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강》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롬 12:9-13)
로마서 12장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가르치는 장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들의 실천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1-2절은 먼저 하나님께 올바른 예배를 드리면서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3-8절까지는 믿음의 분량 따라 주신 은사가지고 교회를 섬기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봉사하는 사람이 반듯이 알아야 할 기본적인 원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봉사한다고 무조건 다 봉사는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실컷 봉사해 놓고 입으로 자랑의 말을 합니다. 어떠한 사람은 봉사를 한다고 자기만 알아 달라는 교만한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봉사하면서 자기 자신 아니면 아무도 못한다고, 내가 아니면 교회 문 닫는다고 착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봉사는 겸손한 마음으로 해야 하고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해야 합니다. 운동장을 뛴다고 해서 다 경주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경기 규칙대로 뛰어야 하듯 교회 안에서도 봉사할 때 어떤 원칙이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이 원칙이 12가지가 나옵니다. 12가지를 크게 넷으로 묶으면 ①사랑으로 봉사하라! ②열심히 봉사하라! ③어려워도 봉사하라! ④나누면서 봉사하라!
오늘 이 말씀을 잘 배워서 우리 모두 은혜로운 봉사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9절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요일3:18절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사랑에는 두 가지 요소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밖으로는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안으로는 진실함이 있어야 합니다. 이 두 가지 요소가 겸비될 때 우리는 비로소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 바로 앞에서는 은사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씀을 해 주었습니다. 은사는 다양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는 각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은사는 소중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은사는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됩니다. 은사는 섬기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은사를 주셨습니까? 우리 자신을 드러내라고 주신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섬기며, 지체들을 섬기라고 우리에게 은사를 주셨습니다.
"사랑은 거짓이 없나니" 거짓 없는 봉사, 진실한 봉사를 하라고 말합니다. 거짓 없는 사랑은 꾸미지 말고 가장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원문의 뜻은 '배우가 무대에서 연기하는 것처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거짓은 위선과 통합니다. 위선은 가면을 뜻합니다. 가면은 원래 배우들이 사용합니다. 다시 한번 사랑엔 거짓이 없다는 말은 사랑의 생활을 가면을 쓰고 하는 연극처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사랑한 것처럼 입맞춤함으로 원수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이것이 속임수요 거짓 사랑입니다. 사랑은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이것이 사랑의 표준입니다.
골3:14절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고전13:6절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오늘 본문의 "사랑에는 거짓이 없다"는 말의 개념을 자세히 생각하면 '사랑은 변질되기가 쉬운'것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사랑은 조금 잘못하면 위선적인 사랑으로 행위만 남고 그 의미는 상실하기가 쉽습니다. 사랑은 처음에 가졌던 동기를 끝까지 지속하기가 어렵습니다. 처음에는 주는 사랑으로 시작했지만 존중을 받기 위한 사랑으로 수정됩니다.
그래서 계3장에서는 에베소 교회에 대하여 '처음 사랑을 찾으라'고 주님을 말씀하십니다. 즉 원점으로 돌아와서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생각하면 사람의 순수한 동기가 다시 살아납니다. 사랑은 진실해야 합니다.
▶1853년 '크리비아' 전쟁 때, 영국과 터키 연합군이 러시아와 싸우게 되었습니다. 연합군 쪽에서 부상병이 많이 생기고 설상가상으로 호열자가 발생하여 그 환자 수가 무려 1만3천명에 달하고 그 반수 이상이 죽어갔습니다.
이때 그 유명한 백의의 천사 '나이팅게일'이 34명의 간호원을 데리고 부상병을 치료합니다. 그들은 주야를 가리지 않고 침식을 잊고 옷을 빨아주고 침구를 고쳐주고 죽음의 경지에서 헤매는 환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위로하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특히 나이팅게일은 항상 사랑과 동정의 미소를 머금고 희생적 사랑을 쏟았습니다. 그때 부상병들이 이구동성으로 <우리는 나이팅게일의 그림자가 지날 때마다 거기에 입 맞추었다. 그리고 만족한 기분으로 다시 침대에 누었다>고 했답니다.
