얌체(소설)성경 말씀 묵상
지하 주차장은 언제나 만차(滿車)였다. 눈이 오는 날씨거나 특히 주말은 주차공간을 찾을 수가 없었다. 박 장로는 주일에는 교회를 나가는데, 돌아올 때 시간이 조금 늦으면 거의 주차하기가 어려웠다. 직장을 은퇴한 뒤에 공기가 좋고 인구가 적은 이 도시로 옮겨온 지 이제 10년이 넘었다. 입주할 당시에는 주차가 수월했다. 그런데 갈수록 힘들어진다. 아내가 대퇴골 골절로 잘 못 걷게 되어 지하 주차장의 101,2동 입구에 주차를 하면 좋은데 그런 행운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입구의 기둥 옆에 딱 한 자리 좋은 주차공간이 있는데 그곳은 옆으로 직진해 가는 길과 앞에서 직진해 오는 길이 만나는 T자로 된 곳이라, 그 자리가 쉽게 비는 일이 없다. 그래서 늘 주차해 놓은 차 앞에 차를 세우고 경고등을 켜 놓은 채 신 권사를 하차시켜 승강기 앞에까지 부축하고 가서 기다리게 한 뒤에, 돌아와 다른 곳에 주차하고 함께 올라가야 했다. 10년 동안 교회까지 40분이 넘게 걸리는 거리를 별 불편 없이 다녔던 박 장로는 아내의 거동이 불편해지자, 이런 일들이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이곳뿐 아니라 교회 주차장에 차를 세우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신 권사는 이제 교회를 가까운 곳으로 옮기자고 제안했으나, 40년 넘게 다니던 교회를 옮기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도대체 왜 교회는 주일 대예배에 맞추어 나가야 하는가? 교회의 장로직분을 은퇴한 지 15년이 넘어 강대상에서 대표기도도 하지 않고, 성경공부도 인도하지 않고, 거리가 멀다고 새벽기도는커녕 교회도 주일에 한 번밖에 안 가는데 꼭 성수주일 해야 하는 것인가? 오래 다녔다고 그 교회에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가까운 교회에 나갈 수도 있고 또 방송예배를 드릴 수도 있는 일이 아닌가? 박 장로는 생각다 못해 담임 목사에게 신 권사가 몸이 불편해서 당분간은 ‘가나안교인(안 나가)’으로 있겠다고 문자를 보냈다. 목사는 “‘그래도 교회는 나오셔야지요.’라고 말하고 싶지만, 거리도, 연세도, 날씨도 장난이 아니니 꼭 그렇게 운전하고 나오시라고 말할 수가 없네요. 그러나 권사님 몸이 회복 되면 봄에라도 나오십시오,”라고 했다. 그래서 당분간 집에서 가까운 교회를 순회하고 있는데 후배 장로 두 분이 찾아왔다. 장기간 교회를 멀리하고 있으면 다시 나오기가 서먹해지기 때문에 교회출석을 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였다. 박 장로는 이곳 교회들도 거리는 가깝지만 주차장에서 예배당까지 장애인이 접근할 수 있도록 배려된 곳이 아니어서 박 장로 혼자 교회에 나갈 수밖에 없는데, 책을 읽듯 성경을 해설하는 설교에도 감동이 없고, 성경은 한 구절 읽고 자기 이야기만 하는 설교도 마뜩치 않아 결국 TV를 통해 안방교회에서 은혜를 받을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를 했다. “예배는 목사나, 교회를 보고 가는 곳이 아니며, 성도의 교제가 중요하지 않아요? 교인들도 장로님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라고 심방 온 장로들은 말했다. “저도 압니다. 신 권사가 아플 때 교인들이 얼마나 열심히 기도하셨습니까?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몸을 이룬 많은 지체들에게 그리스도께서는 각양 은사를 주셨고, 교회공동체는 각자 받은 은사대로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게 하신 것을 압니다. 서로 위로하고, 서로 죄를 고백하고, 병 낫기를 위해 서로 기도하고,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서로 교제하는 곳이 교회 아닙니까? 사실 안방교회에는 그런 교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교제하던 교우들을 떠나려고 하십니까?” 박 장로는 웃으며 말했다. “안 나가보니까 너무 편합니다. 교회도 안 나가고, 부담스러운 친구도 안 만나고, 설거지나 하면서 사니 그렇게 편할 수가 없어요. 이런 세상 못 느껴보았지요?” “구원받은 장로님이 무슨 말씀이세요. 이제 교회는 졸업했으니 안 나가도 구원은 예약해 놓았다는 말씀입니까?” “사실 나는 핑계가 없어서 그렇지 교회의 율법적인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싶었습니다. 고난 받으면 기도하고, 즐거울 땐 마냥 찬양하는 것이 얼마나 자연스럽습니까? 그런데 억지로 40일 새벽기도에 나가고, 릴레이 중보기도에 이름을 등록하고, 노방전도에 나가지 않으면 소외되고, 십일조 헌금을 안내면 손가락질 당하고, … 얼마나 스트레스 받는 교회생활입니까? 