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생각] 권혁란의 관계의 맛
12월 한겨울의 거리는 눈이 얼어붙어 차고 울퉁불퉁했다. 문 닫을 테니 나가라는 카페에서 쫓겨난 참이었다. 또다시 우리는 마주보았고 또 한 번 단도를 꽂듯 친구가(그렇다, 친구다) 나쁜 년, 욕을 뱉어냈다. 무지근하게 참아내던 마음이 벌컥 뒤집혔다. 뇌관을 건드린 나쁜 조합, ‘나쁜’보다 ‘년’이란 말을 견디기 어려웠다. 이어 마구 내 몸을 때려대는 친구의 손을 잡아채고 스스로도 놀라운 분노에 휩싸여 친구 얼굴에 손을 댔다. 공교롭게도 서울경찰청 옆길 얼음 바닥에서 엎치락뒤치락 싸우던 두 사람은 이미 지천명을 넘은 나이. 허헛. 귀갓길엔 민망한 웃음기가 있었으나 오래도록 마음은 절절 끓는 연옥 같았다.
은유는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고 썼는데 나는 싸울 때마다 흙탕물처럼 어두워졌다. 종종 의견은 달랐을지언정 사랑했던 친구였고, 취향이나 지향이 맞아 다툼이 일어나도 묻을 수 있던 사람이었다. 이 나라를 떠나 있느라 오래 못 만났고 반갑게 만났던 그날 밤, 오래전 나쁜 기억 탓일까. 불현듯 입술을 비틀며 나쁜 년이라고 으르렁거린 그 마음을 해독하느라, 독처럼 스민 욕 기운을 해독하느라 오랜 낮과 밤이 흘렀다. 어느 날은 <달콤한 인생>의 선우처럼 ‘도대체 나한테 왜 그랬어요. 말해 봐요’를 반복했고, 어느 밤은 강 사장처럼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중얼거렸다. 우정을 연인 사이의 사랑만큼 큰 비중으로 두었던 마음이 서늘하게 접혀지는 시간. 귀한 친구에게 나쁜 년이 될 수밖에 없었던 둘 사이 저변의 상황을 뒤적거리며 후회와 반추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말 한마디가 칼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베인 칼자국을 들여다보는 나라는 개인의 성정은 언어에 관한 한 바늘 끝처럼 예민해서 좀체 관대해지지 못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방학 내내 옥편(玉篇)을 끼고 살았다. 부수와 획순으로 얇은 종이를 뒤적거리며 한자를 익혔다. 사물의 모양과 움직임으로 글자를 만들었다는 것이 신비롭고 뜻글자가 합쳐져 새 글자가 되는 조합이 놀라웠다. ‘계집 녀’ 글자를 쓰면서 마음이 언짢아 여자로 고쳐 읽었다. ‘여자 녀’ 부수로 된 글자들은 나쁜 의미가 수두룩했다. 성낼 노(怒), 미워할 질(嫉), 샘낼 투(妬), 간사할 간(姦), 싫어할 혐(嫌)… 그토록 재미있던 한자에 똬리 튼 여성혐오의 기미를 알아챈 씁쓸함은 강렬했고 오래갔다. 심지어 ‘딸’을 지칭하는 글자도 없었다. 딸이자 여자인 내 존재를 비하하고 지우는 녀나 년이란 언사는 심히 불쾌했기에 그런 말을 입초시에 올리는 이는 좋게 볼 수 없었다. 그러하니 스무 살쯤 친구 집에 갔을 때 귀하디 귀한 외동딸인 친구를 아버지가 ‘요년, 조년’ 하고 부르는데 얼마나 놀랐던지. 예쁘고 사랑스러운 수많은 애칭 중에 하필 ‘년’을 선택해 딸을 부르는 젊고 다정한 그 아버지의 언어습관에 기함했었다. 엄마를 모욕하는 욕, 성적인 행위를 욕으로 치환하는 나쁜 말끝에 달린 ‘○○년’이나 여자라는 존재 자체를 혐오하고 조롱하는 수많은 ‘○○녀’가 무시로 횡행하는 잔혹한 이 날들을 가까스로 견디며 한탄하는 와중이기도 했다. 그 욕을 여자인 친구에게서 받은 탓에 움직임 많은 부위에 당한 골절상처럼 아물지도 붙지도 못한 채 덜그럭거리며 지금이 되었다.
모두에게 착한 사람이 되고 싶은 가당찮은 욕심은 없고 ‘미움받을 용기’도 어렵사리 챙기긴 했다. 입장을 바꿔보면 순한 그 친구에게 나쁜 년이 될 수 있는 일을 저질렀을 것이다. 입으로 업을 짓고 행동으로 고통을 주었겠지만 아직 사과할 념은 나지 않는다. 내가 진창에 푹푹 빠져 허우적댈 때 손잡아준 이는 그가 아니었고, 깜깜 길을 눈 없이 기어갈 때 불 밝혀 준 이도 다른 친구였기 때문이고, 깊은 공감과 섬세한 도움을 준 다른 사람들은 단 한 번도 내게 그런 욕을 한 적이 없었던 까닭이다. 그러니, 그 겨울 우리의 치졸한 싸움을 전해 듣고 널 사랑하니까, 나쁜 년이라 욕했다손 치더라도 애칭으로 듣고 이해하라던 다른 사람의 가르침은 그저 말없음으로 돌려줄 수밖에 없겠다. 멸칭은 멸칭일 뿐 절대 애칭은 될 수 없으니. 대신 <말이 칼이 될 때>와 <내 마음이 지옥일 때>를 읽으며 남모르는 이가 건네는 위로의 작은 손을 잡겠다.
권혁란 전 페미니스트저널 <이프>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