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목사 로마서·마태복음강해설교

[스크랩] (제43강) 선으로 악을 이기라! (롬 12:14-21)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7. 31. 07:06

《제43강》   선으로 악을 이기라! (롬 12:14-21)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인이 이웃과 어떤 관계로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특히 좋은 이웃보다는 좋지 못한 이웃에 대하여 어떻게 대할 것인가를 원칙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사랑하는 이웃만 있는 것이 아니라 원수 같은 이웃도 있고, 시끄러운 이웃도 있고, 있으나 마나한 이웃도 있습니다.
  우리가 사회생활을 잘 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요건들이 많습니다. 그 중에서도 덕스러운 대인관계를 유지하는 것만큼 귀한 것이 없습니다.
  하버드 대학 경영대학원에서 사용하는 교재 중에 <두뇌를 갈고 닦고 기술을 연마하는 훈련을 잘하면 사회에서 성공할 수 있는 확률이 10%인데 비해 대인관계를 잘 해서 성공할 수 있는 확률은 85%나 된다고 합니다.> 쉽게 표현하면 대인관계를 덕스럽게 잘 함으로서 성공하는 사람이 머리가 좋고 똑똑해서 성공하는 사람보다 훨씬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은 교회 밖의 사람들, 특별히 불신자들, 그 중에서도 껄끄러운 이웃, 불편한 관계에 놓여 있는 이웃과의 관계를 어떻게 가질 것인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라는 주님의 가르침을 다시 새겨봐야 합니다.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랑의 극치와 진실된 믿음에서만 가능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바로 가져야 하고 이웃과의 관계도 바로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원만한데 이웃과의 관계가 좋지 못하다면 이런 사람의 신앙은 잘못된 것입니다. 주님은 "너희가 이웃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지 않갰다."고 하셨고, 또 "제물을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올 때에 누가 너를 원망하는 것이 생각나면 제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화해하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말씀들은 이웃과의 관계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로 직결되어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신앙이라고 한다면 이웃과의 관계를 통해서 신앙을 확증, 실천해 가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 장로님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14절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미국에 어떤 청년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이웃집 농부로부터 심한 모욕을 당하자 복수심에 불탔습니다. 그래서 홧김에 아주 해로운 잡초의 씨앗을 그 농부의 밭에 왕창 뿌렸습니다. 순식간에 밭 전체를 뒤덮어버리는 번식력이 강한 잡초였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바로 직후에 그 농부의 딸과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그 농부는 자기 딸에게 결혼선물로 그 밭을 주었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겠는가? 그 청년은 자기가 뿌린 씨앗을 그대로 거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후 몇 년 동안 그는 그 밭에 있는 잡초를 뽑아내기 위해서 죽을 고생을 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를 핍박할 때 그를 저주하지 않은 것은 소극적인 일입니다. 그것에 만족하지 말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사람을 위해서 축복해 주는 것은 적극적인 일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미워하고 핍박하는 자를 보면 분노가 나고 화가 치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이런 인간의 자연 본능을 억제하라고 말합니다.
  '토머스 제퍼슨'은 <당신이 화가 났을 때, 열을 세어라. 화가 더 나면 백을 세어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이 말을 개작해서 '마크 트웨인'은 <당신이 화가 나면 네 번을 세어라. 그래도 화가 더 나면 네 번을 몇 십 번 반복하라>고 했습니다.
  마5:44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본문은 바울이 주님의 말씀을 다시 한번 반영시킨 말씀으로 여기서 '핍박'이라는 의미는, 물론 넓게 생각하면 나를 괴롭히는 자를 가리켜 다 핍박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의미로는 예수 믿는 것으로 인해서 받는 핍박만이 진정한 핍박입니다. 내가 잘못해서 욕을 먹는 것은 핍박받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의롭고 바르게 신앙생활을 하려는데 이것 때문에 당하는 미움과 어려움만이 핍박입니다. 이런 핍박을 당할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를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유명한 철학자 '플라톤'은 <선한 사람은 핍박을 당할지언정 이 핍박을 악으로 대하지는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견디기 어려운 핍박을 당할 때 저주하지 않고 축복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어렵습니다. ▶유신정치 때 교계의 유명한 목사님이 붙잡혀가서 모진 고문을 당한 일이 있습니다. 손톱이 뽑히는 고통을 당했답니다.
  그 목사님은 고문을 당할 때 너무 고통스러워서 저기도 모르게 저주가 터져 나왔다고 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핍박하는 자를 축복할 수 있겠습니까? 신앙으로 행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 어떻게 하셨는가를 알아보고 그대로 따라야 합니다.
  벧전2:23절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예수님은 핍박을 당하실 때 결코 저주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을 위해 기도하시고, 용서하시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향하여 당부하시기를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하심이라(벧전3:9)"고 하셨습니다.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는 말은 적극적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 "어느 집에 가든지 일단 들어서면 복을 빌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복을 빌라고 하신 후에 오묘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복을 빌어서 그 사람이 복을 받을 만한 사람이면 그 복을 받을 것이고, 만약 그 복을 받지 못할 사람이라면 내가 빌었던 그 복이 내게로 돌아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거꾸로 생각하면 내가 저주를 해서 그가 저주받을 만한 사람이면 저주를 받을 것이지만 만일 그가 저주받지 않을 사람이라면 그 저주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옛날에 사도 바울을 보면 예수님을 몹시도 핍박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심리적인 갈등이 왔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를 보았고, 그의 마지막 간절한 기도를 들었습니다.
  어떤 기도를 했습니까? 스데반은 순교하면서 '어디 두고 보자' 저주하고 죽었다면 그 죽음은 헛된 죽음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순교자답게 "하나님이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기도소리에 큰 변화가 온 것입니다.
  그러던 차에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초대교회가 바울을 얻게 된 것은 스데반의 기도 덕분이다'라고 했습니다.
  마5:44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말로 위로해 줍시다. 형들에게 몹시 미움을 받고, 핍박을 받았던 요셉은 도리어 '간곡한 말로 위로했다'고 합니다. 창50:21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형들과 그 자손까지도 책임지겠다고 했습니다.

