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저녁 ‘서울에 관한 다섯 개의 이야기’라는 주제로 서울 종로구 세종로 교보빌딩 교보컨벤션홀에서 열린 노벨문학상 수상자 장마리 귀스타브 르클레지오와 소설가 황석영의 대담이 열리고 있다. 왼쪽부터 르클레지오, 황석영.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르클레지오 선생의 소설 <빛나-서울 하늘 아래>는 멀리서 색연필로 그린 것처럼 서정적인 이야기 구조를 지녔습니다. 선생이 제주를 무대로 쓴 소설 <폭풍우>도 대단히 감동적입니다. 제주가 아름다운 섬일 뿐만 아니라 4·3의 상처와 고통 역시 지닌 곳이라는 걸 말하되 대놓고 말하지 않고 에둘러서 얘기하는, 아주 서정적인 ‘공중전’을 보여주는 작품이에요.”(황석영)
“황석영의 소설에서는 아직 이상이 살아 있는 청년이 보입니다. 저는 <해질 무렵>의 여성 주인공 정우희가 사는, 곰팡이 핀 반지하 방을 묘사한 대목을 특히 좋아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임에도 그로부터 적당한 거리를 두고 유머를 가지고 묘사하는 점이 좋아요. 그처럼 어려운 상황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게 한국 문화의 힘이 아닐까 싶습니다.”(르클레지오)
프랑스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장마리 귀스타브 르클레지오(78)와 한국 소설가 황석영(75)이 12일 저녁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 23층 교보 컨벤션홀에서 공개 대담을 나눴다. 두 사람은 르클레지오가 서울을 무대로 써서 지난해 말 한국에서 첫 출간한 소설 <빛나-서울 하늘 아래>와 역시 서울을 배경 삼은 황석영의 소설 <해질 무렵>(2015)을 교차 독서한 뒤 서로의 작품과 서울이라는 공간에 관해, 최근 젊은 세대의 아픔과 미투로 대표되는 여성들의 고통과 싸움에 관해, 그리고 남북 및 북미 관계 등 한반도 주변 상황 등에 관해 폭넓게 의견을 주고받았다. 행사를 주최한 대산문화재단 상무인 곽효환 시인이 사회자로 대담을 진행했다.
르클레지오는 2001년 서울국제문학포럼 참가차 처음 방한한 이래 여러차례 한국을 찾았으며 2007~8년 사이 1년간은 이화여대 석좌교수를 지내기도 했다. 이날 대담에서 그는 “처음 보았을 때 서울은 너무도 웅장해서 도시가 아니라 하나의 국가 같은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서울은 나폴리와 런던, 파리 등 여러 도시의 조합 같은 느낌을 주어요. 서울의 하늘은 92퍼센트가 수증기로 이루어진 듯하고, 파리의 센강과는 비교도 할 수 없게 커다랗고 힘이 느껴지는 한강도 있어서 서울은 어쩐지 물의 느낌이 강합니다. 서울 시민들은 스트레스도 받고 힘도 들겠지만, 이런 하늘과 강 때문에 균형 잡히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르클레지오의 말을 받아서 황석영은 “나 역시 2005년과 2006년 2년간 프랑스 파리에 머물며 <바리데기>를 쓴 경험이 있다”며 “외국에서 소설을 쓰다 보면 일종의 거리감이 생겨서 한국에서보다 더 잘 써지는 느낌이 들었다”고 소개했다. “처음 만났을 때 르클레지오 형이 ‘서사가 많은 나라에서 태어난 당신이 부럽다’고 하길래 저는 ‘사회역사적 과제와 억압에 짓눌리지 않고 창작의 자유를 한껏 구가하는 당신이 오히려 부럽다’고 대꾸했습니다. 작가가 마음대로, 쓰고 싶은 걸 쓴다는 건 아주 중요한 창작의 자유에 속하거든요.”
12일 저녁 ‘서울에 관한 다섯 개의 이야기'’는 주제로 서울 종로구 세종로 교보빌딩 교보컨벤션홀에서 열린 노벨문학상 수상자 장마리 귀스타브 르클레지오와 소설가 황석영의 대담에서 르클레지오가 발언을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평창 동계 올림픽 이후 급변한 남북 관계와 북미 관계 등에 대해 두 소설가는 큰 기대를 나타냈다. 르클레지오는 “2008년 황석영으로부터 유럽에서 출발해 시베리아를 횡단하고 압록강을 건넌 뒤 판문점을 거쳐 서울까지 오는 ‘평화 열차’ 구상을 듣고 매우 흥분했던 기억이 있다”며 “계획대로 열차가 운행하면 내가 첫번째 승객이 되겠다고 약속했다”고 밝혔다.
황석영도 “한반도의 분단은 말하자면 피가 통하지 않는 병과도 같은 것”이라며 “평화 열차로 휴전선 장벽을 뚫어 한반도에 피가 통하게 하자는 제안”이라고 소개했다. “저와 르클레지오, 그리고 북한 소설가 홍석중 셋이 공동위원장을 맡기로 계획했지요. 각국의 저명한 문인들, 가령 터키의 오르한 파무크와 미국 작가 폴 오스터 등이 보도진과 함께 다섯 량 정도의 객차에 타고 프랑스 파리에서 출발해 서울까지 오는 겁니다. 오는 동안 베를린에서는 음악제를 하고, 옴스크에서는 학술제를 하고, 평양에서는 평화선언을 채택하고, 비무장지대에는 평화공원을 만들어 거기서 페스티벌을 여는 거지요. 10년 전에는 무산됐지만, 최근에 다시 문체부와 통일부에 제안을 해 놓은 상태예요. 내년 8·15 즈음에 열차를 운행하고 싶습니다.”
12일 저녁 ‘서울에 관한 다섯 개의 이야기’라는 주제로 서울 종로구 세종로 교보빌딩 교보컨벤션홀에서 열린 노벨문학상 수상자 장마리 귀스타브 르클레지오와 소설가 황석영의 대담에서 황석영이 발언을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최근 한국은 물론 세계적으로도 활발히 펼쳐지는 ‘미투’(#Me Too) 운동과 관련해 황석영은 “내가 우리 사회에서 여성이 겪는 차별에 눈을 뜬 것은 전처(소설가 홍희담)와 이혼하고 망명과 징역살이로 10년을 허비하고 감옥에서 나온 뒤”라며 “출옥 뒤 처음 쓴 소설 <오래된 정원>을 여성의 독백으로 시작한 것을 비롯해 <심청>과 <바리데기> 등 여러 소설에서 여성 화자를 내세우는 ‘역할 바꾸기’를 시도했다”고 소개했다. 그는 “여성이 일상 속에서 겪는 분노나 수치, 모욕감이 목구멍까지 차올라서 미투 운동이 발생한 것이고, 나도 반성하겠다”면서 “그러나 이것이 오래 지속되어서는 안 되고, 토론과 더 깊은 사회운동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르클레지오도 “여성이 독립적 존재로 존중받지 못하고, 동일 노동에 동일 임금을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말했다.
이날 대담에서 황석영 소설 <해질 무렵>의 한 대목과 사회자인 곽효환 시인의 시 ‘나의 유년, 여인들의 집’을 프랑스어로 낭독한 르클레지오는 “한국에서는 시가 여전히 활력을 지니고 있다”며 “나는 그 때문에 한국문학의 미래에 대해 비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황석영도 “르클레지오 형의 소설은 산문에 놀라운 시적 정서와 정신이 녹아들어 있다. 그 점을 배우고 싶다”고 응수했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