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가 이희재의 번역론
“번역은 금력이 이겨온 전쟁터”
‘원화 약세’ 등 왜곡된 언어 바루기
“번역가는 금력에 대항하는 독립군”
번역전쟁
-말을 상대로 한 보이지 않는 전쟁, 말과 앎 사이의 무한한 가짜 회로를 파헤친다
이희재 지음/궁리·2만5000원
-말을 상대로 한 보이지 않는 전쟁, 말과 앎 사이의 무한한 가짜 회로를 파헤친다
이희재 지음/궁리·2만5000원
공자의 제자인 자로가 물었다. “재상이 되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공자가 답했다. “정명이다(正名也).” ‘정명’이란, 이름을 바로잡는 것, 이름과 실체가 일치하게 만드는 것을 뜻한다. 5·16혁명을 5·16쿠데타로, 5·18폭동을 5·18민주화운동으로 바로잡는 게 정명이다. 근로자를 노동자로, 장애자를 장애인으로, 동성연애자를 동성애자로 바꾸는 것 역시 정명이었다. 역사란 이름을 바로잡기 위한 세력과 이에 저항하는 세력 간의 갈등이자 투쟁이자 전쟁이다.
<번역전쟁>은 번역 역시 이같은 ‘정명’의 전쟁터임을 일깨우는 책이다. 약 30년간 영한 번역자로 일하며 평소 “번역은 외국어를 옮기는 작업이 아니라 한국어를 바로 세우는 작업”이라고 주장해온 이희재씨는 이 책을 통해 번역은 권력과 금력을 가진 자가 이기기 쉬운, 아니 이겨온 전쟁터임을 고발한다.
먼저 포퓰리즘으로 번역되는 ‘populism’을 보자. 영어 발음 그대로 번역해 일견 중립적으로 보이지만 이 단어는 보수, 진보 양 진영으로부터 조롱을 당하는 신세다. 원래 포퓰리즘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미국 자작농들이 토지 소유 제한, 철도 국유화, 금융 민주화를 요구하며 벌인 개혁운동이다. 미국 주류 언론한테 이 운동은 망국의 이념일 터. 남미의 국유화 정책을 비난하는 데 ‘포퓰리즘’을 가져다 쓰더니 이젠 한국에서도 포퓰리즘은 유권자에게 선심 쓰는 무책임한 정책을 의미하게 됐다. 그래서 저자는 부정적 오염이 심해진 ‘포퓰리즘’이란 단어 대신 ‘서민주의’로 번역할 것을 제안한다.
1970년 칠레 대통령으로 당선된 살바도르 아옌데의 생전 모습. 아옌데는 ‘다원주의’를 추구했으나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지원한 쿠데타 세력에게 죽음을 당했다. 말과 앎 사이의 가짜 회로를 파헤치는 번역가 이희재는 미국을 비롯한 서구 강대국들의 ‘사이비 다원주의’를 비판한다. 궁리 제공.
그럼 민영화로 번역되는 ‘privatization’은 어떠한가? 공장이나 자본을 해외로 옮기겠다는 식으로 사기업이 정부를 협박하는 ‘privatization’은 ‘사유화’라고 번역해야 옳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러시아의 정치·경제를 주무르는 ‘oligarch’는 처음엔 ‘러시아 신흥재벌’이라고 번역되다 지금은 ‘올리가르히’라고 옮겨지고 있다. 이는 마치 금벌이 러시아에서만 존재하는 것처럼 착시를 일으켜 진짜 세상을 주무르는 영국과 미국의 금벌은 손쉽게 숨긴다.
저자는 영어를 한국어로 옮기는 번역 과정에서 작동하는 정치경제학도 고발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영어든 한국어든 말로 담아내는 것 자체가 번역”이기에 다원주의, 극우, 고환율 등 우리가 자주 쓰는 단어들과 진짜 현실의 괴리도 파헤친다.
식민지로부터 독립항쟁을 이끈 현 대통령이 24년째 일당 독재를 하고 있는 아프리카의 소국 에리트레아는 철도 등 기간산업을 국유화하고 식량안보를 최우선으로 삼은 정책 덕분에 외채도 없고 배를 곯는 사람도 없다. 하지만 미국은 앞에서 일당 독재를 비난하며 뒤에선 에리트레아를 수시로 침략하는 에티오피아에 무기까지 댄다. 과연 일당 독재가 문제일까? 서양에 빚을 지지 않고 자본주의 체제가 아니라도 먹고살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데 대한 복수라고 저자는 의심한다.
서구의 이중성과 말글을 지배하는 금력을 비판하는 이희재는 “미국이 사드를 한국에 배치하려는 것은 중국이나 러시아에 핵 선제공격을 가한 뒤 예상되는 중국이나 러시아의 대륙간핵탄도탄 보복발사를 요격하기 위해서”라고 지적한다. 궁리 제공.
