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재
초파리 유전학자
간만에 볼만한 ‘논쟁’이 있다길래 잠시 들추다 헛웃음이 나왔다. 한 인물이 인공지능과 미래교육에 대한 비판으로 포문을 여는가 싶더니, 상대의 유명 예능프로그램 출연을 훈장질한다. 예능 출연으로 유명한 그 인물은 불쾌한 듯 당신의 페친 신청을 거절한단다. 지식인 사회에 논쟁의 갈증이 있다는 건 잘 알겠다. 그렇다고 말싸움을 논쟁이라 포장하면 안 된다.
정부는 대통령까지 참석해 4차산업혁명위원회로 공학인을 대접하는데, 서울대 공대 학생회는 뿔이 났다. ‘문재인 정부의 독단적인 탈원전 정책 추진과정에 대한 공과대학 학생회 입장서’를 읽다 소스라치게 놀랐다. 글이 독해 불가능할 정도의 비문투성이다. 더 놀라운 건 그 와중에 알게 된 서울대 공대 대학원의 미달 소식이다. 지방 공대가 초토화되었다는 말은 자주 들었지만, 이건 심각하다. 가장 실용적인 학문 중 하나인 공학조차 학문의 영역에선 퇴출 중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서울대 교수 박원호는 대학이 느리지만 확실하게 죽어가고 있단다. 대학이 입시기관, 인력양성소 혹은 준정부기관으로 몰락했기 때문이다. 그가 그리는 대학은 인문학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인 학문의 전당이다. 하지만 사회는 대학이 좀 더 실용적일 것을 요구한다. 인문학자들은 그 시선이 불편하다. 비판적 지식인을 길러내는 역할은 인문학의 고유한 기능인데, 대학이 이렇게 타락해선 안 된다. 하지만 표현은 분명히 하자. 죽어가는 건 대학 안의 강단 인문학이지, 인문학 일반이 아니다.
인문학은 대학 밖에서 활력을 찾았다. 지난 수십년, 한국 인문학에서 일어난 학문적 진보들은 죄다 대학 밖에서 나왔다. 죽어가는 건 대학의 인문학이다. 교수사회는 그 원인을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스스로를 반성적으로 돌아봐야 한다. 교수의 권위주의에서 비롯되는 잦은 연구비 횡령, 대학원생 인권 유린은 사회가 교수사회를 지지할 근거를 빼앗았다. 서울대 교수 대부분이 서울대 출신인 현실과, 그 속에서 형성되는 위계질서는 비판적 학문이 숨쉴 여지마저 불태웠다. 인문학이라는 단어는 한국 사회에서 조롱의 대상이 된 지 오래다. 인문계열 학생 몇명이 모여 만든 ‘인문학적 개소리’ 페북 페이지의 인기는 상징적이다. 이 심각한 현실을 교수들만 모른다.
사회가 변했다. 전통적인 대학의 역할이 달라졌다. 하지만 교수사회는 요지부동이다. 학문을 지켜야 한다. 그렇다고 사회와 대학에 푸념만 일삼으라는 건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교수란 권력이다. 그들에겐 이 근원적 징후를 인지하고, 정부를 비판하고, 사회를 설득하고, 대안을 제시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지난 수십년간 한국 교수들은 한 해 몇조나 되는 연구비로 2300여종의 학술등재지를 만들고 이를 학문적 성과라고 강변해왔다. 그렇게 생산된 논문은 자신의 업적 평가에 쓰일 뿐 누구도 읽지 않는다. 아무도 읽지 않는 논문은 쓰레기다. 인문학은 그렇게 고여 썩고 있다.
작은 일부터 시작하자. 가두리 양식장이 된 한국 학술지 시장을 공공 영역으로 전환하는 일, 특히 사익을 추구하며 웹 표준조차 지키지 않는 학술웹사이트에서 인문학을 구해야 한다. 그게 첫걸음이다. 대학생이 리포트를 위해 몇천원 주고 사는 상품으로 전락한 인문학 논문들을 시민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그들이 인문학자의 논문을 읽고, 모여 토론할 것이고, 그렇게 대학 밖에서 생겨난 혁명이 변질되어가는 대학을 바로잡을 것이다. 해답은 공개와 공유에 있다. 인문학 살리기가 이렇게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