어떤 부상병들은 자신의 집에 보낸 편지에서 "그녀가 이곳에 오기 전에는 저주의 소리로 가득한 병실이 그녀가 온 후로는 교회의 거룩한 예배의 처소가 되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여러분, 한 여인의 거짓 없는 사랑과 봉사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위로해 주고 격려해 주었는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사랑은 기독교 윤리의 전부를 표시하는 낱말입니다. 기독교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믿음과 사랑'입니다. 사랑을 크게 둘로 나눈다면 아가페와 에로스 사랑이 있습니다. 신의 사랑과 이성과의 사랑입니다. 아가페 사랑은 조건이 없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에로스 사랑은 철저히 조건을 따진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이기적인 사랑일 수도 있고 거짓의 가면을 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가페의 사랑은 자기의 목숨까지도 준 사랑임으로 절대 거짓이 없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이 아가페 사랑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랑을 우리는 나누어주는 일에 앞장을 서야 합니다.
"사랑은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악한 것을 거부해 버리고 선을 받아드리는 것이 사랑입니다. /믿/ '벵겔'은 <악을 미워하지 않는 사람은 참으로 선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했고, 탈무드는 <슬퍼하는 자들 가운데서 기뻐하지 말고 기뻐하는 자들 가운데서 슬퍼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상가 집에서 슬퍼 애통하는 상주 앞에서 소리내어 웃어대는 것, 정말 주책없는 사람입니다. 주책이란 '주님이 책임을 못 지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믿거나 말거나/
어떤 노인이 결혼식장에서 통곡을 합니다. 그 이유를 물어보았더니 '신부가 죽은 막내 딸 같아서 운다'는 것입니다. 즐거워하는 자와 함께 즐거워해야 하고 우는 자 앞에서는 함께 슬퍼해야 합니다. 여러분,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야 합니다.
▶유명한 무디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하루는 무디가 집에 돌아오니 어떤 부인이 찾아와 울고 있습니다. 주일학교에 다니는 딸이 죽었으니 자신의 집에 좀 가자는 것입니다. 그 집에 가보니 그 남편은 술에 취해 누워있고 그 옆에는 죽은 딸이 있었다고 합니다.
전후 사정을 들어보니 부인은 매일 삯빨래하고 딸은 강가에서 땔나무를 주어서 근근히 살아가는데 남편은 날마다 술을 먹고 행패를 부리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 날은 딸이 나무를 줍다가 발이 미끄러져서 그만 물에 빠져 죽었다는 것입니다. 묘지도 없고 장래 비도 없다고 하소연합니다. 무디는 그 아이의 관을 사기 위해 치수를 재고 돌아왔습니다.
집에 돌아온 무디는 이런 안타까운 이야기를 가족들에게 했더니 그의 딸이 "아버지 내가 만일 그렇게 죽었다면 아버지는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무디는 "내 마음이 터질 것이다"고 대답하자 딸이 "아버지 그 소녀를 나로 알고 장사해 주세요" 무디는 어린 딸의 말에 크게 감동을 되어 정말 자신의 딸처럼 터지는 마음으로 장례식을 치러주었다고 합니다.
사람은 감정의 동물입니다. 그래서 고전13장은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연약한 인간들은 악을 사랑하기도 하고 죄를 사랑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단호히 악을 미워할 줄 알아야 하고 선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인도의 애국자 간디가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내가 한 마디의 거짓말을 해서 내 나라가 독립이 된다 하더라도 나는 거짓말을 할 수 없습니다." 왜 그러냐고 기자가 물었더니 "거짓말로 세운 나라는 곧 망하게 되어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사랑은 진실입니다. 그리고 악을 미워하고 선을 따라야 합니다. 교회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성도의 봉사생활입니다.
▶10절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눅18장을 보면 세리와 바리새인이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들은 따로 서서 기도를 했습니다. 인간적인 견지에서 본다면 세리가 죄인이고 바리새인이 의로운 사람입니다. 바리새인은 일주일에 이틀씩 금식을 했습니다. 소득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깨끗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세리가 바리새인보다 더 의롭다하심을 받았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바리새인의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그의 마음속에는 전혀 형제의식이 없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는 세리를 무시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우리 모두는 한 형제라고 하는 형제 의식 곧 우애가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형제에 대한 사랑은 안으로는 우애이고, 밖으로는 존경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 몸에는 많은 지체들이 있습니다. 그 지체마다 각기 나름대로의 고유한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생각을 해 봅시다. 눈이 아무리 밝게 잘 본다 할지라도 눈으로 음식을 먹을 수는 없습니다. 귀가 아무리 잘 듣는다고 할지라도 귀로 냄새를 맡을 수는 없습니다. 냄새를 맡는 것은 코에 맡겨야 합니다. 음식을 먹는 일은 입에 맡겨야 합니다. 그러므로 각 지체마다 서로의 역할을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다른 지체를 존경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형제를 사랑하여 우애하고" 여기서 형제는 '골육지친'을 말합니다. 형제 사랑은 헬라어로 '필로 스톨케'입니다. 이 말은 친구의 사랑인 '필리아'와 핏줄로 맺어진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인 '스톨케'의 두 사랑을 합친 사랑입니다.
