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목사 로마서·마태복음강해설교

[스크랩] (제21강) 의의 종이 되라! (롬 6:12-14)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7. 31. 06:50

《제21강》      의의 종이 되라! (롬 6:12-14)

 

  썬다싱이 아프리카 오지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하루는 수백 명의 원주민들이 낫을 들고 도끼를 휘두르며 '이방 귀신, 예수 귀신'을 쫓는다고 썬다싱에게 몰려오고 있었습니다. 그 광경을 바라본 썬다싱은 "이제 난 죽었구나" 생각하고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자신의 영혼을 부탁하는 기도를 드리고 있는데 수백 명이 오다가 갑자기 기절초풍을 하면서 사방으로 도망가 버리는 것이 아닌가?
  썬다싱은 영문을 몰랐는데 그 이튿날 족장 한 사람이 대표로 와서 절을 하고는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빌면서 묻기를 "어젯밤에 당신을 둘러쌓고 있는 군대는 다 어디로 갔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천군 천사가 썬다싱을 보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할/

  오늘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지난 시간에 배운 8∼11절을 다시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믿는다," "안다," "여긴다"는 동사들은 무엇을 뜻하는 동사들입니까? 교리적이고 신학적이고 이론적인 의미를 나타내는 단어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하지 말아라," "드리지 말아라," "드려라."는 명령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한마디로 우리의 결단과 행동과 실천을 촉구하는 명령입니다.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강조하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너희가 교리적으로 깨달아 알았으면 그것을 삶 속에서 실천하라는 행함의 믿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할/  ◀제목소개!▶

 

  본문은 '그러므로'라는 말로부터 시작합니다. 이 접속사는 굉장히 귀한 것입니다. 앞장과 오늘 본문을 연결해주는 코드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1-11절까지의 말씀을 상고했었습니다. 그 내용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이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의 속박에서 해방되었습니다. 또 주님이 부활하심으로 우리는 새로운 신분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죄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의의 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교리입니다. 신앙의 이론적인 체계입니다. 우리가 신앙의 교리를 배우는 것은 실천이라는 집을 세우기 위하여 터를 닦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12절의 '그러므로'는 이제 터가 닦였으니 말씀을 실천하는 집을 세워야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문제 즉 순종하고 안 하고는 인간의 자유의사에 달려있습니다. 우리가 실천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자유의지가 있기에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서는 책임을 져야합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에게 책임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왜 책임을 묻는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순종할 수 있는 모든 죄가 용서받은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금요일 날 아침에 제사장과 헤롯왕과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은 후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골고다언덕에 올라 12시에 못 박히시고 오후 3시에 운명하셨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지신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죄와 죽음의 권세를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셨기에 기독교는 위대한 것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셨기에 즉, 죽음에서 일어나셨기에 산 종교가 되는 것입니다. 어느 것을 보아도 인간 편에서 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드리면 됩니다.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신 분은 하나님이시요, 우리로 하여금 죄의 지배를 받지 않도록 새로운 자리에 옮겨 놓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죄가 왕 노릇 못하도록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으로 세워주신 분도 하나님이시요, 하나님이 다 준비하시고 마련해 놓으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우리가 순종할 수 있도록 모든 준비를 다 해 놓으셨기 때문에 우리를 향해 "하라!,하지 말라!"고 명령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12-13절에 보시면 '하지 말라'는 명령과 '하라'는 명령이 나란히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운 만큼 실천에 옮기도록 노력하라는 교훈입니다.
  실천은 항상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병행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라고 명령하시는 일은 우리는 해야 하며, 하지 말라고 명령하시는 일은 우리는 하지 말아야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 마음에 청개구리 심보가 있는지 반대로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보시고 슬퍼하십니다.
  어린아이를 키워보신 분은 잘 아실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아이가 태어난 지 1년 내지 1년 반 정도가 되면 걷기 시작한답니다. 아이가 걷기까지 어머니의 정성과 헌신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을 아끼지 않고 아이에게 다 줍니다. 어머니는 주면서 기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시면서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때가 되면 어머니는 아이에게 걸음마를 시킵니다. "일어나! 걸어라! 어서!" 큰 기대를 가지고 시킵니다.
  이때 아이가 일어나든 안 일어나든 그것은 아이의 자유입니다. 그렇지만 못 일어나면 아이에게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왜? 엄마는 아이에게 모든 필요한 것을 제공했기 때문입니다. 아이는 넘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엄마가 보는 앞에서 걸어야 합니다. 이것이 자기를 위해 수고하신 엄마에 대한 도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다 준비해 놓으신 것은 우리가 믿고 실천만 하면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그러니까 순종하는 것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그러므로'의 의미입니다. 참으로 중요한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이 '그러므로'의 은혜가 항상 넘칠 수 있도록 축원합니다. /할/