그럼 서구는 그렇게 자신이 이상화하는 다원주의를 진짜 실천하고 있는지, 저자의 비판을 들어보자. 이탈리아에서 좌우파의 역사적 화해를 도모했던 알도 모로 기독교민주당 당수는 미국 고위관리로부터 그 작업을 중단하지 않으면 목숨을 잃을 것이라는 경고를 받은 뒤 납치·살해되었다. 스웨덴의 사민당 출신 총리였던 올로프 팔메는 중립적 외교정책을 펼치며 아프리카 등 제3세계를 대변하다 암살당했다. 케네디도 “미국이 전쟁무기로 세계에 강요하는 팍스아메리카나가 되어선 안 되며 진정한 세계 평화는 모든 나라가 스스로 체제를 선택할 권리를 존중해야 가능하다”고 연설한 뒤 암살당했다. 반면 젊은 시절 공산당원으로 활동하며 자원 국유화에 대한 소신이 강했던 만델라가 95살까지 천수를 누린 이유는, 27년간의 감옥 생활 뒤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의 사유화 대세론에 투항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재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상위 10%가 전체 소득의 60%를 차지하고 실질 실업률은 40%에 이르게 됐다. 심각한 빈부격차 아래 번창하는 사업은 오로지 부자들의 재산을 지키는 보안산업뿐이다. 경찰이 16만명인데 보안산업 종사자는 41만명이다. 결론은, 북한의 권력세습과 리비아의 카다피 체제, 짐바브웨의 무가베 체제 등에 들이댄 ‘다당제=선, 일당제=악’이라는 이분법은 신기루이며, 침략을 위한 수작에 불과하다는 거다. 특히 북한이 ‘가난하고 헐벗은 나라’라는 프레임은 미국과 남한 기득권의 탐욕을 정당화하기 위한 프레임일 뿐이라 한다.
베네수엘라의 대통령이었던 우고 차베스와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이었던 피델 카스트로의 모습. 미국을 비롯한 서양 강대국들은 이들의 성과를 평가절하했고, ‘포퓰리즘’이란 번역에는 이런 태도가 녹아있다고 이희재는 지적한다. 한겨레 자료사진.
“한국에는 보수는 없고 극우만 있을 뿐”이라고 진보 진영은 개탄하지만, 저자가 볼 때 한국에는 극우도 없다. 극우의 정의는, 자민족을 아끼는 마음이 지나쳐서 타민족을 혐오하는 태도다. 그런데 한국의 ‘극우’는 자민족은 무시하고 과거엔 일본, 현재는 미국을 숭상한다. 오히려 극우의 정반대인 셈이기에 극우로 불려선 안 된다는 거다.
원 달러 수치가 올라가면 원이 약세인데, 한국 언론은 이를 ‘원화 환율 강세’라고 보도한다. 반면 원 달러 수치가 내려가면 원이 강세인데, 언론은 이를 ‘원화 환율 약세’라고 한다. 세계 어떤 언론도 이렇게 반대로 보도하진 않는데 한국 언론만 그러한 이유는 환율을 ‘대기업의 수출 경쟁력’이란 관점에서만 보기 때문이다. 원화 가치가 떨어지면 수출 경쟁력이 높아지기 때문에 이를 강세라고 보는 것이다. 소수의 대기업을 제외한 다수의 국민은 오히려 원화 가치가 떨어지면 불리하다. 수입 가격 상승으로 생필품 가격도 줄줄이 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말과 번역의 점령군은 누구인가? 바로 ‘돈’이다. 그중에서도 영국과 미국의 금벌이다. 이들은 남미와 동유럽, 아프리카에서 자원을 수탈하고 경제적 이권을 독점하기 위해 음모를 짜고 서로를 이간질시켜 내전과 학살이 일어나게 만든다. 미국의 민주당이든 공화당이든 금벌에 의해 움직이는 건 마찬가지고, 이를 모른 척하는 건 서구의 보수 언론이든 진보 언론이든 마찬가지다. 2014년 2월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에서 일어난 반정부 시위는 경찰의 무차별 발포로 많은 사상자가 생기면서 거센 국민적 저항에 부딪히고 이에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러시아로 망명하면서 친서방 정부 집권으로 사건이 일단락된다. 하지만 이후 이 사건은 미국이 자신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은 야누코비치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새로 집권한 정부와 손을 잡고 일으킨 자작극임이 도청으로 드러났지만, <가디언> 등은 미국의 ‘음모’를 파헤치기는커녕 ‘음모론’으로 보도하는 데 그쳤다.
지은이 이희재
저자는 미국보다 더 ‘악질’이 영국이라고 꼬집는다. 미국은 이미 ‘정의의 사도’인 척하는 게 들통났지만, 영국은 미국과의 독립전쟁 외에 대부분의 전쟁에서 져본 적이 없는 전범국임에도 여전히 ‘신사의 나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흔히 알고 있듯이 군산복합체는 2차대전 이후 미국에서 처음 생긴 게 아니다. 1차대전 당시 영국 정부의 무기 발주로 떼돈을 벌었던 무기회사의 대주주에 전·현직 장성들이 포진하면서 생겨났다. 처칠은 히틀러를 무찌른 영웅이 아니라, 돈벌이를 위해 전쟁이 필요한 영국 금벌의 이익을 충실히 대변한 전범일 뿐이라고 지은이는 말한다.
독재국가를 전향적으로 해석하고, 홀로코스트가 과장됐다고 비판하는 등 책은 논쟁의 중심에도 망설임 없이 뛰어든다. 그래서 저자는 말들의 전쟁터에서 혼자 깃발을 들고 싸우는 전투병이자, 말들의 점령군에 저항하는 독립군이며, 피 흘리기를 주저하지 않는 투사다. 번역이 ‘영단어 22000’을 외운다고 해서 가능한 작업이 아니며, 번역가가 왜 역사학자이면서 철학자이면서 사회학자여야 하는지 책은 뜨겁게 보여준다.
김아리 자유기고가 ari9303@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