형제 사랑은 친구의 사랑인데 피로 맺어진 형제적인 친구사랑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피로 맺어진 한 형제임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는 물론 사람들은 한 형제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직분을 받은 사람이나 평신도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믿음 안에서 형제라고 하는 뜨거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만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주의할 것은 형제를 대할 때 인간적인 어떤 조건을 가지고 조금이라도 무시해서는 아니 됩니다. 많이 배웠다고, 돈이 많다고, 배경이 좋다고 의시 대며 형제를 무시하면 안 됩니다. 한 가정에서도 형제가 우애하면 부모는 마음이 기쁩니다. 형제간에 우애하는 것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법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안에 한 형제된 우리가 서로 우애하고 지내면 우리 주님이 보시고 기뻐하십니다. /믿/ 주님은 이웃 사랑을 새 계명으로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존경하기를 먼저 하라" 사랑은 존경이 따라야 합니다. 존경이 없다면 그 사랑은 식은 것입니다. 남을 존경하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겸손해야 합니다. 또 형제의 사랑과 우애도 존경도 내가 먼저 해야 합니다. <형님 먼저, 아우 먼저> 흐뭇한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먼저 사랑하고 우애하고 존경합시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칭찬을 구하거나 기다리지 말고 먼저 다른 사람을 칭찬하고 존경합시다. '항상 서로 먼저'라는 생각을 할 때 주의 사랑은 우리 가운데 영원히 꽃 피우게 될 것입니다. /할/
▶문둥이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성 따미엔'신부은 본시 벨기에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님은 대단한 갑부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호의호식하면서 얼마든지 일평생을 편안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에게 물려준 모든 재산을 정리해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리고는 혈혈단신으로 하와이 군도의 한 섬인 '몰로카이'로 건너갔습니다.
그 당시의 몰로카이섬은 절망과 죽음의 섬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문둥이들만 그 안에 모여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따미엔은 그들의 친구가 되기 위해서 그곳으로 건너간 것입니다. 그의 마음은 몹시 순수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저 사람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제대로 전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저들의 마음에 소망을 심어줄 수 있을까?> 그의 마음은 자나깨나 그러한 생각으로 불타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어두운 밤길을 걸어서 자신의 움막으로 돌아오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문둥이들이 나누는 대화를 엿듣게 되었습니다. "자기야 몸이 성하니까 그런 배부른 소리를 하지. 자기도 우리처럼 문둥병에 걸려서 날마다 몸이 섞어 들어가 봐! 어디에서 소망을 찾고, 어디에서 하나님을 찾겠다는 말을 할 수가 있겠어!"
그 말을 들은 따미엔은 몹시도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움막에 돌아와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저들의 말이 맞습니다. 제가 진정으로 저들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저들과 똑같은 모습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러니 저에게도 문둥병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저를 위하여 그 귀하신 몸을 버리지 아니하셨습니까?"
간절히 기도하는 가운데 그는 마음의 결심을 굳혔습니다. 그는 문둥이의 고름 섞인 피를 자신의 몸에 수혈을 했습니다. 얼마가지 않아서 그의 몸도 감각이 무디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눈썹이 빠져나갔습니다. 손가락이 오그라들더니 그 마디가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에게도 죽음의 병이 찾아온 것입니다.
그는 문둥병에 걸린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 진정으로 감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제야 비로소 제가 저들 앞에서 '우리'라는 말을 떳떳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의 기도를 들으시고 저에게 문둥병을 허락해주신 것을 진실로 감사를 드립니다." 그는 나가서 만나는 사람마다 이렇게 외쳤습니다.
"하나님은 문둥병이 걸린 우리들도 지극히 사랑하십니다." 그 모습을 보고서 모든 문둥이들은 마음의 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그리고 따미엔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절망과 죽음의 섬이었던 몰로카이가 소망과 생명이 넘치는 섬으로 바뀌어지게 되었습니다.