 

  ▶12절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죽은 몸' 아담의 범죄로 인해 죽음의 권세에 굴복하게 된 몸을 의미합니다. '왕 노릇하지 못하게' 계속하여 죄에 지배하지 못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죄가 우리 몸을 지배하도록 내버려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죄와 싸우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먼저 전제할 것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나를 주장하고, 왕 노릇 하는 '나'가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무엇인가를 섬기고 있고, 끌리고 있고, 다스림을 받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마음을 우리의 마음대로 우리가 다스릴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못합니다. 우리의 기분까지는 우리의 마음대로 다스리지 못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문은 어떤 힘이 우리를 주관하여 왕 노릇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든지 사탄의 영의 지배를 받든지 둘 중 하나에게 지배를 받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사탄이냐? 하나님이냐? 죄냐? 율법이냐? 어째든 무엇인가에 끌려가고 있습니다.
  이 지구에는 많은 별들이 있습니다. 별들이 마음대로 회전하는 것 같아도 다 궤도가 있습니다. 인력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거미줄 같은 힘에 의해 어디로 끌려가고 있습니다. 이제 믿음으로 사는 우리는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다시는 죄가 내 왕이나, 주인이 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이제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전에는 죄가 내 주인이었고, 마귀의 지배를 받았지만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주인이 바뀌었으므로 다시는 죄를 행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죄가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은 것이지 죄가 우리에게 대하여 죽은 것이 아닙니다. 죄는 여전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 힘은 아직도 막강하여 이 세상을 끔직한 악의 소굴로 만들고 있습니다. 죄는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죄가 우리의 몸에 아직도 자리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또 '죽은 몸'은 언젠가는 죽어서 흙으로 돌아갈 육체를 가리킵니다. 우리의 몸, 즉 바디는 13절에서는 '지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몸은 자꾸 거듭납니까? 한마디로 우리가 거듭난 것은 우리의 영혼이지 몸이 아닙니다. 거듭난 내 속 사람이 죄의 지배로부터 자유 했지만 내 몸은 그렇지 못합니다. 우리 몸이 살아있는 한 죄가 몸 안에서 활동할 수 있습니다. 이 연약성은 우리 모두가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 속에는 죄에 쉽게 넘어질 수 있는 부패성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몸이 살아있는 한 죄가 우리 몸에 자주 들어와 활동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몸에는 본능이 있습니다. 원죄로 말미암아 죄의 부패성이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것입니다. 죄로부터 유혹을 받아들이면 악한 정욕으로 변합니다. 이것을 본문에서는 '몸의 사욕'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고 중생을 받은 자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사욕에 이리 저리 끌려 다닐 수 있습니다. 속 사람이 중생을 받는 것이지 몸이 새것으로 바뀐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몸과 본능은 옛날 그대로 놓여있습니다. 이것을 마귀가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다시 죄의 종이 되지 않고 의의 종이 될 수 있습니까?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본문에서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서 소극적인 면과 적극적인 면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우리의 몸은 죽을 몸이지만, 잠시 잠깐 뒤에는 썩어질 육신 덩어리이지만 죄가 우리의 몸을 지배하도록 내버려두지 말라는 것이요, 죄에게 틈타지 못하도록 하라는 당부입니다.
 
