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롬1:17
주신 말씀 롬1:17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함께 은혜받는 귀한 시간 되기 원합니다.
몇 년 동안 절기 설교를 했는데 남는 것이 없는 것 같아 금번 맥추 감사절에 구약에서 맥추절과 관련된 구절을 찾아 설교하려 하다가 마음을 돌려 새로 시작하는 마음으로 로마서를 통해 믿음의 근본을 다시 점검하려 합니다.
기도 많이 하고 예배 잘 참석하고 헌금 많이 하고 하면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하면서 교회에서 직분을 주고 직분을 받으면 무슨 계급장 단줄 알고 나 이번에 권사 땄다 장로 안수 받았다 하며 교만기가 나타납니다.
기도하고 성경공부하고 예배하는 것은 신앙생활을 잘하려고 배워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물론 하나님을 경배하는 예배가 덜 중요하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것 너무 너무 중요합니다.
바른 신앙고백과 올바른 신앙생활이 잘 융합되어 조화를 이룸으로 아름다운 기독성도의 꽃을 활짝피워 아름다운 결심을 맺어야 합니다.
기도한다고 성전에서 밤을 세우기는 하는데 볼 때마다 졸거나 잠자거나 타교단 목사의 듣고 있는 것은 영적으로 매우 위험합니다.
목사가 설교하고 나가서 나이든 성도들에게 반말짓거리나 하며 성도들에게 위로의 말과 기도했다고 식사나 대접을 받는 목회자도 위험합니다.
이미 상급을 받았기에 하늘에서 상급이 있을지 궁금합니다.
어느 목사님의 글에 이런 내용이 있어 인용합니다.
마틴 루터는 ‘내가 정말 구원 받았는가?’ 하는 문제로 벽을 바라보고 앉아서 한없이 고뇌하였습니다. 그는 로마의 성 베드로성당에 있는 ‘참회의 돌계단’을 무릎으로 기어올라 무릎이 온통 벗겨지고 피투성이가 되도록 회개하였지만 그 심령에 구원의 확신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어둡고 지루한 영혼의 방황 끝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1:17)는 말씀을 받고 그 영혼이 깨달음을 얻고 쉼을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어거스틴은 타락과 방종의 죄악 속에서 그 영혼이 고갈 상태에 이르렀을 때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13:13-14)는 말씀을 받고 그 영혼이 자유함을 얻어서 글을 썼다고 합니다. |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음에 대해 바로 알려면 로마서를 읽고 바로 깨달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로마서는 바울이 로마제국의 수도인 로마시티에 자생적으로 생긴 디아스포라 유대인 입교한 이방인 기독인들인 로마인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즉 율법적인 성도들인 구약을 따르려는 유대인 성도들과 은혜로 구원 받은 신약성도들이 혼재된 로마교회에 믿음의 기준을 제시한 서신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율법에 정통했던 바울이 구약에서 49개의 본문을 발췌해서 로마 성도들에게 가르쳐 로마서가 역사를 만들고 (HISTORY MAKING AND) 역사를 바꾸는 (HISTORY CHAINGING BOOK)책이라 하는 평을 받고 있지요.
아직 성숙하지 못한 로마 성도들에게 믿고 구원 받는 다는 것이 무엇이냐에 대해 잘 설명하므로 믿음으로 이신득의 하고 회개하고 바로 살아 이신칭의 될 만한 성도의 성화와 거룩한 생활이 뒷받침되어 조화를 이루는 삶을 살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서는 무엇이 복음인지 알려주고 확인해 주고 있는데 전체 주제는 하나님의 의(디카이오 수네 διΚαιοσύνη ϒαρ Θεοΰ)를 중심으로 전체 주제가 6개 파트로 갈라집니다.
롬1:1ㅡ3:20은 죄에 대한 문제 롬3:21-4:25은 구원에 대한 문제 롬5:1-8:17은 성화에 대한 문제, 롬8:18-39은 안전 즉 영원한 보장에 대한 문제 롬9-11장은 거부 즉 예수님을 거부한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한 문제 그리고 롬12-16장은 생활 즉 성장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오늘은 1단락 죄에 대한 문제(1:1-3:20)중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주제를 중점적으로 배워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믿음도 표현되어야 합니다. (롬1:17상)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 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라 합니다.
표현되지 않은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고백하지 않은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배 때마다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고백할 때 이미 나는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자녀가 되었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고 예수님과 동행하는 동역자가 된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의( διΚαιοσύνη ϒαρ Θεοΰ)가 무엇입니까?
한 죄인이 하나님께서 제공하신 은총을 받아들이는 그 믿음을 통하여 그 죄인의 주인되시는 하나님께 용납될 수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의는 불편부당하여 공평하고 무죄하여 깨끗한 상태입니다.
헬라세계에서 일반적으로 사회적 정의와 법률적 공의를 의라 했지만 성경에선 절대적 공의를 가지신 하나님과 관련된 의로써 하나님과의 옳은 관계를 맺고 하나님의 표준과 본성에 일치하는 것을 말합니다,
한자에서 義는 내가 (我)가 양(羊)이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어린양 예수가 의인 것입니다.
16절에서 복음은 구원을 주신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대상이 유대인이든 헬라인으로 대변된 모든 이방인이든 대상이 문제가 아니라 모든 민족 모든 백성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17절에서 복음에는 하나님으로 받은 의 즉 믿음으로 의인의 지위를 얻는 길이 제시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이신득의)
여기서 바울은 자신이 거듭된 핍박과 환난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자랑한다 말합니다.
