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가을부터 타오른 촛불은 겨우내 밝게 빛났고, 올해 끝내 어두운 권력을 끌어내렸다. ‘책이 촛불의 불쏘시개였다’고 하면 지나친 과장일까? 민주주의를 실천해낸 우리 시민 역량의 상당 부분은 책으로부터 왔을 것이라 생각해본다. 앞으로도 책은 우리의 정신을 살찌우고 민주주의란 나무를 키워가는 데 더욱 중요한 식량이 될 터다. <한겨레>는 올해도 어김없이 국내서 10권, 번역서 10권을 ‘올해의 책’으로 꼽는다. 백원근 책과사회연구소 대표, 도서평론가 이권우,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과학저술가 정인경, 문학평론가 양경언 등 5명으로부터 추천을 받아, 한겨레 책지성팀 구성원들 이 선정했다.
<올해의 책 국내서>최고령 현역 작가 득의의 문체
국화 밑에서/최일남 지음/문학과지성사·1만3000원미수(88살)를 두 해 앞둔 최일남은 한국 문단의 최고령 현역 소설가에 속한다. 그런 그가 신작 소설집을 냈다는 것만도 반가운데, 수록된 작품들이 여전한 생기와 활력을 뿜어낸다는 사실은 놀랍기만 하다. 최일남의 노년 소설들은 에세이풍 소설의 전형적 면모를 보인다. 대체로 작가 자신과 비슷한 노인들을 등장시키는데, 특별한 사건이 소설을 끌어가기보다는 여러 사안에 대한 인물들의 품평과 견해가 주를 이룬다. 최일남 소설의 또 다른 특징이라 할 골계와 해학도 여전하지만, 낡은 감각을 고수하지 않고 변화하는 세태에 맞춰 ‘진화’하는 면모가 또한 감탄스럽다. “네가 필자면 나도 저자인 세상” “노회는 소년의 클릭 한 방만 못하고, 경륜은 글로벌 스탠더드에 치여 별무소용이다” 같은 대목들을 보라. 저자 이름을 가리고 읽어도 누구 작품인지를 알 수 있을 정도로 고유한 문체를 지닌 작가가 희소한 상황에서, 최일남 득의의 문체를 맛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소중한 책이다.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온몸으로 부닥쳐 일군 문학
수인 1, 2/황석영 지음/문학동네·각 권 1만6500원황석영의 자전 에세이 <수인>은 비록 소설은 아니지만 소설 이상으로 흥미진진하게 읽히는 책이다. 여기 기록된 작가 자신의 삶이 흥미롭고 역동적이기 때문이다. 일찍부터 문학에 눈뜨고 그것을 삶의 지향점으로 삼았지만, 황석영이 문학을 품어 안는 방식은 문자와 책에 머물지 않고 사람과 세계로 나아가는 행동을 통해서였다. 청소년기의 숱한 가출과 노동 체험, 베트남전 참전과 ‘귀농’, 밀입북과 해외의 문화 및 통일운동 등은 그가 삶과 문학을 일치시키고자 몸부림친 결과들이었다. 한반도와 세계의 곳곳을 어지럽게 누빈 발자취 속에서도 그는 “결국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은 문학이라는 집”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고, 자신이 온몸으로 겪고 깨달은 것들을 차근차근 문학 안으로 끌어들였다. ‘객지’와 ‘몰개월의 새’, <무기의 그늘> 같은 그의 소설 배경에 얽힌 이야기들, 그가 만난 문인과 문화인들, 그리고 월북 문인들의 뒷이야기를 듣는 재미도 쏠쏠하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우리를 위로한 젊은 ‘사회의사’
아픔이 길이 되려면-정의로운 건강을 찾아 질병의 사회적 책임을 묻다/김승섭 지음/동아시아·1만8000원올해 의사와 관련된 사건 사고가 잦다. 문재인 케어 반발, 세가와병 오진 사건, 이대목동병원 신생아 사망… 여기에 ‘과잉진료로 환자를 등쳐먹고, 그 돈으로 보수기득권층을 형성한 이들’이란 일반인들의 관념이 결합돼 의사에 대한 여론이 어느때보다 싸늘했다. 그렇기에 그의 존재가 더 소중하게 느껴진 것 아닐까.
김승섭 고려대 보건과학대학 부교수가 <한겨레21>에 연재했던 글을 묶어낸 <아픔이 길이 되려면>은 주요 일간지와 인터넷서점에서 선정한 올해의 책에 빠지지 않고 이름을 올렸다. 첫 책으로 이 정도의 전문가들의 일관된 호응을 받은 저자도 오랜만이다. 의대를 나와 경제적으로 넉넉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충분함에도 그는 사회역학자가 돼 쌍용차 해고자, 세월호 생존학생, 성소수자처럼 마음이 아픈 이들 곁을 지켰다. 그리고 말해줬다. 당신은 지금 아프다고, 그 아픔은 당신이 잘못해서가 아니라고, 이 사회가 당신을 아프게 했다고, 미안하다고.
