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 목사 설교

[스크랩] 우리 신앙의 중간 평가는? (눅 13:6-9)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7. 31. 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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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신앙의 중간 평가는? (눅 13:6-9)

 

   어느 주일날, 그 교회 목사님께서 설교 도중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앉은뱅이처럼 앉아만 있습니다. 일어나서 걸어야 합니다.'
  여기저기에서 화답했습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일어나서 걸어야 합니다.' 이어서 목사님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러분! 교회가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일어나서 걷는 것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뛰어가야 합니다.' 교인들은 너도, 나도 신이 나서 맞장구를 치며 화답했습니다.
  '맞습니다! 맞고요! 뛰어가야 합니다!' 목사님은 더 힘주어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세상은 너무나도 넓습니다. 우리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날아가야 합니다. 날아갑시다!'
  그러자 모두가 동시에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아멘! 할렐루야! 우리는 날아가야 합니다. 날아갑시다!' 목사님께서 흐뭇한 모습으로 교인들을 바라보시면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런 시대적 과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물질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 이 시간 구체적으로 작정을 해서 하나님께 헌금을 합시다.'
  그러자 모두 조용해졌습니다. 아무도 화답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단지 한 사람이 용기를 내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우리 교회로 하여금 예전처럼 다시금 앉아있게 하십시다.' 여러분! 이것이 행여 우리들의 모습은 아닙니까?
  벌써 7월 마지막 주일입니다. 이제 올해도 다섯 달밖에 남지 안았습니다. 오늘 설교 주제가 중간평가입니다. 중간평가는 노태우 전 대통령이 87년대선 때 중간평가를 공약으로 내걸고, 당선이 되자 그의 임기 중 야당으로부터 '중간평가를 해 보자'는 시달림을 받은 우리나라 정치사에 기록된 역사가 있기도 합니다.
  기업도 중간평가를 합니다. 올해도 이제 5개월밖에 안 남았습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 신앙인도 중간평가를 해 보고 잘못된 신앙이 있다면 새롭게 결심하고 좋은 열매를 맺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할/ ◀제목 소개!▶ 

   

  ▶영국에서 '킹 제임스 성경'을 번역한 왕이 바로 '제임스 왕'입니다. 그의 정치에 반역한 반역자를 사형시키려고 했습니다. 사형수는 왕이 성경을 그렇게 좋아하는 줄 알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왕이시여! 죽기 전에 왕이 번역한 성경을 한번 읽고 죽게 하여 주옵소서!' 제임스 왕은 기특하게 생각하고, '그렇게 하라'고 허락하였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물었습니다. '다 읽었느냐?' '아직 다 못 읽었습니다.' 며칠 후 또 물었습니다. 계속 그런 대답이었습니다. 왕이 '왜 그렇게 진도가 늦나?'고 물자 사형수가 대답하기를 '왕이시여. 성경 말씀이 너무 깊고 좋아서 하루에 한 절씩 읽고 또 묵상하고 있습니다.'
  왕은 그 마음에 감동되어서 그 사형을 면제 시켜 주었다고 합니다. /할/ 오늘 본문의 내용도 바로 심판을 연기 시켜준 그런 이야기입니다.

 

