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목사 로마서·마태복음강해설교

[스크랩] (제11강) 유대인들의 반발! (롬 3:1-8)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7. 31. 06:45

《제11강》       유대인들의 반발! (롬 3:1-8)

 

  로마서에서 기록된 내용 가운데 오늘 본문은 가장 어려운 내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에게 복음을 변증해 나갈 때, 때로는 대단히 철학적이고 때로는 깊은 논리를 가지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경 말씀 중에는 더러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있고, 본문처럼 까다롭고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도 있습니다. 음식으로 말하면 씹지 않고도 술술 잘 넘어가는 음식이 있는가 하면, 좀 질긴, 그래서 꼭꼭 씹어야만 하는 음식도 있습니다.
  음식 맛으로는 씹으면 씹을수록 맛이 나는 것이 더 진미가 됩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도 마찬가지고 좀 난해한 말씀은 다시 읽고 또 묵상하고 명상하는 중에 깊은 뜻을 깨우치는 것이 있습니다. 이때에 맛이란 쉽게 이해한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깊은 맛이 있습니다.
  성경은 머리로만 공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실 속에서 체험해 가면서 얻어지는 진리가 더 많습니다. "아! 이것이로구나!" /할/  어떤 사람들은 형통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손뼉을 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실패를 통해서, 질병을 통해서, 배신을 통해서, 억울함을 당하면서 다시 성경으로 돌아갑니다. "아!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었는데 바로 그것이었구나!" 비로써 깨닫게 됩니다.
  ▶사람들은 자랑하기를 좋아합니다. 사실 자랑한다는 것은 인간의 본성 가운데 하나가 아닙니까? 고대 헬라인들은 그들의 철학을 자랑했고, 로마 사람들은 그들의 권세와 질서를 자랑했고, 유대 사람들은 그들의 혈통, 즉 아브라함의 자손된 것과 율법을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노라!"
  사실 바울은 육체적으로도 자랑할 것이 너무도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를 알게 되고 십자가를 깨달은 후에는 이런 모든 육신에 관한 것을 한낱 분토로 여겼습니다.
  바울이 처음 이 말씀을 전했던 그 시대 사람들이 알던 십자가는 죄수 중에서도 가장 흉악한 죄수, 그것도 노예 중에서 죄를 지을 때, 십자가 형벌을 집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낌이 되었고,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왜 이 십자가가 사도 바울에게는 유일한 자랑거리가 되었을까요?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바울은 로마서를, 모든 서신 서를 기록하게 된 것입니다.

  ▶2장에서는 유대인들의 위선에 대해서 비난을 했습니다. 즉 유대인들이 내세우는 선민의식과 율법의 자랑, 그리고 할례의식으로서 이방인들과 차별의식을 갖고 있는 민족인데, 행하지도 않고 지키지도 않는 그들이 이방인들 보다 무엇이 월등하고 우월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구슬도 꿰어야 보배라고 했고, 부뚜막에 소금도 넣어야 짜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좋은 법을, 좋은 전통을 물려받았다 할지라도 그 법을 지키지 않으면 결코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할례는 마음속에 해서 행하는 자가 이면적 유대인이요 참 유대인'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표면적 유대인은 참 유대인이 아니고 이면적인 유대인이 참 유대인이라고 했습니다. 할례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체의 할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피부의 가죽을 베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마음의 가죽을 베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참 유대인이 되는 길이 어디에 있다고 했습니까?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하다고 했고, 영에 속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또 참 유대인이 되기 위해서 이것은 사람에게서 나는 것이 아니고, 다만 하나님께로 말미암는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적인 자기의 의를 내세우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 앞에서 참 유대인이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복음에 나타난 의, 하나님의 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게 되는 의를 가진 사람만이 참 유대인이 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족하고 연약합니다. 할례 의식도 행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든든히 붙드는 우리가 바로 하나님 앞에서 참 유대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이와 같은 가르침은 그 당시 표면적인 유대인들을 몹시도 언짢게 만들었습니다. 저들의 감정이 대단히 상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어디를 가든지 그곳에 있는 유대인들에게서 많은 공격을 받았고 핍박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유대인의 반발(문)등을 대화체로 이어가고 있습니다. ◀제목소개!▶