이것은 복음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며 바로 그 안에 하나님의 의 즉 믿음으로 의인의 지위를 얻는 길이 제시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 자신의 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이 바른 관계를 맺는 길 즉 칭의의 방법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대속 제물로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고 , 그 그리스도를 통해 구속의 법을 성취하셔서 그것을 믿는 자들을 의롭다 칭해 주시는 것입니다.(이신칭의)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를 율법에 의한 칭의를 정면으로 거부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는 단 한사람도 의롭다 칭함을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롬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그러니까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는 것은 율법을 통한 응보적 의가 아닌 , 죄없으신 예수님께서 스스로 대속제물이 되시어 죽음에 이르기 까지 순종하심으로 구속의 법을 성취하신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 죄인이 얻게된 은혜로써의 의가 제시되어 있는 것입니다.
나타나서(άποΚαγύπτεται)는 άπο(~으로부터 멀리 떨어져)+Καγύπτω(덮은 것을 제거하다)는 뜻으로 복음에는 항상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며 이것이 불변하는 진리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루터는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여 베드로 성당 참회의 돌계단을 무릎이 깨질 때까지 절규하며 매달린 결과 이신득의 원리를 깨닫고 종교개혁의 기치를 높이 올려 세운 줄 믿습니다.
둘째로 택한 백성이 온전히 구원에 이를 줄 믿으라 (합2:4)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하박국 선지자의 믿음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BY HIS FAITH 이고 본문의 로마서1:17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BY FAITH살리라) 합니다.
하박국 2:4절 상반절에서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는 악인은 교만하고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않은 자인 반면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자입니다.
하박국에서 믿음은 에무나(אםונה)는 거짓이 없고 진실무망하시며 의인들의 참된 의지가 되시는 하나님의 신실성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단어가 사람에게 적용되면 일차적으로 진실하신 하나님을 향한 강한 신뢰를 의미하는 표현으로 단지 하나님을 향한 사람의 태도와 면모를 표시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타인들에게 신실하며 진실한 태도를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인칭(HIS)을 넣지 않은 것은 그의 믿음이 사람 편에서 이신득의 즉 한 인격이 소유한 행함이 있는 믿음을 말합니다.
야고보가 말하는 것처럼 행함과 함께하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행함으로 믿음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박국 2:4절이 협의의 구원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면 롬1:17절은 광의의 의미의 구원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말미암아 나는 좀 부족하고 나는 좀 모자랄지라도 제한적 의미의 믿음이 아니라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로 구원 받았음을 바로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가 말한 율법적 의미의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함을 얻게된 십자가의 은혜로 죄 사함을 받는 상태인 것을 말합니다.
불의한 자의 마음은 교만하고 그 삶의 방식은 정직하지 못한데 반해 의인은 하나님에 대한 강직한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루터에 의해 종교개혁을 일으킨 신교는 믿음으로 즉 믿음까지도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고 믿고 예수님을 믿고 주로 고백하는 성도들인 반면 천주교는 그의 믿음을 강조하여 행위 구원을 강조하였습니다.
로마 자생교회 성도처럼 바른 신앙 고백과 믿음으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죽을 영혼 살리는 일에 참여하기 위하여 하나님 주신 은혜로 하나님 주신 믿음으로 순종하여 온갖 충성 다하여 귀한 열매 풍성히 맺는 구별된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 합니다.
셋째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러야 합니다.(롬1:17하)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얻는 길이 오직 믿음뿐이라는 사실을 구약 합2:4 말씀을 인용하여 구약의 사상과 일치한다고 강조하면서 비록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이해하기 힘들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믿는 의인은 그분을 잠잠히 신뢰하는 그 믿음으로 살아가야 한닥로 말합니다.
바울은 여기에서 믿음을 통해서만 구원이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은 두가지견해가 있습니다
첫째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이 된 사람은 살것이다는 의미입니다.
의인이 될 수 있는 방편은 믿음뿐이라는 사실을 말하면서 동시에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영생을 맛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여기에서 살리라(제세타이:ζήσεται)가 영육간에 영생을 나타내는 단어이므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욱간에 영생하게 될 것이다가 됩니다.
그러니까 믿음으로 의롭게 된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라고 두가지 입장을 종합하여 바울은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회개할 것이 없는 바리새인과 세리가 함께 성전에 올라가 자신이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한 바리새인을 책망하고 철저하게 자신을 죄인이라고 회개의 참회를 한 세리를 의롭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도 이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죄 없다고 하면 스스로 속이는 것이라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라고 요한은 말합니다.
사는 길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것입니다.
의롭게 살고자 하는 것은 정상적인 사람이면 누구나 갖고 있는 간곡한 소망입니다. ㅕ
진정으로 우리가 의롭게 되는 일은 진정으로 우리가 영생을 살게 되는 것은 십자가에서 내 대신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믿고 예수님이 살아가신 본을 닮아갈려고 몸부림 치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믿고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삶의 방식대로 따르고 닮아가려는 노력을 계속할 때 주님께서 끝까지 우리를 붙잡아 주시고 함께 해주셔서 복된 인생 영생의 길로 인도해 주실줄 믿습니다. 아멘
(롬1:17 합2:4) 7월 1일 맥추절 설교초안 / 서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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