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재 장로(박사)소설 콩트 에세이

박 교수와 김삼순 선교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8. 10. 17. 13:19

박 교수와 김삼순 선교사|말씀 산책

은혜 | 조회 82 |추천 0 |2018.10.02. 16:16 http://cafe.daum.net/seungjaeoh/J75F/215 

박 교수는 캄보디아에 나가 있는 김심순 선교사로부터 최근 그녀의 근황을 이메일을 통해 듣고 너무 가슴이 아파 잠을 이루지 못했다. 생각 끝에 그는 그의 딸과 사위가 권사와 장로로 시무하고 있는 교회에 삼순 선교사의 딱한 사정을 알려서 그 교회에서 김삼순의 해외선교 지원을 해 달라고 청원해 볼 생각을 하였다. 혹 안 되더라도 다른 교회를 통해서든 뭔가 길이 열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 교회 목사는 딸을 통해서도 이메일이나 전화번호도 알아볼 길이 없어서 등기 속달로 그 교회 사무실에 장문의 편지와 그가 최근에 출판한 에세이집을 보냈다. 그 에세이집에는 김삼순 선교사의 이야기가 실려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나서 좀 마음이 홀가분해져서 삼순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평소처럼 <내 사랑하는 박삼순 선교사에게>라는 제목과 함께.

박 교수는 삼순 간사를 딸처럼 생각했었다. CCC 지도교수를 맡아서 그들이 성경공부 등으로 개별 모임이 필요할 때는 자기 연구실도 내주었으며 가끔 상담에도 응하고 점심을 사주기도 했다. 또 교회에 불러 교인들이 CCC영리(四靈理)를 통한 개인전도 훈련을 받게도 했다. 은퇴할 때가 가까워서였는지 대학생들을 양육하며 영혼 구원에 힘쓰는 삼순 간사의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고 딸처럼 돕고 싶은 생각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박 교수는 자기가 어느 대형교회에 김 전도사의 후원을 청원했으니, 너무 현실에 낙심하지 말고 기다려보라고 말했다. 메일에 교회 목사에게 보낸 청원서도 첨부파일로 보냈다.

 

xx 목사님

저는 85세의 은퇴 장로로 귀 교회의 박xx 권사의 애비가 되는 사람입니다. 미국 미시건 주에 살면서 한때 목사님과 동역하기도 한 무디신학교 출신 박xx 장로의 큰아버지가 되기도 합니다. 또한 저는 아내가 불편하여 교회를 못 나가는 동안 매 주일 TV를 통해 목사님이 인도하는 예배에 열심히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제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캄보디아에 가 있는 전 CCC 간사 김삼순 전도사(남편 정xx 간사)의 안타까운 사정을 말씀 드려, 귀 교회가 어떤 방법으로든 도와주든지 아니면 잘 아시는 교회를 하나 연결시켜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이 청원을 드립니다.

김삼순 전도사는 1996년에 제가 재직한 대학에 CCC 캠퍼스 전임간사로 피송되어 왔을 때부터 인연을 맺었기 때문에 햇수로 22년째 되는 것 같습니다. 저는 당시 대학 CCC 지도교수를 오래 하고 있었는데, 그 자매가 대학을 떠난 뒤에도 계속 기도편지로 연락을 주고받았기 때문에 그녀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 자매는 주님께 헌신한 삶을 살면서, 두 남녀의 어머니가 된 뒤에도 2008년 말부터는 어느 입양 복지회를 통해 2년 터울의 두 남매를 입양해서 열심히 기르고 있는 자매입니다. 저는 그녀와 만난 지 2년 뒤 대학에서 은퇴한 후에도 제게는 마지막 남은 김 간사와 또 다른 CCC 간사에게 미미하지만 후원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그들에게 어느 해외선교사가 와서 캄보디아에 국제대학을 세우는데 도와 달라는 요청을 했다고 합니다. 그때 그들은 막 안정을 찾았고, 김 간사는 신대원에서 M.Div. 과정 중에 있을 때였습니다. "영혼 구원은 생명을 건 전쟁이라고 말하며, “이곳 공부도 좋지만 캄보디아의 죽어가는 생명 구원 전선에 같이 뛰어듭시다.”라고 열정적으로 설득하는 말에 섬뜩하여 심장이 멎는 듯했답니다. 가슴이 찔려 며칠을 고민하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순종하기로 했답니다. 그들은 집을 청산하고 저축해 놓은 통장도 정리하고, 신대원 M.Div. 과정까지 그만둔 채 201410월 말, 캄보디아 바탐방으로 떠났습니다. 그들에게 간절히 부탁했던, 두려울 만치 선교사역에 열성적이었던 분은 그 해 12월 현지에 한 선교대학을 세웠는데, 그곳은 어학 연수원과 유치원, Pre-School, 신학교까지를 망라한 학교였습니다. 김삼순 선교사 부부는 자기들이 가지고 온 사재를 다 바치고 하루 12시간씩 봉사했는데 8개월 여 그곳에서 일하다가 거기를 떠났습니다. 깊은 내막은 모르지만 같이 일할 형제가 아닌 것을 깨달은 것 같았습니다. 그들은 빈 몸으로 20157월 중순에 프놈펜으로 떠났습니다. 투자한 돈도 다 돌려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프놈펜에서 좋은 선교사와 목사님을 만나 그곳 한인교회를 섬기며, 남편은 프놈펜 대학생 학사(學舍)에서 사역하며, 이제는 조금 안정을 얻은 듯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들을 후원해 주던 한국의 미자립교회가 더 이상 도울 없다는 연락을 해 와서 그녀는 지금 막막한 상태에 있습니다.