  ▶즉 다시 죄에 매이지 않으려면 소극적인 면으로는,
  ①형벌의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죄 때문에 벌을 받는다고 생각하면 언제나 마귀는 그 점을 이용합니다. 형벌의식에서 벗어나야만 죄를 이길 수 있습니다. 마귀는 속삭입니다. "너는 죄인이다. 죄인이기에 벌을 받아야 한다." 그때마다 "아니다. 예수께서 내 대신 벌써 벌을 받으셨다. 전에는 죄인이었지만 지금은 용서받은 의인이 되었다."고 당당하게 외치시기 바랍니다.
  ②죄의 권세를 부인하라!
  다시 말하면 죄를 무서워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은 어두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빛이 들어오면 어두움은 물러갑니다. 분명히 어두움이 있지만 그 어두움 자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빛이 없는 곳에 어두움이 몰려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어두움은 죄요, 마귀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저와 여러분은 죄와 사탄의 권세를 무서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 예수님이 뱀의 머리를 치셨습니다. 사탄의 권세를 꺾으셨습니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느니라." /아멘!/
  ③죄에게 기회를 주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요셉을 잘 압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받았을 때 "내가 어찌 하나님 앞에서 득죄 하겠나이까?" 겉옷을 벗어 던지고 도망쳐 나왔습니다. 사람은 환경의 지배를 받습니다. 죄의 유혹의 장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아예 접근을 피하십시오.
  ④교만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죄는 어디서부터 시작합니까? 크든 작든 교만에서부터 싹을 내어 자라게 합니다. 혹시 여러분이 누구를 미워하고 있습니까? 교만 때문입니다. 혹 남의 마음을 상하게 했습니까? 역시 교만 때문입니다. 남을 무시한 적은 없습니까? 죄는 교만한 자에게 통합니다. 우리는 교만하지 않도록 특별히 노력해야 합니다.
  ⑤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신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잊지 마십시오. 죄를 이길 수 있는 비결입니다.
  ⑥하나님의 사랑(믿음)으로 가득 채워야 죄를 이길 수 있습니다.
  마음이 허해지면 이상한 것이 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할 때, 우리는 죄를 이기고 의의 종이 될 수 있습니다.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 하지 못하게 하라" 우리 속담에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고 했습니다. 이는 인간의 약한 성품이 얼마나 죄 짓기 쉬우며 또한 죄에 대해 쉽게 무감각해져 가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 속담일 수 있습니다.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여러 가지 더러운 욕망들이 이것저것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 몸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더러운 욕구들을 갈5;19-21절에서 열다섯 가지로 설명을 했습니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 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여기 '순종치 말고'에서 순종한다는 단어는 '귀를 기울이다. 주위를 기울이라'는 말입니다. 죄에 대하여 귀를 기울여서는 안 됩니다. 영적 싸움입니다.
  바울은 이 싸움에서 이기는 비결을 고전9:27절에서 "내가 내 몸을 쳐 복종시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제 죄의 종, 불의의 종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순종의 종, 의의 종, 하나님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아우구스티우스'는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은 참된 자유를 얻는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신학자 '트레이'는 말하기를 "하나님께 은혜 받기를 원한다면 절대 순종하라"고 말합니다.”
  요일3:22절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마이어는 기독교인의 생활원칙을 몇 가지로 말합니다.
  ①매일 내 자신을 하나님께 바칠 것을 소리내어 기도하라!
  ②모든 일을 기쁘게 하나님의 일에 쓸 그릇이 되기 위하여 수고하라!
  ③예수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이루어 주신 것을 확신하라!
  ④죄를 직고하라(회개)!
  ⑤모든 시험, 근심, 걱정을 주께 맡겨라!
  ⑥예수 그리스도와 계속 교제하라. 어떻게? 기도와 말씀으로!
  ⑦성령님이 내 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역사하신 것을 믿고 기도하라!
  12절에서 바울의 강조 점은 '죄를 짓지 말라'는 것입니다. 죄의 유혹을 단호하게 물리치라는 것입니다. 인도 속담에 "코끼리는 코만 들어오면 다다."는 말이 있습니다. 코끼리는 집에 조그만 틈이 있을 때 코를 내밀고 휘휘 저어봅니다. 그때 막아 버려야지 일단 코가 들어오면 그 큰 몸뚱이가 집을 부수고라도 들어오고 만다는 것입니다.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마음을 틈타고자 할 때 그때 아예 차단을 해버려야 합니다. 틈을 주면 안 됩니다.   ▶13절에서는 죄를 이기는 적극적인 방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3절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우리가 범죄하면 우리의 지체는 불의의 병기가 됩니다. /믿/ 본문의 '병기'는 군인의 손에 들려 있는 '무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바꾸면 '도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죄가 마음대로 사용하는 도구가 된다는 말입니다. '드린다'는 말은 '원하는 대로 하게 내버려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의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드린다는 말은 죄에게 우리 자신을 (마음대로 하십시오) 갖다 바치는 것과 같습니다.
  본문에서 보면 "죄에게 드리지 말고" 라는 말과 "하나님께 드리며" 둘 다 드린다는 말에서 똑 같습니다. 우리 몸을 죄에게 드리든지 하나님께 드리든지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몸을 죄 짓도록 내버려둔다면 마치 죄에게 우리 몸을 헌신하는 꼴이 됩니다. 죄는 우리의 몸을 가지고 불의의 병기로 쓰려고 합니다. 술 취하고, 음란하고, 방탕하고, 도둑질하고, 싸움질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파괴를 가져오는 무기로 사용합니다.
  ▶언젠가 신문에서 봤더니 승용차 운전을 난폭하게 하는 사람에게 "운전 똑바로 해" 충고하는 40대에게 20대 젊은 청년이 차에서 내려 "당신이 뭔데 큰소리야" 하며 흉기를 들고 살해했습니다. 죄는 자신의 잘못을 가리우고 사소한 일조차도 살인까지 하게 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라"는 말씀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물로 드릴 때, 그 드림을 뜻합니다. 순종입니다. 순종의 뜻은 말씀을 듣고 따른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순종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만 우리의 뜻을 정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지혜로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죄의 노예가 아닙니다. 우리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오히려 우리 몸을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술잔을 들던 그 손에 성경을 들고, 음란과 방탕으로 질주하던 그 발걸음을 성전으로, 구역 심방으로, 또한 세상 쾌락에 좇던 그 걸음이 하늘나라의 영광을 좇는 걸음이 되어야 합니다. /할/