나는 좀 해방되고 싶었습니다. 사실 나는 벌써 해방되었지만 스트레스 받는 교인만 봐도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그건 원로 장로님께서 하실 말씀이 아닌데요?” “바울은 이교도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하셨는데 교회는 성도들에게 너무 많은 멍에를 메 준 것 같아 가슴이 아파요. 세상에서 각종 직업을 가지고 말씀을 지키며 사느라고 지친 성도들인데 목사처럼 교회에서 순교할 생각으로 나와 살라는 것은 좀 심한 것 같지 않아요?” “그런 점은 저도 동감입니다. 각자의 직업과 소명이 다른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살 수 있도록 교회는 평신도들에게 용기를 넣어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요. 교회에서는 속세에서 지친 그들에게 말씀으로 능력을 입혀서 교회 문을 나갈 때는 그들이 세상에서 흩어진 교회의 역할을 하게 해야지요. 그런데 요즘은 교회에 광적으로 모여 사는 사람이 많아서 교회에 열심이 아닌 사람을 폄하하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사회에서 말씀대로 성실하게 살던 성도들이 교회에 오면 열성적인 사람들 때문에 주눅이 들어 불필요한 죄의식에 눌려 양어장 고기처럼 서로 부딪쳐 싸우기가 일쑤라는 말입니다. 운동선수들이 도장(道場)을 잘못 찾아왔다고나 할까?” “그래, 아예 도장을 바꾸고 싶으십니까?” “그럴 생각은 없어요. 어느 교회나 상황은 마찬가지기 때문이죠. 우리의 본향은 영원한 천국이요, 이 세상은 그림자와 같이, 순간 있다 사라지는 곳입니다. 그런데 모두 이 세상이 영원한 거처이며, 천국은 인간이 만든 가상적인 낙원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요.” “정 반대인 것 같은데요. 속세를 부정하고 천국 가려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 아닙니까?” “아닙니다. 잘 살펴보십시오. 하나님과 천국은 그들이 만들어놓고 있어요. 자기들의 기도만 들어주는 신을 하나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기도를 들어보십시오. 우리 교회에 오천 명이 모이게 해 주세요, 내 아들 시험 잘 보게, 결혼하게, 취직 잘 되게 해 주세요. 남편 사업 잘 되게, 부모 무병장수하게, 남편 예수 믿게, … 이것 다 이기적이며 점쟁이들이 하는 주문이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무엇을 위한 ‘특새(특별 새벽기도)’입니까? 무엇을 위한 철야기도입니까? 이것은 인간을 자기 형상대로 지으신 유일신을 믿는 교인들이 해야 할 기도가 아닙니다.” “그래도 교회는 그런 사람이 있어야 부흥하는 것 아닙니까? 집을 바치기도 하고, 집안을 돌보지 못해도 교회에 나와 봉사하고, 노방전도 나가고, 카드빚을 내서 하나님께 십일조 내고, 병 나은 사람도 생기고, 방언의 은사 받은 사람도 나타나고, 금식기도 해서 응답 받고,…” 박 장로는 자기도 그 말에 동의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교회 안에 천국을 믿지 않으면서 천국을 믿는 사람처럼 행동하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세상을 7일 만에 창조했다. 인간은 모두 죄인이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인간들은, 아들이며 하나님인 그를 죽였다. 죽은 그가 다시 살아났다. 그가 천국에 가서 성령을 보내 구원 받은 사람의 상담자가 되며 주인으로 함께 사신다. 그를 믿으면 영원히 죽지 않는다. 슬픔과 고통이 없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천국이 있다. 유한한 인간도 영으로 거듭나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다. …’ 이것을 다 믿느냐고 묻는다면 ‘예’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런 일을 다 믿는 다는 것은 이성을 가진 인간인 이상 천지가 개벽을 해도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교인이 많을 것이다. 온전히 믿을 수 없다면 그는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다. 한편 미개한 우리나라에 와서 생명을 바쳐가며 병원을 세우고, 학교를 세우고, 교회를 세워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사람들을 위해 생명을 버린 선교사들을 ‘양화진선교사묘역’에 가면 볼 수 있다. 