▶11절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라" 사랑의 행동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부지런해야 사랑할 여유도 있고, 봉사할 여유도 생깁니다. 부지런해야 줄 것도 있습니다. 부지런해야만 집안 일도 다 해 놓고, 자신의 일도 다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 봉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게으르면 신앙생활은 못합니다. 게으른 사람은 예배 참석하기가 어렵습니다. 게으른 사람은 살아생전에 새벽기도 한번 못해보고 하나님 앞에 설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 새벽기도 많이 했니? 물으시면 할말이 없습니다.
부지런히 성경 읽읍시다. 부지런히 기도합시다. 부지런히 봉사하고, 전도합시다. 게으른 자는 내일로 미룹니다. ▶마귀의 작전을 보십시다. 내일로 미루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라 그러나 내일 믿어라, 봉사하라, 전도하라, 기도하라, 그러나 오늘 하지말고 내일부터 하라>는 것이 마귀의 작전입니다. 내일이면 늦습니다. 신앙은 오늘 이 시간 현재가 귀한 것입니다.
▶히말라야에 가면 야맹조라는 새가 있습니다. 낮에는 신나게 놀고 즐기다가 밤에는 잘 둥지가 없어서 다른 새의 둥지에서 자는데 밤새 구박을 받는 답니다. 그는 서러운 눈물을 하염없이 흐느끼면서 <내일이면 집을 지으리. 내일이면 집을 지으리.> 구슬프게 노래한답니다. 그러나 야생조는 자신의 일생이 다 가도록 집을 짓지 못했답니다. 왜 그렇습니까? 게으르기 때문입니다.
잠24:33-34절 "네가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니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자" 오늘 제목입니다. '열심을 품고'란 가슴에 불을 안고 사는 것을 말합니다. 신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성령이 충만하여 가슴이 뜨거워서'라는 의미입니다. '성도는 자기 속에 불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한 학자도 있습니다.
뜨거운 열심은 은혜 받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열심을 내면 은혜 받은 사람이요, 열심히 식어지면 은혜에서 떨어진 사람입니다. 그만큼 우리의 믿음은 열심과 떼 놓을 수가 없는 관계입니다.
한국의 유명한 신학자, 한철희 박사는 '기독교는 열심의 종교다' 라고 했습니다. 그는 자기 신학을 가리켜 '나의 신학은 열심의 신학'이라고 말했습니다. 맞습니다. 열심을 빼 버리면 우리의 신앙은 설자리가 없습니다. 열심이 없으면 건물이 아무리 아름다운 교회라고 해도 이미 죽어버린 교회입니다.
우리 주님은 열심을 좋아하시고 미지근한 것을 싫어하십니다. 계3:15-16절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 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열심이 있는 기도, 열심이 있는 찬송, 열심이 있는 봉사'가 뭐가 대도 크게 됩니다. /믿/ 그런데 인간적인 열심을 품고 하면 쉽게 식어 버립니다. 본문의 '열심을 품고'는 성령이 주시는 불타는 열심을 말합니다. 성령으로 뜨거워진 열심은 절대로 식지 않습니다. /할/
▶성경을 보면 잘못된 열심이 있습니다.
①무지한 열심(롬10:2-3)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신의 의를 내세우려는 열심, 무지한 열심입니다. 한때 바울도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열심히 예수님을 핍박했습니다.
②미신적인 열심(왕상18-19장)도 있습니다. 바알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400명이 그들의 우상에게 제사 할 때 아침부터 저녁까지 뛰어다니며 큰소리로 그들의 신을 부르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기운이 지치고 온 몸이 상하여 피가 쏟아질 정도로 "바알이시여! 바알이시여! 저희 기도를 들으소서! 불을 내려 재물을 태우소서!"를 외쳤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열심은 하나님을 격노케 했습니다. 여러분, 지식이 따르지 않는 미신적인 열심은 하나님을 격노케 합니다. /믿/
③위선적인 열심이 있습니다. 눅18:11-12절에 보면, 바리새인은 자기들이 행한 일을 자랑합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명성을 얻는 일에는 열심이나 좋은 일꾼 되기에는 흥미가 없는 위선적인 열심입니다. 자신의 뜻대로 될 때는 열심이나 자신의 뜻에 안 맞으면 그만 두어버리는 위선도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는 누가 보던지 아니 보던지 꾸준히 힘써 일해야 합니다. 만인이 알아줘도 하나님이 몰라주시면 그것은 큰 실패입니다. 만민이 다 몰라줘도 하나님 한분만 알아주시면 성공한 것입니다. /믿/
④열심은 대단한데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면서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가 있습니다. ▶잠16:28절 "말장이는 친한 벗을 이간하느니라." 하나님과 우리의 원수는 교회를 파괴시키고 이간질시키는데 백방으로 노려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주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마5:9절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고후5:18절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11절 이하의 본문은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구원을 이루어 나가는 과정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열심으로 천성을 향한 순례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 돈버는 일에만 열심 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열심을 내야합니다.