이렇게 선교지에서 고생하는 이들 부부 선교사에게 측은한 생각이 드시거든 좋은 길을 열어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저는 CCC를 창건하신 김중곤 목사님을 존경하며 따르던 사람입니다. 그분이 살아계신다면 김삼순 선교사에게 어떤 도움이라도 주었으리라고 믿습니다. 이 목사님께서도 CCC 출신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목사님, 큰 교회의 높은 담과 교파를 초극해서 측은한 손길을 뻗어 주실 수는 없을까요?

2018326

xx 장로 올림

 

박 교수는 그 편지에서 자기가 출판한 에세이집에 올린 김삼순 선교사의 평소 삶을 소개한 글, ‘청빈낙도도 읽어봐 달라고 부탁했다는 내용도 언급했다. 김삼순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청빈낙도

청빈낙도는 우리나라 가난한 선비들이 자주 썼던 말이다. ‘청렴결백하고 가난하게 사는 것을 옳은 것으로 여기고 도를 즐긴다.’는 뜻이다. 부자로 살지 못한 실패자의 푸념처럼 들린다. 그런데 왜 청빈한 선비들은 존경을 받았을까? 그들은 덕을 쌓고 자신을 위한 치부에 눈을 돌리지 않으면서 어렵게 사는 사람들에게 옳게 사는 본을 보였기 때문이다. 성경에 나오는 바울은 평생 복음 선포로 다른 사람의 영혼 구제에 힘을 썼는데 자기는 어떤 궁핍에도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다고 말하고 있다. 가난하게 산다는 것 자체가 탐욕을 이겨낸 도인으로 옳은 길을 권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지난해 8월 한국을 방문한 프란체시카 교황이 청빈은 방벽(防壁)이자 어머니라고 말한 바 있다고 들었는데 하나님께 몸 바친 사람들은 청빈한 삶이 없으면 대중 앞에서 방벽이 없는 것과 같으며, 그것 없이는 성도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어머니 역할도 할 수 없다는 말로 생각된다. 성직자가 호화로운 주택에 살고 호화로운 차를 타고 다니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아무리 복음을 전파해도 그것은 소귀에 경 읽는 꼴이 된다는 말이다.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려면 청빈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일까?

나는 CCC에서 전도훈련을 받고 남의 후원만 가지고 수십 년간 예수님께 헌신하고 사는 자매를 알고 있다. 1996년 내가 봉직하는 대학교 CCC 간사로 와서 봉사하다가 지금은 네 자녀의 어머니가 되어 있다. 그녀는 CCC 간사로 함께 일하던 신랑과 결혼했는데 밥 그릇 둘, 국 그릇 둘, 물 컵 두 개로, 방 하나 딸린 옥탑 방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성경에서 말한 대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다. 시골에서 부모님이 택배로 보낸 쌀과 반찬은 학생들을 불러다 먹이고, 일주일 분량의 장을 봐서 만든 반찬이 이삼일만에 남의 입에 들어가도 나머지 날은 없는 대로 만족하며 살았다. 마트에서 반짝 세일로 몇 개 한정으로 파는 세일 상품 방송을 하면 물건을 고르되 늦게 올 사람을 위해 좀 못한 것부터 샀다고 한다. ‘돈은 일체 가지고 가지 말아라. 여행 가방이나, 갈아입을 옷 그리고 여분의 신발이나, 지팡이도 갖고 가지 말아라.’는 성경 말씀대로 산 것이다. 그것이 성경의 말씀이었고 CCC에서 가르쳤던 삶의 방법이었다.