 

  ▶1절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본문에서 바울은 질문 형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앞 2장에서 사도 바울의 지적을 받은 유대인들의 마음속에 분이 일어났습니다.
  바울 자신도 유대인이면서 유대인이 별거 아니라고 하니, 그렇다면 유대인이 나음이 무엇이며, 태어나서 8일 만에 할례를 받는 것이 무엇이 유익한 것인가? 차라리 할례나, 유아 세례는 안 받은 것이 낫지 않겠는가?
  여기 '그런즉'이란 접속사는 앞장과 연결 고리입니다. 그런즉 이란 '할례를 받은 자가 무 할례자보다 못하고 오히려 할례가 축복의 조건이 되기는커녕 심판의 조건이 된다면 이란 뜻'입니다.
  사실 그동안 유대인들은 할례가 하나님의 선민임을 나타내는 유일한 징표로 알았고, 또 그것에 대한 무한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바울의 책망을 듣고 분이 일어난 것입니다.
  1절의 질문은 당시 유대인들이 선민이라고 우월감을 가지고 교만했는데, '그런 전통적인 것이, 그러니까 형식적인 할례가 너희 구원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그런 물음입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반문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우리 유대인들이 도대체 이방인보다도 나은 것이 뭐가 있냐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할례를 받아야 하느냐?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이러한 것들을 따지는 것입니다.
  요즘 말로 한다면 당신이 예수 믿고 세례 교인이 되었다고 해서 나은 점이 무엇인가? 라는 뜻입니다. 여기에 대해 바울은 2절에서 유대인들의 반문에 대답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2절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여기서 '범사에 많다'는 말은 한마디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구원의 은총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애굽에서 노예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세를 통해서 10가지 재앙을 내리시고, 강퍅한 바로 왕을 굴복시키고, 그들을 해방시켰습니다. ▶그뿐 아니라 바로 군대가 뒤쫓아오고 앞에는 홍해 바다가 가로 놓여 있을 때, 하나님은 홍해를 갈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너게 해주시고, 애굽의 군대는 수장시켜 버렸습니다.
  광야 40년 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불기둥, 구름기둥으로 지켜주셨고, 물이 없어서 고통 당할 때, 바위를 쳐서 생수를 내게 하셨고, 한 낮 폭염은 구름기둥으로 덮어주셨고, 한 밤 추위는 불기둥으로 보호해 주셨으며, 40년 간 하나님은 아침마다 만나를 내려주셨고, 이스라엘이 고기가 먹고 싶다고 할 때, 메추라기를 주시어 신물나게 먹게 하셨으며, 가나안을 향해 진군하다가 아말렉의 공격을 받았을 때,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손을 들고 기도하게 하시고, 여호수아 장군을 통해서 아말렉을 잔멸시켰으며 하나님은 모세와 여호수아를 세대교체 시키시어 가나안 땅을 가는데 철옹성 여리고가 가로막고 있을 때,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너뜨렸으며 아브라함에게 약속했던 가나안 땅을 보여주시면서 원주민 일곱 부족을 다 멸하셨으며 약속의 땅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에게도 뒤돌아보면 이스라엘을 보호했듯이 우리들도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성경 역사는 그 당시 그 시대에 끝나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때 그 상황의 그 능력이 지금도 상황 속에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아멘!/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도 영원히 동일하시느니라" /할/
  지금도 우리에게는 영적 방해꾼이, 축복의 방해꾼이 있습니다. 여리고가 홍해가 막혀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면 홍해가 갈라지고, 여리고 성은 무너집니다.
  하나님은 '범사에' 많은 기적과 이적을 행하시면서 이스라엘을 구원했습니다.
  신4:33-35을 보면 지도자 모세가 지도권을 이양하기에 앞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가르치고 있습니다. "어떤 국민이 불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너처럼 듣고 생존하였었느냐? 어떤 신이 와서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편 팔로 크게 두려운 일도 한 민족을 다른 민족에게서 인도하여낸 일이 있느냐? 이는 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 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행하신 일이다. 이것을 내게 나타내심을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오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네게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여기 첫째는 차례로 말하는 첫째가 아닙니다. 무엇보다 먼저, 우선이라는 뜻입니다.
  2절은 '1절에서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냐?'의 질문에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란 구약 성경이요, 계시, 언약, 율법, 제사제도가 있는데 그 하나님의 말씀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이 땅에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다는 예언입니다.
