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 때 울면 3류 인생이다.
고후 4;7-12.
너무 힘들어 어떻게 할지 몰라 쩔쩔매는 경험을 한 적이 있나요?
교회를 짓다가 너무 힘들어서 교회 옥상에서 떨어져 죽고 싶었다는 목사님의 간증을 들어 본 적이 있습니다.
사업을 하다가 너무 고통스러워 외국으로 도망가고 싶다고 말하는 이의 고백도 들었습니다.
어느 사업가가 사업에 실패하였습니다. 눈 내리는 날이었습니다. 몸은 말도 못 하게 아팠습니다. 사람들이 멸시하고 있었습니다.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눈위로 발자국이 한 줄로 선명하게 나 있었습니다.
그는 눈물을 글썽이며 주님께 말했습니다.
“주님! 내가 이렇게 답답한 일을 당하여 아파 하는 데 어디 계시나요?” 주님이 대답하셨습니다.
“나는 너와 함께 걷고 있다.”
“안 보이는 데요.”
“뒤를 보아라.”
뒤를 보니 역시 발자국이 한 줄 뿐이었습니다.
“내 발자국밖에 없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 발자국은 네 발자국이 아니라 내 발자국이란다. 내가 너를 안고 가고 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주님이 모든 것을 담당하고 계십니다.
두 명이 사업을 같이 하다가 부도가 나서 모두 망하게 되었습니다. 둘이 한강다리에서 뛰어 내려 투신 자살하기로 하였습니다. 한 명이 뛰어 내렸습니다. 떠내려가면서 다리위에서 뛰어 내리지 않는 동업자에게 소리질렀습니다.
“너도 뛰어내려.”
그가 다리위에서 말했습니다.
“무서워서 못 뛰어 내리겠어.”
그러니까 물에 뛰어든 사람이 말했습니다.
“그러면 나도 안 죽는다.”
그리고 헤엄쳐서 나왔습니다.
살아가다 보면 힘들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힘들 때 우는 사람은 3류 인생입니다.
힘들 때에 참으면 2류 인생입니다.
힘들 때에 도피하면 4류 인생입니다.
힘들 때에 도전하는 사람이 일류 인생입니다.
성경은 인간을 질그릇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렇게 본문은 시작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도 로마서 9장에서 하나님은 토기장이요 우리는 토기장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질그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그냥 질그릇이 아니라 <보배를 지닌 질그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보배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돌이신 예수>(벧전 2;4)
올림픽에 출전하기 위하여 수 백명 선수들이 같은 비행기를 타고 같이 떠납니다. 그러나 돌아 올 때는 다릅니다. 메달을 따지 못 한 선수는 언제 어떻게 귀국하였는 지 알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금메달이나 은, 동메달을 딴 선수들은 카퍼레이드를 벌이면서 요란스럽게 귀국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가진 질그릇입니다.
예수님을 모신 사람은 힘들 때에 울지 않습니다. 힘들 때에 우는 것은 3류 인생입니다. 예수님을 모신 사람은 왜 울지 않을 수 있는 것일가요?
1. 싸이지 아니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있기에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함을 믿고 힘들어도 울지 말아야 합니다. 우겨쌈을 당한다는 원어는 <들리보메노이>라고 합니다. 이는 포도주를 짜기 위하여 포도를 짓이길 때 쓰는 말입니다. 기름을 짤 때 깻묵이 되도록 짓이겨 눌르는 상태를 말합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애급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400년만에 해방될 때 하나님은 홍해 앞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갑자기 노동력을 다 잃어버린 바로 왕은 돈 안들이고 부릴 수 있는 200만명 노예를 다시 잡으려고 병거 600 대를 앞장 세우고 잡으러 왔습니다.
도저히 도망갈 수 없는 상황입니다.
앞은 홍해입니다. 뒤는 애급 군사입니다. 양쪽으로 가 보아야 사막입니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였습니다. 포도주를 짜듯이 바로는 조여 왔습니다. 모두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한 것을 보고 모세를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같이 그 곳까지 오고 나서 책임은 모세만 져야 했습니다. 이것이 지도자의 고독이고 아픔입니다. 그래서 지도자는 외로운 것입니다. 긴 시간동안에 아무도 바로가 쫓아 올 것을 예상하지 못 하였습니다. 200만명중에 그 누구 하나 이렇게 말한 사람이 없습니다.