  ▶본문의 배경을 먼저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그 당시 유대 기득권 층에 있는 종교 지도자들, 즉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장로들의 죄악상을 신랄하게 드러내며 '만약 회개하지 않으면 화를 면치 못하리라'고 책망의 말씀을 하시자, 그들이 오히려 예수님께 반감을 가지고 예수를 없애고자 여러 가지 함정이 깔린 복합적이고 교활한 질문공세를 시도합니다.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걸어 넘기려는 완악한 질문이 본문 1절에 '갈릴리 사람들이 로마 당국에 의해 성전에서 피살된 사건의 책임 소재에 관한 것'을 들고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그때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빌라도가 제사(예배)를 드리고 있는 갈릴리 사람들을 죽인 이야기를 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로 빌라도 총독의 통치 아래 있었습니다. 로마의 식민지 통치에 반기를 들고 독립을 쟁취하려는 과격한 무장 세력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갈릴리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성전에서 예배드리고 있다는 첩보를 가지고 빌라도가 성전을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성전 안에서 갈릴리 사람들을 대량 학살해버렸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이렇게 성전에서 학살당하는 규모가 3천명이 될 때도 있었고, 많을 때는 무려 2만 명이나 되는 때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건을 예수께 고하고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느냐는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만약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는 정치적으로 로마 당국을 반역하는 행위로 예수를 로마 당국에 고발하여 넘길 구실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학살당한 그들의 죽음을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원리에 따라 마땅히 죄의 보응을 받은 것이라고 말한다면, 결국 바리새인과 유대 지도자들과 그들의 율법 개념을 지지하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딜레마에 빠뜨리려는 사악한 질문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들의 교활한 질문에 대해 예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2-5절입니다.
  '이 갈릴리 사람들이 그런 변을 당했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들보다 죄가 더 많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지만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다 그와 같이 망할 것이니라.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죽은 열 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죄가 더 많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지만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다 그와 같이 망할 것이니라.' /할/
  바리새인들과 유대 지도자들의 간악한 생각과 의도를 예수께서 훤히 꿰뚫어 보시고, 그들뿐만 아니라 그 누구라도 사는 길, 구원을 얻는 길은 오직 회개밖에 없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정치적 문제에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간교한 정치적 함정이 깔린 질문공세에 맞 대응하여 변론하고자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께서 항상 원하시는 바는 누구든지 '죄를 회개하고 변화되어 구원받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거듭 회개를 촉구하신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람이 불행한 일을 당하는 이유는 죄 때문이라고 믿었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이 성전에서 불의의 학살을 당하는 불행이나, 실로암 망대가 붕괴되어 압사 당한 사건 등은 당사자의 죄 때문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그러한 불행을 당하지 않은 것은 바로 자신들의 무죄를 입증하는 증거인양 생각했던 것입니다. 숱한 재앙과 재난, 사건 사고 가운데 자신이 무사했다는 것을 자신들이 죄가 없었기 때문으로 여겼습니다.
  다른 사람의 불행을 보고 긍휼히 여기기보다는 그 불행의 원인을 따지는 일에 집착하는 한편, 자신들의 죄악을 합리화시키려는 아주 불순하고 사악한 생각들을 가졌습니다. 회개할 줄 모르는 완악한 무리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그릇된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아직 불의의 재난과 재앙을 당하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해서 자신은 죄가 없다고 안심하지 말라, 세상에 죄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다 그와 같이 망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관심은 재난과 재앙을 당해 심판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죄를 회개하고 구원'받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할/
  여러분, 회개가 무엇인가? '회개'란 지난날을 돌아보아 자신의 잘못과 죄악을 깨닫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며, 잘못한 삶의 태도를 완전히 바꾸는 변화를 의미합니다. 더 나아가 이웃이 당하는 불행을 보고 위로해 주고 함께 아파하며 자신도 하나님 앞에 그들과 똑같이 죄인임을 깨달아 회개의 열매를 맺는 생활을 의미합니다. /아멘!/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형제를 향한 정죄가 아니라 형제의 모습을 통해 도리어 자신의 죄의 심각성을 깨닫고 그 죄를 회개하여 열매를 맺는 변화된 생활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다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비유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심었습니다. 그러나 열매가 열리지 않았습니다. 3년을 기다리던 주인은 과수원지기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이 말을 들은 과수원지기가 말했습니다.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 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아주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여기 이 비유에서 '무화과나무'는 유대인들, 오늘날 예수 믿는 성도들을, '열매'는 참된 신앙인의 인격을, '주인'은 하나님을, '과원지기'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의미합니다.
  무화과나무를 심는 목적은 분명합니다. 열매를 보기 위해서 심는 것입니다. 무화과나무는 장식용이나 땔감용, 또는 목재용으로 심지 않습니다. 오직 열매를 얻기 위해서 무화과나무를 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열매를 맺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나무입니다. 그러니까 무화과나무의 존재 이유는 딱 한 가지, 열매 맺는데 있다는 사실입니다. /할/
  무화과는 꽃이 없는 나무입니다. 모든 과일들은 다 꽃이 있어서 아름다움이 있고 열매가 있지만 이 무화과는 꽃은 없고 열매만 있는 특별한 나무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하나의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국토가 넓고 인구가 많아서 하나님이 선택한 나라가 아니요, 다른 민족보다 특별한 재능이 있어서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증인으로 하나님의 열매를 거두기 위해서 택한 무화과 같은 민족입니다.
  주님께서 무화과나무에 대한 열매를 기대한 것처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열매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세전에 예정하시고, 구원하시고, 또 자녀를 삼으신 것은 하나님의 분명한 계획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계획이 바로 '열매'라는 것입니다. /할/