  바울이 지금 논쟁하고 있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으로, 그 언약대로 오신 메시야 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은혜 가운데 가장 크신 은혜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그 말씀을 제일 먼저 받았다고 하는 사실이 복중에 복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씀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그렇게 오리라고 예언해 놓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곧 유대 땅,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성경의 예언대로 오셨건만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믿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말씀을 주신 메시야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배척을 했고 원수 노릇을 자행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민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동족인 유대인들의 구원 문제를 놓고 심각한 고민에 빠졌습니다. 오신 예수를 믿지 않고 착각 속에 할례의식이니 선민이니 하는 우월감에 빠져 있는 동족을 보고 고민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맡은 사람은 그 말씀대로 믿고 지켜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 말씀을 지킬 뿐 아니라 만민들에게 나누어주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여기 "맡았음이니라"는 농장의 모판과 비유되는 말입니다.
  모판에서 모를 길러서 모든 논에 이양을 합니다. 농사꾼이 처음에는 모판에만 종자를 심어 거름을 주고 정성껏 기릅니다. 그러다가 때가 되면 모판의 모를 뽑아 논에 옮겨 심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말씀을 맡겼다는 것은 모판으로 심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양하라는 의무를 부여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들의 의무와 책임을 회피한 채 이방인들과 구별되어진 무엇인가 나음이 있다고 자부하는 자들입니다.
  의무를 다하지 아니하면 개인도, 단체도, 국가도 망합니다. 세금을 내야 국가 살림을 합니다. 고치고 건설할 수도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나와서 국가를 지켜야 국민들이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문맹의 눈을 떠야 합니다. 즉 배워야 앞으로의 발전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국가에는 국민이 해야 할 의무가 있고, 가정이나, 직장이나, 단체에도 해야 할 의무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의무를 제쳐놓고 이익과 권리만을 주장한다면 한 길, 천 길이 무너져 내리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세리와 죄인들을 멸시했으며 그들의 율법 그 자체가 구원인 것으로 착각했으며 이방인들보다 무엇인가 나음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시장 어귀에서 손을 들고 기도하며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행위를 반복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본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의 위선에 대하여 그들의 행위가 곧 불의요, 거짓이며, 불신과 교만을 들어낸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만일 바리새인이 옳다면 하나님을 불의한 자로 만들겠느냐?" "하나님이 죄인을 구속하기 위하여 예수를 보내주심이 거짓된 것이냐?"고 맹렬하게 꾸짖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사람은 거짓되나 하나님은 진실하시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의를 가르쳐 줍니다.
  여러분!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가 누구입니까? 롬9:8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약속의 말씀을 받은 유대인들이 그 종교적 우월감과 민족적 교만에 빠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왔으나 그를 배역함으로 오늘날 그 메시야 예수를 받아들인 교회가 바로 신령한 이스라엘이 되는 것입니다.
  요1:9-11절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12절에 보면, 그를 영접하는 자가 있었으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13절에서는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자들이니라"
  우리가 신령한 참 이스라엘이요 저 천국을 유업으로 물려받은 자들입니다. /믿/
  ▶우리는 여기서 우리가 "교회에 다니는 것이 안 다니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무엇이냐? 교회 직분자의 유익이 무엇이냐?" 묻고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바울처럼 "범사에 많으니" 범사에 많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첫째는 너의 신앙에 유익이 되느니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고등학교에 가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대학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사실입니다. 고학을 하면 됩니다. 검정고시를 치르면 대학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학생은 역시 고등학교에 다니는 것이 훨씬 더 유리합니다. 선생님 밑에서 배우기도 하고, 가르침도 받고, 또 정해진 규율 속에서 엄격하게 공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이 교회에 나오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일년 내내 집에서 성경 읽고 기도 드리겠다는 마음으로 교회에 한번도 안 나와 보세요. 백이면 백 신앙이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래도 교회에 나와서 말씀을 들으면 집에 있을 때는 성경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에 나오면 신앙의 선배들이 많이 있습니다. 신앙의 선배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신앙생활은 이렇게 하는 것이구나' 하고 도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직분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신도일 때는 담배를 피울 수가 있습니다. 또 술집에 드나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집사가 되면 "그래도 내가 집사인데 어떻게 담배를 피울 수가 있나? 어떻게 술집에 갈 수가 있나?"고 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스스로 조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신앙에 유익이 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문제가 무엇인가? 자기에게 주어진 권리를 주장하면서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입니다.