 

  ▶15절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어린아이의 피나는 손가락에 엄마가 호하고 불어주면 아이는 금방 울음을 멈춥니다. 엄마의 입김에서 뜨거운 체온과 함께 사랑이 전달되어 아픔을 이길 힘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체온의 종교입니다. 상처 입은 우리의 마음이 다정한 이웃의 사랑과 우정의 체온을 느낄 때, 상처는 치료를 받습니다.
  본문은 한마디로 동고동락하라는 뜻입니다. 괴로울 때 같이 괴로워하고 즐거울 때 같이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이웃 관계는 마음과 마음으로 서로 연결되어 상대방의 입장을 동정하고 공감하는 관계입니다. 쉽게 표현하면 상대방의 입장에서 항상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서양 속담에 <함께 기뻐하면 그 기쁨이 커지고 함께 슬퍼하면 그 슬픔이 작아진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는 것과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것, 어느 것이 쉽겠습니까? 

  이웃의 잘못된 불평에 대하여 우는 것이 쉽습니다. 초상집에 가면 그 집에서 슬피 우는 소리가 나면 공연히 우리의 눈에도 눈물이 고입니다. 그런데 남이 잘될 때 같이 즐거워하는 것, 이것이 어렵습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픕니다.> 목회자들도 누구 교회가 땅을 샀다고 하면 배 아파하고 시기하고 합니다.
  우리 민요 가운데 아리랑을 생각해 보세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무슨 뜻인가? 나를 사랑하는 님이 나를 떠나려고 합니다. 그런데 갈 테면 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리도 못 가서 발이 부르트든지, 발목이 삐든지 해서 넘어지고 말 것이라는 뜻입니다. 일종의 저주의 노래입니다. 인간의 타락한 심성에서 나온 결과입니다.
  성경에도 그렇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시기했습니다. "천천이요 만만이로다" 백성들의 인기 순위가 다윗에게로 쏠리자 사울이 시기하여 그를 죽이려고 쫓아 다녔습니다. 그 뿐입니까? 동생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이 열납하시고, 자신의 제물은 받지 않음에 시기가 생긴 가인은 마침내 동생을 돌로 쳐죽이는 사건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첫 살인사건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800년 전에 살았던 '크리소스톰'이라는 설교자는 "우는 자와 함께 우는 것은 웃는 자와 함께 웃는 것보다 쉽다. 우리가 웃는 자와 함께 웃기 위해서는 훨씬 더 고상한 인격을 필요로 한다."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대학에 합격했다고 기분 좋게 말하는데 "병신 자기만 합격했나?"하고 빈정대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직장에 취직한 동료에게 "직장이 어디 자기 밖에 없나" 괜히 시기합니다.
  ▶하루는 어떤 제자가 자기 스승에게 "스승님, 제가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의 입장을 잘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스승은 가만히 생각하다가 "일어나서 창 밖을 내다보아라. 누가 보이느냐?" 제자는 창 밖을 내다보고 난 뒤에 스승에게 "예, 어떤 아주머니가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서 정답게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러자 스승은 또 제자에게 "이번에는 거울 앞에 서거라. 그리고 거울 속을 들여다보아라. 누가 보이느냐?" "스승님, 거울 속에는 제 모습만 크게 보입니다."
  그 말을 듣고서 스승은 제자에게 가르침을 베풀었습니다. "제자야, 똑같은 유리인데 어찌하여 유리창을 통해서는 다른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있고, 거울을 통해서는 다른 사람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자기 모습만 볼 수 있겠느냐? 그것은 거울 뒤에는 은칠이 되어있기 때문이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제대로 바라보고 그들의 입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네 마음에 있는 은칠을 벗겨버려야 하느니라"
  그렇습니다. 우리 마음에 있는 편견의 은칠을 먼저 벗겨버려야 합니다. 내 감정의 은칠을 벗겨버려야 합니다. 우리 마음을 비울 때 비로소 우리는 다른 사람을 제대로 볼 수가 있습니다.

