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인 프루스트는 얻지 못하고 빈자인 천상병은 얻어낸 그 선물들은 무엇일까. 그건 ‘세상의 아름다움’이다. 아침의 투명한 이슬, 저녁의 장엄한 노을, 찬란한 대낮의 햇빛들에게 ‘저금통장 같은 건 없다’. 가난해서 찬란하게 빛나는 세상은 역시 저금통장이 없는 시인에게만 선물로 주어지는 축복의 세상이다.
김진영
철학아카데미 대표
철학아카데미 대표
평생 사랑할 수 있는 책 한 권을 곁에 지니는 일은 행복한 일이다. 나에게도 그런 책이 있다. 그건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이다. 그런데 근자에 들어 프루스트에 대한 오래된 고정관념이 좀 바뀌었다. 그건 문장 하나를 새롭게 읽으면서부터이다.
긴 대하소설의 마지막 권인 <되찾은 시간> 안에는 이런 문장이 들어 있다. “… 이제 나는 죽음에 대한 생각을 먼저 통과하지 않으면 다른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전에 이 문장은 프루스트의 고독한 말년과 생의 유한성에 대한 솔직한 성찰이 표현된 것으로 읽히곤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문장이 꼭 그렇게 긍정적으로만 읽히지 않는다. 어쩐지 그 안에서 아직 화해되지 못한 미련과 한탄의 목소리가 들리기 때문이다.
프루스트는 19세기 프랑스 고급 부르주아의 아들로 태어나 평생 유복한 삶을 살았다. 있는 자들은 부럽게도 이승의 삶에서 참으로 많은 것들을 누리지만 그들 또한 언젠가는 말년의 삶과 마주하게 된다. 그럴 때 그들은 어떤 회한에 젖을까. 때로 우리는 평생 원 없이 누리며 산 자들의 말년이 보여주는 치졸하고 욕스러운 작태들을 목격하게 된다. 그건 더 오래 살아서 더 많은 것을 누리고 싶어 하는 그들의 노욕이 빚어내는 치졸하고 가엾은 말년의 모습일 것이다. 물론 노년의 프루스트를 그런 이들과 비교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내 금수저의 삶을 누렸던 프루스트에게도 세상과의 이별은 역시 아쉽고 한스러워 보인다.
그런데 이런 이들과는 전혀 다르게 세상과 이별하는 법을 알고 있는 사람도 있다. 시인 천상병이 내게는 그런 사람이다. 프루스트와 천상병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대척점에 서 있는 삶을 살았던 인물들이다. 프루스트의 직업이 향유였다면 천상병의 평생 직업은 가난이었기 때문이다(그의 가난은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다. 그건 그가 참혹하게 겪어야 했던 정치적 가난이기도 하다).
그런데 말년의 천상병은 자신이 살아온 가난한 삶이 ‘아름다운 소풍’이었다고 노래한다(“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의 시 안에서 우리가 만나는 건 궁핍에 지친 노인이 아니다. 그건 소풍을 갔다가 많은 선물들을 얻어서 기쁘게 집으로 돌아가는 한 천진스러운 아이의 모습이다. 그의 시 안에는 한탄과 아쉬움, 히스테리가 없다. 오히려 어떤 충족감이 있다. 이 충족감은 어디서 오는 걸까. 그는 모든 욕망을 체념하고 마침내 초월과 달관의 지경에 이르렀던 걸까. 물론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천상병에게는 한탄과 미련의 이유가 없다. 소풍길에서 가득 선물을 얻은 아이처럼 얻고자 한 바로 그것들을 그는 모두 얻었기 때문이다. 부자인 프루스트는 얻지 못하고 빈자인 천상병은 얻어낸 그 선물들은 그런데 무엇일까.
우선 그건 ‘세상의 아름다움’이다. 아침의 투명한 이슬, 저녁의 장엄한 노을, 찬란한 대낮의 햇빛들에게 ‘저금통장 같은 건 없다’. 가난해서 아름다운 세상, 가난해서 찬란하게 빛나는 세상은 역시 저금통장이 없는 시인에게만 선물로 주어지는 축복의 세상이다. 또 하나의 선물은 ‘인생의 깊이’라는 선물이다. 반드시 구도자가 아니어도 생의 행복 중에 하나가 자기 생의 깊이와 해후하는 일이라면 그 행복 또한 가난한 시인에게만 주어진다. 생의 오묘한 깊이는 가난의 깊이를 통해서만 주어지는 역설적이며 숭고한 선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은 저승 가는 여비조차 없는 자신의 바닥없는 가난을 한탄하다가 돌연 인생의 오묘한 깊이와 만난다(“생각느니, 아,/ 인생은 얼마나 깊은 것인가”). 세 번째 선물은 세상의 아름다움과 생의 깊이를 통해서 열리는 ‘역사적 지평’이다. “새날이 와 새가 울고 꽃잎 필 때는/ 내가 죽는 날 그 다음 날”이라고 천상병의 <새>가 노래할 때 그의 시들은 한 가난한 시인의 사적인 영역을 넘어서 더 이상 가난이 존재하지 않는 보편적인 역사의 영역으로 확장된다.
그리고 마지막 선물이 있다. 그건 ‘바람’이다. 시인은 자신의 평생을 이렇게 노래한다: “살아서/ 좋은 일도 있었고 나쁜 일도 있었다고”, 그러니 “바람아 씽씽 불어라”라고. 가난은 변주되어 씽씽 부는 바람이 된다. 이 바람은 거의 성스러운 선물이다. 그 바람은 아무리 가난해도 멈출 수 없는 바람, 생에 대한 총체적 긍정의 신바람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생을 향한 이 유보 없는 사랑의 신바람을 잠재울 수는 없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