그러나 나는 두 사람이 지금까지 간사로서 일정한 수입이 없이 교회 봉사나 후원금만으로 살고 있는 가난한 삶이 불안하고 안타깝다. 은퇴연금도 없이 어떻게 하루하루 살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런데 더 대책이 없다고 생각한 것은, 그들에게는 귀여운 딸과 아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다 자라기도 전에 또 다른 아들과 딸을 입양해서 지금은 모두 여섯 가족이 살고 있다. 그들은 결혼한 지 3년 뒤에 연년생으로 남매를 가졌다. 7년 뒤 업고 안고 병원을 오가며, 힘들게 기른 아이들에게서 숨을 좀 돌릴 때가 되었다고 생각된 때였다. 귀한 생명을 낳자마자 핏덩이 채 검은 비닐봉지에 넣어 버리기도 하고, 그렇게까지는 아니지만 철없는 어린 미혼모는 입양시설에 세워진 베이비 박스에 어린 생명을 버리고 간다는 기사를 읽자, 그녀는 다시 두 살 터울로 남매를 입양하여 4남매의 부모가 된 것이다. 여섯 식구의 빨래만 해도 큰일이었다. 애들의 털옷, 털모자, 목도리, 장갑, 심지어 부츠, 실내와, 운동화도 모두 손빨래를 하는데 작은 세탁기를 돌려서 빠는 양말만 마흔네 짝이어서 어디로 빠졌는지 그 짝을 한 번도 제대로 맞춘 적이 없었다고 한다. 옛날 자기가 캠퍼스 전임간사로 있을 때 CCC 동아리 학생으로 자기에게 신세를 졌던 애들은 졸업하여 직장을 갖거나 잘 사는 남편을 만나 부유하게 지내고 있다. 그런데 내가 아는 이 자매는, 옛 순원(筍員; CCC에서는 조직의 기본단위 cell이라고 한다.)들이 자기들만 잘 사는 것이 미안해서 보내온 후원금으로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이들을 보면 나는 이탈리아의 아시시에서 태어난 성 프란체스코를 생각한다. 그는 중류층 마포상인의 아들이었는데 25세 때 허물어져가는 성당의 십자가상 앞에서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모든 세속적인 것을 버리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헌신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는 철저한 가난을 실천하며 탁발하는 수도자, 순회하는 설교자로 살았다. 그는 자기를 따르는 수도사 중에서 예수님처럼 열두 제자를 뽑았다. 그리고 성경대로 둘씩, 둘씩 짝지어 세상으로 보내 전도하게 하였다. 자기는 자기 동반자로 마세오를 택하여 함께 떠나 소위 거지 순례를 시작한 것이다. 사랑의 빵을 걸식하러 마을로 나갔는데 갈림길이 나타났다. 두 사람은 거기서 헤어졌다. 그들이 마을을 지나 다시 만났을 때는 성 프란체스코의 손에는 마른 빵 몇 조각이 있을 뿐이었다. 그는 왜소하고 보잘것없는 외모여서 나이 어린 거지 취급을 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마세오는 키가 크고 수려해서 그의 손에는 많은 음식과 빵이 있었다. 그들은 가까운 데서 샘물을 찾아 널찍한 바위 위에 앉아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프란체스코는 마세오야, 우리는 이와 같은 보물을 받을 자격이 없는데.”라는 말을 되풀이 했다.

선생님, 이처럼 가난한 채 빵 몇 조각 얻은 것을 어떻게 보물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우리는 옷도 없고, 나이프도 접시도 없으며, 그릇도, 집도, 식탁과 요리사도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큰 보물이니라. 이것들은 우리 수고로 준비된 게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로 마련되었다. 빵과 편편한 돌, 식탁, 깨끗한 샘물을 보라! 우리,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청빈이라는 매우 고귀한 보물을 사랑할 수 있도록 기도하자.”

나는 이런 구절을 읽을 때 성 프란체스코는 독신의 수도사이며, 오직 예수를 믿고 그와 하나 되기를 원한 사람이었기에 그렇게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성자는 교부시대에도 그렇게 흔하지 않았다. 그런데 결혼한 부부가 자녀를 기르면서 성 프란체스코를 흉내 낼 수 있을까를 생각한다. 이것은 강요된 새로운 율법이 아닐까? 바울의 자비량(自費量) 선교는 그런 것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이런 편지를 보낸 얼마 뒤에 김 전도사로부터 답신이 왔다.

 

