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강》 믿음의 분량대로! (롬 12:3-8)
오늘 본문 3-8절까지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을 위해 살고 이웃을 위해 바르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바르게 살아가는 봉사생활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봉사란 대가 없이 일하는 것을 말합니다. 본문의 말씀은 그 봉사에 있어서는 먼저 봉사자의 겸손한 자세 없이는 참 봉사가 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겸손한 자세는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겸손한 자세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다는 은혜의식에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구원도, 생명도, 물질도, 건강도 우리의 모든 것은 주께로부터 왔다는 은혜 의식이 필수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다는 의식이 없이는 절대로 겸손해 질 수가 없습니다.
내 것 가지고 봉사한다고 생각하면 교만해집니다. 우리는 성자 어거스틴을 잘 압니다. 그 어거스틴에게 하루는 제자가 와서 묻기를 "선생님은 아주 은혜가 충만한 생활을 하고 계시는데 그 비결이 어디에 있습니까?" 어거스틴의 대답은 수사학 교수답게 "우리가 웅변을 잘 하려면 첫째도 발음, 둘째도 발음, 셋째도 발음입니다. 발음이 정확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내용을 가지고 있어도 그 웅변은 빵점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를 계속 받으려면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하지 않으면 설교를 들어도 옳게 듣지 못합니다."
바울은 본문 3절부터 우리가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를 드리는 비결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목소개!▶
▶3절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본문을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너 자신을 바로 알라'는 것입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여기서 '내게 주신 은혜'는 바울 자신의 사도직을 가리키는 말로, 하나님이 자기를 사도로 받아주셨다는 소명의식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이 소명의식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주셨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워주셨다>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입니까? 사도 바울은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사도의 직분을 받아 권면하고 있습니다.
3절에 보면 '생각'이라는 말이 세 번이나 나옵니다. 이 말의 헬라어의 의미는 '사고, 증거, 결론, 측정'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자기가 자기를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즉 자아의식에 대한 말씀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네 자신을 알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고 없는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자기 자신의 능력을 정확히 평가하는 것은 삶의 유익을 위해 중요한 일입니다.
믿음 안에서 뿐 아니라 세상사는 일에도 자기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알아야 합니다. 사업을 하는 분이 자신의 능력과 재력을 잘못 알고 너무 욕심에 밀려 사업 확장을 하다가 많은 사람들이 실패의 잔을 마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대학입시도, 취직시험도, 자신의 실력과 잘 비교해서 원서를 넣어야 합니다. <뱁새가 황새걸음 따라가다가 가랑이가 찢어진다>는 옛 어른들의 말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기 자신을 올바르게 알지 못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지혜로울 수 있으리라는 자신에 대한 과대평가 때문에 범죄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바로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 '지혜롭게 하라'는 말은 '정신 차려 제 분수에 넘지 않도록 생각하라' 즉 '주제를 파악하라'는 말입니다.
▶미국에 '산도호'라고 하는 힘센 거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힘이 최고라고 자랑하면서 언덕 위에서 바위를 굴리면 밑에서 받아 번쩍 들어 올리겠다고 장담했습니다. 많은 사람 앞에서 그대로 했는데 결과는 뻔합니다. 심한 타박상과 뇌진탕으로 피투성이가 되어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답니다. 자신의 힘을 과대 평가하다가 당한 일입니다.
주님은 요15:5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는 자는 그런 어리석은 자랑에 빠지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이 없이는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자임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빌4:13절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할/
"믿음의 분량대로" 믿음에도 분량이 있습니다. '큰 믿음, 적은 믿음, 의심하는 믿음', 그래서 주님은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왕이면 우리 모두 큰 믿음을 가지십니다. 큰 믿음은 큰 믿음의 역사를 일으킵니다. /할/ 본문의 '믿음의 분량'은 각 개인에게 주신 은사의 차이를 말하고 있습니다.