또 그들에게서 천국의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은 사람이 나병환자 촌에 가서 환자의 피 고름을 입으로 빨고, 신사참배(神社參拜)반대로 옥살이를 하며, 여순반란 사건 때는 두 아들을 잃고, 수복 후에는 학살한 반역자를 찾았는데도 용서하고 양자로 삼았으며, 한국전쟁 때는 나병환자를 두고 피난할 수 없다고 남아 있다가 공산군에 붙들려 순교한 그리스도인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또 깨어진 가정이 회복 되고, 불치의 병이 낫고, 평생을 새벽 기도 다니며 기도했던 자녀들이 다 잘 살게 되어 남을 위해 돕고 헌신하는 것을 보고, 또 그 간증을 들으면 천국은 분명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즉 불신 속에서도 천국을 믿는 사람이 있다. 어느 것이 참 세상인가? 천국인가? 자기가 발 붙여 사는 속세인가? 교회에 있는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이 두 가지 모순되는 가치관 때문에 불편해 하거나 스트레스를 받는다. 천국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면 교회를 나오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교회는 포기하지 않은 채 그 많은 의심은 그대로 가지고 있다. “이 어정쩡한 상태에서 자기는 기독교인아라고 말한다면 그는 참으로 구원받은 기독교인일까요?” 박 장로의 질문에 심방 온 장로는 대답했다. “아니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구주로 시인하지 않고, 세례로 여러 증인들 앞에서 자기는 죄인이며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 하는데 그분의 은혜로 구원받은 것을 서약하지 않고는 누구든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없지 않아요?” “그럼, 교회가 요구하는 이 모든 요식행위를 다 했다면 그는 구원받은 기독교인입니까?” “그렇지요. 한번 받은 구원은 소멸되지 않지 않아요? 비록 천국에서 면류관을 받고 하나님의 칭찬은 받지 못할지라도 불 속에서 꺼낸 부지깽이처럼 부끄러운 구원으로 천당에 갈 수는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것이 내가 40년 동안 고민하고 해결하지 못한 문제입니다. 비록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시인하고, 세례 요식에 따라 묻는 질문에 다 긍정적인 대답을 했다할지라도 한 걸음 나아가면 천국이 실재하고, 한 걸음 물러서면 세상이 실재하면 자기의 정체성은 과연 어떤 것입니까? 이 불합리한 삶을 합리화 하려면 기독교의 탈을 쓰고 자기는 기독교인 행세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들을 사이비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교회에 참 신자와 섞여 있는 가라지라고 부릅니다. 그는 자기가 만든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한 하나님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그 신은 자기가 만들었기 때문에, 또 마음의 중심에는 자기가 주인으로 살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언제나 자기편입니다. 자기를 도와주고, 자기 기도를 들어주고, 그가 목회자라면 자기가 교회를 세습해서 왕좌에 앉을지라도 그 신은 자기를 용서할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나는 기독교인의 탈을 쓰고 이런 우상을 섬기는 이들이 언젠가는 기독교를 망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장로님, 알곡과 가라지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습니까?” “나는 알곡이고 너는 가라지라고 말할 수 있는 인간이 어디 있습니까? 이것은 실제 인간 개개인의 내적인 갈등입니다. 즉 가라지는 밖에 보이지 않고 내 안에 자라고 있어 가라지를 뽑다가는 자기 자신이 죽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가라지를 뽑지 말고 그냥 두라고 주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추수 때 주께서 구별하여 알곡은 거두어 드리고 가라지는 불에 태워버릴 것입니다. 혹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서 가라지가 사라지도록 추수 때까지 오래 참으시는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말씀을 잘 깨달을 수가 있을까요?”
함께 온 장로가 다음과 같은 예화를 들었다. 아마 박 장로가 너무 자기주장을 강요 하고 있다고 생각해서 화제를 돌리고 싶어 한 이야기 같았다.