김지훈 기자 watchdog@hani.co.kr
이 땅에서 살아간 사람들은 무슨 글을 썼을까
한국 산문선(전 9권)/안대회·이종묵·정민·이현일·이홍식·장유승 편역/민음사·전권 16만원<동문선>은 조선 성종 때인 1478년 서거정이 신라 시대부터 당대의 글까지 망라해 편찬한 시문선집이라고 한다. 그로부터 540년이 지나 민음사에서 올해 펴낸 <한국산문선>이 최초이자 최대 규모의 산문선집이라고 하니 그 기획의 야심만만함을 짐작해볼 만하다.
삼국시대 원효부터 20세기 정인보까지 1300여년에 걸친 작가 229명의 산문 618편, 원고지 1만8000매에 달하는 산문이 실렸다. 당대의 문장가부터 노비까지, 논설·상소문부터 일기·묘비명까지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형식의 글들을 담았다. 국내서 가장 이름 높은 중견 한문학자 안대회, 이종묵, 정민 교수와 이현일, 이홍식, 장유승 등 신진학자들이 세 팀으로 나누어 번역·해설해 완성도를 높였다. 번역 기간만도 8년이 걸렸다.
이 땅에서 살아온 민족이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았는지, 당대 최고의 문장가들은 어떻게 글을 썼는지 궁금했던 이들의 호기심을 부족함 없이 채워줄 법하다.
김지훈 기자 watchdog@hani.co.kr
춘추전국 500년 역사에서 배워야 할 것들
춘추전국이야기 1-11/공원국 지음/위즈덤하우스·전권 13만2000원두 발로 중국과 중앙아시아의 오지를 탐사해온, ‘여행하는 인문학자’ 공원국(43)이 지난 7년 동안 꾸준하게 써내려온 야심작 <춘추전국이야기>를 11권으로 완간했다. 춘추시대의 질서를 설계한 관중의 등장으로 시작하는 그의 이야기는, 춘추전국시대의 중요한 역사와 사건들을 두루 꿰어가며 진나라의 천하통일에 이르고, 한걸음 더 나아가 ‘초한쟁패’를 겪고 중국 ‘최초의 제국’인 한나라가 탄생하는 데까지 닿는다. ‘오월쟁패’, ‘백가쟁명’ 등 그가 펼쳐내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에는, 중국 지리와 사회경제적 구조의 천착과 죽간, 명문, 석비 등 온갖 자료들을 파고들어 최신의 연구 성과를 담으려 한 노력이 담겼다. 영웅이 아닌 ‘보통 사람’의 눈높이로 역사를 바라보려는 태도가 두드러진다. ‘보통 사람’의 욕망을 긍정하는 시대의 질서를 세운 관중이 전체 이야기의 문을 열고, 인민의 마음을 얻어 제국을 세운 유방이 이를 마무리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에 먹이는 ‘강펀치’
이상한 정상가족-자율적 개인과 열린 공동체를 그리며/김희경 지음/동아시아·1만5000원이 책의 사정없는 포화를 맞고도 흔들리지 않을 가부장주의자가 있을까?
18년간 일간지 기자를 하고 6년간 세이브더칠드런에서 일한 김희경의 글엔 막연한 구석이라곤 하나 없다. 사례와 통계, 연구 결과를 적재적소에 배치해 아동학대와 저출산, 미혼모 문제의 공통원인인 ‘가부장주의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를 정확하게 타격한다. 가정 내 체벌금지법을 제정하지 않는 이상 아동학대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잘라말한다. “체벌을 해도 된다고 보는 태도가 뿌연 안개처럼 사회에 깔려 있는 상황에서 아동학대를 뿌리 뽑을 방법이 있을까? 단언컨대, 없다”
그의 논리는 지구상에 없는 이상향을 그리는 것이 아니다. 그의 대안들은 지구 어딘가에서 현실로 존재한다. 1979년 스웨덴을 위시해 가정 내 체벌을 금지한 나라는 전세계 52개국. 개인-가족 관계를 중시하는 미국 모델에서 개인-국가 관계를 중시하는 노르딕 모델로 나아가는 것이 우리의 갈 길이다.