  ▶13절 중간부분을 보겠습니다.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적극적인 명령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고후5:15절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주님이 죽으시고 다시 사신 것은 우리를 하나님께 헌신하는 자로 만들기 위해서 입니다.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라" 마귀는 우리를 꼬일 때, 참으로 묘한 작전을 씁니다. 목적을 바꾸라고 하지 않고 방법을 바꾸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공부하겠다고 결심한 자에게는 열심히 공부해라. 단 오늘은 쉬고 내일부터 하라. 전도하겠다고 결심한 자에게는 "그래 전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지, 그러나 그렇게 서두를 필요 있나, 오늘은 푹 쉬고 내일부터 하자." 기도도 내일부터, 신종 사탄의 큰 방법이 바로 내일로 미루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 가라 그러나 내일 가라. 우리는 이 작전에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이 말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또 반복적이고 계속적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번 드리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드리고, 또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죄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예컨대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전에 올라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물론 개중에는 눈감고 다른 생각하면서 속으로 죄 짓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와서 하나님께 우리 몸을 드리는 동안에는 마귀가 우리 몸을 더럽게 사용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시간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물질을 하나님을 위해서 써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들을 하나님을 위해 쓰는 것이 바로 죄에 대한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우리 몸을 하나님을 위해 자꾸 바치기를 힘쓰면 하나님께서 써 주십니다. 우리의 손을, 우리의 입을, 발을, 머리를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이 축복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명령형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바치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고전10;31절에서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왜? 시100;3절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 의의 병기로 드리십시다. 우리의 몸을 의의 병기로, 우리의 물질을 의의 병기로, 우리의 재능을 의의 병기로 드려보십시오. 하나님의 놀라운 복을 받으십니다.
  ▶옛날 미국 필라델피아에 존이라고 하는 열세 살 난 소년이 있었습니다. 우리말 이름으로는 '요한'입니다. 집안이 참 가난했습니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인근에 있는 벽돌 공장에서 열심히 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비록 집은 가난했지만 신앙심은 남달리 깊었습니다. 열심히 주일학교에 참석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부지런히 읽었습니다. 기도 생활도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요한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요한이 출석하고 있는 교회 앞에는 골목길이 있었습니다. 그 골목길은 포장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비만 오면 질퍽질퍽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믿음이 약한 성도들은 그것 때문에 비가 오면 교회에 오려고 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교회에는 어른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장로님들도 있었고, 권사님들도 있었습니다. 좋은 집에 사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좋은 마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른들은 하나같이 하나님의 교회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습니다. 대책을 세우려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요한의 마음은 아팠습니다.
  하루는 요한이 결심을 했습니다. "내가 교회의 골목길을 벽돌로 포장하겠다." 그 당시 요한이 벽돌 공장에서 받는 임금은 하루에 7센트였습니다. 그 중에서 식대를 떼고 최저의 잡비를 제하고 나면 벽돌 딱 한 장을 살 돈이 남습니다. 그 돈으로 요한은 매일 벽돌을 한 장 사들고 교회에 와서 골목길을 포장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골목길 포장이 끝나려면 적어도 2년이 걸립니다. 그러나 요한에게는 2년이라고 하는 세월은 조금도 길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한 주일이 지났습니다. 두 주일이 지났습니다. 한 달이 지났습니다. 교회의 어른들이 어린 요한의 헌신을 눈여겨보기 시작했습니다. 어른들은 자신들을 부끄럽게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드디어 어른들의 이기적인 마음이 깨어졌습니다. 이제는 어른들이 발벗고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가지 않아서 교회 앞의 골목길은 깨끗하고 아름답게 포장이 되었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낡았던 예배당 건물도 어느덧 깨끗하게 새롭게 단장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 요한을 축복해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엄청난 복을 내려주셨습니다. 하늘의 문을 활짝 열어주셨습니다. 요한은 자기가 받은 물질적인 복을 언제나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아낌없이 투자했습니다. 좀이 먹지 않는 곳에 투자했습니다. 동록이 슬지 않는 곳에 투자했습니다. 도적이 구멍을 뚫지 못하는 곳에 투자했습니다. 여러분,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아세요? 미국의 백화점 왕이라고 불리는 '요한 와나메이커'입니다. 요한 와나메이커는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을 가지고 전 세계에 수많은 YMCA 건물을 지어준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우리나라 종로2가 YMCA 건물도 이 요한 와나메이커가 돈을 내서 지어준 건물입니다.