인도에 있는 두 청년 철학도가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의문만 생기는 철학에 궁극적인 답을 얻고자 멀리 떨어진 티베트의 현자를 찾아보기로 했다. 120세가 된 이 현자는 인생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간난신고 끝에 그곳에 도착해 깊은 산 속에 은둔해 있는 현자를 찾아가 머리를 조아리고 인생의 모든 비밀에 대해 가르쳐 주기를 간청했다. 긴 침묵이 흐른 뒤 현자는 운을 떼었다. “인생은 깊은 우물이다. 그 우물을 스스로…” 그리고는 아무 말이 없었다. 기다리다 못해 다른 청년이 물었다. “현자여, 우리는 당신에게 인생의 비밀을 듣기 위해 간난신고 끝에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하시는 말씀이 겨우 ‘인생은 깊은 우물이다’입니까?” 눈을 감고 묵상하고 있던 현자는 놀라서 눈을 떴다. 그리고 반문했다. “그럼, 인생은 깊은 우물이 아니란 말인가?”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타인의 말만 들으려 하지 말고 자기 스스로의 답을 명상하고 찾아보라는 예화였다. 박 장로는 말했다. “한국인 신자들은 구도자의 정신이 너무 없는 것 같아요. 말씀을 들으면 ‘이것이 그러한가?’하고 한 번도 더 생각해 보지 않는 것 같다는 말입니다. 물론 타 종교는 인간이 진리를 찾아가는 것이고, 기독교는 하나님이 먼저 인간을 찾아오셔서 문 밖에서 진리인 자기를 알리기 위해 문을 두들기는 종교지만 한국인의 심성적 바탕에 깊숙이 숨어 있는 샤머니즘(토속신앙)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무당을 찾아가 빨리 답을 듣고 싶은 것이지요. 또 신도들은 영험한 무당을 좋아하듯, 신령한 목사, 초인적 체험담을 가진 목사, 카리스마적인 목사가 복 빌어주고 재앙을 물리치는 이야기를 해주기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신기한 말과 이적 이야기를, 듣고 구경만 하고 싶은 것입니다. 더욱 마땅치 않은 것은 신학을 한 목회자들도 자기가 카리스마가 없고, 방언, 신유의 은사가 없으면 부흥회에 그런 신령한 강사를 초청하여 열광적으로 찬양하며, 기도하며, 교인들이 몰아입신(沒我入神)의 삼매경에 돌입해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체험하게 하려는 것 같아요. 부흥회, 철야기도회 등을 하고 나면 교회 건축헌금도 많아지고, 신도들의 교역자 대접이 눈에 뜨이게 달라지거든요. 그러나 그렇게 훈련 받은 교인들은 가정의 애경사나 사업 파탄 때 단골무당처럼 당회장 목사가 심방 와서 재앙을 몰아내고 복 빌어 주지 않으면, 바로 불만을 품고 교회에 분란을 일으키는 수가 있어 문제가 될 때가 많습니다.” “교회에 실망이 많으셨군요.” “우리 교회에 실망이 많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사례들이 한국 전체 교회의 위기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나는 나라 정치의 난맥상을 볼 때마다 우리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이 구원의 동아줄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이렇게 무너져 간다면 동양의 예루살렘이라고 외치는 한국의 기독교가 어떻게 우리를 구해 줄 동아줄이 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시무장로(視務長老)들의 어깨가 무겁습니다.” “은퇴한 노 장로의 푸념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장로님께서는 젊어서 70년대 초, 노회평신도연합회장으로 각 교회를 순회하며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각 교회 평신도회를 조직할 때 ‘만인제사론(萬人祭司論)’ 때문에 교역자님들의 반대에 부딪쳐 무척 수고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말 마십시오. 그 때는 복음 전파는 잠재력이 많은 평신도를 깨워서 앞장서서 세상을 향해 나가게 하고 목사는 ‘나를 따르라’가 이니라 그들을 동역자로 돌보아 주어야 한다고 역설했는데 우리나라 교인들은 고집이 셉니다. 여전도회는 자기네는 교회 조직 속에서 세상에 나가 잘 전도하고 있는데 왜 이름을 바꾸어 새 조직을 만드느냐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여전도회를 고집하고, 남전도회는 여전도회 보다는 활동이 미진해서 처음에는 평신도회라고 시작하더니 어느새 남선교회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그러나 국제대회 참석은 좋아해서 지금도 세계평신도대회(Laymen’s Convention)에는 남선교회/여전도회가 평신도회라는 이름으로 국가 대표를 파송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장로님, 이제는 교회 경로대학이라도 나오셔서 좀 활성화 시켜 주시지요.” “나는 교회의 경로대학을 싫어합니다. 노인들이 교회의 짐이 되고 있어요. 왜 노인들이 매주 교회에서 바쁜 여전도 회원들을 불러 식사대접을 받아야 합니까? 또 매년 봄가을에 버스를 대절해 야유회를 나가는데 왜 교회 헌금으로 밖에 나가 야유회를 합니까?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발이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소서. 내가 주의 힘을 후대에 전하고, 주의 능력을 장래의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까지 나를 버리지 마소서.’하고 하나님께 매달려 애원해야 할 사람들이, 어른 대접을 잘 하지 않는다고 누구에게 불평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나는 교회에 나가면 이 모임부터 없애고 싶은데 그러다간 조상제사 못 지내게 했다고 멍석말이 당한 것처럼 될까봐 경로대학에 못 나갑니다. 그러나 나는 단언컨대 교회는 노인인구의 급증과 청년과 유년부 학생의 현저한 감소, 거기다 기독교 안에 깊이 파고든 유교의 충효사상으로 또 교회의 위기가 또 온다고 확신합니다.” “기도해야 되겠군요. 기독교 세계관이 바탕에 깔려 있던 구미제국은 기독교가 쇠퇴하여 새로운 선교지가 되고, 한국은 단군 이래 이어온 무속과 불교와 유교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해 신흥기독교는 비빔밥 종교를 만들고 있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를 통해 이루어지리라 믿습니다.”