  성림의 성도들이여! 기쁨을 누리는 자에게 함께 기뻐해주고 우는 자와 함께 우는 성도의 연합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할/

 

  ▶16절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성도가 동고동락하는데 있어서 꼭 필요한 말씀입니다. 겸손한 이웃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또 잘 난체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웃을 보고 '나는 너하고 달라' 하는 식으로 행동하거나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본문을 나누어서 생각해 봅시다.
  ①"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마음이 같다는 것은 통한다는 것입니다. 뜻이 통하고 사상이 통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마음이 같고 뜻이 같아야 합니다. 부모와 자식간에도 마음과 뜻이 같아야 합니다. 부부간에도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마음이 같지 아니하면 큰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마음이 하나 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남편과 아내의 마음이 하나 되지 않습니다. 형제의 마음이 하나 되지 않습니다. 오래 전에 감리교단에서 총감독을 뽑았는데 형제 목사님들이 나와 경합을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김선도 홍도'목사님입니다. 광림교회 금란교회 모두 대형교회 담임목사님들입니다.
  그런데 마음을 같이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뭡니까? 우리의 마음을 비우고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빌2:5절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어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예수님의 마음이 어떤 마음입니까? 온유와 겸손함 마음, 희생과 섬김의 마음, 죽기까지 낮아진 마음입니다.
  ②"높은 데 마음을 주지 말라" 이 말씀은 높은 소망, 곧 하늘나라의 소망을 가지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높은 지위를 바라보지 말라는 말도 아닙니다. 쉽게 말해서 교만한 마음을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만은 우쭐대는 마음입니다. 가졌다고 우쭐됩니다. 배웠다고 우쭐됩니다. 예쁘다고 우쭐됩니다.   
  ▶어느 날 두 마리의 수탉이 싸웠습니다. 이유는 '암탉을 누가 더 차지하느냐?'입니다. 이 싸움은 혈투입니다. 닭들은 날개를 퍼덕이며 날카로운 부리로 상대방을 쪼아서 서로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마침내 흰 닭이 상처를 입고 툇 마당 밑으로 슬그머니 도망쳤습니다.
  싸움에서이긴 검정 닭은 우쭐해졌습니다. 그는 울타리에 올라가 목청을 높여 크게 외쳤습니다. "어때, 요놈들아! 누구든지 나를 이길 자는 없을 것이다. 앞으로 내 암탉들에게 손을 대는 놈은 가만 두지 않겠다."고 우쭐대는 그 순간이었습니다.
  검정 닭은 앗! 하고 소리를 쳤으나 피할 틈도 없이 매에게 잡히고 말았습니다. 매는 의미 있는 미소를 지으며 "싸움에 이겼다고 뽐내지 마라, 네가 울타리 위에만 올라오지 않았다면 내 눈에 띄지 않았을 텐데, 안됐다 요놈아!" 
  또 교만은 남을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또 교만은 자기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싫어하십니다. 잠16:18절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③"낮은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한마디로 '겸손하라'는 말입니다.
  '체' 하는 말을 언제 씁니까? "없으면서도 있는 체, 모르면서도 아는 체, 약하면서도 강한 체" 우리 주변에 '체'문화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우리 주님은 겸손한 자를 사랑하십니다. 겸손한 자는 이웃을 섬기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겸손은 위대한 품격입니다. 무르익은 곡식일수록 그 이삭은 머리를 숙입니다. 그러나 속이 비어 있는 이삭일수록 고개를 듭니다. 빈 수레가 요란합니다. 우리 모두 겸손한 자가 되십시다.