 

  ▶3절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뇨"
  1절에서 묻고, 2절에서 대답하고, 3절에서 묻고, 4절에서 대답하는 대화체로 말씀을 풀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언뜻 읽어서는 무슨 내용인지 이해가 잘 안됩니다.
  즉 유대인들이 누리고 있는 특권 가운데서 가장 큰 특권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 속에서 유대인들에게 많은 약속을 해주셨습니다. 그 가운데서 가장 핵심적인 약속이 메시야를 보내주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약속대로 유대인들에게 메시야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정작 메시야가 왔을 때 메시야를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오히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유대인들이 믿지 아니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울의 이와 같은 가르침에 지금 유대인들이 반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지금 바울에게 하고 있는 반발은 '유대인 가운데 많은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믿지 않았기 때문에 다 버림을 받는다고 했는데, 너의 말대로 믿지 아니했다는 그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우리가 버림을 받게 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유대인들에게 약속해주신 그 많은 것들이 다 어떻게 되겠느냐?'고 반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해 주실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는 그 약속을 다 폐기해 버리느냐? 그렇다면 하나님은 미쁘신 하나님이 아니라 변덕스러운 하나님이 되는 것이 아니냐? 왜 너는 하나님을 그와 같이 변덕스러운 분으로 만드느냐?" 지금 유대인들이 사도 바울에게 따지고 드는 것입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유대인들이 믿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미쁘심, 즉 성실하심과 거짓 없으심'이 폐하고 말겠느냐? 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인생들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지 못합니다. 하와는 선악과를 먹으면 '정령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뱀의 유혹을 더 믿고 선악과를 먹음으로 스스로 타락과 파멸의 길을 걷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것은 한마디로 말씀하신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하는 성림의 성도들이여! 우리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고 따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할/

 