박 장로는 두 후배 장로들이 떠난 뒤 자기는 정말 교회를 안 나가니 마음이 후련한가를 생각했다. 자기는 무교회주의를 선호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무교회주의자들도 결코 자기들이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욱 신실한 기독교인이라고 자부한다. 내세를 믿고, 주님을 믿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고 확신한다. 또 교회는 필요하다. 교회는 죄인들이 회개하고 거듭나게 하는 필요한 조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직은 법을 요구하고 법은 교인들을 구속한다. 그래서 지금은 교인들이 교회가 스스로 조직한 조직체의 법의 노예가 되고, 그 법은 교인들을 강제한다. 법의 강제가 교회에 권력을 가져오고 권력이 강해지면 교회는 부패한다고 그들은 말한다.
금요일에 박 장로는 이 작은 도시에 전통적으로 열리는 ‘금요시장’에 다녀왔다. 말하자면 가정부로 장보러 간 것이었다. 지하주차장의 101,2동 입구 쪽을 향해 차를 몰고 귀가하는데 이게 웬 일인가? 승강기 앞 주차공간이 비어있는 것이 아닌가? 한 차가 비어 있는 주차 공간 쪽으로 왼편에서 T자형 길로 다가오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혹 그 차가 주차하려나? 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그냥 그 앞을 지나 자리를 비워 준다. 고마운 생각에 박 장로는 빨리 전진 주차를 하고 나와 입구 문을 통해 승강기로 아파트에 들어왔다. 그러다 생각하니 그 때 앞을 지나던 승용차가 직진해서 곧 바로 지나가지 않고 기다리고 있던 것은, 박 장로가 주차한 공간에 후진주차하려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박 장로는 자기가 너무 얌체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어 얼굴이 후끈거렸다. 후진주차를 하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자기는 바로 전진주차를 하고 후안무치하게 걸어 들어와 버린 것이다. 아파트에 들어오자 신 권사에게 그 말을 하고 다시 내려가 보아야겠다고 말했다. “내려간다고 그 사람이 지금까지 있겠어요?” “아니야. 나는 주차하는 순간 그가 후진주차하려고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 그런데 차가 서 있으면 왜 바로 내려서 그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까? 만일 만났다면 우리는 웃으며 좋은 해결을 보고 헤어졌을 거야. 나는 얌체가 되어 이렇게 마음이 아파. 너무 찜찜해.” 얌체와 염치는 손바닥의 앞·뒷면과 같다. 염치는 사람이 갖추어야 할 예의와 체면이고, 얌체는 염치가 없는 일이다. 이것은 천국과 세상이 앞·뒷면인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래서 얌체와 염치는 천국과 세상만큼 엄청난 차이가 있다. “노인이, 좀 얌체가 되면 어때요? 그게 어때서요?” “아니야, 나는 결코 얌체가 되어서는 안 돼.” “그래, 그 순간에도 전도를 못해 마음 아파서 그래요?” “나는 너무 마음이 찔려 견딜 수 없을 뿐이야. 내려가 봐야겠어.” “왜요?” “그 자리에 차를 세워 둘 수 없어. 그 자리는 원래 내 자리가 아니었거든. 좋은 자리를 누구에게든 양보하기 위해 비워두어야지.” “누가 그러면 알아준대요?” “나는 지금 마음이 아파 이러지만, 내 뒤에서 그러면 안 된다고 나를 움직이는 분이 계서. 그분을 믿고 그분 뜻대로 행하며 사는 사람들이 기독교인이 아니야? 어디 있던지 우리는 그분의 백성이라는 의식이 있어야 해. 그것이 기독교세계관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야.” 그러면서 박 장로는 지하 주차장으로 가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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