  벧전5:5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17절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평화를 이루어 내기 위한 첫 번째 단계는 악을 버리는 일입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악한 일을 행하면 어떻게 해 주고 싶습니까? 성질대로라면 우리가 당한 이상으로 앙갚음을 해 주고 싶습니다. 그래서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는 말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조금 건드렸는데, 더 크게 당한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에서 나온 결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악으로는 결코 평화를 이루어갈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악은 언제나 더 큰 악을 초래하기 마련입니다. 결과적으로 당사자에게 화를 가져다 줄 뿐입니다.
  악으로 악을 갚으면 이 세상에 악이 점점 많아지게 되고 자기 자신도 악하게 됨으로 결국 믿음에서 떠나고 하나님이 죄악을 심판하실 때에 다같이 망하게 됩니다.
  악으로 악을 갚은 것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는 것입니다.
  ▶종로 3가에 아주 작은 식당하나가 있었는데 점심때가 되면 항상 손님이 만원입니다. 어느 날 한 참 바쁜 시간에 여승 하나가 조용히 문을 열고 조용히 들어서고는 말없이 목탁을 두드립니다. 그러자 여 종업원이 불쑥 나서더니 <우리는 예수 믿어요.> 쏘아 붙였습니다.
  분명히 그 식당은 예수 믿는 사람이 경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여승은 꼼짝도 없이 목탁소리에 맞춰 염불까지 외우고 있습니다. 이때 이 여 종업원이 쏜살같이 달려가 여승을 문 밖으로 밀쳐내며 악을 썼습니다. "우리는 예수 믿는단 말이 예요." 여승은 아무 말도 없고 표정도 없이 절을 하고는 사라졌습니다. ▶여러분, 누가 이긴 잡니까? 그 날 그 사건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은 마음이 편치 않았고 주님의 거룩한 이름도 빛을 잃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행동에 있어서도 달라야 합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악으로 악을 갚지 않습니다. 그 어떠한 경우라도 악을 대응 무기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예컨대 누가 우리를 저주합니까? 그럴지라도 우리는 그 사람을 저주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우리를 원수로 대하고 있습니까? 그럴지라도 우리는 그 사람을 원수로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초대교회 스데반 집사를 보세요! 그는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자기의 동족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가 전하는 복음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오히려 돌로 쳐서 그를 죽였습니다. 그때 마지막으로 스데반의 기도는 "주여, 이 원수를 꼭 갚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셔서 저들 자손 대대로 망하게 해 주시옵소서." 이런 기도를 드렸더라면 그는 위대한 순교자가 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무릎을 꿇은 채 진솔한 모습으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그는 고통 속에서도 평화의 기도를 드리면서 자기에게 돌로 치는 그들에게 평화를 선포한 것입니다. 그는 악으로 악을 갚지 않았습니다.
  그의 기도에 힘입어서 변화된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바로 오늘 본문을 기록한 사도 바울입니다. 바울은 본시 예수그리스도의 원수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습니다. 위대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스데반의 평화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 어거스틴은 "교회가 바울을 얻게 된 것은 전적으로 스데반 덕분이었다."고 했습니다.
  악으로 악을 갚지 않았던 스데반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되기를 바랍니다. /할/
  본문은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고 하십니다. 여기 도모하라는 말은 미리 생각하고 미리 준비하라는 뜻입니다. 특히 악으로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까지 선을 도모하라는 것이 성도의 참모습이며 사명입니다. /할/

 