“모세 선지자님! 그 곳으로 가면 홍해입니다. 긴급상황이 생기면 도망갈 곳이 없습니다. 바다가 막고 있는 곳으로 가지 말고 윗 쪽 평탄한 길로 가십시다.” 이렇게 말해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 때 모세가 외쳤습니다.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 14:13-14)
하나님은 홍해를 갈려 주셨습니다.
보배를 지닌 질그릇인 우리는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습니다.
어떤 남자가 점쟁이를 찾아 갔습니다. 그리고 손금을 보아 달라고 하였습니다. 손금을 보던 점쟁이가 말했습니다.
“당신은 아픔을 당하고 비참해 질 것입니다. 30세가 될 때까지는 가난할 것입니다.”
실망한 남자가 물었습니다.
“그러면 30세 후는 어떻게 될 것입니까?”
점쟁이가 대답하였습니다.
“그 때는 가난과 아픔에 아주 익숙하여져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사람들은 늘 그렇게 살게 됩니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인 채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영접한 우리는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보배 예수님이 임재하여 계십니다.
힘들다고 우는 것은 3류 인생입니다.
2. 낙심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이란 원어에 <아포루메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극심한 불안을 의미합니다. 안절부절하는 상황입니다. 이런 때에도 보배를 지닌 질그릇, 예수님을 모시는 우리는 낙심하지 않아도 됩니다. 예수님이 해답이기 때문입니다.
사방을 우겨쌈을 당하는 것이 외적 현상이라면, 답답한 일을 당하여 낙심하는 것은 내부적인 상황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있고, 예수님은 답답한 일을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보배를 지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아도 됩니다. 힘들다고 우는 것은 3류 인생입니다.
12 해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성경에 등장합니다. 12년 동안 피를 쏟으며 고침을 받지 못 하니까 그 동안에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다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던 차에 예수의 소문을 e을은 지라.>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답답하였을 가요? 얼마나 울었을 가요? 얼마나 피가 말랐을 가요? 피가 흐르고 마르고 말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자 말자 혈루 근원이 말랐습니다.
고침을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에게는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나라 연속극 가운데 <시크리트 가든>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우리 나라 평균 시청율 30%를 기록한 인기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작가는 김 은숙입니다. 그는 꿈의 사람입니다. 어린 시절 너무나 가난하였습니다. 책 살 돈이 없었습니다. 드라마로 유명하여 지기 직전까지만 하여도 30만원 월세방에서 살았습니다. 학원에서 강사로 아르바이트 하면서 근근히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작가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가난하여서 새우깡 한 봉지로 3일 먹은 적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드라마 한 편으로 6억원을 벌고 있습니다.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면 안 됩니다.
힘들 때 우는 사람은 3류 인생입니다.
반대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역사상 가장 아름다웠던 여배우하면 마리린 몬로가 떠오릅니다. 그는 미모 때문에 수많은 구설수에 올랐습니다. 끝내 그는 신경쇠약증에 걸렸습니다. 그리고 무대 공포증에 시달렸습니다. 그는 마지막에 답답한 일을 당하고 견디지 못 하고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유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나의 인생은 파장하여 문닫은 해수욕장과 같다.>
무엇도 부족함이 없었던 그는 예수님 없이 살았기에 답답한 일을 당하였을 때 낙심하였습니다.
프랑스의 오베랑 목사님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 성도를 찾아가서 보석 두 개를 보여 주면서 위로하며 말했습니다.
“어느 보석이 더 빛나게 보이나요?”
그 성도는 더 빛나는 보석을 가리켰습니다. 같은 보석인 데 한 보석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오베랑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이 보석은 8번 깍았지만 이 빛나는 보석은 80번 깍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시련을 주실수록 더욱 빛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답답한 일을 많이 당할수록 단련을 받아 더욱 빛나는 성도가 됩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질그릇같은 우리는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 때문입니다.
힘들 때 울면 3류 인생입니다.
3. 버린 바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학생들이 학교 생활하면서 어려운 것중에 하나가 왕따시키는 것입니다. 같이 어울려 주지 않습니다. 어디를 가도 자기들끼리만 연락하여 같이 움직이고 자기는 외톨이가 됩니다. 핍박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버린 바 된 것같지만 하나님은 더 크게 사용하여 주십니다.