교수님^^

답답해 보일 수도 있지만 교수님도 아시다시피 고난은 축복의 통로로 반드시 돌아오잖아요. 여기 저희가 교제한 선교사님들이 모두 그렇게 살아 왔더랬습니다. 저는 이때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가난하고 한치 앞도 모르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우리를 인도하신 주님을 언젠가는 간증할 날이 오겠지요. 너무 염려마시고 깊은 중보기도를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그렇게까지 애쓰시지 않아도 됩니다. 처음부터 지원교회를 생각하고 시작한 일이 아닙니다. 지금 잘 살고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한 달 뒤, 박 교수는 사랑하는 내 딸 박삼순 전도사에게 또 편지를 썼다. 청원했던 교회에 많이 화가 나고 불쾌한 어조였다. 김 전도사를 후원해 달라는 청원서를 등기로 보내고, 우체국에서는 모바일을 통해 배달이 되었다는 연락까지 받았는데 한 달을 기다려도 답이 없어 교회 홈페이지를 검색하여 그 교회의 행정목사에게 어떻게 된 것인지 영문을 문의했다고 말했다. 당회장 목사는 집 주소도, 전화번호도 숨기고 철저히 베일에 싸여 일반인에게는 접근이 허락되지 않은 것 같아서 자신이 보낸 청원서가 어찌되었는지 따지고 싶어 행정 담당 목사에게 분풀이를 했는데 이번에 그 경위를 알아 조처하겠다는 내용의 글이었다. 그러면서 박 교수는 행정담당 목사에게 보낸 편지 내용을 첨부문서로 김 전도사에게 보냈다. 다분히 그녀도 자기처럼 분개하리라고 기대하며 쓴 글이었다. 첨부문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행정담당 정 목사님:

저는 현재 85세의 은퇴 장로입니다.

지난 326(전후 2,3일 내)에 귀 교회의 담임 목사님께 교회 주소를 통해 등기로 택배를 보낸 일이 있습니다.

제가 궁금해 하는 점은, 택배가 도착하면 행정목사님께서 미리 이것을 받아 선별한 뒤에 담임 목사님께 폐가 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예 쓰레기통에 버리는지, 아니면 일단 당회장 목사님께 드리기는 하는지 입니다. 만일 전자라면 교회가 잘못된 길을 걷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담임목사가 자신은 철저히 베일 뒤에 숨어서 규칙과 명령으로 교회를 움직이고 심지어 부목사까지도 독재자 수족처럼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이것은 천주교의 교황제도와 무엇이 다릅니까? 나는 귀 교회는 다른 대형 교회와는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실망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와도 불통을 원하지 않고 소통을 원하셨습니다. 그분을 만나고 싶어 뽕나무에 오른 삭개오를 만나서 구원하셨고,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자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군중 속에서 그분의 옷깃에 손을 댔을 때, 그분은 그것을 느끼고 그녀를 불러 병을 낫게 하셨습니다.

지금 한국 교회가 어떻게 본질에서 벗어나고 있는지 아십니까? 목사는 돈과 권력과 명예를 탐하고 교인들 앞에서 교황으로 군림하면서 귀신 들린 자, 병든 자, 가난한 자들을 돌보지는 않고 하나님께 바치는 헌신과 헌물을 자기가 가로채고 있습니다. 주님과 직접 교제하는 개별적 교인은 온 데 간 데 없고, 구원받았다는 각 지체들은 자신이 바로 예수님이 사시는 성령의 전(殿)’인 교회인 것을 망각하고, 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만 종으로 헌신하고 있을 뿐입니다. 목사는, 매 주 바리새인이 율법을 강론하듯 설교해서 스스로는 주의 종이 되고, 교인들을 자신에게 순종하는 종으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모든 교회는 대형 교회를 흠모하며, “3,000명을 주시옵소서.” “4,000명을 주시옵소서.”하고 외치며, 교인들을 노방전도에 동원시키거나, 총동원주일 같은 행사를 기획해서 교회로 사람들을 초대하고 그들에게 상품 공세를 퍼붓기도 합니다. 마치 돈으로 주의 백성을 살 수 있다고 훈련을 시키는 것 같습니다. 영적인 것을 물질적인 것으로 대체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모인 무형의 교회는 눈에 보이는 치장된 대형 교회로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큰 예배당을 지으려다 빚에 쪼들려 교회가 경매로 넘어가기도 하며, 교회가 눈에 보이게 커지면 목사는 자녀에게 교회를 세습하기도 합니다. 부흥회로 복을 나누어 줄 뿐 아니라 자기가 축귀(逐鬼)의 권능을 받지 못했거나, 신유(神癒)의 은사를 받지 못했을 때에는 그런 기적을 행하는 목사를 초빙해서 하나님의 초능력을 체험하도록 부흥회를 하기도 합니다. 예배당의 이름을 바꾸어서 그 건물을 성전’, 교회 조직 명칭을 성역’, 그래서 이제는 목사는 옛 제사장, 성역장들은 레위인들이 되어, 교회는 제사 지내는 성전같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목사님, 제발 이 평신도의 외침을 신학교에서 신학교육을 받지 못했다고 외면하지 말고 귀기우려 주십시오. 말씀을 이렇게 이해하고, 교회를 이렇게 보고 있는 평신도도 있구나 하고 역지사지의 입장이 되어봐 주십시오. 나를 위한 것도 아니요, 내가 사랑하고 아끼던 간사에 대한 청원이었는데 답이 없어 서운했습니다. 어떻게 되었는지 행정절차를 알려 주어서 내가 어떤 무례한 짓을 하고 있는지 알게 해 주십시오.