  ▶본문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무엇인가?
 
  1.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열매를 찾고 계십니다(6).

 

  ①'포도원'의 복음적인 의미가 무엇인가?

  ㉠이스라엘의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사랑의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사랑의 공동체란 '너와 내가 모여 우리가 되어 사는 곳'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 모여 사는 곳 그러니까 우리들의 삶의 터전, 거기가 포도원입니다.
  ㉢교회를 의미합니다. 마20장에 나오는 포도원 비유에 교회를 신령한 포도원에 비유했고, 요15:1절 이하에 보면 성도들을 포도나무 가지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가정을 의미합니다. 시128:3절에 '네 집 내실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상에 둘린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우리의 심령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마음이 중요합니다. 마음을 잘 다스리면 승리자가 될 수 있습니다. 잠4:23절에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할/


  ②포도원에 심겨진 무화과나무는 아주 특별한 나무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아주 특별합니다. 포도원에는 당연히 포도나무를 심는 것이 마땅한데 특별히 한 그루의 무화과나무를 그 가운데 심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요1: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할/
  ㉡우리는 아주 특별한 곳에 심겨진 나무와 같습니다. 시1:3절에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렘17:7-8절에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할/
  그렇습니다. 포도원 주인이신 하나님은 포도원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특별히 심었다는 것부터가 특별한 애정입니다. 천국에는 하나님과 천사들만 살고 있는 곳입니다. 그런 곳에 죄인된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은 은혜 중에 은혜요 감격 중에 감격이요 축복 중에 축복입니다. /믿/아멘!/