  ▶4절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찌어다 기록된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
  3절 물음에 '그럴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미쁘심은 결코 폐하여지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거짓되다 할지라도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은 참되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하반부에서 구약에 있는 시51편의 다윗의 시를 인용해서 이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해줍니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
  왜 하나님께서 신실하시고, 왜 하나님께서 미쁘시냐? 왜 하나님께서 말씀대로 이루시느냐? 왜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반드시 지키시느냐? 그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의롭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주께서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해서 이 세상 어느 누구도 감히 왈가왈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의를 제기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거짓되다 할지라도 하나님만큼은 참되십니다. 신실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잊지 말고 꼭 붙들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은 거짓되되 하나님은 참 되시다" 인간의 약속은 조석변개 같습니다. 자신의 이익과 안전을 위해서는 맹세도, 약속도 헌신짝 버리듯 버리는 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또한 인간은 속고 속이며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죄 아래 있는 인생은 다 거짓된 자"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의 모습 속에서 '율법을 외우는 일, 선전 입구에서, 거리에서 기도하는 일, 경건한 외모' 이 모든 행동은 종교나 신앙의 전부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하나의 의식과 형식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한 행동이 자신을 스스로 의롭게 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는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의로운 길로 인도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믿/
  3절의 물음에 더 큰 의미의 대답은 '유대인들이 나은 점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것인데, 그 말씀이 성취되어 예수가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너희들이 믿지 않는다고 예수께서 구주 되심이 취소될 수 있겠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고 선언하면서 바울은 이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구약 시51:4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다윗이 간음하고 난 후 선지자 나단에게 죄를 지적 당하고 크게 회개하고 통회하면서 지은 시인데, 그는 회개할 때, 하나님이 얼마나 의로우신 분이신 것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의 죄가 크면 클수록 하나님의 의가 얼마나 크고 태산 같은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실 범죄자 다윗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용서하시고 약속대로 유대인들에게 최고의 선물인 예수를 보내주셨는데, 그들은 끝까지 믿지 않고 대적했으며 이 어찌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있단 말인가? 입이 있거든 말해 보라는 것입니다.
  주께서 하신 모든 말씀이 의롭다 함을 얻으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감히 판단과 참소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누가 감히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되었다, 거짓이다, 가장이다'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로 판단의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머리로써 깨닫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비판한다면 하나님의 본체를 대적하는 엄청난 죄를 짓게 됩니다. ▶잠1:7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 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5절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나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 하시냐"
  본문에 대해서 배경 설명이 필요합니다. 유대인들은 계속해서 메시야를 고대하고 있었고, 하나님은 약속대로 메시야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러나 정작 메시야가 왔을 때 저들은 메시야를 영접하지 않았고, 도리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와 같은 일이 가능할 수가 있단 말인가? 바울이 울분하고 있습니다.
  뒤에 바울은 롬9-11장에서 여기에 대해서 우리들에게 집중적으로 설명을 해주고 있습니다. ▶간략하게 말씀을 드리면 유대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비로소 전도의 문이 이방인에게 활짝 열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비로소 나아가서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역사적으로도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뒤에 일백 이십 명의 성도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아니하고 저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면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오순절이 되었습니다. 놀라운 성령의 체험이 저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흩어져서 복음을 전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은 다시 오실 주님만 바라보면서 흩어지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자기들끼리만 한 자리에 모여 있었습니다.
  이 때 성령께서 저들을 억지로 흩어버렸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큰 핍박이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순교하는 일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비로소 예루살렘의 성도들이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유대로 사마리아로 갔습니다. 다메섹으로, 안디옥으로 흩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흩어진 성도들이 비로소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이방인의 수가 충만하게 차게 되면 나중에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을 긍휼히 여기신 것처럼 다시금 유대인들을 긍휼히 여기셔서 유대인들을 거국적으로 다 구원해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세요. 만일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다 믿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아마 모르긴 해도 복음은 예루살렘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믿지 아니했기 때문에 그 복음의 물결이 이방인들에게 흘러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 같은 설명을 할 때 유대인들이 반문한 것이 본문 5절입니다. '우리가 믿지 아니해서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구원 계획, 이방인들이 구원받는 그 일이 이루어졌다면 무슨 말할 것이 있겠느냐? 우리가 벌받아야 하느냐? 오히려 우리가 상을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장본인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가룟 유다가 우리들에게 이와 같은 주장을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차피 죽어야 할 몸이 아니냐? 그래야 너희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지 않느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장본인이 누구냐? 내가 아니냐? 내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에 너희들이 구원의 길에 이르게 된 것이 아니냐? 그러니 너희들은 나에게 상을 주어야 한다. 내게 감사의 뜻을 표해야 마땅할 것이다" 가룟 유다가 이렇게 주장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억지 논리입니다. 지금 유대인들이 그와 같은 논리를 펼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은 30에 파는 반역죄를 범함으로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게 되었고, 또 그 죽음이 곧 인류의 구속을 이루는 것이 되었으니 이런 의미에서 가롯 유다는 반역자, 배신자라고 말 할 것이 아니라 공로자로써 상급을 주어야 할 게 아니냐는 비뚤어진 질문입니다.

