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인(命人)
전남청소년노동인권센터 교육활동가
전남청소년노동인권센터 교육활동가
전남엔 22개 시군에 47개의 특성화고등학교가 있다. 그중엔 상고나 공고처럼 오래된 이름을 여전히 쓰고 있는 학교도 있지만 ‘농고’라는 이름은 이제 그 어디에서도 볼 수가 없다. 공고나 상고였던 학교들도 이름이 바뀐 학교가 많다. 가령 ○○하이텍고, ○○기술과학고 등. 특성화고와 관련된 사람이 아니면 이런 이름은, 그토록 들어가기 어렵다는 특목고인가 싶기도 하고 이름만 들어서는 도대체 뭘 가르치는 학교인지조차 알기 어렵다.
상고에서 주로 가르치던 주산이나 부기가 이제는 필요 없어진 것처럼, 사람이 먹고 살 것을 생산하는 농사도 이제 더는 필요하지 않은 것일까? 농고가 아예 사라져버렸다는 건 이 나라에서 농업이 얼마나 인기가 없는지를 반영해주기도 하지만 이 나라가 교육과 산업에서 모두, 정책적으로 제 국민을 제 국민 스스로 먹여 살리는 데 전혀 관심이 없다는 방증이 아닐까? 농업이 이런 형편이라면 제조업은 어떨까?
아마도 ‘하이텍고’의 ‘하이텍’은 하이테크놀로지, 다시 말해 최첨단 기술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하이텍고’에선 학생들이 정말로 최첨단 기술을 배울까? 또 하이텍고를 졸업하면 최첨단 기술을 사용하는 일자리를 얻을까? 그럴 리 없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인데, 대체 왜 학교들은 앞다투어 그렇게 이름을 바꿨을까?
정보화 시대라 하더니 요즘은 4차 산업혁명 시대라 한다. 얼핏 생각하면 산업이 달라지니 특성화고 이름도 바뀌는 게 당연해 보인다. 그런데 머지않아 로봇이 사람의 노동을 모두 대신한다는 세상에 나에겐 왜, 이따위 시대착오적인 질문들이 꼬리를 물고 떠오른단 말인가?
사람이 달나라엘 갈 수 있게 된 지가 대체 언제인데 장애인들은 왜 아직도 집 근처 시장에 가는 일조차 자유롭지 않을까? 로봇이 못하는 일이 없다는 시대에 왜 아직도 섭씨 1500도라는 용광로에선 로봇이 아니라 사람이 일을 해서 그 뜨거운 쇳물을 뒤집어쓰고 죽는 사람이 생길까? 대체 왜 지하철역에서 표를 팔거나 고속도로 통행료를 받는 일처럼 사람이 하기 쉽고 사람이 하면 더 좋은 일은 기계가 하고, 사람이 하면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은 사람이 하고 있을까?
노동인권 수업을 하면서 학생들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면 이구동성 같은 대답을 한다. “돈 때문이요”라고. 나는 또 궁금해진다. 그렇게 번 돈은 다 어디로 갔길래 가난한 사람들은 죽을 각오로 일을 해도 점점 더 가난해지기만 할까? 이런 질문이 끝도 없이 떠오르다가 끝내 마지막에 떠오르는 질문은 이것이었다. 대체 어쩌다가 사람들은 이제 아무에게도 더 이상 이런 질문을 하지 않게 되었을까?
실질적인 직업교육과는 상관이 없어진 지 오래인 현장실습을 폐지한다고 하니 외려 학생들이 반발하며 말한다. 어차피 배울 것도 없는 학교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느니 공장에 가면 돈이라도 벌 수 있다고. 대체 우리는 ‘교육’이란 이름으로 학생들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일까?
너희가 하게 될 노동이 우리가 사는 세상에 얼마나 필요하고 또 무엇을 공부하고 어떻게 일해야 사람과 세상에 더욱 이로운지는 어느 학교에서도 가르치지 않고, 죽어라 공부해서 남을 밟고 올라서야 성공할 수 있다고, 돈을 많이 버는 직장에 취직하거나 그게 어떤 일이든 취업은 하고 봐야 한다고 대놓고 가르치는 세상.
농사를 짓고 싶거든 농민이 아니라 농업경영인이 되어 무슨무슨 지원이란 이름의 빚더미를 떠안고 억대 연봉의 대농을 꿈꾸라 가르칠지언정, 농사란 우리가 자연에 겸허한 마음으로 정성껏 지은 만큼 나와 남을 먹여 살게 하는 귀한 일이니 농사꾼을 꿈꾸어도 좋다고는 아무도 가르치지 않는 세상.
이런 세상에서, 스무살 전후로 진로를 고민하던 아들이 고향에 남아 조그맣게 농사를 지으며 살겠다 한다. 이런 세상에서 그런 결심을 한 아들에게 나는 장하다고 말해도 될까? 나는 내 아들의 소박한 꿈을 무슨 말로 응원해야 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