▶지혜롭게 생각하기 위한 구체적인 가르침으로 "마땅히 생각한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영어 성경 번역에는 '자기 스스로를 교만하게 또는 자랑하는 존재로 생각지 말라'는 표현이고, 헬라어의 원어에는 '생각할 바 그 보다 높이 생각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생각을 높이지 말고 낮추지도 말고, 사실 그래도 있는 그대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주는 교훈은 성도들 가운데서 어떤 사람은 '자신이 받은 어떤 믿음의 은사를 과대평가해서 자랑하고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언의 은사, 신유의 은사, 영 분별의 은사, 방언의 은사 등을 받아서 그 은사가 최고 인양 생각하고 믿음의 척도인양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은사가 없는 성도는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이라고 무시합니다. 뿐만 아니라 구원도 받지 못한 사람이라고 평가합니다. 이런 태도는 믿음의 교만이요 영적인 교만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필요에 따라 은사를 주십니다. 마25장에 보면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들이 나옵니다. 문제는 받은 달란트를 얼마나 활용하느냐 입니다. 많이 받고 적게 받은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얼마나 그 달란트를 가지고 충성했느냐 그것이 문제입니다.
목회자도 마찬가지입니다. 100명의 그릇, 200명의 그릇, 1000명의 그릇, 만 명 넘는 그릇도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생각하는 것은 대 교회 목사들을 하나님께 큰 상급을 받은 것이고 개척교회 목사들은 상급이 없는 것이다 판단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목사님들에게 믿음의 분량대로 성도들을 맡기십니다. 중요한 것은 맡겨진 양들을 위해 얼마나 섬기고 충성했느냐 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보십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분량대로 충성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축복해 주십니다. /믿/
▶4절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바울도 4-5절에서 성도를 주안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과 예수님은 머리요, 교회의 몸이요, 우리는 그 지체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즐겨 사용하는 신앙적인 고백의 하나가 교회를 하나의 몸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고전12:12절 이하에 보면, 바울은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는 많으나 한 몸과 같이 다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 몸에는 여러 지체가 있습니다. 그 지체는 서로 다투지 아니하며 시기하는 일이 없으며 서로가 서로의 중요성을 인정합니다. 우리 몸은 유기체로 되어있습니다. 몸의 각 지체는 그 기능이 다 다릅니다.
▶하루는 우리 얼굴에 있는 입과 코와 눈이 서로 간에 시시껄렁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말 많은 입이 먼저 말문을 열었습니다. "야, 나는 음식을 넣어주는 일을 하고, 말도 하는데 왜 너희들보다도 언제나 맨 밑에 위치해 있어야 되는 거야?" 그러자 코가 "무슨 소리야? 나는 숨도 쉬고, 냄새도 잘 맡고, 생긴 것도 오뚝하게 잘 생겼지만 기껏해야 얼굴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는데."
그러자 눈이 우쭐대면서 "얘들아, 그런 말들 하지 마. 내가 너희들보다 위에 있는 이유가 다 있어. 내가 없어 봐. 너희들은 단 한 시간도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을 거야." 그러자 이번에는 엉뚱하게 눈썹친구에게 "야 눈썹! 자네는 특별히 하는 일도 없으면서 어떻게 우리보다도 더 높은 곳에서 잘난척하면서 뻐기고 있냐?" 그러자 눈썹이 이렇게 겸손하게 "그래, 너희들 말이 맞아. 나는 언제나 중요한 일들을 하는 너희들 앞에서 늘 미안한 심정으로 그저 내 자리를 열심히 지키고 있을 뿐이야."
여러분! 그렇다고 우리의 눈썹이 쓸모 없는 존재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땀이나 물이 흘러도 눈으로 흘러 들어오지 않고 자연히 옆으로 비껴서 흘러내리도록 눈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몸의 각 지체들은 그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저 자기가 맡은 그 직분에 충성을 다하면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의 지체에는 성도에게는 각자 주어진 임무와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 몸의 지체를 한번 생각해 보십니다. 눈은 보는 일을 합니다. 코는 냄새를 맡습니다. 귀는 듣습니다. 혀는 맛을 보고 말을 합니다. 눈썹은 눈을 보호합니다. 발바닥은 차바퀴 튜브 역할을 합니다. 손에는 손가락 다섯이 있어 모두 그 사명이 다릅니다. 이 손가락은 길고, 짧고 두텁고, 가늘지만 그 사명이 다릅니다.
