다고 비판하며 ‘정치적 보복’을 중단하라는 날선 항변도 만만찮다. 이 지점에서 드는 강한 의문 하나! 그것이 만약 의도된 것이라면 불법이 확인되었더라도 눈을 감아야 하는 것일까?
적폐 청산은 일차적으로 사실에 관한 것이다. 시쳇말로 그런 팩트가 있다면 청산을 주장하는 쪽의 의도가 어디에 있든 불법 행위를 저지른 당사자들에게는 상응하는 책임을 물어야 한다. 이것은 법치를 생명으로 하는 입헌공화국의 책무이다. 만약 이것이 의도된, 따라서 동기가 불순한 흐름이라고 주장하고 싶으면 주장만 할 것이 아니라 먼저 그것을 입증할 수 있는 다른 팩트를 제시하는 것이 순서이다. 그러면 지금의 팩트들과 크로스 체크가 이루어지면서 이른바 실체적 진실이 드러날 것이고, 나아가 합당한 사유가 확인된다면 그 또한 그것대로 법률적 판단을 받을 것이다. 그럼에도 팩트는 제시되지 않고 나름의 심증을 실은 주장만 난무하는 것은 사실을 성찰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외눈박이로 들여다보기 때문이다.
“마음이 거기에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먹어도 맛을 모른다”는 말은 『대학』의 가르침이다. 눈을 뜨고 있는데 왜 보이지 않고 귀를 열고 있는데 왜 들리지 않는다고 하는가? 본질을 꿰뚫어 보려는 마음이 없어, 보되 곁가지만 보고 듣되 잔바람 소리만 듣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성찰은 한순간 자신을 부끄럽게 할지 몰라도 궁극에는 자신을 강하게 한다.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일깨움으로써 인식의 지평을, 그리고 그 결과로서 사태 판단의 합리성과 진정성을 넓혀주기 때문이다. 이화여대 학생들의 성찰적 용기 또한 그들의 모교를 부끄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에는 더 강하게 하는 일임이 불문가지이듯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