  ③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열매를 찾고 계십니다.
  여기 '열매를 구하였다'는 말은 그리스도인들에게서 그리스도인다운 열매를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직분에 있어서 집사가 될 때는 집사다운 열매가 있어야 되고, 권사가 될 때는 권사다운 열매가 있어야 됩니다. 또 사회적인 활동에서 어떤 직책을 가졌을 때는 그 직책에 대한 열매가 있어야 됩니다.
  회사에 가서는 자기가 맡은 분야에서 어떤 책임을 맡았으면 그 책임에 대한 열매를 맺어야 됩니다. 가정에서 어머니는 어머니다운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또 아버지는 아버지다운 열매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멘!/
  ㉠예수님은 열매를 보아 평가하십니다(마7:16-18).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가 좋은 나무가 되어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좋은 나무에 좋은 열매'란 지극히 상식적인 이야기이자 간단한 이치입니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고,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두고, 적게 심으면 적게 거둔다.'는 이 간단한 이치를 거스르는 사람들 때문에 세상이 시끄러운 것입니다.
  '불한당'이라는 말은 떼를 지어 돌아다니며 재물을 마구 빼앗는 사람들을 가리키는데 한 마디로 땀을 흘리지 않는 무리들입니다. 나는 수고하지 않고 남이 땀 흘린 것을 거두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도적 심보요, 강도와 같은 마음입니다. 진실을 심고 그 열매를 기다려야 옳은 것입니다. 거짓을 심고 옳은 열매를 얻겠다는 것은 강도요, 도적입니다.
  오늘 이 시대를 가리켜 '슈바이처'는 '어리석게도 열매도 맺지 못하는 허무주의라는 나무 가지에서 진리라는 열매를 찾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믿을 만한 것도 없이, 사랑할 만한 것도 없이, 기대할 만한 것도 없이 살면서 열매만을 바라고 있는 어리석음을 꼬집은 말입니다. 생명이 있는 것은 그것에 걸 맞는 열매를 맺을 때 비로소 그 생명 됨이 인정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아멘!/
  여기 '그 열매로 그 나무를 안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중요한 것은 '열매 이전에 나무'입니다. 예수께서는 '무작정 좋은 열매를 맺고자 하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며 먼저 '좋은 나무가 되라'는 것입니다.
  나무는 가시나무인데 열매는 포도를 따겠다면 말이 안 됩니다. 나무는 엉겅퀴인데 열매는 무화과를 따겠다면 웃기는 이야깁니다. 예수님은 열매부터 말씀하시지 않고 나무를 먼저 말씀하십니다.
  열매가 그 사람의 행위라면 나무는 그 사람의 됨됨이, 즉 '인격과 성품과 기질'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행동부터 바꾸라고 하지 않고, 속 사람이 변하면 행동은 자동적으로 따라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행동을 먼저 고치라고 말씀하지 않고 사람이 먼저 바뀌라는 것입니다. /할/
  즉 인격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순간적으로 보여 주는 행동에는 얼마든지 가식이 있을 수 있습니다. 속 사람은 여전한데 행동만 바꾼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가식입니다. 절대로 오래가지 못합니다.
  ▶삿9장에 보면 나무들의 비유가 나옵니다. 삿9장의 배경은 기드온의 아들인 요담이 세겜 사람들에게 외친 말인데 요담은 왜 이러한 나무들의 비유를 들어야 했는지 당시 배경을 알아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이 미디안 사람들에게 괴로움을 당할 때에 백성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으니까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을 세우시고 그의 3백 명의 용사로 메뚜기 떼와 같이 몰려오는 미디안 군대를 쳐부숴서 승리했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드온에게 와서 그와 그의 아들과 그의 손자가 나라를 다스려 줄 것을 건의합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고 하며 그 호의적인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기드온이 죽은 후에 기드온의 첩의 아들인 아비멜렉이 자기가 왕이 되려는 욕심으로 음모를 꾸몄습니다. 자기 어머니의 고향인 세겜 사람들을 돈으로 매수하여 기드온의 아들 70인을 한 반석 위에서 몰살시켰습니다.
  그러나 말째 아들 요담만은 스스로 숨었으므로 홀로 화를 면할 수가 있었습니다. 요담은 아비멜렉이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참을 수가 없어서 세겜 남쪽에 있는 그리심산 꼭대기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는 나무의 비유를 들어 세겜 사람들에게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여러 나무들이 무화과나무에게 와서 우리의 왕이 되어 달라고 했습니다. 그때 무화과나무가 '나의 단 것, 나의 아름다운 실과를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를 위에 요동하리요' 하며 거절했습니다.
  또 포도나무에게 가서 왕이 되어 달라고 했습니다. 그때 포도나무는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나의 새 술을 버리고 어찌 나무를 위에 요동하리요'하며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가시나무에게 왕이 되게 해 달라고 했더니 '너희가 나를 왕을 삼겠거든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비유처럼 과연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았던 세겜 사람들은 나중에 아비멜렉의 손에 의해 진멸되었고, 아비멜렉 역시 부끄러운 죽음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무엇을 말입니까? 거짓된 인격은 이렇습니다. /할/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압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하나님은 성도의 신앙의 행위를 보고 그 신앙의 척도를 재십니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나무는 그 나무의 종류대로 열매를 맺습니다. 그 나무와 전혀 다른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성도의 좋은 열매는 무엇입니까? 다섯 가지로 알아보겠습니다.