  그는 일평생 동안 세 가지 생활신조를 붙들고 살았습니다. 모두가 'T'자로 시작합니다. 첫째로, 'Think,'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Try,'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해주셨으면 그것을 삶 속에서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셋째로, 'Trust in God!'입니다. 내가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도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으시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붙들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서 나아갈 때에 하나님께서 한없이 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14절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성도는 율법에서 정죄 받아 죽었습니다. 우리가 죽었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이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법에서 벗어났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법은 율법입니다. 우리는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 아래 있습니다. 하나님은 구약사대에는 '하지 말라'는 십계명을 주셨으며 신약시대에는 '내가 하겠나이다' 자원하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하여 우리는 자발적으로 내가 하겠나이다. 내가 드리겠나이다.
  파스칼은 "율법은 줄 수 없는 것을 요구하지만, 은혜는 요구하는 모든 것을 준다." 은혜는 우리에게 감격을 안겨줍니다. 은혜는 자원하는 심령을 일으킵니다. 은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생명까지도 내어놓게 만듭니다. 그래서 많은 순교자들이 생겨났습니다.
  은혜는 우리를 진정한 자유인으로 만듭니다. 어거스틴은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유 밖에 없다."라고 했습니다.
  "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죄가 우리를 주관치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12-13절의 말씀만 듣게 되면 마음속에 낙심이 됩니다. "나는 왜 그런지 모르겠어. 번번이 죄의 유혹에 빠져 버리고 말아. 하나님께서 내 몸을 의의 병기로 쓰라고 말씀하셨는데 왜 그런지 불의의 병기로 내 몸을 내맡길 때가 많아. 나는 구제불능이야." 이런 식으로 실망하게 됩니다.
  여기에 대해서 바울이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는 것은 '낙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때로는 넘어질 때도 있고, 때로는 실수할 때도 있지만 죄가 우리를 주관치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용기를 내라는 것입니다. 왜? 궁극적인 승리는 언제나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닙니다. 과거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는 죄의 종이 되어서 죄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는 삶을 살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죄 값을 다 지불해주셨습니다. 죄의 사슬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닙니다. 우리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습니다. 대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뒤따라가는 십자가의 군병이 되었습니다. 다시는 죄가 우리를 주관치 못합니다.
  그 이유를 바울이 본문에서 자세하게 설명해주었습니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그 다음을 보세요. 어디에 있다고 했습니까?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우리는 은혜 아래 있습니다. 법 아래 있지 않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은 아무리 선하고 착한 일을 많이 해도 결국 그는 죄인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 율법의 조항을 다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는 사람들입니다. 은혜 아래 있는 사람은 누구나 다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의인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 주시고 우리를 의롭게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너희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은 자유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은혜 안에 있고, 사랑 안에, 긍휼 안에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보장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하나님께서 통치하고 다스린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리고 통치하시면 모든 것에서 승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은 강하고 담대해집니다.  죄가 유혹해도 기꺼이 싸울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시골에는 집집마다 개를 많이 키웁니다. 우리 큰집에도 개를 키웁니다. 개 중에는 사나운 것도 있습니다. 제가 모처럼 내려가면 이를 악물고 덤벼듭니다. 개가 짖고 달려들 때, 겁을 먹고 도망하면 그놈은 기고만장해서 더 쫓아옵니다. 대적해야 합니다.