①열심히 기도합시다. 열심 있는 기도는 응답을 받습니다. 엡6:18절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라"
②열심으로 말씀을 전하고 전도합시다. 딤후4:2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③열심으로 사랑합시다. 벧전4:8절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④열심으로 봉사합시다. 본문은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⑤열심으로 모이기에 힘씁시다. 행2:46절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모일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모일 때 역사는 일어납니다. 모일 때 문제가 해결되고 모일 때 믿음이 충만해집니다. 주님은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⑥죄를 회개하는 일에도 열심히 해야 합니다. 계3:19절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할/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안으로는 열심, 밖으로는 충성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종, 노예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롬1:1절에서 자기 자신을 가리켜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이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종은 주인을 어떻게 섬겨야 합니까? 부지런해야 합니다. 게으를 수가 없습니다. 한마디로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옛날 어느 나라 왕에게 한 충성스러운 신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신하가 갑자기 중병에 걸렸습니다. 그 신하는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왕은 그를 찾아갔습니다. 왕은 안타까운 듯이 그를 바라보면서 "그대는 지금까지 내게 충성을 다했네. 그래서 내가 그대에게 마지막으로 무엇인가 보답하고 싶네. 그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해주게나. 내가 다 들어주겠네." 그러자 그 신하는 숨을 헐떡거리면서 "폐하, 제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미처 못한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니 단 며칠이라도 좋습니다. 제 목숨을 좀 연장시켜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왕은 안타까운 듯이 "여보게, 미안하네. 내가 막강한 권세를 가지고 있는 왕임에는 틀림이 없네. 그러나 그 일만큼은 내가 할 수 없네. 그 일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자 그 신하는 한숨을 쉬면서 "폐하, 저는 지금까지 너무나 어리석었습니다. 저는 이 세상의 왕을 섬기는 일에만 바빴습니다. 하늘의 왕을 섬기는 일에는 너무나도 소홀했습니다. 이제 곧 제가 하늘의 왕 앞에 서야 하는데 면목이 없어서 떨리는 심정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돈버는 일에는 그동안 열심이었습니다. 사업을 하는 일에는 열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과연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는 얼마나 충성스럽게 섬겼습니까? 말씀을 통해서 우리 자신들을 한번 되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롬14:7-8절에서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사도 바울의 고백이 우리에게도 있기를 바랍니다. /할/
▶12절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어려워도 봉사하라는 원리입니다. "소망 중에 즐거워하라" 소망이 없으면 그 삶은 끝나버린 삶입니다. 농부는 가을에 풍성한 수확을 바라보며 삽니다. 사업가는 사업의 번창을 바라보며 삽니다. 직장인들은 진급의 소망을 둡니다. 우리 교회도 큰 소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인간적인 소망은 자꾸만 변합니다. 사람도 변하고, 시대도 변하고, 물질도 변하고, 인심도 변하고, 사업도 변합니다.
어린아이는 부모를 철석같이 믿지만 언제 가는 부모님이 이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늙은 부모는 자식을 철석같이 믿는데 그 자식도 장가가면 변합니다. 이런 사실들은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할 수밖에 없으며 세상에 소망을 두고 믿을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런즉 썩어지고 변화되는 이 땅의 것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영원하시고 변함 없으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합니다. /아멘!/
12절 '중'반절에 "환난 중에 참으며" 여러분, 환난이 왔습니까? 참으십시오, 환란은 우리의 신앙을 더욱 더 하나님께로 달려가게 하는 직선 코스입니다. 환난을 통하여 이루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요셉은 큰 환난을 통하여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어떤 환난이라도 꼭 참으십시오, 바울은 로마서에서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게 해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도에 항상 힘쓰며" 기도에 항상 힘씁시다. 여러분, 어떤 봉사도 기도보다 앞서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제일 기본은 기도입니다. 기도 없이는 아무것도 안됩니다. 그러나 기도하면 우리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들어주십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아멘!/할/
본문을 기록한 사도 바울이 2차 전도여행 중에 빌립보에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그 성에는 점치는 귀신들린 여종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 여종의 주인들이 자기들의 이익이 끊어진 줄 알고서 바울과 그의 동역자 실라를 끌고서 관가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는 바울과 실라가 이상한 풍속을 전하면서 빌립보 성을 요란케 한다고 고소를 했습니다. 그 때문에 바울과 실라는 옷을 찢기고 벗기어졌습니다. 매도 많이 맞았습니다. 그들은 깊은 옥에 가두어졌습니다. 발에는 든든히 착고가 채워졌습니다.