  ⑴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갈5:22-23절에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나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사랑과 희락과 화평'은 하나님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태도입니다. 사랑은 그리스도를 대표하는 낱말이며 최대의 덕목입니다. 희락은 구원받은 자의 거룩한 기쁨입니다. 은혜 받은 사람의 외적인 표현은 바로 희락입니다. 화평은 하나님과 나 사이에 이웃과 나 사이에 화평함이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은 대인관계에 나타나는 미덕의 열매입니다. 오래 참음은 분을 더디 내는 인내를 가지고 자기를 헤치려는 사람에 대해서 너그러운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께 기도하고 한 번 더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오래 참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아멘!/
  자비는 부드러운 성품이요, 양선은 친절과 덕행을 뜻입니다. 그 다음에 '충성, 온유, 절제'는 자유에 대한 열매입니다. 충성은 변함 없는 신앙의 절제를 말하고 온유는 하나님 앞에서 잘 길들여진 상태를 말하고 절제는 모든 생활에 지나치지 않은 것을 말합니다. /아멘!/
  ⑵히13:15절에 '입술의 열매'를 맺으라고 했습니다. 입술의 열매는 찬양을 말합니다. 찬양은 곡조 있는 기도입니다. 찬양은 그대로 살겠다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우리가 입술을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 입술 가지고 원망하고 불평하면 안 됩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찬송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AD 64년 경 네로 황제의 무서운 박해 운동이 일어났을 때 맹수의 밥이 되면서도 초대 교인들은 하나님을 찬송했고, 그 찬송을 로마의 하늘에 가득 찼습니다.
  그 후 250년 동안 로마 하늘에 가득 찼던 찬송의 찬송은 콘스탄티 대제의 입을 열고 그 입으로 기독교를 국교로 맞이하는 밀라노 칙령을 공포하게 됐습니다.
  기독교의 모든 행사는 찬송과 함께 이루어집니다. 찬송은 모든 예배 행위요, 모든 비중을 차지합니다. 역대서를 보면 레위인 중에서 따로 성가대를 두었으며 수금, 나팔, 제금, 비파 등 악기를 부는 제사장이 120명이었습니다.
  전쟁시에도 찬송을 했습니다. 여호사밧 왕은 모압, 암몬 연합군이 쳐들어왔을 때 찬양대를 앞세워 나갔습니다. 찬양은 위대한 능력을 동반합니다.
  대하20:22-23절에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산 사람을 치게 하시므로 저희가 패하였으니 곧 암몬과 모압 자손이 일어나 세일산 거민을 쳐서 진멸하고 세일 거민을 멸한 후에는 저희가 피차에 살육하였더라' /할/
  마가의 다락방에 120문도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양하다가 성령의 불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성령도 찬송의 줄기를 타고 강림하십니다.
  행16장에도 바울과 실라의 찬송은 옥문을 여는 기적이 동반됩니다. 여리고 성이 무너진 것도 하나님의 찬송할 때였습니다. 시150편의 결론도 찬양입니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송할찌어다.' /할/
  ⑶거룩한 삶이 아름다운 열매입니다. 롬6:22절에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그런데 거룩한 삶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가능합니다. /아멘!/
  ⑷선한 행실의 열매입니다. 골1:10절에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⑸전도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전도하면 신앙이 더 견고해 지고 하늘나라의 상급이 큽니다. /믿/ 열매는 맛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의 의미는 맛을 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열매는 맛만 내는 것이 아니고 그 속에 반드시 씨가 있습니다. 맛을 내는 데까지는 헌신입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씨가 있어서 거기에서 또 생산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인의 가치요, 의미입니다.
  ㉢우리 주님의 실망이 무엇인가?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이것이 비극입니다. 오늘 우리가 조용히 중간평가를 해 보아야 합니다. '내가 열매를 맺은 성도인가? 못 맺은 성도인가?' 그런데 여러분, '좋은 열매를 맺느냐? 안 맺느냐?'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심판이 있습니다.
  마7:19-20절을 보세요!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할/
  물론 여기서 말씀하는 불은 지옥을 상징합니다. 지옥 불은 꺼지는 법이 없습니다. 영영한 불입니다(계21:8). 지옥은 뜨거운 불로 인해서 고통스럽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유황이 탈 때마다 심하게 풍겨져 나오는 유독가스 때문에 더욱더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지옥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그곳에서는 소망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저 세세 무궁토록 밤낮 없이 고통을 당해야 하는 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믿/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은 아름다운 열매를 많이 맺기를 원하십니다. 열매를 맺는 비결은 주안에 있어야 합니다. 요15:7절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아멘!/