2018426

xx 장로 드림

 

얼마 만에 또 김삼순 선교사로부터 회신이 왔다.

 

교수님^^

딸처럼 여러 가지로 걱정해 주신 것 감사합니다. 시골에는 낳아 주신 부모님이 계시고, 여기 예수님을 깊이 아시는 또 한 분의 아버님이 계신 것을 감사합니다. 저는 하나님 은혜로 잘 살고 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그 교회의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거나 저를 위해 부탁하는 일을 그만 두어 주십시오. 그 교회는 건전한 대형 교회입니다. 그 교회는 그 교회대로 규칙이 있습니다. 그 교회에서 해외선교사를 보낼 때에는 반드시 그 교회의 교인으로서 자격심사에 통과된 사람을 선교훈련을 시킨 뒤 파송하게 되어 있다고 들었습니다. 물론 자비량(自費量)이 원칙입니다. 또 은퇴 후 퇴직금으로 나가고 싶은 자기 교인도 심사 후 훈련을 마친 뒤에 보낸다고 합니다. 그 교회 교인만으로도 자원이 넘치는데 어떻게 제가 해당되겠습니까? 이제 제발 수고를 그만 두십시오.

다만 제가 아쉬운 것은 제 후원과는 상관없이 그 교회 목사님 몇 분이라도 교수님이 쓴 에세이는 읽어 봤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교수님은 단편소설도 쓰시는데 그곳에는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라는 것도 있었습니다. 그것을 읽고 저는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장례식 때 천국에 가시라고 부르는 찬송인데, 저는 죽은 뒤 정말 천국에서 가족을 만날 수 있을까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지상에서 죽을 때 육의 몸으로 죽지만, 천국에서는 전혀 다른 모습인 영의 몸으로 존재하는 것인데 훗날 내가 죽어서 어떻게 어머니를 알아볼 수 있을지, 또 천국에 있는 어머니가 지상에서 가족들이 모여 추도예배를 드릴 때마다, 무한의 세계에서 유한의 세계로 와서 지상의 우리와 교제할 수 있는 것인지? 또 막내아들 결혼을 못 보고 안타깝게 돌아가신 분이 그 아들을 잊지 못하고 천국에서 그 아들을 위해 기도를 쉬지 않고 있다면, 이 세상의 고통과 슬픔을 그대로 안고 천국에 갔다는 말이 되는데,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해 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는 있지 아니한 천국에서, 그런 부담을 안고 어찌 안식할 수 있겠는가? 이런 교수님의 주장에 저는 많이 흔들렸습니다. 목사가 교인들에게 천국을 잘못 가르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잘 가르치고 있다면 교수님 같은 오해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밝혀야 되는 것이 아닐까? ‘불신 지옥, 예수 천당이라는 구호로 불신자들에게 잘못된 인식을 심어주어 그들을 교회로 유인했다면 이것은 범죄행위가 아닌가? 이런 생각도 했었습니다.

사실 교역자들이 신학대학, 신학대학원, 교회, 그리고 바로 젊어서 설교 현장에 뛰어들었다면, 기독교 세계관의 지평이 편협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교역자들이 교수님의 에세이를 한번 쯤 읽어봐 주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본 것입니다. 그러나 제 문제에 대해서는 제발 더 이상 걱정하지 마시고 교회 후원문제도 손을 놓으십시오.

 

박 교수는 의외의 답변에 약간 놀랐다. 자기는 편협한데 김 전도사가 더 너그럽고 의연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자기는 세속적이고, 초조하고, 근심 걱정이 넘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의지하지 못하고 늘 불안해하는데 그녀는 하나님의 요새와 반석에 앉아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가뭄 속에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어 있는 엘리아 선지가 하나님이 까마귀를 통해 보내주는 떡과 고기를 먹으며 다음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그녀는 자기는 잘 있으니 아무 걱정을 하지 말라는 것이 자기를 더욱 초조하게 하였다.

 

한 달 뒤에 박 교수는 다시 김삼순 선교사에게 이것이야말로 자기가 최선을 다한 마지막 편지라는 뜻으로 메일을 또 보냈다.

 

사랑하는 내 딸 김심순 선교사에게;