예수님 자체가 버린 돌이 머릿돌이 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벧전 2;7)
나는 힘차게 그리고 확실하게 외치고 싶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을 당하여도 보배를 지닌 질그릇된 우리는 버린바 되지 않습니다.
사람만 핍박하는 것이 아닙니다. 돈의 핍박, 병의 핍박도 있습니다. 이런 핍박을 받아도 보배를 지닌 질그릇은 버린 바 되지 않습니다.
지구 역사상 가장 글을 잘 쓴 사람은 세익스피어입니다. 그는 너무나 가난하여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기본적인 생활이 되지 않았습니다. 절박함 속에서 먹을 것을 벌려고 글을 썼습니다. 잘 써야 돈을 버니까 궁여지책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성경을 많이 읽으면서 믿음으로 글을 써나갔습니다.
질그릇에 보배를 지닌 사람은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않습니다.
자연산 고기가 왜 맛이 있는 것일가요? 왜 영양이 더 좋은 것일가요?
양식의 환경은 평안합니다. 그래서 고기도 순합니다. 그러나 자연적으로 자란 고기들은 세찬 파도속에서 자랐습니다. 양식은 온도를 맞추어 주어서 쾌적한 환경에서 자라지만 자연산은 기온차가 엄청난 곳을 오가며 살기 때문입니다.
버린 바 된 것같은 환경은 우리를 강하게 합니다. 결코 버린 바 되지 않습니다.
무지개를 보려면 비를 맞아야 합니다.
서리가 알곡을 만드는 법입니다.
힘들 때 우는 사람은 3류 인생입니다.
4. 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꺼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이 말은 바울이 직접 체험한 말입니다. 바울은 생무지같은 땅에서 전도하면서 죽을 뻔 한일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꺼꾸러뜨림을 당한 적이 부지기 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뚜기처럼 되살아나서 일하곤 하였습니다.
미국에서 사업을 잘 하고 있는 인투이트 회사가 있습니다. 컴퓨터에 들어가는 소프트 웨어를 생산하는 잘 나가는 회사입니다. 그들은 제품을 만들어 놓고 실패하였으면 전 직원들이 모여서 <실패 파티>를 열었습니다.
사장은 말하고 있습니다.
“실패작을 내놓는 것이 실패가 아니라 실패에서 배우지 못 하는 것이 진정한 실패다.”
실패하였다고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 잘 되는 길이 있습니다.
그래서 힘들 때 우는 사람은 3류인생입니다.
실패해도 연장전이 있습니다. 재기전도 있습니다.
중국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웃을 수 없는 날에는 가게 문을 열지 말라.>
우리는 언제나 웃을 수 있습니다.
100여전 이야기입니다. 옥스퍼드 대학 신학 시험에서 이런 논술 문제가 나왔습니다.
“예수님이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가나 혼인잔치 기적에 대한 고찰”
모두가 잘 쓰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빈둥거리며 노는 학생이 하나있었습니다. 시험감독관이 한심하다는 듯이 보았습니다. 5분 전에 다가가서 말했습니다.
“5분 남았는 데 너는 아직 백지다.”
그는 펜을 들어 한 문장을 적었습니다.
“물이 주인을 만나니 얼굴이 붉어졌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서 거룩한 흥분으로 얽굴이 붉어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이런 이야기 하나 드리고 마치려고 합니다.
역사상 음반 판매 기록을 세운 훌리오 이글레시아스는 프로 축구 선수였습니다. 최고의 골키퍼였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하였습니다. 부상이 심하여 1년 반 동안 병원 생활을 하여야 했습니다. 이제 축구 선수로서의 생이 마감되는 것같은 위기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간호원이 키타를 주면서 말했습니다.
“병상에서 지루할 테니 배워서 노래해요.”
노래에는 전혀 관심도 없었던 선수였습니다. 그는 병상에서 키타를 배웠습니다. 작곡도 배웠습니다. 자기가 직접 작곡하여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잠재되어 있던 소질이 개발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구슬프고 감미로운 노래를 작곡하였습니다. 직접 불렀습니다. 세계 역사상 가장 많은 음반이 팔려 나갔습니다.
오늘 말씀으로 다시 읽으려고 합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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