 

2.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7절)

 

  여기 '땅만 버린다'는 말은 열매 맺지 못하면 열매 맺지 못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해로운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나무가 뿌리를 박고 나무의 자양분을 다 흡수해버리기 때문에 땅이 황폐해진다는 것입니다. 다른데도 쓸 수가 없습니다. 백해무익입니다. 그래서 땅만 버린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스스로 자신을 생각해 보십시오. 나 때문에 오히려 내 주위 사람들이 황폐케 되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 보십시오. 사업가가 혼자만 착취하려고 할 때 노동자를 황폐케 만듭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이나 교수가 자기 이권만을 위해서 가르치고 있다고 할 때 학생들의 심령을 황폐케 만드는 것입니다. 권력을 잡은 정치가가 자기의 권력만을 생각하고 독재할 때 국민의 심령을 황폐케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두려운 것입니까? /할/
  죄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적극적인 죄가 있고 소극적인 죄가 있습니다. 적극적인 죄는 악한 마음을 가지고 남을 해치고, 살인하고, 온갖 악을 행하는 죄입니다. 소극적인 죄는 선을 알고도 행치 않는 죄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일반적으로 소극적인 죄를 짓습니다.
  전도 학에서 '전도하는데 가장 큰 장애물이 누구냐?'라는 조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불신자들 때문에 전도가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불교 신자 때문에 전도가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기독교 전도 학에서 전도의 장애물은 바로 그리스도인이라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우리 자신이 장애자입니다. 그것은 열매를 맺지 않기 때문입니다. 열매 없는 성도가 이 세상 사람들이 교회에 오는 것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두려운 마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할/
  여러분, 우리 자신을 보면서 '왜 땅만 버리느냐?'고 하시는 주님의 책망이 나에게 어떻게 임하는지 스스로 성찰해 봐야 합니다.
  ▶예수께서 한번은 이른 아침에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데 몹시 시장했습니다. 그래서 '먹을 것이 없나' 하고 성밖에서 눈을 들고 보니까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가 있었습니다. 가까이 가서 보니까 열매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 나무를 저주하십니다.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이 나무에 열매가 없을지어다' 하니까 나무가 말라버렸습니다. 나무에 있어야 할 열매가 없었기에 존재할 가치가 없다고 그를 저주하신 것입니다.
  무화과나무는 잎이 무성했기 때문에 눈에 얼른 띄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나무가 많습니다. 사업이 잘 되면 눈에 잘 띕니다. 인물이 좋으면 눈에 잘 띕니다. 학력이 높으면 눈에 잘 보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눈에 잘 띄려고 출세합니다. 성공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눈에 잘 보여서 주님께서 가까이 가셔서 봤을 때 아무런 열매가 없을 때 주님이 그를 향해서 책망하십니다. '찍어 버리라' 이것은 영원히 망하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인생을 살면서 어떤 모양으로든지 자기 존재가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쓰임을 받는다면 이것이 바로 가치 있는 삶이요 축복입니다. /믿/

 

3. 우리에게 기회는 있습니다(8-9).  