  ▶18절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 하라"
  여기 '할 수 있거든'이라고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할 수 없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평화는 나와 너와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악으로 악을 갚지 않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한다 할지라도 상대방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더불어 평화할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미국에 사는 어떤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이 남자는 어느 날 한 아리따운 여성을 만났습니다. 그 여성의 아름다움에 반해서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살아가다 보니까 문제가 생겼습니다. 얼굴은 예쁜데, 얼굴에만 신경을 쓰느라고 살림은 엉망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너무 게을렀습니다. 그래서 그는 후회하기 시작했습니다.
  "아, 내가 눈이 삐었구나! 여자는 얼굴이 전부가 아닌데, 왜 내가 그 사실을 잊어버렸을까?" 결국 그는 자기 아내와 이혼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부지런한 여성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마음에 딱 맞는 매우 부지런한 여성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여자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살다보니 또 문제가 생겼습니다. 부지런한 것까지는 좋은데 입마저 부지런한 것이었습니다. 잠시도 쉴 새 없이 혼자서만 지껄였습니다. 질려서 살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또 후회하기 시작했습니다.
  "아, 내가 또 실수를 했구나! 좀 더 신중해야 했었는데…" 결국 그 여자와도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번에는 조용한 여자를 만나서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살다보니 또 문제가 있습니다. 조용한 것은 좋은데 너무 사치스러운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러기를 몇 번 반복했습니다. 장점을 보고 결혼했다가 단점이 생기면 이혼을 해 버렸습니다. 그는 결국 두 손들고서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인생은 가위 바위 보와 같구나!" 무슨 뜻입니까? 가위 바위 보는 언제나 이기는 법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질 때도 있습니다. 예컨대 가위는 바위에게 집니다. 그러나 보자기는 이깁니다. 보자기는 바위에게는 이깁니다. 그러나 가위에게는 집니다.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살아가다 보면 때로는 우리에게 우호적인 사람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적대적인 사람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그러려니 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인생입니다. 아울러 모든 사람에게 장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에게 또한 단점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있게 마련입니다. 단점이 있으면 장점도 있게 마련입니다.
  본문은 이웃과의 적극적인 면을 말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사회생활을 하면서 가급적이면 적을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적극적으로는 화목동이가 되어 화평을 심으라는 말입니다. 주님은 산상보훈에서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할/
  우리가 이웃에게 평화를 주기 위해서는 자기가 죽어지고 희생해야 합니다. 여기 '할 수 있거든 평화 하라' 조건을 붙이고 있습니다.
  ①먼저 '평화'는 것은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상당한 값을 지불해야 하는 것입니다.
  ②할 수 있거든 화평하라는 의미에는 너희 능력과 지혜를 다해서, 즉 최선을 다해서 화평에 힘쓰라는 뜻입니다.
  ③할 수 있거든 화평하라는 말은 할 수 없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기 '할 수 있거든' 이 말씀 속에는 '진리에서 벗어나지 않거든'이란 말입니다. 쉽게 표현하면 일본 신사에 절하라고 강요한다면 이것은 진리가 아니므로 하나님 앞에서 안 되는 것입니다. 또 자기 아버지가 아들에게 "얘야 가서 도적질 좀 해 오너라" 한다고 해서 예 하고 도적질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 "할 수 있거든" 이란 말은 바로 죄 짖는 일, 하나님의 말씀을 반역하는 일이 아니고는 모든 사람으로 화평하라는 말입니다. 주님은 이 땅에 화평의 사신으로 오셨습니다. 요14:27절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하나님의 나라는 화평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다. 반면에 불복케 하는 자는 마귀의 자식의 된다는 의미입니다.

 

