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이 있는 믿음의 삶
마가복음 8:27-38
오늘 본문은 가이샤랴 빌립보 지방에서 있었던 시몬의 신앙고백을 보여주는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 본문은 예수님의 공생애에서 아주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말씀입니다.
먼저는, 이때까지 말씀하지 않았던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처음으로 말씀하셨다는 점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됩니다.
31절 말씀을 보면,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라고 할 수 있는 십자가와 부활같이 중요한 말씀을 처음으로 하셨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전환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하나는, 그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방향을 예루살렘으로 돌리셨다는 점입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의 활동의 주 무대는 갈릴리 지방이었습니다.
가버나움을 중심으로 한 갈릴리 마을을 중심으로 활동하신 주님이 오늘 본문을 기점으로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향하였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전환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으로의 방향전환은 바꿔 말하면 지금까지의 갈릴리 사역을 마감하는 순간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갈릴리 사역의 결과는 참으로 만족할 만하였고 대단히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는 예수님의 질문에 제자들은 ‘세례요한, 엘리야,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합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이러한 평가는 지금까지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이 성공적이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시 한 번 제자들에게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고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의 견해를 물은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의 견해가 아니라 제자들의 고백을 물으신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의 견해와 나의 고백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분이 결혼을 하기 전에 자기 부인될 사람에 대하여 아주 침이 마르도록 자랑을 하였습니다.
자랑을 들으면서 많은 사람들은 대단한 미인일 것이라고 생각을 하였지만 막상 결혼식 때 보는 신부는 그저 그런 분이었습니다.
한 여자를 보면서 ‘그 여자는 그저 보통 수준의 여자야’ 하는 것은 사람들이 보는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그러나 그 여자가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둘도 없는 내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그 남자의 사랑의 고백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의 견해를 물은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는 것은 제자들의 고백을 물으신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들을 향하여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는 고백을 묻고 계십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러나 주님이 보실 때 진정 중요한 것은 성도들의 고백입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는 성도들이 어떤 고백을 하느냐 하는 것이 주님의 관심사이고 주님은 그 고백을 우리들에게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성도들에게는 다른 사람들의 견해가 아니라 자기만의 진정한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오늘 이 시간 주님은 저와 여러분들을 향하여 이 질문을 다시 한 번 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내가 아니라 너희들이 진정으로 믿고 고백하는 내가 누구냐? 고 묻고 계십니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우물가에서 만난 사마리아 여인의 전도를 통하여 그 동네 사람들이 다 예수님 앞에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 이들은 여인의 말을 듣고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그 말씀을 듣고는 그가 메시아라는 확신을 더욱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 신 줄 앎이라”
처음에는 여자의 신앙을 의탁해서 주님 앞에 나왔지만 나중에는 예수님을 만남으로 자신의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구주임을 고백하였습니다.
부모님의 견해, 아내의 견해, 다른 사람의 견해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진실한 고백으로 주님께 영광 돌리고 주님을 섬기는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물으심으로 우리들의 진정한 고백, 세상 사람들의 견해가 아니라 믿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진정한 고백을 원하고 계십니다.
먼저,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는 주님의 말씀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는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메시아’ 라는 히브리말을 헬라말로 표기한 것인데요, 그 본래적인 의미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기름부음을 받는 자는 제사장 왕 선지자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그리스도, ‘메시아’ 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은 왕이요 제사장이요 선지자라는 말이 됩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 말은 ‘구세주’-세상을 구원할 주님이라는 말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는 말은 ‘주님 당신은 우리를 구원할 구세주입니다.’ 하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노라 하면서 많은 고백을 하고 있지만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는 이 고백이 없으면 그것은 알맹이가 없는 고백일 수밖에 없습니다.
부부간에 사랑한다는 고백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요 약방에 감초가 빠진 것과 같습니다.
이 고백이 없다는 것은 진정한 믿음이라고 할 수 없고 이 고백이 없이는 주님을 기쁘게 할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베드로가 이 고백을 했을 때 주님이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모릅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셨습니다.
이 고백을 하고 베드로가 받은 엄청난 칭찬과 축복을 생각할 때 이 고백이 얼마나 주님을 기쁘시게 했고 중요 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전에 저의 고향에서 한 친구가 자기를 낳아 길러 준 어머니를 의심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 친구의 생각에는 어머니가 친어머니가 아니고 자기는 어머니의 자식이 아니라 입양한 자식이라는 오해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 오해가 생기자 한때는 어머니를 어머니로 부르지 않았고 말도 하지 않고 서먹한 관계 속에 빠진 적도 있었습니다.
아들이 어머니를 어머니로 인정하지 않았을 때 그것같이 속상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기를 낳아 길러준 부모에게 ‘당신은 나의 부모입니다. 나의 어머니이며 나의 아버지입니다.’ 하는 고백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요, 또한 너무나 중요한 고백입니다.
