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열사 47주기를 맞는 11월13일 오전, 서울 청계천 전태일 동상 옆에서 노조하기좋은세상운동본부 회원들이 연대와 노동조합을 상징하는 빨간색 우산을 들고 노조할 권리 보장을 주장하는 ‘1113인 사회적 선언’을 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꼭 100년 전, 러시아 10월혁명이 절정으로 치닫던 시기에 블라디미르 레닌은 <국가와 혁명>에서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공산주의 첫 단계(사회주의) 원칙’이 실현됐다고 선언했다. 2000년 전 기독교 신약성서(‘사도 바울이 테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둘째 서간’)에도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거듭 지시했다”는 구절이 나온다. 옛소련은 아예 소비에트연방 개정헌법(1936년, 일명 ‘스탈린 헌법’)에 못박았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어서도 안 된다는 원칙에 따라, 소비에트연방에서 노동은 모든 비장애인 시민들의 의무이자 명예이다. 소비에트 연방에서 이 원칙은 ‘능력에 따른 생산, 노동에 따른 분배’라는 공산주의 원칙을 말한다.”(헌법 제12조)
레닌은 위 저서에서 “노동의 평등, 임금의 평등이 실현되자마자 ‘누구나 능력에 따라 (노동), 누구에게나 필요에 따라 (분배)’라는 원칙의 실현 문제가 필연적으로 등장”한다고 했다. 이른바 ‘공산주의 사회의 높은 단계’는 한번도 실현된 적이 없는 ‘유토피아’(어디에도 없는 곳)지만 노동과 분배를 둘러싼 갈등은 ‘늘 어디에나 있다’. 마르크스는 인간의 노동만이 사회적 이윤의 유일한 원천이라고 봤다. 그러나 노동이 저가 경쟁 상품으로만 존재하는 곳에서 ‘노동의 신성함’ 따위는 지극히 정치적인 허구의 신화일 뿐이다.
지금 한국 사회의 1800만 비정규, 미조직 노동자와 자영업자 대다수는 “죽어라 일해도 먹고살기 힘들다’고 호소한다. 소득불평등 악화가 더는 뉴스가 아니고, 청년 세대는 바늘구멍 취업문에 좌절한다. 안정된 일터, 정당한 보수, 인격적 존중을 위한 몸부림이 과도하고 위험한 욕망일까? 노동 현장에선 꼭 47년 전인 1970년 11월13일 청년 전태일이 몸을 불사르며 외친 절규가 지금도 되풀이된다. 인간의 존엄과 기본권이 묵살되는 바로 그곳이 ‘디스토피아’(나쁜 장소)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