나는 지난 번 네 편지 때문에 더 이상 협력교회의 청원은 잊어버리기로 하였다. 그러나 혹 그 목사가 어떤 부담감이 있어 답을 주지 않을까 해서 한 달을 더 인내하고 기다리기로 하였다. 그러나 아무런 답변을 받지 못했다. 다만 그 때 내가 서운했던 것은 교회는 다양성을 가진 개 교회로 나타나면서, 전체로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우주적 교회로 존재하는 공동체라는 것을 왜 그는 인정하지 않을까 하는 안타까움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는 시대와 장소와 교파와 교리에 구애받지 않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우리는 그의 백성이며 형제로 세상으로 나가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사명을 받은 공동체가 아니냐?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의 형제로서 어떤 조언이 있을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나는 여러 면에서 교회가 참 생명이신 예수님을 잃어가고 있다고 생각해서 마음이 아프다. 우리나라는 현재 국운이 풍전등화처럼 위태로운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을 너도 알겠지. 그래서 얼마 전 나는 주간 지방지에 우리의 생명줄은 예수그리스도라는 글을 기고한 일도 있다. 우리나라의 불안한 장래는 미국이나 중국, 러시아 등의 동아줄을 붙잡는다고 살 길이 열리는 것이 아니고, 오직 생명의 동아줄은 예수그리스도라고 강력히 주장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내가 주장한 최후의 보루인 교회가 국내에서 무너져가고 있다면 오직 방황이 있을 뿐이다.

나는 <성 프란체스코의 작은 꽃들>이라는 책 속에서 어떻게 프란체스코는 구비오의 매우 사나운 늑대를 길들였는가.’를 읽은 일이 있다. 프란체스코가 구비오 마을에 머물고 있을 , 그 도시주변에는 굶주리고 광포한 늑대가 한 마리 살고 있었다. 그 늑대는 짐승뿐 아니라 사람까지도 잡아먹곤 해서 사람들은 너무 공포에 사로잡혀서 어느 누구도 성문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프란체스코는 자기가 늑대를 만나 단판을 짓겠다고 산중으로 늑대를 만나러 갔다. 이것은 영웅적인 행위로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늑대는 그와 그의 제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는 십자가의 성호를 늑대를 향해 보였다. 그러자 늑대는 유순해졌다. 프란체스코는 늑대를 부르면서 말했다.

나에게 오라. 늑대여!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나와 누구도 해치지 말라.”

그 때 참으로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다. 늑대는 머리를 숙이고 프란체스코 앞에 어린 양처럼 앉았다.

형제 늑대여, 너는 이 지방에서 많은 해를 끼쳤다. 그리고 너는 무자비하게 하나님의 피조물을 파괴함으로써 크나큰 죄악을 저질렀다. 너는 짐승을 해쳤을 뿐 아니라, 심지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조차도 잡아먹었다. 그러므로 너는 극악무도한 강도나 살인자처럼 사형을 받기에 합당하다. 또한 모든 사람이 너를 증오하고 미워하는 것이 당연하며, 이 온 도시가 너의 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형제 늑대여, 나는 너와 시민들 사이에 평화를 맺어주기를 원한다. 그래서 그들이 너로 말미암아 더 이상 해를 받지 않게 되고, 그들도 너의 지나간 모든 죄를 용서한 후에 사람이나 개들조차도 더 이상 너를 미워하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늑대는 이 모든 것을 알아듣고 수긍하는 모습을 보였다. 프란체스코는 다시 말했다.

형제 늑대여, 너는 이 평화조약을 지키기를 원하였으므로 나는 너에게 약속한다. 나는 이 도시사람들에게 네가 살아 있는 동안 날마다 너에게 음식을 갖다 주고 네가 더 이상 굶주림으로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 해주라고 말하겠다. 왜냐하면 네가 여태까지 행한 모든 악은 굶주림 때문에 나온 것임을 나는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형제 늑대여, 내가 이와 같은 은혜를 베푸니 너는 다시는 어떤 동물이나 사람도 해치 않을 것을 약속하기 바란다. 너는 나에게 그것을 약속하겠느냐?”

프란체스코가 그 맹세를 받기 위해 손을 내밀었을 때 늑대도 그 앞발을 부드럽게 얹어 놓았다. 그는 말하였다.

형제 늑대여, 나는 너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한다. 지금 나와 함께 두려워하지 말고 마을 안으로 가서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조약을 맺자.”

