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농단 기폭제’ 청와대 문건유출 사건 톺아보니…
정호성 전 청와대 부속비서관이 지난 1월10일 오후 서울 대치동 특검사무실에 소환되고있다. 사진공동취재
법원이 15일 최순실(61)씨에게 청와대 비밀문서를 유출한 정호성(48) 전 청와대 부속비서관에게 징역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하며 국정농단의 단초를 제공한 책임을 엄중히 물었다. ‘청와대 문건유출’ 사건은 지난해 국정농단 사태의 기폭제였다. 4년여의 임기 동안 ‘유체이탈’ 화법으로 국민 속을 태우던 박근혜 전 대통령의 연설 상당수가 사전에 최씨 손을 거쳐 나왔다는 게 정 전 비서관 재판에서 드러났다. 두 사람 사이 연락책 역할을 했던 정 전 비서관의 재판을 통해 ‘최순실 문건유출’ 사태를 톺아본다.
청와대 공식기구가 못미더웠던 대통령, 최순실 말 녹음해 ‘복습’한 비서관
정호성 전 청와대 부속비서관은 2012년 대선 전부터 최씨가 박 전 대통령의 연설문 등을 ‘검증’했다고 했다. 박 전 대통령이 박정희 전 대통령 사후 최씨에게서 받은 도움 때문에 그를 무한 신뢰했다는 것이다. 취임사는 물론 대통령 후보 수락연설과 대선 티브이(TV) 토론 등도 최씨의 손을 탔다.
“최순실씨가 ‘말씀자료’에 관여하기 시작한 건 지난 18대 대선 준비하면서부터였다. 대통령님이 개인적인 일까지 믿고 맡길 분이 최씨밖에 없었다. 그래서 당선 이후에도 미흡하면 최씨로부터 의견을 들어보라고 한 것이다” (정호성, 검찰 진술)
대통령 취임 이후 최씨의 ‘코칭’은 정교화됐고, 빈번해졌다. 청와대 공식기구인 연설기록비서관실이 내놓은 연설문이 성에 차지 않은 박 전 대통령은 최씨 뜻을 들으라고 지시했고, 정 전 비서관은 이를 성실히 수행했다. 3대의 휴대전화를 이용해 “거의 매일” 최씨와 통화했고, 이메일 계정을 만들어 하루에도 여러 건씩 자료를 주고받았다. 정 전 비서관은 최씨와의 통화를 녹음해 다시 듣기까지 하며 그의 의중을 파악하려 애썼다.
“취임 직후 연설기록비서관실에서 생성된 연설문과 말씀자료를 그대로 대통령께 드렸는데, 대통령 스타일과 맞지 않는 게 많아서 최씨 의견 참고해서 반영하라고 (박 전 대통령이) 지시했다.” (정호성, 검찰 진술)
“최씨가 언론보도를 체크하다가 대통령님에 대한 비판기사 있으면 저에게 전화해 자초지종을 물어보고 ‘이런 방향으로 대처하면 된다’고 자신의 의견을 제시한다. 그럼 대통령에게 보고드리고 대통령도 최씨 의견이 타당하다고 생각하시면 반영한다. … 대통령이 최씨 의견을 들어보라고 해서 최씨 의견을 정확히 파악하는 게 중요했고, 녹음해서 다시 듣기 시작한 거다.” (정호성, 검찰 진술)
“선생님이 쓴 단어, 먹힐 것 같네요”… 최순실 ‘선생님’의 특별코칭
정 전 비서관은 최씨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적극적으로 그의 의견을 구했다. 박 전 대통령이 취임 직후 새정부 국정철학을 담아 내놓은 4대 국정기조의 하나인 ‘경제부흥’도 최씨 작품이었다. 최씨는 대통령 주재 수석비서관 회의(대수비) 개최까지 지시하며 ‘세심하게’ 국정 관리에 나섰다.