 

  지금까지 열매맺지 못 한 무화과나무는 바로 '나'입니다. 주인이 3년씩이나 와서 보았는데 열매가 없었습니다. 열매 없는 나를 보고 예수님이 얼마나 허전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 무화과를 따러 오셨다가 열리지 않으니까 빈 바구니를 들고 도로 돌아가실 때 얼마나 서운하셨을까요?
  여기 '찍어 버리라'고 하시는 말씀 속에는 얼마나 실망하셨는지 그 진한 감정을 느낄 수 있지 않습니까? '땅만 버리는구나'라고 한탄하실 때의 주님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지 않습니까? 다시 한번 다짐하며 회개하며 남은 인생을 맞이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빅터 프랭크린'은 유대인입니다. 유명한 심리학자요 의사입니다. 그는 독일 유대인 수용소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분입니다. 히틀러가 600만 명을 학살하는 동안에 유대인 포로 수용소에 있으면서 견디어 낸 특별한 분입니다.
  그런 분이 이런 이야기하나를 전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독일군은 유대인들을 운동장에 모아 놓고 몇 명을 뽑아 생체 실험을 하고 있었습니다. 십자가 세 개를 땅에 세웠습니다. 그리고 한 명씩 임의로 뽑아 십자가에 매고 동맥을 자르고 깡통을 댑니다. 그리고 피가 얼마큼 흐르면 사람이 죽는 지를 실험하는 것이었습니다.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그 모습을 구경시켰습니다.
  세 명을 그렇게 죽인 후에 또 세 명을 골라 붙들어 맸습니다. 그리고 동맥을 잘랐습니다. 피가 주르륵 흘러 내렸습니다. 왼 편에 있는 이가 반도 차지 않아서 죽었습니다. 오른 편에 있는 이가 조금 후 죽었습니다. 그런데 가운데 있는 이는 죽지 않고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는 유대인 랍비였는데 그는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난 이대로 죽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지 못 했습니다. 한번만 기회를 다시 주십시오. 반드시 멋지게 주를 위하여 살겠습니다. 지금 이렇게 죽으면 하나님 앞에 가서 할 말이 없습니다.'
  알고 보니 나중 세 사람은 동맥을 아주 자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눈을 수건으로 가렸습니다. 그리고 동맥을 칼로 자르는 척하면서 칼을 댔습니다. 그리고 테이프로 붙였습니다. 그리고 수돗물을 틀어서 깡통에 물소리가 나게 하였습니다. 피가 떨어지는 소리처럼 들리게 하였습니다
  눈을 가리운 이들은 자기 몸에서 피가 떨어지는 것으로 착각하고 스스로 죽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랍비는 철저히 회개하며 하나님께 기회를 달라고 간절히 구했습니다. 그만이 살아나 새로운 생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하려고 하는 사람에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또 연기는 안 됩니다. 마지막 기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 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 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그대로 두소서' 심판의 연기입니다. 우리에게 기회를 다시 주신 것입니다. /할/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회는 단 한번뿐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9절에 '이후에'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남아있는 시간'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기회는 무한정 있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자비 또한 언제까지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어느 권사님의 간증입니다. 이 권사님이 40대까지만 해도 인물 내고 어떻게 하면 잘 사느냐, 좋은 집에 사느냐, 누가 알아주느냐, '사모님은 복도 많지' 이런 소리 듣는 것을 자랑으로 알고 살았답니다. 그런데 50이 넘으니까 잠자리에 들 때 '쇼펜 하우어'가 했던 말이 생각나더랍니다. '50이 넘으면 무덤의 소리가 들린다' 이 소리가 들리면서 '내가 죽으면 어떻게 하지' 그 생각이 떠오르는데 순간 이런 생각이 들더랍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무엇인가 잘 먹고, 잘 입고, 좋은 집에서 사는 것을 자랑하며 살아온 것이 내가 산 것인가 이래서는 안되겠다. 나는 하나님 앞에 가야 할 사람인데 내가 하나님 앞에 갈 때 무슨 열매를 가지고 갈까 무엇을 드릴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인생이 조급해지더랍니다.