오늘 본문의 해석은 우리 모두가 몸된 교회의 지체이기 때문에 몸된 교회를 위해 봉사해야 함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지체라는 말은 몸에 붙어 있는 다양한 기능을 이야기합니다. 어떤 사람은 발의 역할을 할 수 있고, 어떤 성도는 손의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지체가 되었다는 말은 섬겨야 할 책임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4절에서 말하는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라는 말 가운데, 여기 직분은 교회의 어떤 직책이라기보다 몸의 기능을 말합니다.
모든 지체가 똑 같은 기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손은 손대로, 눈은 눈대로, 코는 코대로, 다 각각 기능이 다릅니다. 그러면 왜 지체마다 다른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것은 한 몸을 섬겨야 할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고전12:12절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5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우리는 본문에서 귀한 진리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무엇입니까?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우리는 그 몸에 붙어 있는 지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우리의 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삶의 대원칙 하나를 주셨는데 그것은 마19:19절에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한번 주목해 볼만합니다. 이웃이 바로 (내 몸)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내 몸처럼 사랑하라고 했으니까 내 몸은 아닙니다. 반면에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동시에 내 몸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교회가 이웃에 비해 훨씬 가까운 대상이라는 말입니다. '네 이웃'은 우리 몸처럼 사랑해야 할 대상이고, 교회는 우리 몸으로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 봉사는 그 어느 것보다도 우선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몸이 지체를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고 지체가 몸을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믿/
▶6절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은혜 대로란 말은 무료로, 공짜로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은사는 원어로 '카리스마'인데 은혜는 '주신 선물'이라는 의미입니다. 뒤에 나오는 모든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저 공짜로 주신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해서 또는 시험을 치러서 자격을 따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값없이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를 받았습니다. 여기서 은사는 달란트로 비유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맡은 일이 큰일이나, 적은 일이나, 보이는 일이나 보이지 않는 일이나 다 하나님의 뜻이 있으므로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또 주어진 직분대로 감사해야 합니다. 무엇을 시키든지 간에 아멘 하는 신앙이 복 받은 신앙입니다.
또한 나에게는 아무 직분도 안 주었다고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두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기회를 주실 때 우리는 이 주어진 일에 충성해야 합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사람의 모든 은사, 모든 재능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각각 서로 다른 재능을 부여받고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이러한 모든 재능들은 인간에 의해서 계발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그의 선하신 뜻을 위하여 제공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잠재력은 무궁무진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그 잠재력까지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어떠한 재능을 소유했다 할지라도 교만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은사, 모든 재능, 모든 직분,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교회에 덕을 세우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사용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본문 '하'절부터 은사 면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먼저 우리가 고전12:4-11절까지의 은사 장을 한번 찾아서 읽고 넘어가는 것이 유익입니다.
여기서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습니다. 또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습니다. 여기서 직임이란 (봉사, 섬기는 일, 준비하는 일, 직무, 직책, 집사 직) 등을 의미하는데, 봉사하고 섬기는 모든 일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섬기라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목사의 직분, 장로의 직분, 권사, 집사, 구역장, 찬양대, 기관장들 많은 직분이 있습니다. 이 모든 직분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고 봉사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목사 직분 받아 가지고 대통령에게 잘하는 것 위법입니다. 옛날 정치 목사들이 그랬습니다. 교회 안에 그 어떤 직분도 모두 하나님을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직임은 여러 가지나 오직 섬김의 대상은 3위 일체대신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 우리 아버지 한 분이십니다. /믿/
본문 6절 '하'반절에서부터 8절까지에서 몇 가지의 은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①"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량대로" 바울은 예언의 은사를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고전14:1절에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했습니다.
예언은 무엇입니까? 두 가지 학설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깊이 깨닫고 그 말씀을 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치며 하나님의 나라의 꿈과 환상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설교 자체가 예언이요, 천국의 이야기하는 전도도 예언입니다.
예언이란 원어 속을 보면, 단순히 미래를 말하는 것만이 아니라 본래의 뜻은 하나님을 '대변한다, 변호한다.'는 뜻입니다. 즉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에게 당신의 말씀을 주셔서 그 말씀을 백성에게 또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게 하셨습니다.
그 말씀 속에는 미래를 향한 말씀이 있습니다. 현재에 관한 말씀도 있으며, 칭찬과 경고의 말씀도 있습니다. 책망, 권고의 말씀도 있고 명령도 있습니다. 이런 말씀은 하나님이 주시는 대로 가감 없이 대언하는 것이 예언자의 사명입니다.