 

   ▶개를 이기는 삼 단계 전투 법을 소개하겠습니다.
  ①버티고 서서 노려보는 것입니다.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개는 멈칫하며 못 덤빕니다.
  ②개처럼 땅에 쪼그리고 앉아 같이 으르렁거리는 것입니다. 어디 한번 해보자는 식으로 대들면 아주 효과적입니다.
  ③개처럼 쪼그리고 앉아서 손에 막대기 하나를 쥐어주면 그 싸움은 끝납니다. 재미있는 것은 험상 굳게 생긴 놈일수록 쉽게 도망갑니다. 앙칼지게 짖어대는 놈일수록 더 쉽게 무너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면으로 맞서야합니다. 약4:7절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찌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개와 같이 엎드리라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엎드리는 것인데 그것은 기도를 의미합니다. 기도하면 능력이 생깁니다. 힘이 생깁니다. 기도하는 성도에게는 마귀는 꼼짝 못합니다. "기도 외에는 이러한 유가 나올 수 없느니라" 막대기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전신갑주와 철장권세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사는 기쁨을 누립니다. 늘 그 삶이 윤택합니다. 왜? 우리를 넘어뜨리는 사탄의 권세가 틈 못 타기 때문입니다. 어느 때 우리의 삶이 윤택합니까?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사는 사람들은 늘 화목의 주인공이 됩니다. 그뿐 아니라 겸손과 생명, 감사의 생활, 헌신의 생활, 충성의 생활을 이루어 나갑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하나님의 은혜 속에 거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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