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이는 성장하면서 제법 내 속을 썩인 아이다. 대학도 3수를 해서 겨우 입학을 했다. 공부는 그리 잘하지 못했지만 세상의 이치는 정확히 아는 아이였다. 예를 들면 용돈이 필요한 경우가 있어도 아이는 다른 아이와 접근 방법이 달랐다.
엄마에게 대뜸 “엄마, 용돈이 필요해요.”하고 말하지 않았다.
용돈 얘기를 꺼내기 전에 “엄마! 쉬고 계세요. 설거지는 제가 할게요.” 했다. 그런 다음에 어깨를 주무르면서 온갖 아양을 다 떨었다. 뻔히 보이는 수이지만 아내는 그 속을 뻔히 알면서도 번번이 그 아양에 속아 넘어갔다.
어느 때는 그 용돈을 받아들고 “어머님! 저를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나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한 적도 있었다. 아내는 그 말에 함박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고 있는 나는 기가 막혔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이놈은 어디를 가더라도 굶어죽지는 않겠다고.
나는 아이들을 키우면서 내 아이가 공부를 아주 잘해주기를 바랐다. 모든 부모가 그러하듯이. 하지만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자 나는 내 자신과 타협을 했다. 아이가 공부 잘하는 아이가 안 되면 바른 생각을 하는 아이로 키우자고.
공부도 잘하지 못하는데 마음마저 바르지 못하면 아이는 할 수 있는 일이 세상에는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이들이 바른 생각을 할 수 있도록 우선 내 몸가짐부터 바르게 해야 했다. 아이들 앞에서 내가 먼저 본을 보여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집 안에서나 집 밖에서나, 아이들이 있는 곳에서나 없는 곳에서나 언제나 바른 모습을 하려고 늘 노력해 왔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아이들 앞에서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 앞에서 아이들이 거짓말을 하는 것 또한 용납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두 아이를 생각해 보니 아이들을 훌륭하게 키우지는 못했지만 바르게는 키운 것 같다. 어디를 가든 ‘버릇없는 놈’이나 ‘나쁜 놈’이란 말은 듣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나는 그러면 됐다고 생각한다. 자식을 키우면서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언젠가 부모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나간 적이 있었다.
강의가 모두 끝난 뒤에 그 모임을 주최한 어머니들과 티타임을 가졌는데 그 중에서 사고로 어린 자식을 잃은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 어머니는 죽은 아들을 땅에 묻은 지가 벌써 1년이 넘었다고 했다.
그런데도 지금도 아들이 아파트 문을 열고 “학교 다녀왔습니다.”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집안으로 들어올 것 같다고 했다. 그런 생각이 드는 날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눈물을 쏟는다고 했다.
그 어머니는 아들이 공부를 못해도 좋고 말썽을 피워도 좋으니 다른 아이들처럼 “학교 다녀왔습니다.”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집으로 들어올 수 있다면 지금이라도 소원이 없겠다고 했다. 그 말을 하고 그 어머니는 한바탕 눈물을 쏟았다.
아이가 날마다 집으로 돌아오는 평범한 일상이 그 어머니에게는 사무치게 그리운 일상인 것이다. 그러고 보면 평범하지만 씩씩하게 자라나는 우리 아이가 부모에게는 신의 선물이고 축복이고 은혜이고 보배인 것이다.
아들을 면회하고 돌아오는데 아들은 우리에게 “특공!”하면서 거수경례를 했다. 듬직한 대한의 건아였다. 나는 아들을 불러서 내 지갑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는 내 지갑에 있는 돈을 몽땅 아들 손에 쥐어주었다.
비록 얼마 되지 않은 금액이었지만 아들은 또 함박 웃음을 지었다. 아내는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콧노래를 불렀다. 이렇게 소소한 것이 가족의 진정한 행복이 아닐까 싶다.
대원(大原)
박완규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