두 번째로, 글자 그대로 성도들에게 앞날을 예언하는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지금도 주의 종들에게 이런 은사가 나타나고, 성도들 가운데 특히 권사님들이 이 은사를 많이 받습니다. 그런데 이 예언은 기도생활을 많이 하고 늘 성령 충만한 상태에서 오는 은사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늘 성령 충만할 수는 없기 때문에 예언의 은사는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합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에 합방이 되어 약 30년이 흐른 후에 일입니다. 일본이 2차대 전에서 점점 불리해지니까 일본 정부는 한국교회를 무섭게 핍박했습니다. 신사참배를 강요했습니다. 반대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무자비하게 투옥시켰습니다.
이처럼 한국교회가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자, 하나님이 일본의 장래와 한국교회의 미래를 이야기하는 예언의 은사를 소수의 성도들에게 주었고 그 중 한 분이 박관준 장로님이십니다. 그는 의사였고, 믿음이 아주 투절한 분이었습니다.
그는 일본에 임한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미리 알았고, 그 내용은 일본 당국에 알려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일본으로 가는 데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가 일본말을 잘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를 놓고 주님 앞에 기도한 끝에 응답으로 만나게 된 분이 일본어를 잘하는 안이숙이란 사모님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일본 국회의사당으로 들어갔습니다. "일본이 회개하지 않으면 6년 안에 하나님이 유황불을 비같이 쏟아 부어 이 나라를 멸망시킬 것이오" 큰소리로 예언했습니다. 그런 결과로 그들은 감옥에 들어가 모진 고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예언이 얼마나 기가 막히게 떨어졌는지 6년 후에 그 나라 히로시마에 가공할 만한 원자폭탄이 떨어져 진짜 유황 불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특별한 시기, 특별한 경우, 앞으로 될 일을 사전에 예언하는 은사를 주시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너도나도 예언한다고 하면서 예수 팔아먹는 예수 점쟁이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7-8절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8)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②"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섬김이란 원어는 '디아코니아'인데 여기에서 우리가 쓰는 영어로 집사라는 말이 이 말입니다.
행6장에 보면, '가난한 자와 병든 자와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종사하는 일을 위해 일곱 집사를 선택했습니다. 그 대신 사도들은 전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전하는 일에만 전념하기로 했습니다.
행6:3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그러니까 집사의 선택의 기준이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딤전3장에 보면, 단정하고 일구이언을 행치 않고 술에 인 박이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하고, 여집사는 단정하고 참소치 않고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딤전3:13절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
그렇다고 해서 집사 직분을 받은 자만 섬기는 일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섬기는 일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고 주의 종을 섬기고 성도들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고 섬겨야 합니다. 신앙생활의 모범답안지는 섬김입니다. 섬김을 잘 하는 자들이 복을 받습니다. 주님도 말씀하시기를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루는 인도의 수녀 테레사에게 한 사람이 와서는 "수녀님, 수녀님은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은 돕지 않고 자기만 편안하게 사는 것을 보면 속상하지 않습니까? 시기심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그때 테레사 수녀는 이런 유명한 대답을 했습니다.
"아닙니다. 허리를 굽힌 채 섬기며 사는 사람에게는 위를 쳐다볼 겨를이 없답니다." 그렇습니다. 겸손한 자세로 섬기는 사람은 자신과 다른 사람을 비교하려고 들지 않습니다. 따라서 속상할 이유가 없습니다. 마음에 상처를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저 묵묵히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섬기는 일에만 힘쓰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곧 섬김의 지혜입니다.
③"혹 가르치는 자는 가르치는 일로" 지금 교회에서 말하는 교사를 말합니다. 헬라어로는 '디다스 칼로스'라는 말로, '옳은 것을 가르치는 자'라는 말로, 아무 것이나 가르치는 자가 선생이 아니라 옳은 것을 가르치는 자가 선생입니다.