 

  ▶6절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하나님은 결코 불 의하신 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의로운 재판장이십니다. 만일 하나님이 불의하시다면 세상을 심판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의로운 재판을 원하십니다. 사30:18절 "대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이라" 
  ▶신약 성경에 '결코 그럴 수 없다'는 말이 15번이나 나오는데, 그중 14번은 바울이 사용한 말입니다. 바울은 많은 환난을 겪으면서 한평생 하루에도 이 말씀을 고백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자신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데 '하나님에 대해서 의심이 일어날 때, 결코 그럴 수 없다고 소리쳐 의심을 버립니다. 또 마귀가 와서 믿음을 흔들어 놓을 때에도 결코 그럴 수 없다'고 외쳤습니다.
  6절의 결론은 '하나님께서 불의를 조작해서 당신의 의를 드러내고, 진실된 의가 결핍된 하나님이라면 어떻게 이 세상을 공정하게 심판 할 심판주가 될 수 있겠느냐?'는 바울의 반문식 대답입니다.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으면 어찌 나도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여기서 '나'라는 것은 사도 바울이 자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유대인의 주장을 인용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에 유대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를 보면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애굽의 종으로 팔아먹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요셉이 애굽에 내려가서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습니까? 종살이를 했습니다.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서 지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셨습니다. 요셉이 모든 어려움을 다 극복을 하고 나중에는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보고서 요셉의 형들이 요셉에게 이와 같은 주장을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요셉아, 네가 애굽의 총리대신이 된 것은 우리 덕분이다. 우리가 너를 애굽에 팔지 아니했다면 네가 어떻게 총리대신이 될 수가 있었겠느냐? 네가 총리대신이 된 것은 다 우리가 너를 애굽에 팔았기 때문인 줄 알아라. 그러니 너는 우리에게 감사해야 한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의 죄악까지라도 바꾸어서 구원 계획을 이루어나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여러분, 잊지 말고 명심해야 할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은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것이지, 내가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나의 잘못에 대해서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를 팔아먹은 죄 값을 반은 것처럼, 또 요셉의 형들도 자기 동생을 종으로 팔아먹은 죄 값을 반드시 치러야 합니다.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이 말씀을 쉽게 예를 들면, '쌀독에 쌀이 없었는데 내가 기도하고 났더니 쌀독이 가득 찼다는 말과, 우리 애가 병원에서 다 죽었다고 사형선고를 받았는데 제가 기도했더니 다 낳았다고 말하는 것과,  내가 산을 놓고 옮겨 달라고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감쪽같이 옮겨주셨다'고 주장하는 말들은 하나님을 마술쟁이로 만드시는 것으로, 이런 거짓말도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8절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저희가 정죄 받는 것이 옳으니라"
  완전히 괴변입니다. 선을 이루기 위해서 악을 조장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 가운데는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8절 괄호 속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바울을 중상하고 모략했습니다.
  "바울은 선을 이루기 위해서 악을 조장하는 사람이다"라고 비방을 하고 다닌다는 것입니다. 물론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몹시 강조했고, 인간의 의를 내세우는 것을 부인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유대인들 사이에서 바울이 하나님의 율법도 폐하고, 선행도 부정하고, 도덕도 부인한다는 잘못된 오해를 사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바울의 마지막 결론은 8절 끝 에 "저희가 정죄 받는 것이 옳으니라"고 했습니다.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려 들지 아니하고 끝까지 고집을 피우면서 죄를 정당화시키는 유대인들은 진노의 날,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러한 모습이 없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를 자백하지 않고, 자기가 죄인임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자기의 잘못을 정당화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정죄 받아 마땅한 사람이 되어 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에는 양면이 있습니다. 곧 사랑의 면과 의의 면이 있고, 하나님의 약속하신 축복과 저주가 있습니다. 복음에는 구원과 심판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죄의 결과를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죄의 성격을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과 행위의 동기를 보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외모를 보시지 않고 인간의 중심을 보십니다.
  어떤 사람은 목적이 선하면 그 수단이 악해도 좋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닙니다. 선한 목적을 위해서는 그 수단도 선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한다는 목적이면 그 목적을 위해서는 하나님이 정하신 방법에 따라 행해야 합니다.
  바울은 8절에서 "인간의 죄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선을 이루기 위해 우리는 자꾸만 악을 행해야 한다"는 궤변을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바울은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정죄를 받아 마땅하다는 말입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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