  ▶19절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왜 우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아야 합니까? 우리는 불의한 자들입니다. 따라서 원칙적으로 우리에게는 원수 갚을 권한이 없습니다.
  ▶톨스토이의 작품 가운데 <재난의 원인>이라는 단편집에 있는 이야기인데 담 장을 사이에 두고서 서로 사이좋게 살아가던 두 집 사이에 있었던 일을 다루고 있습니다.
  하루는 이쪽 집 암탉 한 마리가 담 장을 넘어서 저쪽 집으로 건너갔습니다. 잠시 뒤에 "꼬옥-꼭꼭"하면서 돌아오는데 영락없이 알을 낳고 난 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쪽 집 아이가 저쪽 집 아이에게 달걀을 좀 찾아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저쪽 집 아이가 찾아보더니 없다고 했습니다.
  결국 이 두 아이는 서로 간에 <있다 거니 없다 거니> 옥신각신하다가 주먹질까지 하면서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두 어머니들이 가세를 했습니다. 머리카락을 서로 잡아당기면서 격렬하게 싸웠습니다. 나중에는 아버지들도 합세를 했습니다. 두 집이 아주 크게 싸웠습니다. 힘이 모자란 이쪽 집 아버지가 화가 나서 분을 삭이지 못하고 저쪽 집에 불을 질러 버렸습니다. 한 동안 그 집에 불길이 한참 타오르다가 바람이 휙 돌아 불더니 이쪽 집으로 옮겨 붙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두 집 모두 타버리고 말았습니다.
  복수는 그런 것입니다. 원한은 또 다른 원한을 낳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검을 쓰는 자는 검으로 망한다."고 하셨으며, 우리나라 속담에도 "남의 눈에 눈물내면 자기 눈에는 피가 난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본능에는 강한 보복심리가 있다고 합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생명은 생명으로 복수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절대 복수하지 말하고 하십니다. 원수가 생길 수는 있지만 그러나 그 원수에게 보복하려는 마음은 갖지 말라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원수를 갚아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사울과 원수지간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친히 자신의 원수 갚기를 거절했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갚아 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자신을 팔아먹은 형제들 앞에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창45:8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
  성도가 원한을 품거나 원수를 갚으려고 하면 영감을 받은 온유한 마음은 상실케 되어 믿음에서 떠나게 됩니다. 원수를 하나님이 갚아 주실 것을 믿고 성도는 모든 사람에게 선을 베풀고 화목해야 합니다.
  본문은 신32:35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다윗이 자기 아들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서 도주할 때, 시므이라는 사울 집 족속이 돌을 던지면서 다윗을 저주했습니다. 그러자 다윗의 신하 가운데 한 사람이 그것을 보고서 당장 그에게 쫓아가서 목을 베어 오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전적으로 의로우신 하나님의 판단에 맡겼습니다.
  하나님은 시므이에 대해서 오래 참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시므이가 솔로몬 왕 때에도 회개하지 않자 하나님은 시므이를 심판하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시므이를 바로 그 순간에 심판하지 않았는가?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공평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지금까지 오래 참아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에게도 다른 사람에 대한  오해가 있더라도 오래 참어야 합니다. 원수가 있습니까? 우리가 친히 원수를 갚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는 동안에 그 사람이 회개하면 그는 우리에게 와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다면, 시므이를 심판하신 하나님은 그 사람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믿/

 

  ▶20절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맺힌 것을 풀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사로이 원수를 갚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원수에게 사랑과 친절을 베푸는 일입니다. 예컨대 우리 원수가 주리고 있습니다. 목말라하고 있습니다.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제야 저의 원수를 갚아주시는군요.' 이렇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잠25:21-22절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원수에 대하여 복수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들이 어려울 때 먹을 것을 갖다 주고 마실 것을 갖다 주면 머리에 숯불을 얻는 것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머리에 숯불을 얻는다는 비유는 원수인 줄 알면서도 가서 어려울 때 먹을 것을 주고 마실 것을 주면 그 사람이 머리로부터 전신에 뜨거운 감동에 사로잡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불에 놓아버린 마음에는 복수의 칼이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사랑을 공급하면 원수의 마음을 녹일 수가 있고 원수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아오게 만들 수 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청년을 용서해 주고 자신의 수양아들로 삼았습니다.
  20절 '하'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놓으리라" 원수에게 자신의 준엄한 심판을 내린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에게 사랑을 보임으로 그의 영혼을 감동시켜 회개시킨다는 의미입니다. 미움과 증오를 가지고 오는 사람 앞에 사랑을 가지고 나아가면 그 미움과 증오는 사람 앞에 녹아집니다. /믿/

 

  ▶21절 "악에게 지지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손자병법에 보면 '백 번 싸워서 백 번이기는 것보다는 한 번도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진정한 승리'라고 했습니다. 본문은 소극적으로는 악에게 지지 말라고 했고, 적극적으로는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악에게 지는 것은 자기가 친히 원수를 갚는 것입니다. 여러분, 원수 갚는 것이 쉽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가 원수를 갚으려면 먼저 마음이 강퍅해져야 하고, 모질어져야 합니다. 마음이 유순해서는 복수할 수가 없습니다. 눈에는 살기가 등등해야 합니다. 말도 거칠어져야 합니다. 행동도 공격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신경도 날카로워져서 밤에는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습니다. 복수의 칼을 갈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힘들고 괴로운 일입니까? 이것이 바로 악에게 지는 일입니다. 이는 마귀나 좋아할 일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때리고 침 뱉고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리다."
  예수님은 선으로 악을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으로 승리하셨습니다. /할/
  "악에게 지지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여러분, 악은 악으로 절대로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면 깨어져 버리고 파탄을 자초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악은 선으로 이길 수 있습니다. 행여나 여러분을 괴롭히는 자가 있습니까? 그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그 사람에게 선을 베푸십시오. 그리하면 좋으신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움직여 선한 양심을 갖게 할 뿐 아니라 예수님을 영접하는 마음까지 올 것입니다. /믿/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