여러분! 세상에 가장 옳은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생명을 살리는 일입니다. 영혼을 살리는 이 일보다 더 급한 것도, 더 귀한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가르치는 자가 먼저 많이 알아야 합니다. 준비해야 합니다. 기도하고 말씀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할/
④권면의 은사를 말하고 있습니다. "권위 하는 자면 권위 하는 일로" 신앙의 약한 자, 시험에 든 자, 낙심에 빠진 자에게 권위 하는 직책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로 받아야 합니다. 권면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인간의 감정 가지고 하면 서로 상처만 줍니다. 권사님들은 이 권면의 은사를 받아야 합니다.
⑤구제의 은사를 말하고 있습니다.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구제란 남에게 주는 것이기 때문에 잘못하면 아무렇게나 주기가 쉽습니다. "얻어먹는 주제에 무슨 잔소리야!" 이런 마음으로 주면 받고도 욕합니다. 성실한 마음으로 주어야 합니다. 성실함으로 하라는 것은 보답이나 대가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는 것입니다. /할/
⑥다스리는 은사를 말하고 있습니다.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목사와 장로를 말합니다. 부지런함으로 다스리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다스리는 자가 다른 방법으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모범을 보이고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잠27:23절 "네 양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 떼에 마음을 두라"
⑦"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가버나움에 한 백부장이 있었습니다. 그의 종이 중풍 병에 걸렸습니다. 드러누워서 꼼짝도 못하고 괴로워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백부장의 마음은 몹시 아팠습니다.
때마침 예수님이 가버나움으로 찾아오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하인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손수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긍휼의 은사가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주님은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하인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긍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남을 불쌍히 여기며 도와주는 자가 인색한 마음으로 부득이, 마지못해 한다면 상대방은 불쾌하게 됩니다. (친구에게 인색한 마음으로 떡을 주면, 떡을 잃고 친구도 잃어버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런 모든 은사들은 <주신 은혜대로, 믿음으로 분량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절대로 무리하지 말고 순리대로 해야 합니다. 또한 은사를 감당함에 있어서 겸손해야 하며 모든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교회에 덕을 세워야 합니다. /할/
▶우리는 본문에서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①은사는 다양성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바울은 일곱 가지의 은사들을 말했습니다. 그런데 고전12장에는 은사들이 아홉 가지로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은사의 숫자에는 제한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은사는 이외에도 얼마든지 더 있을 수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 말하는 의도는 은사가 다양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은사를 주셨든지 간에, 받은바 은사대로 각자가 맡은 소임에 충성을 다하면 되는 것입니다.
▶동화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하루는 당나귀가 밖에서 열심히 일하고서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때마침 그 집의 강아지가 주인의 무릎에 앉아서 재롱을 떨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당나귀는 샘이 났습니다. 자기는 뼈 빠지게 일만 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강아지는 일도 하지 않고 주인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나귀는 자기도 주인의 사랑을 받아야 되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어느 날 좋은 기회가 왔습니다. 주인은 마당에 홀로 앉아서 한가하게 부채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강아지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틈을 놓칠세라 당나귀는 주인에게로 얼른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강아지처럼 자기의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그 육중한 몸을 날려서 주인의 무릎 위로 껑충 뛰어올랐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가련한 당나귀는 영문도 모른 채 그 날 주인에게 죽도록 얻어맞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괜스레 다른 사람의 은사를 흉내 낼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떠한 은사를 주셨든지 간에, 받은바 은사대로 각자가 맡은 소임에 충실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우리에게 은사를 주신 하나님을, 우리의 주인되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②은사의 소중성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은사를 주신 분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은사를 주실 때 마구잡이로 무턱대고 주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라고 했습니다.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가장 적합한 직분을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직분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가장 적절한 은사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다 소중합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일곱 가지 은사를 어떻게 사용해야 되는가를 일일이 설명해 주었습니다.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그 이상이면 거짓 예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하라고 했습니다. 왜 바울이 똑같은 단어를 반복했습니까? 설명할 말이 얼른 생각나지 않아서 그렇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섬김의 정신이 변질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섬긴다고 하면서 자기가 드러난다든지, 또는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려는 자세를 취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섬김은 어디까지나 섬김으로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바르게 가르쳐야 합니다. 자기의 잘못된 생각을 가르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가르치는 자가 잘못 행하는 것처럼 배움을 받는 자도 역시 잘못된 길로 행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권위 하는 자면 "권위 하는 일로" 하라고 했습니다. 욥의 세 친구들을 욥이 어려운 곤경에 처했을 때 그를 위로하러 왔습니다. 위로하러 왔으면 위로해 주어야 하는데 오히려 욥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말았습니다. 권위 하는 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권위 하는 일로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물질의 주인이 아닙니다. 물질의 주인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청지기에 불과할 뿐입니다. 청지기는 주인의 뜻대로 성실한 자세로 임해야 합니다. 마치 자기가 물질의 주인인 것처럼 받는 사람을 깔본 다는지, 또는 인색한 태도를 취해서는 안 됩니다.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다스리는 자는 본이 되어야합니다. 다스리는 자가 부지런해야지 함께 일하는 사람도 역시 부지런할 수 있습니다. 그저 팔짱만 낀 채 말로서만 지시하려고 들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이 먼저 앞장서서 솔선하는 본을 보여야 합니다.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죄악 가운에 있는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서 높고 높은 별을 넘어서 낮고 낮은 이 땅으로 직접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억지로 하신 것이 아닙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언제나 즐거운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책임감 때문에 마지못해서 하는 듯한 인상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지금 사도 바울의 의도가 무엇입니까? 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로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를 일일이 설명을 했습니까? 은사는 하나같이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하나라도 소홀히 여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하고가 없습니다. 똑같이 소중합니다.