“‘경제부흥’이란 말은 한동안 안쓰던 단어인데요. 이렇게 딱 보니까 먹힐 것 같네요.” (정호성)“공무원한테도 내려가고 다 이 기조로 하세요.” (최순실)
“이런 국회를 놔두고 그냥 훌쩍 (해외순방) 가는 건 아닌 것 같아. 외국만 돌아다니시는 것 같어. 출국 전에 정국에 대해 당부 말씀할 수 있게 국무회의 개최해야... ” (2013년 10월27일 통화, 최순실)“예, 알겠습니다.” (정호성)
“선생님 목요일에 그거(대수비) 일정 잘 결정해주셔서 괜찮을 것 같습니다. 대통령이 어떤 톤으로 말씀해야 하나요?” (정호성)
“선생님, 유민봉 (당시 국정기획)수석한테 연락 왔는데요. (정홍원 당시 총리 10월28일 대국민담화) 1안 오전 10시와 2안 오후 2시가 있습니다.” (정호성)“오전에 하기로 했는데.” (최순실)
5년간 국정을 이끌 내각 구성도 최씨 손을 탔다. 국정원과 감사원장, 각부 장·차관 인선안도 공식발표 전 최씨에게 전해졌다. 또 ‘체육특기자 입시비리 근절방안’ 문건, ‘복합 생활체육시설 추가대상지 검토’ 문건 등 최씨가 사적 이해관계를 가진 문서들도 유출됐다. 다만 최씨에게 넘어갔다고 검찰이 지목한 47건의 비밀문건 중 33건은 압수절차의 위법성 문제로 인해 법원에서 유죄로 인정되지 않았다
코드명 ‘어벤저스’·‘인피니트’·‘삼계탕’ … 치밀한 연막작전
최순실씨.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정 전 비서관과 최씨는 이같은 행위가 차후 문제될 수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는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이 주고받은 이메일을 보면, ‘인피니트’, ‘어벤져스’, ‘삼계탕’ 등 제목이 눈에 띈다. 정 전 비서관이 국무회의 ‘말씀자료’ 등을 담은 이메일을 송신하고 수분 안에 “보냈습니다”라는 문자메시지를 보내면 최씨가 메일을 확인하는 방식으로 소통이 이뤄졌다. ‘어벤져스’ 메일의 경우 영화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 촬영이 서울에서 열린다는 내용의 기사를 앞세운 뒤 중반부부터 순방 수행기 수정 내용을 논의하는 식이다.
“김팀과 한팀장이 순방 수행기를 보내왔습니다. 조금 수정했으면 좋을 거 같아 수정해서 넣을 부분을 빨간색으로 표시해 보냅니다.” (2014년 3월30일, 정호성 이메일)
“최순실 능력 없었다. 하지만…”
정 전 비서관은 최씨에게 국정 대소사에 개입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 그는 박 전 대통령의 연설 이후 조인근 전 청와대 연설기록비서관으로부터 “연설 내용이 어법에 맞지 않는다”는 취지의 항의도 들었다고 했다. 실제 박 전 대통령은 임기 내내 주어와 술어가 일치하지 않는 문장이나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 수 없는 지시대명사를 남용해 해독기가 필요한 ‘유체이탈’ 화법을 구사한단 비판을 사기도 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최씨가 대통령님이 하시는 국정 전반에 대한 말씀자료를 수정할 능력은 없었다. 그래도 (박 전 대통령의) 속마음을 잘 알고 있는 분이기 때문에 단지 의견을 구하는 차원에서 최씨의 도움을 받은 것뿐이다” (정호성, 검찰 진술)
“정 전 비서관을 통해 대통령에게 보고한 연설문이 비문으로 발견된 게 몇 번 있어서 이의제기한 적 있다.” (조인근, 검찰 진술)
“조 비서관으로부터 박 전 대통령 연설 내용이 어법에 맞지 않는다는 등 애기를 들었나?” (검찰)“항의는 없었고 그런 취지의 말은 들었다.” (정호성, 검찰 진술)
하지만 그는 민간인 최씨에게 청와대 비밀문서를 유출하는 것의 위법성이나 부적절성에 대해선 고려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검찰에서 “공적 업무를 맡을 자격과 권한이 없는 최씨에게 말씀자료나 연설문을 유출하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고 답했다.
“대통령님이 국정운영 잘하려는 뜻” 사미인곡,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년여간 지속되던 ‘국정 코칭’은 2014년 말 ‘정윤회 문건유출’ 파문이 터지면서 잠시 중단되기도 했다. 그해 12월 <세계일보>가 최씨 남편인 정씨가 국정에 관여했다는 의혹을 담은 보도를 내놓으면서, 최씨의 존재까지 노출될 것을 염려해 단속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최씨와 통화를 줄이고 연설문 전달을 중단하겠단 자신의 건의를 박 전 대통령이 수용했다는 게 정 전 비서관 말이다. 하지만 사태가 잠잠해지면서 최씨의 코칭은 재개됐고, 검찰은 최씨가 지난해 4월까지 청와대 비밀문서를 받아봤다고 파악했다.
정 전 비서관은 재판 과정에서 자신의 혐의를 대부분 시인했다. 지난해 12월 공판준비절차 때 세월호특조위 위원 시절 ‘세월호 훼방꾼’으로 불리던 차기환 변호사를 선임해 최씨의 ‘태블릿피시’ 감정을 신청하며 물타기에 나섰다는 비판을 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신청을 철회했다. 그는 문건유출 행위가 “국정을 더 잘 운영하려는 통치행위의 일환”이라며 끝까지 박 전 대통령을 감쌌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재판부는 이날 “박 전 대통령은 지난해 대국민 사과에서 ‘취임 이후에도 일정 기간 일부 자료에 대해 최씨의 의견을 들은 사실이 있다’고 인정했는데, 최씨의 의견을 듣기 위해선 해당 문건을 보내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는 것은 당연한 전제”라며 박 전 대통령의 공모관계를 인정했다.
현소은 기자 son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