마을로 내려온 그는 마을사람들에게도 말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앞에 서 있는 형제 늑대는 나에게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맹세했습니다. 늑대는 여러분과 화평할 것이며, 여러분이 매일 그를 먹이기로 약속한다면 그는 여러분을 해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형제 늑대를 위하여 내 자신을 보증인으로 맹세합니다. 그는 신실하게 이 평화조약을 이행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늑대와 마을사람 사이에 평화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너는 이것을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이것은 현실성이 없는 동화 같은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그 호전적인 늑대가 그 본성을 들어내어 언제 표변할 줄 모르는데 영원히 유순해진다는 것을 믿으며 두려워 떨던 사람들이 그 늑대와 평화조약을 맺을 수 있겠느냐고. 그러나 내 간절한 소망은, 혹은 내 믿음이라고 해도 좋은데 나는 우리나라 기독교인이 참 예수의 제자가 되어 다 프란체스코와 같은 마음이 된다면 8·15 해방과 같은 하나님의 선물이 이 나라에 임한다고 믿는다. 평화는 결코 상대방을 위협해 궁지에 몰아넣거나, 눈치를 보고 비위를 맞추거나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늑대의 마음을 움직이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주의 백성들이 함께 모여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하고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믿는다면 그때는 동화가 현실로 나타나는 기적의 순간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나도 믿는다. 엉뚱하게 평화협정의 성사를 인간적인 방법으로 미리 꿈꾸고 그것을 정치적인 거래로 이용하려 한다든지, 군중의 인기를 사로잡는 포퓰리즘의 도구로 삼으려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기적을 거두실 것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 한국 교회의 실상에 절망하고 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2,000명이 넘는 교인을 가진 한 교회가 장로 선출을 하는데 장로피택후보추천수락서라는 것을 후보자들에게서 돌리고 받았다는구나. 거기에는 최근 3년간 교회에 낸 헌금 내역을 전 교인에게 공개하겠다는 것과, 교회 건축 등, 필요할 때는 자기 재산을 담보로 연대보증을 서겠다는 것, 그리고 교회의 공집회에는 빠지지 않겠다는 서약 등이 들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서약의 당위성은 진정한 죄의 회개는 지갑이 먼저 회개해야 한다.’면서, ‘제물 앞에 사람을 세워보아야 그 신앙의 깊이를 알 수 있기 때문이라고 당당히 말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재정보증은 현 시무(視務) 장로도 과거 교회 건축을 할 때 다 집을 잡히고 재정보증을 섰기 때문에 현재의 교회가 세워졌고, 그렇게 해서 세운 교회의 부채는 현재 거의 다 갚아가고 있다면서 새로 새울 장로도 옛 시무장로와의 형평성을 고려해서 그 항목의 서약은 마땅하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물질 중심, 율법 중심으로 뽑힌 장로가 어떻게 교인의 권징을 관리하고, 교회의 영적인 관계를 살피며, 또 교인들이 교리를 오해하거나 도덕적으로 부패하지 않도록 권면할 수 있겠니? 영적인 지도자들은 마지막 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에 자기들이 교인들을 양육할 때에 했던 일들을 하나, 하나 하나님 앞에서 보고(會計)해야 할 사람들인데 이것이 그런 장로를 뽑을 때 있을 법한 서약 항목이니? 이것은 더 이상 교회이기를 그만 둔 속인들의 모임이다.

사랑하는 삼순 전도사야, 나는 너희 후원에 관한 것을 왜 인간인 교회의 당회장 목사나, 행정담당 목사를 의지하여 문의했는지 심히 후회하였다. 내가 물어야 할 하나님께 왜 기도하며 묻지 않았는지 너무 죄스러웠다. 그래서 내가 뒤늦게 회개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받은 응답은 남의 살을 떼어 주려고 하지 말고, 네 살을 떼어 주어라.”라는 말씀이었다. 왜 그 생각을 진즉 하지 못했는지 너무 하나님께 죄스러웠다. 그래서 이번에 내 살을 깊이 도려내지는 못했지만, 다음 내 에세이집의 자비출판을 위해 비축해 놓은 돈을 너에게 보내기로 하였다. 나는 당장 책을 내지 않아도 된다. 큰돈은 아니지만 받아 유용하게 써 주었으면 한다.

그리고 이번 기회에 너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해외선교를 접고 귀국해라. 그 나라에 귀화해서 그 백성과 함께 괴로움을 나누고 평생 살 생각이 아니면 조국으로 돌아와 우리나라 선교사로 일하면 어떠냐? 우리나라는 지금 선교사를 파송할 형편의 나라가 아니다. 자기 나라는 원전을 폐기하면서 다른 나라에 가서는 원전 수주를 받으려고 로비스트가 되어 가 있는 것과 같다. 지금 우리나라 기독교의 현주소와 너의 선교활동은 무관하지 않다. 지금은 역선교로 우리나라에 선교사를 받아들여 참 교회를 세우고, 모든 교회의 교인들이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천국 백성의 증인의 삶을 사는 모습을 세상에 보여야 할 때다. 왜 목사의 아들들이 빗나가며 왜 선교사의 부모가 교회에 안 나가는지 생각해 보았니? ‘그런 하나님이면 나도 믿고 싶다.’고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 교인들의 변화된 삶을 보고 따르고 싶어 해야 하는데 예수 믿는 사람을 보고 다 외면하는구나. 깊이 생각해 보아라.

 

김삼순 선교사는 일주일 후에 이에 답신을 보내왔다.