③은사의 섬김 성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사를 주신 것은 우리 자신의 유익을 도모하라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 은사를 가지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섬기라는 것입니다. 다른 지체들을 섬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일곱 가지 은사들을 살펴보면 다 섬기는 것입니다. 예언은 말씀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섬기는 일이야 말할 것도 없습니다. 가르치는 일도, 권위하는 일도, 구제하는 일도, 다스리는 일도, 긍휼을 베푸는 일도 궁극적으로는 모두 다른 지체들을 섬기기 위한 것입니다.
▶어느 부자 집의 주인이 칠순을 맞이하여 잔치를 며칠 앞두고서 집안에 있는 모든 동물들이 모여 회의를 했답니다. 주인의 잔칫상에 올라갈 동물을 뽑기 위해서입니다. 과연 누가 순교할 것인가? 그것이 그 날의 의제였습니다.
의장 동물이 먼저 개에게 물었습니다. "얘, 멍멍아! 요즈음 들어서 주인의 기력이 몹시도 쇠하여진 것 같은데, 네가 주인의 보신을 위해서라도 탕으로 올라가 주면 어떻겠느냐?" 그 소리를 듣고 개가 가만히 생각하더니 "내가 주인을 위해서 희생을 하는 것은 좋은데, 내가 없으면 누가 이 집의 재산을 지켜 주겠니? 주인을 도둑으로부터 보호해 줄자가 누구겠어? 그러니 내가 없으면 안 될 것 같아." 의장 동물은 개의 말을 듣고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이번에는 닭에게 "얘, 닭아! 네가 삼계탕으로 주인을 좀 대접해 드리면 어떻겠느냐?" 그러자 닭이 "무슨 소리야? 내가 없으면 누가 매일 알을 낳아서 주인의 영양을 보충해 줄 수 있겠어? 그리고 내가 없으면 누가 주인에게 일어날 시간을 가르쳐 줄 수가 있겠어? 나는 안 돼!"
어쩔 수 없이 의장 동물이 이번에는 소에게 "얘, 소야! 아무래도 네가 갈비로 주인을 대접해 드려야 하겠다. 그래도 잔칫상에는 소고기가 제일이지 않느냐?" 그러자 소도 역시 "내가 없어봐. 이 집의 이 많은 농사를 누가 짓겠어? 나는 안 돼!"
다른 동물들 역시 다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런저런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희생을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동물은 돼지밖에 없었습니다. 의장 동물은 마지막으로 돼지에게 "얘, 돼지야! 네가 삼겹살로 주인을 대접해 드리면 어떻겠느냐?" 그러자 돼지가 가만히 생각하더니 비장한 각오로 "꿀꿀, 알겠다. 죽을 놈은 나밖에 없네. 알았으니까 가마솥에 물이나 끓여라."
여러분! 우리의 모습을 어떠합니까? 우리도 이런 저런 변명을 늘어놓으며 섬김의 자리를 피하려고 들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사를 주신 것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섬기라고 주신 것입니다.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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