그 극심한 환난 속에서 바울과 실라가 어떻게 했습니까? 밤중에 그들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그들은 환난 가운데 기도와 찬미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발생했습니다. 홀연히 큰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옥터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옥문이 열렸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매인 것도 다 풀어졌습니다.
간수는 놀랐습니다. 죄수들이 다 도망간 줄 알고 검을 빼들고 자결하려고 했습니다. 그때 바울이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너의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간수와 그의 온 집이 세례를 받고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는 바울과 실라를 데려다가 매 맞은 곳을 씻어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집에 초청해서 음식을 차려주었습니다. 그는 자기와 온 집이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을 크게 기뻐했습니다.
후에 사도 바울은 그 때 일을 회상하면서 빌립보 성도들을 향해서 이렇게 권면을 했습니다. ▶빌4:6-7절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여러분, 환난에 처해 있습니까? 그 환난에 너무 집착하지 마십시오. 그 일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십시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평강을 주실 것입니다. 그 뿐입니까? 어느 순간엔가 우리는 우리가 당하고 있는 환난에서 벗어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할/
▶13절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바울이 오늘 본문을 기록할 당시의 성도들은 많은 환난을 겪고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신앙 때문에 자기의 산업을 빼앗겼습니다. 재산을 몰수당한 것입니다. 더러는 핍박을 받아서 감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더러는 마을에서 추방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당시의 세계 제일의 도시였던 로마로 몰려왔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을 염두에 두면서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라고 권면을 했습니다.
실제로 초대교회 성도들은 어려운 일에, 구제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힘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있는 자는 자기의 집이나 밭을 팔아서 그 판 것을 사도들의 발 앞에 갖다 놓았습니다. 그러면 사도들은 그것을 각자의 필요를 따라서 나누어주었습니다.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해주십시오. 주님은 주는 자가 복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쓸 당시만 해도 예수 믿는 사람 대부분이 극빈자였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는 생활을 했습니다. 초대교회가 유물 상통하는 교회였습니다.
또 이 말씀은 성도들에게 교역자들의 가정을 돌아보라는 말씀입니다. 갈6:6절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어려운 자를 돕는 순간 하나님이 귀하게 보십니다.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손이라고 하니 좀 거창합니다만 나그네란 뜻입니다. 또 본문의 이해는 손이라는 말은 당시 예수 믿는 다고 박해를 받아 흩어진 형제로써(히13:2), 또 복음 증거를 위해 나그네 된 자들을 가르칩니다.
본문 13절의 말씀은 한마디로 나누어 보면 봉사하라는 말입니다.
▶'벤다이크'의 <대저택>의 소설입니다. 꾸며낸 이야기지만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주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어떤 부자가 천국에 갔습니다. 천사가 인도하는 데로 자신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아주 작은 오두막이 나타났습니다. 보기에도 민망한 그 오두막이 그가 살아야 할 집이었습니다.
그는 너무나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집 옆에는 한참 천사들이 으스스한 대저택을 짓고 있었습니다. 이 부자는 누구의 집이냐고 물었습니다. 자신의 한 동네에 살고 있던 초라한 의사의 집이라고 했습니다.
자기에 비해 형편없는 이 사람이 어떻게 저런 저택에서 살 수 있느냐고 항의 조로 말했습니다. 천사가 부자에게 말을 하기를 "당신도 알다시피 지금 짓고 있는 건축자재는 모두 그 집에서 살 본인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보내온 것들입니다. 당신은 너무 적게 보내었지요. 당신이 보낸 자재만으로는 이 오두막집의 지붕도 제대로 씌울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저 대저택을 보시오, 당신이 잘 아는 의사의 방인데 그는 평생 동안 하나님과 남에게 나누어주는 것을 기쁨으로 알고 살았습니다. 그가 하나님과 남을 위해 쓴 것이 하나도 빠짐없이 이곳에 도착하여 대저택을 짓고도 재료가 남는답니다." 뭔가 우리 가슴에 와 닿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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