 

교수님^^

답신이 늦어 죄송합니다. 큰 충격으로 많이 울고 기도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부모님을 회심시키지 못한 죄책감 때문에 괴로웠습니다. 많이 기도하면서 제가 정말 하나님을 모르는 나라에 와서 선교사로서 잘 하고 있는지를 생각했습니다. 지금까지 주님을 위해 산 제 삶은 무익한 것이었는지를 돌아보았습니다. 주님께 합당한 열매를 드리지 못한 삶을 살았다면 제가 심판을 받아야지요. 그런데 지금까지의 제 삶은 끊임없이 주의 인도하심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까지의 제가 고통 중에 이겨낸 고난의 뜻은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또한 형제자매들을 주 앞에 인도했을 때의 환희와 기쁨도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저는 주님께서 교수님께 주신 계시가 있는 것처럼 저 개인에게도 제게 합당한 계시가 계속 있어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게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제 자신에게 주신 계시입니다. 저는 주께서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불러주셔서 저는 저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수행하며 열심히 살아왔다고 확신합니다. 제가 주님의 어떤 인도로 여기까지 왔는지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는 예수를 모르던 초등학생 때 마을에 있는 한 작은 교회에 호기심을 가졌는데 하나님은 그때부터 저를 부르셨다고 생각합니다. 그 때 교회에 가보고 싶다고 했더니, 아버지는 네가 무엇이 아쉬워 그런 곳에 나가냐? 부모가 없냐? 무엇이 부족하냐? 동네사람 창피한 짓 하지 말라.”고 노발대발하셨습니다. 집에서 4,50분 떨어진 고등학교에 다닐 때 친구의 권유를 따라 처음으로 교회라는 곳을 가보았습니다. 그때 부모에게 거짓말을 해가며, 교회의 고등부 교사가 가르치는 대로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집에 가는 길에 외웠는데 그 때의 기쁨은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황홀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대학은 집에서 아예 멀리 떨어진 곳에 정해서 거짓말 하지 않고 자유롭게 교회를 다닐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리하여 대학에서는 CCC 동아리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2학년부터 졸업까지 순장으로 지냈습니다. 순장이 되어 순원들을 양육할 때는 그 삶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습니다. 처음으로 제 인생에 목표가 생긴 것을 깨달았습니다. 책임감이 생기고, 순원들을 권하여 신년금식기도회, 여름수련회 등에 열심히 참석하면서 점차 캠퍼스 전임간사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졸업 때 대학원에 진학할까 직장을 갖을까 방황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선배들의 충고와 금식기도 끝에 얻은 결론은 진학도, 직장도 아닌 CCC 간사로 사는 삶이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하나님께서 저를 그렇게 불러 세워주셨다고 믿습니다. 제가 원해서 교회에 간 것이 아닙니다. 제가 원해서 순장이 된 것이 아닙니다. 저를 지금가지 이끌어주고, 간사의 삶을 살도록 결심까지 하게 해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20 여 년간 저를 인도해 주시고 먹여주시고 입혀주셨으며 지금도 저는 주님의 심부름꾼이며 주님의 사역을 하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 확신을 저에게서 빼버리면 지금까지의 제 삶은 공허 바로 그것입니다.

교수님^^

저를 향한 주님의 계시는 분명합니다. 죄송하지만 그래서 주님의 일을 방해하는 것은 마귀의 장난이라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열 두 제자를 세상에 내보낼 때 먼저 주님의 일을 방해하는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부터 주셨습니다. 그래서 심히 죄송하지만 교수님께서 아무리 그럴듯한 말로 포장할지라도 저는 교수님의 유혹을 마귀의 궤계(詭計)로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제가 의지한 성경 말씀은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6:11.”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6:11)”입니다. 저는 마귀의 유혹을 이기고 승리할 것입니다.

교수님 다시 죄송합니다. 저는 교수님의 권고에 따라 한국에 돌아가는 것을 하지 않겠습니다. 이제부터는 사랑하는 내 딸 김삼순 전도사라고 부르는 것도 거부합니다. 그리고 이번 일회성 후원금과 매월 보내주시는 후원금도 거절하겠습니다.

언젠가는 제가 탕자처럼 아버지 품으로 갈 때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교수님 후원과 권고가 너무 부담스럽고 제 사역을 방해하는 궤계 같습니다. 지금까지의 사랑과 돌보심에 감사드립니다. 또 일시 후원금은 교수님 댁으로 우편전신환으로 송금될 것입니다. 이십여 년 간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신 하나님을 저는 의지하고 믿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입니다. 저를 통해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박 교수는 김 전도사의 최후의 통첩에 머리가 하얗게 되고 정신을 잃고 쓰러질 뻔 하였다. 부흥강사가 손가락으로 자기를 가리키며 주의 일을 훼방하는 마귀여, 물러나라!”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러자 모인 청중들이 아멘!”하고 큰 소리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박 교수는 이 때 정신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자신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김 전도사의 모든 말은 들어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마귀가 아니다.’고 큰 소리로 외쳤다. 이 우주에 자기를 변호해 줄 누가 있는가? 자기가 믿는 예수그리스도가 자기 손을 들어주지 않으면 자기는 영원히 마귀일 수밖에 없다고 박 교수는 생각했다. 그것이 신앙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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