  그래서 주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여, 내가 50-70까지 일한다면 20년인데 20년 동안 100명만 주께 영혼의 예물로 들고 가게 하소서' 기도하면서 소원을 갖고 길거리에 나가서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소원을 가지고 기도한 때부터 일년에 다섯 명 이상씩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리게 되더랍니다. 물론 많은 전도를 했지만 순수하게 결실 맺는 열매가 다섯 명씩 되더랍니다. 일년에 다섯 명씩 전도하면 20년 동안 100명을 전도할 수 있습니다. 마음에 소원을 하나 가지면 운명을 바꿀 수 있습니다. /할/
  '그대로 두소서' 지금 우리가 이런 기회 속에 살고 있습니다. 기회는 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잡아야 합니다. ▶어느 곳에 한 양치기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 일을 하러 나가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그 집 마당에 온갖 꽃들이 아름답게 활짝 피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코끝에 스며드는 향기며 난생 처음 보는 꽃 같아 이 꽃들을 보면서 하루를 마음껏 즐기고 싶었지만, '오늘은 양털을 깎아야 하니 빨리 털을 깎고 와서 이 꽃들을 보며 즐겨야지...' 그러나 그가 양털을 깎고 돌아왔을 때는 이미 꽃들은 시들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다음 날 아침 그는 아름다운 새 소리에 잠을 깼습니다. 너무나 아름답고 황홀한 새 소리이었습니다. '지금은 우유를 짜야 하는 시간이니까, 일을 마친 후 저 새 소리를 들어야지...'  그러나 양치기가 우유를 짜고 와 보니 이미 새들은 다른 곳으로 날아가 버리고 없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양치기는 집 밖에서 들려오는 말울음 소리에 잠을 깼습니다. 창문을 열어보니 아주 잘 생긴 백마 한 마리가 자신의 몸매를 자랑하듯이 천천히 울타리를 돌고 있었습니다. '저렇게 훌륭한 말을 타 볼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런데 지금은 울타리를 고쳐야 하니까 빨리 고치고 와서 저 말을 타 봐야겠다...' 그러나 그가 급히 일을 마치고 왔을 때는 이미 백마는 그 곳에 없었습니다.
  양치기는 그처럼 자기가 하고 싶었던 일을 뒤로 미루는 바람에 하나도 자기의 소원을 성취해보지 못한 채 일생을 마쳤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삶이 바로 이 양치기와 같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의 삶의 우선 순위를 바로 알고 사시기를 소원합니다. 마6:33절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리고 오늘 회개할 기회를 놓치면 내일이 없습니다. 전쟁 깜도 안 되는 아이성 전투에서 패배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여 내일을 기다리라'(수7:13)고 말씀하셨습니다. 회개하여 깨끗함을 받지 못하면 내일이 없습니다. 금 그릇과 은그릇이라도 더러우면 천하게 쓰입니다. 그러나 나무나 흙으로 만든 그릇이라도 깨끗하면 귀하고 거룩한 일에 쓰임 받게 됩니다(딤후2:20-21). /할/
  ▶바른 예배 자로 삽시다. ▶하나님을 하나님처럼 섬기는 성도들이 됩시다. ▶오늘 우리 주님의 열심을 본받으십시다. 오늘 본문의 두 단어에 관심을 집중해야 합니다.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앞으로 일년 동안은 포도원 지기가 열심히 팔 작정입니다. 그리고 열심히 거름을 줄 작정이 들어 있습니다. 주님이 남은 해에도 열심히 우리를 돌보실 것입니다. 이 약속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아멘!/ 하나님이 일하시니 주님도 일하시고 주님이 일하시니 우리도 일해야 합니다. /할/
  '그대로 두소서' 이 말씀 속에는 예수님의 기대도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심판도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책임진다'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이 과원지기는 열매 없는 실패의 책임을 졌습니다. 열매 없는 책임이 내게 있다고 말합니다.
  나무에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내게도 책임이 있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책임을 지고 다시 한해동안 땅을 파고 거름을 주고 정성을 다하며 열매 맺기 위해 힘을 다하겠노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소망이 있고 기대가 있습니다. 막9:23절에 예수께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할/ (2011년 7월 31일 대예배 설교)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송수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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