만약에 자기를 낳아서 길러준 부모님을 아버지,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고 아저씨, 아주머니라고 부른다면 얼마나 잘못된 것이며 이것을 누가 기뻐하겠습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우리의 구세주이십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온갖 고통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다 이루셨다’ 외치신 주님을 향하여 ‘당신은 나의 구세주이십니다.’ 고백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그 고백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구세주이신 주님에게 ‘당신은 선생님이십니다. 훌륭한 랍비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이것은 주님을 모독하는 말이고 주님에게는 전혀 적절한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에게는 구세주라는 말이 가장 합당한 말이고 이 고백이 있을 때 주님이 진정 기뻐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진정 어떠한 분이십니까?
예수님이 진정한 여러분들의 구세주이심을 고백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그런 일반적인 견해를 가지고 주님을 섬기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은 우리의 진정한 고백을 기뻐하십니다.
신앙생활에서 진정 중요한 것은 어떤 활동이 아니라 주님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한 올바른 고백을 드리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라고 고백한다면 주님의 뜻에 나의 뜻을 맞추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말씀하셨을 때,
앞장서서 이를 만류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베드로였습니다.
왜 그렇게 만류를 했을까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용이 자기가 생각한 것과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베드로가 갖고 있었던 주님에 대한 이해와 주님이 원하시는 이해가 달랐음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원수를 물리치고 정복하고 승리하는 주님을 생각하고 있었던 반면 예수님은 고난 받는 구세주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베드로뿐 아니라 모든 제자들이 정복자이신 주님을 생각하면서 따르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로마 정권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정부를 세우실 것이고 자기들은 정부의 요직을 맡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한 자리를 하고 출세를 하겠다는 나름대로의 목표와 생각을 갖고 주님을 따르고 있는데, 갑자기 예수님이 죽으신다는 말씀을 하니까 자신의 목표와 꿈이 무너져 내렸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만류를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베드로와 같이 내 목표와 내 꿈을 이루기 위해서 주님을 따르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만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나의 구세주로 고백한다면 내 것을 버리고 주님의 것을 취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처음에는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나의 구세주로 고백한 이후에는 주님에 대한 우리의 자세가 달라져야 합니다.
내 것을 버리고 내 생각과 내 뜻을 버리고 주님께 순종하며 주님을 위해 충성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에 대한 진정한 고백은 주님의 것을 받아들이게 합니다.
더 이상 내 것을 요구하지 않고 내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게 합니다.
나를 사랑하되 목숨을 버리기 까지 사랑하신 주님께 온전히 헌신할 수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 주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에게 순종할 때 거기에 우리의 복이 있습니다.
그 하나님보다 우리가 더 똑똑할 수 없고요 그런 하나님을 거역해서 주님의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내 것을 버리고 주님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이 고백한 자의 올바른 모습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를 향하여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책망하셨습니다.
내 것을 포기하지 못할 때 우리가 이런 잘못을 범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열심히 일한다고 했는데 알고 보니 하나님의 일을 한 것이 아니라 내 일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내 영광을 위해 일을 한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 일이다 죽어라고 했는데 알고 보니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잘 기억해야 합니다.
이런 실수는 베드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수없이 닥칩니다.
교회를 짓는 것, 교회를 치장하는 것, 교회일이다 해서 가정을 돌보지 않는 것,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런 것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예수님에게 와서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고 병자를 고쳤나이다.” 하는 자들에게 주님이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하면서 책망하신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한다고 다 주님의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합니다.
세 번째로, 주님을 향한 고백이 있는 자는 주님의 뒤를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일이 있은 후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주님을 나의 구세주로 고백하는 사람은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 사랑하는 사람을 따르지 않는 것은 결국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나의 구세주로 고백하면서 주님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그 고백이 진실한 고백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진실한 고백은 주님을 따르게 마련입니다.
비록 그 길이 어렵고 힘들다고 할지라도 그 길을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편하고 쉽고 이익이 될 때만 주님을 따르지 마시고 어렵고 힘들고 손해가 될 때도 주님을 따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길만이 생명의 길이며 구원의 길이며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병원에서 큰 수술을 받게 되면 보호자가 사인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수술을 하다가 어떤 상황이 벌어져도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는 것입니다.
‘수술하다가 죽어도 좋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책임을 묻지 않겠다.’ 이것은 사실 굉장히 불합리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도 왜 사인을 합니까?
죽어가는 생명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은 수술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수술을 받으면 살 수 있다는 마지막 희망 때문에 목숨을 내 놓고 서약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놔두면 그대로 죽습니다.
그러나 죽을 목숨을 주님 앞에 내어놓고 주님을 믿고 맡기면 구원을 받습니다.
어떤 사람도 어떤 죄인도 구원을 받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을 믿고 따라가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끝까지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끝까지 주님을 따라가서 영원한 생명을 얻고 구원의 축복을 누리는 성도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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