김지훈 기자 watchdog@hani.co.kr
이동휘·김사국·김재봉·이재유… 이들을 아십니까
조선공산당평전-알려지지 않은 별, 역사가 된 사람들/최백순 지음/서해문집·1만9000원이 지구 어느 곳에서든 공산주의 또는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정치세력이 평탄한 활동을 벌일 수 있었겠는가. 제국주의의 식민통치 아래에 있던 곳이라면, 이념 때문에 끝내 조국이 분단된 곳이라면, 그 괴로움은 몇 곱절 더했을 터다. 민주노동당 시절부터 오늘날 정의당까지, 꾸준히 진보정당 운동에 몸 담아온 최백순 <레디앙> 기획위원이 5년에 걸쳐 우리나라 사회주의 운동의 잊혀졌던 계보를 써냈다. <조선공산당평전>이라는 제목은 단지 1925년 창당했던 ‘조선공산당’을 주인공으로 삼은 것이 아니다. 그 앞뒤로도 면면히 흘렀던 사회주의 운동의 거대한 흐름 그 자체가, ‘평전’을 자처하는 이 책의 주인공이다. 1860년대 러시아로 이주한 한인들과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 등 ‘뿌리’를 더듬어 거슬러 올라가는 작업이 책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이젠 남북이 모두 잊은, “조선 독립을 목적”할 뿐 아니라 “사회주의를 희망”했던 사람들의 치열한 역사를 다시 읽는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김훈·고종석을 잇는 문학적 기사쓰기의 계보
웅크린 말들-말해지지 않는 말들의 한국어사전/이문영 지음/후마니타스·2만원“이문영의 기사(글쓰기)는 김훈, 고종석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문학적 기사 쓰기의 계보를 창의적으로 일구어 나가고 있다. (…) 이 책은 이 시대 문학과 예술이 충분히 조명하지 못한 한국 사회의 가장 밑바닥 인생, 가장 낮은 곳의 실존, 가장 짙은 그늘을 단아한 문장으로 담담하게 응시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2017년판 <난쏘공>이라 할 수 있겠다.”(문학평론가 권성우)
기자로서 이보다 더 큰 찬사를 받을 수 있을까. 하지만 이문영 <한겨레> 기자의 <웅크린 말들>은 글의 무게로 찬사에 값한다. 폐허가 된 폐광에서 살아가는 전직 광부와 구로공단 여성노동자, 알바생을 지나 에어컨 수리기사에 이르면 더이상 페이지를 넘기기 힘들어질 정도로 고통이 찾아온다. 그들의 비참한 삶의 무게가 고양된 문장을 통해 영혼 깊은 곳에 내려앉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은 이후에 보는 그들의 모습, 세상의 모습은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김지훈 기자 watchdog@hani.co.kr
한동안 뛰어넘기 어려울 리얼리즘 만화송곳(전6권)/최규석 지음/창비·전권 6만6000원
그동안 나온 국내외 만화 중에 이 정도로 노동운동을 현실감 있고 완성도 높게 그려낸 만화가 또 있을까. 대중문화에서 노동조합은 전혀 흥미로운 소재가 아니었고, 노조를 소재로 삼더라도 긍정적인 면만을 부각하기 위해 평면적으로 그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최규석 작가의 <송곳>엔 노조 활동을 하느라 일상이 무너져버린 노조 간부, 사측과 투쟁 끝에 가압류를 당해 극단적인 선택을 한 노동자, 파업한 노조원들에게 ‘자본주의 체제와의 전쟁의 일부’라고 말하는 노조 활동가가 나온다. “어쨌든 나는 모든 곳에서 누군가의 걸림돌이었다”이라고 말하던 송곳 같은 사람으로 인해 주변의 동료가 일터를 지켜낼 수 있었고, 지기만 하던 노동자가 작은 승리를 맛본다. <송곳>은 이야기에 음영을 넣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거기서 더욱 빛나는 서사가 탄생했다. 이 작품을 뛰어넘을 리얼리즘 만화가 나오기는 앞으로 꽤 오랫동안 쉽지 않을 것이다.
김지훈 기자 watchdog@hani.co.kr
왜 생명체만이 지능을 가질 수 있는가?
지능의 탄생-RNA에서 인공지능까지/이대열 지음/바다출판사·1만8000원나날이 발전하는 인공지능은 끝내 인간의 지능을 능가하게 될까? <특이점이 온다>를 쓴 미래학자 레이 커즈와일은 2045년께 인공지능이 인간의 정신을 복제할 수 있게 될 것이라 예측했다. 그러나 세계적인 뇌과학자로 꼽히는 이대열 미국 예일대 신경과학과 석좌교수(51)는 자신의 책 <지능의 탄생>을 읽고 나면 “오직 생명체만이 지능을 가진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것”이라고 장담한다. 지은이는 ‘지능’을 “인간의 사고 과정의 한 부분으로서, 특히 문제 해결 능력에 초점을 맞추는 개념”이라고 말하며, 진화의 관점에서 왜 지능이 등장했고 그 지능이 생명체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파헤친다. 생명체에 견줘 인공지능의 문제풀이 능력은 극히 제한적이며, 그 능력조차 그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것이라는 지적이 날카롭다. 특히 지은이는 다른 동물보다 더 두드러진, 인간의 ‘사회적 지능’과 ‘메타인지 능력’에 주목하는데, 이는 인간 존재에 대한 본질적 고민과 연결된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