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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틱] 소설이 국경을 넘을 때 / 이명원

성령충만땅에천국 2018. 3. 11. 06:22

[크리틱] 소설이 국경을 넘을 때 / 이명원

등록 :2018-03-09 18:05수정 :2018-03-09 22:33

 

이명원
문학평론가·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월경광장>이라는 오키나와의 진보적 잡지가 있다. 2015년 3월에 창간되었는데 최근 출간된 4호를 읽어보았다. 한국에도 잘 알려진 소설가 메도루마 슌과 비평가 나카자토 이사오의 대담이 있었기 때문이다. 독서를 진행하면서 국경을 넘는 소설이 발생시키는 역사에 대한 상호이해와 공통감각의 구성, 고통스러운 성찰능력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문학(인)의 연대에 대해서도.

이 대담에서는 주로 메도루마의 현실참여와 문학의 관련성에 대해 논의하고 있지만, 그런 가운데 한국·베트남과 공유한 착잡한 역사적 기억 역시 환기되고 있다. 재일소설가 양석일의 ‘아시아적 신체’라는 표현을 변용해 ‘식민지적 신체성’에 깃든 심층화된 고통·감각이 메도루마 문학에서 저항의 근거임도 피력되고 있다.

이때의 ‘식민지적 신체성’은 양가적인 것이다. 메도루마는 오키나와 문학과 역사 이해에서 핵심적인 것은 ‘가해와 피해의 이중성’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한국에서는 오키나와 문학에 재현된 일본군 위안부와 군부 표상에서 오키나와와 한국의 관계를 주목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결국 일본의 식민주의 아래서 가해/피해의 착종된 상황을 오키나와 문학에서 재인식하게 된 계기가 아니었겠냐고 해석하고 있다.

메도루마에게 베트남전쟁의 경우는 오키나와가 처해 있는 가해/피해의 착종된 상황을 더욱 예리하게 인식하게 만든 것 같다. 대담에는 베트남 작가 바오닌의 소설 <전쟁의 슬픔>에 대한 논의도 등장한다. 특히 인상적으로 논의되는 것은 미군의 공세에 밀려 패퇴하는 과정에서 주인공인 키엔과 부상병들을 캄보디아 국경으로 안내하는 역할을 했던 북베트남 출신의 여성 안내원 호아의 비참이다. 그녀는 미군의 수색대를 홀로 유인한 결과 키엔 등의 목숨을 구하게 되지만, 정작 호아 자신은 십여 명의 미군들에게 윤간을 당하고 잔혹하게 학살당하는 것으로 소설에서 묘사된다.

아마도 이 장면이 전쟁과 폭력의 본질을 가장 날카롭게 환기하고 독자의 폐부를 찌르는 부분일 텐데, 대담자들은 그 미군들이 오키나와에서 훈련받고 출동했으며, 호아를 향해 짖어대던 군견들 역시 오키나와에서 훈육된 것이며, B-52 폭격기 역시 오키나와와 괌에서 출격해 베트남을 맹폭했음을 들어, 오키나와가 미국과 일본의 지배에 따른 역사적 피해자인 것은 분명하지만, 동시에 아시아 민중에 대해서는 명백한 가해자의 위치에 있었다는 이중성을 적극적으로 환기한다. 난징대학살을 자행했던 일본군들 가운데 오키나와 출신이 다수 있었음 역시 환기되는데, 오키나와에서는 이 부분에 대한 증언과 연구가 빈약하다는 점을 들어 뼈아픈 성찰이 필요하다는 발언도 눈에 띈다.

바오닌의 <전쟁의 슬픔>은 한국에서도 폭넓게 읽혔다. 한국의 젊은 문인들 역시 1990년대부터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젊은 작가들의 모임’을 구성해 베트남 문인들과의 상호이해와 성찰의 끈을 이어왔다. 메도루마는 자신이 문학행위를 지속해 가는 가운데, 특히 한국의 광주와 베트남을 방문하고 싶다는 욕망을 갖고 있었다고 고백한다. 대학 시절에 광주항쟁과 관련된 보도를 보면서 자신과 같은 세대가 민주화 과정 속에서 살육당하는 장면을 보고 전율과 연대감을 느꼈고, 오키나와의 미군기지 범죄에 분노하면서도 동시에 베트남에 대한 가해자로서의 성찰과 참회의 감정을 피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올해 4·3항쟁 70주년이 되는 달에 메도루마 슌은 제주에서 바오닌과 한국의 작가들을 만나게 될 예정이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35428.html?_fr=sr1#csidxfc3b5edbfd037568993ef40b36255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